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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1. 성경 (행16:26 ~ 34)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26)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7)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8)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29)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0)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1)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2)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3)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3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6 지진이 나서~~~~~~"  ;  눈으로 볼수있는이 표적을 행하심에 있어서 주님은 우선 자기의 종들이 드리는 기도가 옹답되었음을 그들 스스로가 더욱 분명히 알게 하시려고 자기 종들을 중요하계 여기시려는 의도를 가지셨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지진을 보내지 아니 하시고 바울과 실라를 착고로부터 풀어 내시고 옥문들을 여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신 데다가 다른 기적을 부가하신 것은 그들을 격려하시는 데 대단히 효과가 있었다.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대기와 땅을 진동시키셨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간수와 다른 사람들이 그 기적은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임재를 아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시에 주님께서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은혜가 될만한 자기 능력의 실예를 보여 주셨음이 분명하다. 이는 신실한 자들이 복음을 옹호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위험을 무릅쓸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 가까이 계심을 확신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분명한 표적들로서 자기의 임재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항상 같은 길을 따라 행하지 아니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원칙을 규정하는 것온 옳지 않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날 그의 은밀한 은혜로써 만족하도록 당시의 자기 사람들을· 도우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관해서는 제 2장에서 더욱 상세히 말했다.

 

"27 간수가~~~~~ 깨어."   ;  그는 자결하려고 했다. 죽음의 벌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옥문들이 저절로 열렸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변호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만일 간수가 자결을 한다면 바울은 도망친다는 것이 자기 마음여하에 달렸음을 알았음에도. 간수가 자결하지 않도록 말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함은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감옥으로부터의 구원으로써 거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더군다나 그 기적으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간수가 깨기를 바라셨던 것은 순전히 지혜롭지 못한 일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와 그 다른 사람들로서  즉시 내어 보내시기 위하여 그들을 착고에서 풀으시고 옥문들이 열리게 하지 아니하셨고 자기 손의 능력을 보여 주심으로써  바울과 실라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 중에서 실로 뛰어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울과 실라의 기도를 이러한 방법으로 응답하고 계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자신은 그들을 자주 자유롭게 할만한 충분한 능력자이시며 자기의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이끌어내시기 위하여 감옥 뿐만 아니라 무덤 속까지라도 들어 가시는 것을 막을 자가 있을 수 없음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12장에서 본 것 갈이 또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베드로를 위해 감옥의 문을 열으셨다. 그러나 지급 바울과 실라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적용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기적으로 당장에 이끌어 내시려는 것보다는장래를 위해서  그들을 격려하려고 의도하셨다. 감옥이 열린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미 바르지 못한 편견의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그들의 가르침을 인정하고 계심을 많은 목격자들에게 알리시려는 것이었다고 내가 말한 사실을 다시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이 이 사실을 깨달았음에 의심은 없다. 그러므로 그가 묶인데서 자유롭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을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할 길은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있었던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냐님의 은혜를 가볍게 평가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태만으로 그 기적을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 모든 사실들을 볼 때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머물러 있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사람들이 해야 할 최선의 것을 그들이 때로는 알지 못하는 중에 실행하고자 애를 쓰고 자기들의 목표를 놓치지 않도록 혼란스러운 상황 중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시는 방법을 따라 그가 머물러 있게 하셨다.  

 

"29  무서워 떨며~~~~~~~·부복하고"  ; 이 간수는 기적에 의하여 그 마음이 준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억지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 이 사실을 볼 때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을 익히기 위하여 교만을 벗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은혜스러운 일인지 분명해진다. 간수는 자기가 믿는 미신에 있어서 완고해 있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하는 말은 어떤 것이든지 거만한 마음으로 멸시하려고 했으며 특히 그들을 든든하게 가두어 두기 위하여 수치스럽게 감옥에 가두었을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 두려움 때문에 그는 유순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치실 때에나 어떤 두려움을 주실 때에는 우리가 교만하고 스스로 힘있는 자들이 되는 대신에 우리가 바론 위치로 돌아가도록 이런 일이 생간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자.  간수가 그들의 발 앞에 엎드렸는데 책망을 받지 아니한 것은 이상하다. 앞에서 누가가 보고하고 있는 것처럼(IO:26) 고넬료의 경우에 있어서 베드로가 견디지 못했던 그 어떤 것을 바울이 중요하계 보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나는 그 간수가 그렇게 하도록 바울이 내버려두었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떤 그 간수가 미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이런 모습으로 겸손하계 되었음을 바울이 알고 있었기 때문아다. 이러한 모습의 존경심은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었다. 로마인들이 어떤 것을 겸손하게 구하고자 하거나 용서를 얻고자 할 때 그 간청을 받는 사람의 무릎 아래 엎드리는 것은 특히 그들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하나님에 의하여 겸손해진 사람을 향하여 바울이 분노할 이유란 전혀 없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에 반대되는 어떤 일이 있었더라떤 -바울은 전에 루가오니아 사람들 가운데서 보여 주었던 그 열심을 잊어버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침묵을 지켰던 사실로부터 그 간수가 보여준 절하는 모습에는 경건에 있어서 신앙심이나 하나님의 영광에 반대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계 된다.

 

"30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 간수는 자신이 순종하겠음을 보여 주면서 충고를 구하고 있다. 이 사실을 볼 때 그는 진지하게 감동을 받았으며 몇 시간 전에 자기가 잔인하게 착고에 묶어둔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실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기적을 보면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다가도 바로의 경 우가 그러 했 던 것 처럼  즉시 더욱 완악해지는 결과가 간혹 있다. 여하간 불경건자들은 하나님께 굴복하기 위하여 항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간수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보고 잠간동안 두려워하다가 곧 전에 가졌던 잔인성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하 나님을 향한 순종을 보여 주고 바른 교훈에 대하겨 진지했다. 그는 구원을 얻는 방법을 묻고 있다. 이 사실은 단순히 그가 잠시 후에 사라져버리는 하나님을 향한 공포에 의하여 급히 동요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일꾼들 앞에서 제자로서의 자신을 보여주기 위하여 참으로 겸손해졌음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준다. 그는 그들이 지금까지 있어온 기성의 종교를 타도하고 있다는· 오 직 한가지 이유 때문에 감옥에 갇혔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자기가 전에 멸시했던 그들의 가르침에 유의할 마음을 갖고 있다.

 

"31 주 예수를 믿으라"  ; .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구원에 대한이 정의(定義)는 얼론 보기에 짧고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충 분하다. 그리스도만이 그 안에 축복과 영생의 온갖 요소를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고 계시며 우리논 그것들을 믿음으로 받는다. 이는 내가 15장 (9절)에서 상세히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가지를 주시해야 한다.

 그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한 분 뿐이신 믿음의 목표 (unicum fidei scopum)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이 그에게서 떠나게 될 때 그는 방황할 수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교황이 붙잡고 있는 신학의 전부가 거대한 혼돈이며 무서운 미궁(迷宮)일지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무시된 채 그들은 헛되고 바람을 잡는 듯한 공론(空論)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에다 누가가 붙인 문장은 믿음의 본질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바울과 실라는 그 감옥지기에게 하나님의 아둘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 한 마디 말로써 그들은 중단하고 말 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누가가 쓴 기록의 문맥에는 그들의 주의 말씀을 전했다고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보잘것 없거나 무미 건조한 견해가 아니라 복음으로부터 얻은 그리스도에 관한 선명하고 뚜렷한 지식임을 알 수가 있다. 반대로 생각하여 만일 복음에 관한 가르침을 없앤다면 믿음이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누가는 믿음을 말씀의 전파와 가르침에다 연결시키고 있으며 믿음에 관하여 간략히 말한 다음에 그는 참되고 바른 믿음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지껄이는 암시적인 믿음 (implicitae fidei)의 허구적인 것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연합된 믿음 (/idem implicitam)을 갖기로 하자. 이는 그 믿음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33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 누가는 그 간수의 경건한 열심을 다시 칭찬하고 있다. 그가 자기의 온 가족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는 하나님의 은혜도 보여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온 가족들이 경건한 일치를 갖도록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특별한 변화 또한 눈여겨 보아야 하겠다. 그는 바울과 다른 사람들이 도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결하려고 한지 얼마 안되어 지금 모든 두려움을 제하고 기꺼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전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던 자들에게 즉각적인 행동을 위한 성질을 주고 있음을 본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유익한 결과를 기대할 때 두려움과 의심이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 경우에는 어떠한 위험이라도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하지 않도록 우리의 모든 근심을 하나님의 품에다 맡길 수 있게 되는 것보다 더 나온 신뢰의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되도록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34 저와~~~~~ 믿었으므로~~~~~ 기뻐하니라."  ;  간수가 가졌던 믿음의 외적인 점은 이미 칭찬을 받았다. 지금은 그 믿음의 내적인 결과가 설명되고 있다. 그가 상관들로부터 받았던 명령과는 반대로 사도들을 친철하게 영접하고 자기가 받을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기 집에서 친절하게 대접했을 때 그는 자기의 믿음이 쓸데 없는 것이 아님을 증거했다.

 반면에 누가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기쁨온 모든 사람이 자기의 믿음으로부터 얻는 독특한 축복이었다. 불안한 양심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괴로움도 없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든 수단을 써서 자기의 감정을 무디게 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초조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당장 고통을 겪지 않더라도, 반대로 난폭하고 구속이 없는 방종으로 환락에 빠진다 하더라도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고 밝은 기쁨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때 순전하고 오래가는 기쁨온 오직 믿음으로부터만 온다. 그리하여 스가랴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 나니"(9 : 9)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성경의 어디에서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상상에 의한 공허하고 죽은, 꾸며낸 어떤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순수한 기쁨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아는 것임을 깨닫도록 하자.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기쁨에 참예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옳다. 그들은 평강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의를 혼란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