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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행 16:3)

1. 성경 (행 16: 1 ~ 5)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1)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2)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3)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4)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5)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1절"  ;. 누가는 지금 바울이 바나바를 떠난 뒤에 그가 다녔던 여정 (旅程)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첫째로 누가는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자기의 일행으로 선택한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바울이 경솔하게 혹은 깊이 생각함이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을 우리로 알게 하려고 누가는 디모데가 그 곳 형제들에게 칭찬을 듣고 있었고 그의 경건이 그들에게 입증되었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누가가 표명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그러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기가 성경의 다른 귀절에서 일꾼들을 뽑을 때 지켜야 한다고. 지시했던(딤전 3장) 그 선택의 방법을 따라서 지금 사람을 뽑고 있다. 바울온 성경의 다른 귀절에서(딤전 1 : 18) 성령께서 예언으로 디모데를 선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그 예언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디모데가 '형제들' 가운데서 훌륭한 평판을 얻고 있었다고 누가가 말한 사실에는 좀 특이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바울온 감독으로 선택 될 사람이 바깥 사람들에게서도 선하다는 증거를 얻은 사람(딤전 3 : 7)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경건한 사람들의 판단이 특별하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들은 합당한 중인들이요, 성령에 의하여 정확하고 지해롭게 분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은· 소경과 다름이 없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과 거룩한 생활에 대한 평가는 성도들의 판단과 인정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온 분명하다. 이는 성도들에 의하여 칭찬을 받는 사람이 감독의 자리에 오르기에 적합한 사람 으로 인정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두번째로 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라도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어야 함을 인정한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추문(酸聞)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도록 할 경우에  그렇게 되듯이 교회가 그들의 비난과 중상을 당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3·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히나~~~~~" ; 누가는 디모데가 꼭그렇게 했기 때문이거나 혹은 이 표적에 의한 신앙이 아직도계속 존재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바울이 추문을 피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았음을 극히 분명하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할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었지만 사람들에게 거리낌을 주지 않기 위하여 행하여졌다.    그러므로 디모데가 받은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셨던 그러한 성례전이 아니었고 사랑을 일으키기 위해서이지 경건을 실행하키 위해서가 아닌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중립적이면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의식이었다.

 바울이 그것의 의미와 효력이 폐지된 하나의 쓸데없는 표적을 활용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 할례는 하나남의 제도에서 떨어져 나가버린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이를 실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의문에 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할례는 그리스도께서 오심과 동시에 끝나는 것이지만 그것의 사용은 일시에 완전히 페지되지 않고, 복음의 빛으로서 더욱 분명하게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심을 모두가 알게 되기까지 시행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형태로 자유롭게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세 가지 단계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율법의 의식들이 그리스도의 강림과 함께 페지되어 이 의식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다시는 속하지 않게 되었고 영적인 실체에 대한 상징이 되지 못하며 그것들 중에 어떤 것도 꼭 실행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두번째복음의 진리가 더욱 분명하게 알려지기까지 이 의식들의 활용은 자유로웠다.

  세번째 단계는 이 의식들의 사용이 덕을 세우고 이 의식들로 말미암아 미신이 조장되지 않게 하려는 목적 외에 신실한 자들은 그 의식들을 전과 같이 시행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의식들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할례는 죄를 속하기 위하여 정해진 제사들과 갈온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합법적이었다. 그러나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제물을 드렸다면 이는 합법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믿음과 양심에 관한 한 율법이 정하는 예배의 전부는 어느 기간동안을 위한것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때에 끝이 난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그 의식들의 활용에 관하여 우리는 그것들이 신앙의 고백에 반대만 되지 않는다면(証2)  중립적인 것들이 되며 경건한 사람들의 자유에 맡겨진다는 견해를 갖는다.

  우리는 ‘복음이 분명하게 나타나기까지'라는 내가 말한 그 짧은 기간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어떤 유식한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서 혼동하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장사될 때 할례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골 2 : 11. 12. 갈 2. : 3)고 가르치는 반면에 그들은 할례가 유대인들이 여전히 시행해야 할 의식이라고 여긴다. "회당은 명예롭게 매장되어야 한다"는 옛 격언 속에서 이 사실은 더욱 정확하계 표명되고 있다.

    할례의 사용이 어느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 말해야 하겠다. 이는 자유의 원칙(ratione)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수가있다. 이방인들의 부르심이 모든 곳마다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특권은 유대인들에게 여전히 허락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아들 삼으심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부터 만민에게로 옮겨졌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기까지 덕을 세우기 위하여 구 별의 표가 남아 있게 허용될 수가 있었다. 바울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할례를 시행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갈 2 : 3)고 말하고 있으므로 이 의식은 자유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분별이 없거나 선택없이 함부로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덕을 세우는 일과 교회의 공통된 복과 이익에 유의해야 했었다. 바울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할 경우에 복음의 순전한 교훈을 포기해야 했고 원수들의 중상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므로, 디모데의 경우에 있어서는 교회에 은혜를 끼치게 될 것을 알았으므로, 이를 시행했먼 그 자유를 삼가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볼 때 교황이 다스리는 안에서는 얼마나 무서운 혼동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들에게는 무수 하게 많은 의식들이 있다. 옛 성전에 있었던 한 개의 휘장 대신에 백여개의 휘장올 더 걸치는 사실을 제외하고라도 왜 그렇게 많은의식이 필요한것인가?  하나님은 복음의 진리가 더욱 찬란하게 빛나도록 하시려고 전에 명령하셨던 의식들을 페지하셨다. 사람들은 감히 새로운 의식들을 끌어들이고 한정이 없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모두 가치가 있는 것들에다 그릇되고꾸며댄 것들을 부가시켰다. 마침내 공로를 믿는 잔인무도한 일이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한 의식들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숨겨져 계신 수건이나 무덤도 아니며 신실한 믿음과 경건이 그 속에 매장된 냄새나는 거름더미인 것이 분명하므로 이런 의식들을 거침없이 무부분별하게 사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자기 율법에 내리신 것보다 더욱 더한 권한을 교황에게 주고 있다. 그 자체 속에 우상승배를 분명하게 내포하고 있는 미 사와 그와 비슷한 더러운 것들에 관하여는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다 앓이러라."  ;  누가는 디모데가 유대인들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유대인들이 마치 더러운 사람인 것처럼, 그로부터 피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바울의 의도였음을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누가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고 말하고 있다. 모계(母系)는 자녀들에게 영향력이 없으므로 그가 할례를 받지 않았음을 유대인들은 확신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떠나지 못했던 노예적인 신분이 얼마나 불행한 것이었는지 독자들은 잠시 눈여겨 불 일이다.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는 유대인들조차도 기괴하다고 여겼던 소수의 남은 자들에게 속하고 있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결혼했으므로 자기 자녀들을 하나님께 감히 드리지 않았으나 은혜의 외적 표적을 갖도록 했다.

  이 여자는 자기 아들이 그러한 혈통을 갖기는 했으나 소년 시절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참되게 섬기도록 하면서 양육하는 데 번함없이 성실했다. 이는 남편들이 포악한 권세를 쓰기 때문에 자녀들과 식구들이 참된 경건 중에 깨끗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여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다. 여기서 ‘헬라인’이만 말은 성겅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이방인’이란 말 대신에 쓰였다.

 

"4 규례틀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나~~~~"  ;  이 말씀으로,누가는 바울이 화평을위하여 얼마나 열심이었는가를 지적하고 있다. 당시에 교회들 중에 일치를 조장하는 가장 좋은 결속은 사도들이 정한 것을 지키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 일을 위하여 열심을 보이는 동안 그는 자기의 잘못 때문에 어떤 소란이라도 생겨나지 않도록 양심적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이었음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는 장애물의 위험이 없어지게 되는 것올 보았을 때 교회들을 완전히 자유롭게 했으며 그 규례들을 치위주고 그 규례 안에서 사도들이 금했던 것들을 자유롭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규례들을 페지함으로써 그는 사도들이 정한 것을 무효로 하거나 범하지는 않았으며 사도들을 정최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영구적인 법을 만들고자 하지 않았으며 약한 양심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을 짧은 기간동안 누그럽게 하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전 장에서 충분하게 선명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사실을 통하여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명백 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우리가 바울과 대단히 다르게 행동한다고 우리를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는 우리가 교회의 명령을 무시하고 경건한 자들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지배를 받고 사람들의 견해에 굴복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바울은 사람들의 양심에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필연성의 올무를 놓고자 하는 마음을 결코 갖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 고 있지는 않다. 그는 성경의 ·다론·귀질들에서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 이 깨끗하나"(딛 I : 15),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몸 14 : 2),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몸 14 : 17),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고전 8 : 8), 그리고 "무릇 시장에서 파는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 : 25)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우상에게 드린 음식물을 조심할 것을 지시했을 때 이 말 한마디로 바울은 대단히 일치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여지는 것들을 서로 조화시키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경건한 영혼들을 사람들이 정한 법으로 묶지 않도록 대단히 조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하고 있었던 것과 조금도 다르게 하려고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교황과 그롤 섬기는 자들은 자기들이 정한 법이 사도들에 의한 명령과 비슷하다고 여길 때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사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어떤 새로운 예배도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어떤 새로운 영적제도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화평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무엇인가를 양보해 주도록 강력하계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황이 그와 같은 구실을 내세워 자기가 만든 빕둘을 옹호하려면 우선 그들 모두가 변화된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황과 그를 섬기는 자문 은 인간 하나님을 위한 자기들의 영적 예배의 근거를 고안에다 .'두고 있으 며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세를 사람에게로 옮겨 자기들이 영혼 돌을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묵묵히 배반자둘이 되어 그리스도의 피로 얻어전 은혜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댜면 그들에게 격렬히 항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 약한 자들을 붙잡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그세 가 지 명령과 무거운 힘으로 불행한 영혼들을 짓누를 뿐만 아니타 믿음을 삼켜 버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황과 그를 섭기는 자들의 법 사이에 어떤 바 슷한 점이 있단 말인가? 자누아리우스(Januarius)를 향한 어거스턴의 불평 온 유명하다. 그는 당시에 이미 교회가 너무도 큰 전통의 침을 잘못 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때보다 거의 백배나 심해찬 오늘날의 교회가 당하는 노 역을 본다면 어거스턴이 참을 수 있을지 나는 울고 싶다•·

 

 "5  교회가~~~~~ 굳어지고~~~~~~"  ;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 는 사도들이 정한 명령에 관하여 누가가 말하는 것은 이른바 부가된 장식물이나 부속물과 같았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라고 말 했을 때 누가는 바울이 가르쳤던 것에 의한 다른 효과와 성과를 좋은 것으로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의 교훈에 근거하고 외져 질서보다 더욱 높고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의 주된 관십을 기울이고 있다는 의미를 갖고 외적 사항들을 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명령들은 일치를 얻게하는 데 중요하므로 언급되었던 것이다. 이는 그 일치가 바울에게 중요한 것이었음을 우리가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려나 신앙과 경건 온 더욱 높은 수준에 놓여 있다. 그리고 믿음은 사도들이 정한 명령들의 유 일한 기초이다. 그런가 하면 믿음온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 근거하고 있으 며 사람들이 만든 법에 의존되지 않는다. 아 실에로써 누가는 시초에 게으 름이나 유익을 얻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덮쳐오지 않도록 믿음 안에 서 계속 전진할 것을 강권하고 있다. 믿음을 더 얻는 방법도 설명되고 있 다. 주님께서 자기 종들이 행한 일로써 우리를 깨우치서는 것이 믿음을 더 얻게 하시는 방법인데 당시에는 바울과 그의 일행들이 수코.한 것을 그 목져 을 위해 활용하셨다. 누가가 "수가 ...... 더 하니라"고 즉시 계속하여 말을 이었을 때 그는 복음 전도에 의한 또 하나의 성과를 칭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와 동시에 누가는 그리스도께로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믿음이 진전되면, 마치 믿음이 선전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광범위하계 퍼져 나가는 것 처럼,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