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15:12~21)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12)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3)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4)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5)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6)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7)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8)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19)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20)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2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 누가는 이 말로써 그들이 즉시 베드로의 말에 순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이 그 모임 중에서 다스리고 계셨음을 의미하고 있다. 잠시 전에 그들은 열떤 논쟁을 했으나 지금 베드로가 하나님이 갖고 계신 목적을 설명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서 부딪힌 문제를 처리한 다음에 소란은 즉시 끝나고 잘못된 교훈을 열렬하게 옹호하던 사람들은 말없이 조용해졌다. 이는 하나님의 진리가 나타나자마자 그 진리가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바론 회의의 산 모습이다. 성령께서 주장하실 때 성령은 모든 불일치를 중단시키는 충분한 힘을 갖고 계신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성령은 다른 사람들이 순종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인도해야 하는 사람들을 지도하실 만한 능력을 가지신 안내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지나치게 자기 주장을 하지 않게 하시고 자기들의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함을 스스로 보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큰 무리가 모인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 원래의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있었을 것은 의심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우세하였으며, 누가가 말하고 있는 대로, 그들이 잠잠했던 사실온 그들이 공통적으로 순종하고 있었던 증거였다. 한편 베드로가 보여준 온화함은 특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이 이 사건에 관하여 충분히 토의하기까지 자기의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치우친 견해가 된 경우 자기의 견해와는 다른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그들이 공중 앞에서 말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바나바와 바울이~~~~~ 고하는 것을 듣더니" ; .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이 이전에는 조용히 듣고만 있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끗하지 못한 이방 사람들이 저 사람들에 의하여 교회로 잘못 받아 들여졌음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이 반대자들의 잘못된 견해가 시정되고 모든 것을 호의적인 감정으로 듣지 않으면 그들이 한 말 중에 그 어느 것도 동정적으로 들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런 이유가 없이 반대의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가를 알고 있다. 왜나하면 이 감정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진리에 이르는 모든 문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볼때 디도서 1장 15절에 있는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Omnia sana sanis)라는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가를 알게 된다. 왜냐하면 부패된 마음의 태도가 어떤 손상을 주는 행위로 바뀌지 않을 만큼 건전한 것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보고 증에 자기들이 이방인들 중에서 수행한 사도직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임을 말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이 사도직은 그것에 대한 도장과 같았던 기적들에 의하여 확증되고 승인되었기 때문이다.
"13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 교회에 관한 고대의 저작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 야고보가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 (Antiquities)의 제 20권에서 그의 부끄러운 죽음을 보고하고 있는 ‘의로운 자'와 ‘오블리아스'(Oblias)라는 별명을 가진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 알지 못하는 사람의 신성함 을 크게 칭찬하려고 하는 것브다는 그의 신분을 밝혀보려고 수고한 것으로 본다. 오직 그만이 지성소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다는 그들의 설명은 하나의 유치하게 꾸민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 출입이 어떤 종교적인 의식 (religio)에 관련되고 있다면 대제사장이 아니었던 그가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은 하나님의 율법올 어긴 행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러한 방법으로 실체에 대한 그림자로서 성전을 섬기도록 격려하는 것은· 미신적인 행위였다. 나는 다른 유사한 허탄한 것들을 말하지 않고 넘긴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열두사도 중의 하나였음을 부인함에 있어서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야고보는 바울이 교회의 세 기둥들(갈 2:9)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가졌던 사람이라고 인정할 만큼 높이 칭찬을 받던 사람이었음을 억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도들보다 못한 반열에 있었던 사람은 그처럼 사도들보다 우월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도'라는 칭호로써 그를 영예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몸의 견해는 그 ‘기둥'이라는 말이 일반적인 의미로 쓰였으며 주의를 끌만한 가치가 없으니, 이느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다론 교사들보다 사도들을 먼저 세우셨으므로, 이 말은 신중하게 취급되고 있는 반열상의 위업(dignitas ordinis)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 귀절을 볼 때 그가 특별히 높임을 받고 있었다는 시싣을 알기란 쉽다. 왜냐하떤 그가 찬성함으로씨 베드로의 말을 확중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의견에 따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 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그의 권위가 얼마나 힘이 있었던가를 다시 보게되기 때문이다. 고대 저작자들은 그러한 상황은 그가 예루살렘의 감독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신실한 자들이 자기들 스스로의 의향대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순위를 바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알페오의 아들이었으며 그리스도와 혈연의 관계(consanguineus)에 있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주의 형제"라고 불리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가 예루살렘 의 감독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누구나 생각해 볼 만한 의문으로 남겨 둔다. 이 문제는 회의의 명령이 베드로보다는 야고보의 권세에 의하여 결정 된다는 사실로써 교황의 참람함은 반박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교회사〉 제 2 권의 시초에서 그가 어떤 야고보였든간에 그는 사도들의 감독(Bishop of the Apostles_)이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로마사람들은 지금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전체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자랑스럽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의 말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베드로 위에 또한 사람이 있게 되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 · 야고보의 말은 두 가지 주요 부분으로 되어 있 다. 그는 첫째로 선지자 아모스의 증거로 이방인들이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자유가 손상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희미하계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신실된 자들 중에 화평과 일치를 갖기 위해 도움이 될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베드로가 ‘시므온'이라고 호칭된 것은 당시의 그의 이름은 여러가지로 불려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취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권고(卷顧)하셨다는 내용의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바깥 사람들을 자기의 아족이 되게 받아들이고자 계획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는 좀 거북스러운 표현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말은 쓸모있는 교훈을 그 속에 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들을 부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취하셨다고 말했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기 시작할 것은 그의 호의에 의한 것임을 알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취하시려고……권고하신 것'을 말함에 있어서 그는 더욱 확실하계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의미는 이 방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갔을 적에 하나님은 특별한 은해로씨 그들을 바라보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갈 수 밖에 없었으므로 우리가 굴하지도 않았음에도 하나님은 마침내 아버지의 도리로써 우리앞에 다가 오셔서 우리를 바라 보셨다.
"14 자기 이름을 위할(in nomine suo)" ; 벌게이트역에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nomini suo)로 번역되어 있는데 전치사 Erc2(에피 ; 근거하여 ; 記)가 ‘자기 이름 때문에 ' (propter nomen suum) 혹은 ‘자기 이름에 근거하여 ' (super nomine suo)와 같이 다르게 번역 될 수가 있지 만 그 의미는 거의 같다. 이 귀절의 의미는 이방인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이름이나 능력에 근거 하고 있으며 그들을 부르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 외에 아무 것도생각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에 대단히 잘 부합된다. 그러나 나는 더욱 일반적인 해석을 내렸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에 포함시킴에 있어서, 조금 뒤에 하나님이 자기 교회로 모아 들이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다고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은 자기 이름으로 그들이 알려진 바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시간의 의미를 가진 부사 따pW't'OlJ(프로― 몬 ; 처음으로)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가 있다. 에라스므스역과 빌게이트역에도 그러한데 primum(프리뭉)을 '제일 먼저'라고 해석한다면 그 의미는 고넬료와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을 부르기 시작하신 첫 열매들 (the firstfruits) 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부사는 비교적인 의미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바나바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알리기 전에 고넬료와 그의 친척들 가운데 이방인들을 아들들로 삼으신 증거를 이미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이 두번 째 의미가 더욱 합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 우리는 지금 사도듈이 오만하께 자기들 스스로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정해놓은 것을 공손하게 따르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임을 고백하는 것이 성가신 일이라고 느끼지 않고 그러한 자들이라고 간주한다고 해서 자기들의 권위를 잃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정신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예언적인 교훈을 교회에서 제거하려고 하는 반면에 그것의 활용이 귀하게 평가되고 있음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러 선지자들의 증거에 호소하고 있으면서도 단지 한 선지자의 말씀만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사람이 한 말은 그들 모두의 공통된 증거가 됨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론 말을 하고 있지 않으며 마치 모든 선지자들을 대신하여 한 사람씩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그보다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 모두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의 말씀은 하나의 큰 책 을 이루기 위하여 한군데 모여져 있다. 그러므로 이 집합된 책의 어떤 부분으로부터 인용한 것은 그 모든 선지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바르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가 있을 것이다.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 . 한 가지 예언이 논하고 있는 그 상황에 잘 맞기만 하면 인용된 단어들 중에 어떤 다른 점이타도 있는가를 주의깊게 살 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아모스 선지자의 기록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다른 점이 있는지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켜 주시겠음을 약속하신 다음에 유대인들이 에돔의 남은 자들을 소유하게 하시겠다(암 9 : 11)고 이어 말씀하셨다. 그 말씀의 앞뒤를 모두 보아도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관한 의미를 이끌어 낼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 후에 기록되어 있는 이 선지자들의 기록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 만국의 남은 자들에 관한 말씀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돌이 연합한 한 교회가 있게 될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만 속해 있었던 것이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자기 이름을 부르게 하셨을 때 그들을 유대인들과 대등한 존귀의 수준에 올려 놓으시기 때문이다. 이두매 사람들과 그 이웃 사람들은 다윗이 다스리고 있을 적에 한 때 유대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조공을 드리는 사람둘이기는 했으나 교회 밖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으로 일컬음을 받으시기 위하여 그들을 자기의 거룩한 백성에게 부가시키신 것은 새롭고 보통이 아닌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됨으로써 그둘은 모두가 대동한 존귀를 갖게 되는 것이 확실하기 때 문이다. 이 사실을 볼 때 선지자 아모스의 중거가 현재의 목적에 얼마나 잘 부합되는지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황페하도록 쓰러진 그 장막을 다시 세워 주시겠음을 약속하고 계신다. 이 장막 안에서 이방인들이 조공을 바치고 왕의 명령에 따라 무기롤 드는 일 뿐만 아니라 갈은 하나님을 모시고 한 식구가 되기 위하여 다윗의 나라에 속하도록 하게 하실 목적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바울은 이에 관하여 많온 것`을 인용하고 있는데 (롬 15 : 9 이하) 야고보가 이 문제에 관하여 더욱 분명한 중거를 내포하고 있는 많은 다론 예언들보다는 이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우선 이렇게 대답한다. 사도듈은 성경 귀절들을 모아 놓는 일에 야심을 갖지 않았으며 자기들이 가르치고 있는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은 것임을 종명하는 한 가지 사실로써 만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둘째로 나는 아모스의 이 예언이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사실보다 더욱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예언은무너져 버렸던 한 집이 복구 될 것에 관련 되고 있으며 선지자는 그 집의 비참하고 황폐된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후손들인 왕들이 거기에 앉아서 이방인들을 다스릴 보좌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는 연이어 기록된 약속은 곧 바로 그리스도를 카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질 경우에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중에서 일컫게 되리라는 사실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야고보가 이 말씀을 함부로 선택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서고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일컬어지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과 연합된다면 그들이 구원의 소망을 갖지 못하는 것은 합당치 않으며 율법아래서 그들이 서로 분리되게 했던 중간에 막힌 담은 헐려야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의식(儀式)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깨끗하지 못한 이방 사람들로부터 구별하는 목적을 위하여 실행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구별은 없어졌으므로 이 의식들도페지되어야한다. 선지자 아모스는 "내가 돌아와서"라는 본문에 나타난 첫번째 동사를 쓰지 않았고 환경의 변화를 말했었는데 그가 말하고 있는 이 사실은 이 점을 극히 잘 표현해 준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 ; 선지자 아모스는 왕의 집에 있게 된 누추한 황폐와 파멸을 좋은 목적을 갖고 우리들 눈 앞에 보여 주고 있다. 다윗의 나라가 허무하게 되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황폐된 것을 그 원래의 질서대로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무엇과도 비교할 수없는 성공을 주심으로써 그 나라의 영광을 하늘까지 끌어 올리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경건한 사람들이 확신하게 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매일 수 백번씩 실망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부터 돌아 왔을 때 그들은 끊임없이 무수하게 찾아 든 재난에 의하여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었다. 그 후에 살아 남았던 자들은 대내의 분쟁에 의하여 점차 활기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그리고 더욱 심했던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행한 형편 중에 그들을 구원 하시기 위하여 찾아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 내려 주셨던 도우심의 방법은 실망을 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다 지파가 갖고 있었던 지배권은 마카비(the Maccabees)에 의하여 탈취되었기 때문이다· 이러 한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은 그들이 실망하는 처지에 있을 때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할 경우 다윗의 나라가 온전히 멸망을 당하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지 아니 하실 것을 이 선지자를 통하여 주의깊게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멸시를 당하고 천한 줄기로부터 한 싹이 나오게 될 것을 선언하고 있다(11 : 1). 교회를 회복시킴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황폐한 중에서 이룰 세우시는 훌륭한 방안을 갖고 계심을 기억해 두어야 하겠다. 이 귀절은 다윗의 보좌가 높이 울리워지고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데 연합하기 위하여 그만이 우월하계 되실 때 교회의 참되고 바른 정체(政體)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교황이 그의 신성 모독적인 포악으로 교회를 박멸하고 있지만 그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뽐내고 있다. 그는 건전한 교훈의 빛을 꺼버리기 위하여 교회라는 이름을 공연히 사용하여 속 임수를 쓰고 있다. 바르게 살펴보면 그가 범하고 있은 그처럼 쿤 허위를 쉽게 반박할 수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밀려 나시고 그가 홀로 최고의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말 로는 시인하고 있으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망명을 위하셔서'라 고 말하면서 허울좋게 하늘로 몰아내고 그의 모든 권세를 자기의 것으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의 교훈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교훈은 그 저주받을 우상에 의하여 가증 스럽계 발아래 밟히고 있다. 하나의 우리와 한 분의 목자가 있게 되도독 모 든 사람들이 최고의 왕이신 그리스도깨 굴복하는 것이 우리들 중에 있는 교 회의 바론 상태라는 사실을 명심하기로 하자.
"17 그 남은 사람들과~~~~~찾게 하려 함이라" ;. 설명의 한 방편으로 야고보는 '찾다’는 말을 부가하고 있다. 이 말은 아모스 선지자의 말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필요없는 가외 (加外)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알아 주시도록 우리는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는 야고보가 유대인들과 함께 자기들의 모국어로 의논한 것을 간단하계 요약한 것 같으며 이 사건에 관한 설명의 결과를 아모스 선지의 말과 함께 섞어서 본문에 기목한 것 같다. 왜냐하면 아모스가 기록한 ‘만국의 남은 자' (許8)를 누가는 더욱 친근한 헬라어 번역을 따라서, 실제로 그렇게 실행되었던 것 같이, 필요없는 부분을 제거하는 작업이 세상의 더러움을 깨끗하계 하는 일에 앞설 것이라는 의미로 ‘남은 사람들'이란 말로 대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교훈은 우리 시대에도 적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부패는 온 세상이 그리스도께 굴복하기에는 너무도 추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끝날에 남아 있게 될 자들을 자신에게로 모으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환란의 키 (fans)질로 찌꺼기와 독(毒)보리를 흩으신다.
"18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 이 말씀은 새 로운 것 에 대한 악평을 없게 하려는 예방이다. 왜냐하떤 급한 변화는 얼른 잘 믿어지지 않으며 약한 마음들을 혼란케 하기 때 문이 다. 그러 므로 야고보는 이 일이 실로 급하 고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계 생겨나기는 했으나 하나님온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앞으로 자신이 하실 일과 이방인들에 대한 부르십이 자기 의 은밀한 목적 안에 숨겨져 있음을 미리부터 알고 계셨으므로 하나님 편에 서 볼 때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이 악평을 없애고 있다. 그 러므로 이 부르십은 사람의 이해를 따라서 평가되어서는 안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야고보는, 이 선지자가 이 모든 일을 하실 하나님이 이 예언의 주 인이시라고 주장하는 그의 말에 유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 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보신 것을 이 선지자를 통하여 먼 한계를 두고 그 렇 게 하실 때 , 할레 를 받지 않는 것 이 나 다론 어 떤 것 이 타도 하나님 께 서 이 방인들을 자기의 가족으로 택하시는 일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 고 이 말씀에는 사람들을 향하여 행사하시는 어떤 일에 대한 이유를 하나님 께서 자신만 알고 계실 때 사람들이 육신의 재능의 분량에 따타 하나님의 그 일을 판단할 경우에 격합한 일반적인 권면이 숭어 있다. 오히려 사람듈 온 하나님의 킬이 모두 탐구할 수 없는 것이며 그의 판단은 너무도 깊기 때 문에 이 에 감탄하여 소리 쳐 야 할 것 이 다(롬 11 : 33).
"19 하나님께로 ~~~~~~ 자들을 괴롭게 말고" ; .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겠으므로 의식에 관하여 일치하지 못한 점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몇 가지 한정된 규칙들을 정하고있는점에 있어서 그는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 된다. 이에 관하여 나는 충분하계 알고자 한다. 첫째로, 야고보는 그들이 형제들로서 자기들과 일치하지 못하게 될 그 무엇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있다. 둘째로,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자유한 자들이 되었고 거짓 선지 자들이 끌어 들이려고 애썼던 그 허위적이고 그릇된 신앙이 제거된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이 몇가지 규정들은 그들의 양심에 괴로움이나 불편이 되지 않았다. 야고보는 왜 이 네 가지만을 이방인들에계 명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규정들을 내세우지 않으면 자기들에게 복종을 강요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어떤 사람들과도 언약을 맺지 않는 관습을 가진 그둘의 조상들이 가진 엣 관습에서 그 네 가지가 나오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려나 이 설명에 관해서는 어떤 그럴 듯한 근거가 없으므로 나는 이를 의심스럽고 확실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문제는 그렇다 해두고, 그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것 (idolothytis)과 피와 목매인 것에 관하여 특별한 지시를 내리고 있는 데 대해서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이 규정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어느 편에도 기울어지지 않은 것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과는 다론 특별한 규정들을 부여받게 되었다. 우리는 주님께서 믿음의 외적 고백에 모순이 되고 우상숭배에 대한 행위나 의심을 내포한 것들을 피하라고 얼마나 엄격하계 명령하고 계시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미신에 대한 어떤 오점도 이방인들에게 남아있지 않게 하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순전하게 드리는 예배 외에 어떤 것도 그둘중 에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장애물을 경계하도록, 그들이 우상에게 바 쳐 진 것 (idolothytis) 을 조심 하라고 명 령 한 것 은 조금도 이 상하지 않다. 누가가 사용한 ai,ur'T)µa(알리 스게 一마)는 온갖 더럽힘 ' 을 의미 한다. 이에 따라서 나는 더러 운 것들' (inquinamenta) 이라고 쓴 일 반적인 번역울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이 때로는 제물에 대하여 쓰였으며 그 의미가 야고보가 말하려는 목적에 잘 맞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을 이 귀절에 사용 하는 것이 더욱 단순하고 실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조금 뒤에(29절) 누 가가 같은 명 령 을 반복하면서 ‘우상의 제 물' (E&ool60ur:a, 에 이 돌로뒤 타 ; idolothyta)이란 말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피'와 ‘목매어 죽인 것'에 관해서는 유대인들만이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이로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신 12 : 23). 그러나 이 법은 홍수 직후에 온 세계 사람들에계 주셨던 것이었다(창 9 : 4). 그러므로 온전히 타락한 자들이 아니라면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방 사람들도 피는 싫어했었다. 나는 이 경계의 말씀 역시 잠정적인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렇기 는하지만 이 경계는 한 국민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이 경계를 범함으로써 큰 장애물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사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른 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문제는 ‘음행'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단지 장애물이 된다는 견지에서 피해야 한다고 말한, 그 어느 편으로도 기울어져 있지 않은, 위에서 설명한 것들에다 이 음행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들·자체에 있어서는 불법이 아닌 것들의 부류에 이 음행을 연관시킨 데는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음행의 방종이 어디에도 억제할 수 없이 심하다는 사실온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특별히 이 병페는· 동양 사람들 가운데 너무도 심했다. 그들은 더욱 정욕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결혼에 대한 성실성과 정절이 이 곳보다 양심적으죠 무시되고 있었던 곳도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생각으로는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간음이나 모든 정절이 공공연하게 침해되고 부패되는 종잡을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과 같은 모든 종류의 음행을 분별없이 문제로 삼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첩을 두는 일인데 이방인들은 첩을 두는 일에 너무도 습관이 들어 이는 거의 묵인된 법이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서로 크게 다론 것들을 같은 부류로 취급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음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가 그 자체에 있어서는 나쁘지 않은 것들에다 일반적인 부패를 포함시킨 것은 불합당하지는 않다. 왜냐하떤 깨끗치 못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더러움에 대한 핑계로서 이 사실울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반박하기는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야고보는 피를 먹는것과 음행을 결부시켰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서로 비슷한 것듣 혹은 최소한 전혀 다른 점이 없는 것돋운 비교하고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과 질서의 첫째가는 법에서 떠난 사람들의 변질되고 부패된 관습만을 숙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판단에 관한 한 이 관습을 알려면 성경의 영구적인 교훈에서 이를 찾아보아야 한다.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사실에는 애매한 점이란 없다. 다시 말하면 음행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저주 받을 행위이며 사람의 영혼은 이 음행에 의하여 더러워지고 하나님의 성전인 몸이 이 때문에 더러워져서 그리스도께서는 대신 상처를 당 하셨으며 하나님은 매일 음행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어느 날엔가 두려운 보옹자가 되실 것을 성경은 분명하계 선언한다. 하늘의 재판관이 그처럽 엄격하게 정최하신 음행의 더러움은 이를 옹호하는 자들이 아무리 총명 하고 웅변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그럴 듯한 말로는 변명되지 못한다.
"21 모세롤~~~~~~" ; 나는 이 구절이 지금까지 그릇되게 설명되어 왔고 본 래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고 본다• 왜냐하면 주석가들 은 율법의 교훈을 잘 알고 이률 안식일마다 읽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위하여 무엇을 규정한다는 것은 필요없는 일이었으므로 이 귀절이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석가들은 이 귀철로부터, ”율법의 명에를 메는 데 익숙하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이 몇 가지를 강요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유대인 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모세를 받들고 있으므로 그로부터 더욱 배우게 되리라”는 의미를 끌어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 귀절로부터 할례는 그것에 부수적인 모든 것과 함께 오늘에도 유대인들에 의하여 시행되어야 한다고 추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언급한 그 설명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리석온 추측을 하고 있다. 사실에 있어서 야고보는 이와는 대단히 다른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각종 의식들이, 마치 단번에 되는 일처럼, 그렇게 급히 페지되지 못함을 경고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수 세대동안 율법의 교훈에 이미 익숙해져 왔고 모세를 가르치는 자들이 계속 있어 왔다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자유가 점차 선명하게 이해되기까지 짧은 시간 안에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지 말하면 속담이 그렇게 말하듯이, 각종 의식들은 예절에 어긋나지 않게 매장되어야 했다. 헬라어를 번역하는 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이는 ..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는 귀절을 그 애매한 의미를 피하기 위해 한사코 다른 말로 바꾸어 놓은 것을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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