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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7)

1. 성경 (행 16:6 ~ 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6)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7)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8)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9)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6  브루기아~~~~ (로)~~~~ 다녀가·~~~~~" ; 여기서 누가는 바울과 그의 동행자들이 가르치는 일에 얼마나 부지런히 그리고 활발하게 전념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누가는그들이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소아시아 여러 지방을 여행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는 특별히 설명을 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어떤 장소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 사실온 바울의 사도직을 훌륭한 것으로 칭찬하기 위한 극히 가치있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 생명과 행위의 안내자로서 하나님의 영이 자기와· 함께하고 계심을 알게 될 때 자기가 할 일을-계속 하여 나가는 데 있어서 특별하게 격려를 받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가는 곳마다 차별없이 복음을 가르치기 위하여 준비함에 있어서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소명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외없이 모든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 나 주님은 특별한 순간에 (in ipsis temporum articuis) 그들의 여행길을 인도하심에 있어서 전에는 숨겨 두셨던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고 계셨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만일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어떤 곳에서라도 가르칠 수가 없었다면 언제 말하고 언제 침묵을 지켜야 될 것인가에 관하여 확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갖지 못한 오늘 교회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소명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영역은 극히 넓고 크기 때문에 그에게는 성령의 특별한 지시가 있어야 했다. 그는 어떤 한 장소나 몇 군데 성읍의 사도로 세우심을 받지 않았다. 그는 온 아시아와 유럽에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을 받았으며 이는 그가 극히 넓은 바다에서 항해하는 것과 같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넓은 지역의 혼란 중에 하나님께서 그가 어떤 곳을 향하여 얼마나 멀리 갈 것인가를, 마치 손을 펴고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그 에게 신호하셨던 사실에 관하여 이상히 여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더욱 어려운 의문이 생긴다. '주님께서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하는 것을 금하시고 그가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곳에 사는 이방인들은 구원에 관한 교훈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대답한다면, 반면에 ‘마게도냐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욱 가치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가?'라는 반문이 나올 것이다. 극히 지혜롭게 되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이 분간(分棟)의 이유를,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복음에 순종하고자 하는지를 아시기 때문에 그러한(quosque) 기준에 의하여 그 사람이 복음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간구하신다는 사실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와같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 주님은 구하지 않은 자들에게 나타나 주셨고 자신에 관하여 묻지 않는 자들에게 말씀하여 주셨던 것이다. 주님의 성령에 의하지 않고 다른 무엇에 의하여 유순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얻겠는가 ? 

  그러므로 모든사람들은 똑같이 천성적으로 믿음을 향하여 적대적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로를 앞세워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온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자기 은혜를 받을 만한 자들로 여기시고 또 원하시는 자들을 그 은혜를 빼앗아야 마땅한 자들로 여기시는 자유와 권한을 가지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옳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온 은혜에 의한 것이므로 그 은혜로부터 흘러 나오는 부르심 역시 은혜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근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르심은 누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순전한 은혜의 한 생으로부터 우리에게로 임하여 오고 있음을 깨닫기로 하자.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복음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고 다론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음에 대한 합법적인 이유를 안 가지고 계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이유가 그의 은밀한 목적 안에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버려 두시고 믿는 자들을 아무런 이유가 없이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에만 속한 것을 자신들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와는 반면에 어떤 분명한 이유가 없이 하나님께서 물리치신 그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들이 그 심오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이상히 여기도록 내버려 두자. 그 심판에 관하여 상세하게 따지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끝으로, 여기서 ‘아시아'라는 지명은 그들이 있었던 그곳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곳이 그렇게 불리웠던 것은 마땅했다. 바울과 그의 동행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중단되기까지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다고 누가가 말했을 때 그는 그들이 꼭 그렇게 되어야 할 경우에만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인도 되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이 확신할 수 없고 혼동을 당 하기 쉬운 형편 중에 있을 때 그들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9 밤에 환상이"  ;  주님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하지 아니 하셨다. 왜냐하면 주님의 목적은 그를 마계도냐로 데려 가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가는 그가 그곳으로 인도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으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밤에 바울 앞에 나타났다고 했다.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주님은 언제나 계시의 방법을 동일하계 사용하지 아니 하신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확증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들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 환상온 꿈에 의하여 보여졌다고 말씀하지 않았고 밤에 나타난 것이었다고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깨어 있을 때 나타나는 밤의 환상들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도우라"  ;  이 말씀은 바울이 받온 성역(聖役)을 칭찬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꾼들은 멸망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이 일꾼들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붙들어 영생의 기업 속으로 이끌어 들인다(롬 1 : 16). 그리고 경건한 교사들은 자기들이 불행한 영혼들을 멸망에서 불러내고 잃어 버린 바 된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도와주고 있음을 듣게 될 때 이는 그들의 열심과 열의를 불려 일으키는 자극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복음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전 좋지 못한 품위 (meUgne)로 하나 님의 은혜를 배격하고자 하지만 않는다면 복음의 일꾼들을, 마치 그들이 해방자들인 것처럼,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영광이 가장 작온 부분이라도 빼앗기지 아니 하시도록 이 일을 사람들에게 전부 말기지 아니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역자들을 시키셔서 구원을 주고 계시지만, 마치 도움을 주시기 위하여 손을 펴고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10 인정함이더라."   ;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환상이 환상으로서 그치지 않고 성령의 증거가 밑받침되고 있음을 추측한다· 왜냐하면 사단 역시 믿지 않는 자들을 희롱하기 위하여 속이는 술책으로 환영(幻影)과 유령을 나타내어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환상온 사람의 마음에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상태만을 남긴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확실한 표적으로 인을 쳐주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헌신하도록 시키시고자 하는 자들이 요동하거나 주처하지 않게 하신다. 한 악한 영이 브루두스(Brutus)에게 나타나서 후에 바울이 부르심을 받아 가게 되었던 바로 그 곳 빌립보에서 죽음을 당하게 했던 비참한 전쟁을 하도록 그를 유인해 갔었다. 그러나 그 이유에 있어서 크게 다른 정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도 자기 종을 다르게 취급하셨다.

  그리하여 그가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게 하시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게 하셨다. 바울과 그의 동행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즉시 주님의 지시에 순종하고자 열심이었다. 자기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곳으로 가야 함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은 출발 할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용된 분사는 능동의 어미 ((Juµ{3,(3aC6l,)1:ES') 를 갖고 있 다. 이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본 절에서 바울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이 환상을 전에 주신 말씀과 연결시켜 생각할 때 그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마게도냐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나는 누가가 이를 의미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