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 14:19~28)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19)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0)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1)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2)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3)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4)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5)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6)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7)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2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9 와서~~~~~" ; 바울과 바나바는 그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려고 하는 것을 막기가 어려웠다. 한편으로 할 일 없는 악한들은 참시 전에 그들이 신으로 모시고 있었던 바울에게 돌을 던지도록 사람들을 선동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 사실을 볼 때 하나님을 향하여 순전하게 순종하는 것보다 세상이 미신에 기울어지기가 얼마나 쉬우며 미신은 사람을 얼마나 오만하게 하는 것인가를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 미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주요 부분에서 작용하려고 하기 때문이 다. 주님의 종들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구원과 축복은 순종 안에 있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들을 위한 어떤 주장을 하려는 권한을 바라지 않고 이득을 따라서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들을 너그럽게 대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반대하여 고함지르고 때로는 소란을 일으키 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기꾼들에 게 극히 잘 속고 그들의 포악에 쉽게 굴복한다. 그리하여 교황은 불행한 영혼들을 노예로 삼아 억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잔인하게 괴롭힘 으로써 자기가 하고 싶온 대로 할수 있게 된다.
그가 무엇을 정하든지 그것은 유순하게 잘 받아 들여지고 있다. 오늘에도 그가 만들어 내는 법이 아무리 시행이 어려워도 그 누구도 감히 불평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멍에에 자진해서 응하는(suave)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건 가운데서 우리는 세상의 부패된 행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얻고 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허메 (Mercury)의 이름으로 그들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충성스럽게 그리스도를 섬겼기 때문에 돌로 침을 당했다. 그러나 그의 참을성은· 우리가 본 받도록 칭찬되고있다. 그는주님에 의하여 놀라웁게 구원 되었다. 그러 나 그에 관한 한, 그는 극히 잔인한 죽음에 자신을 내어 맡겼다. 그러므로 이번에 그가 돌에 맞는 것은- 마치 그가 죽임을 당한 것처럼-그가 고린도인들에게 두번째로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는 그것 (고후 11 : 25)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여 소란을 일으켰음에 의심이 없다. 그러므로 경건치 못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의 종들에게 어떤 폭력을 쓰더라도 이에 대한 조사도 없고 법은 침묵을 지키며 법정은 열리지도 않고 치안관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변호는 전혀 있지도 않는다.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 바울을 번호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누가는 믿는 자둘이 그의 생명에 관하여 염려했음울 보여 준다. 아무도 모르게 하지 않고는 그들이 바울에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큰 위험을 당하저 않기 위하여 그 들은 스스로 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주남께서 우리의 능력 안에 두시는 일에 관하여 항상 유의하지 않으떤 안된다. 내가 바닷가에서 파선을 당한 사람이 깊은 물 속에 빠진 것을 본다면 그리고 그를 돕는 데에 손을 쓸 수 없다면 그를 주님께 부탁드리는 일 밖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를 구원할 만한 어떤 가망이 있다면 나는 물론 모험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겁에 질려서 바울을 내버려 두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를 도울 만한 능력이 그들에게 전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곳에 누워 있는 그를 둘러섰을 때 그를 향한 사랑과 염려에 대한 증거를 보였다.
"더베로 가서." ; 이 사실을 볼 때 바울은 오직 이적에 의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그가 죽은 줄 알 정도로 넘어져 있었던 바로 그 다음 날에 생기있고 활기있는 사람처럼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가 온갖 불행 앞에서도 굽힘이 없는 정신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는 퇴역한 군인처럼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어떤 휴양할 곳을 구하지 않고 잠시 전에 흉악한 취급을 받았던 그 곳으로 되찾아 갔다. 그런데 누가는 그 더베의 사람듣 중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우선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제자들을 굳세계 하기 위하여 전에 세웠던 교회로 되돌아 왔다고 기록했다. 이 사실로써 누가는 말씀이 듣는자에게 교훈만을 주기 위해 쓰여지지 않고 경고와 권면과 확신을 줌(coarquendo) 으로써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데에도 효력이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일꾼들이 가르칠 뿐만 아니라 전할 것을 명령하고 계시며 바울 역시 성경은 교훈 뿐만 아니라 권면을 위해서도 유용함을 선언하고 있다(딤후 3 : 16). 그러므로 목사는 격려하는 일에 전심하지 않으면 자기 사람들에게 바른 지식을 바르게 전하여 주었다 하더라도 자기의 사역을 온전히 수행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믿는 자듈온 마치 말씀을 읽는 것과 전하는 것이 어떤 가외(加外)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등한히 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계속적으로 견고하게 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
"22 권하고." ;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고백한 제자들이 그 복음은 계속 지켜 나가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권하는 것은 그들을 굳세게 하는 주요 방법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만큼 신속하고 활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의 게으름에는 자극이 필요하고 냉냉함에는 뜨거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여러가지 투쟁을 통하여 연단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이 환란에 견디기 위하여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으라고 경고한다. 우리가 헌신적이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고는 대단히 필요하다. 만일 육신이 우리에게 곤란을 주지 않고 사단이 우리롤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지 않고 악한 자들이 장애물로 우리를 혼란케 하지 않는다면 참는다는 것이 그렇게 진저리 나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쉽고도 유쾌한 길을 따라 걷는 즐거운 걸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마다 사방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가신 일들이 생겨나서 우리들이 포기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에 어려움은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참는 힘은 그처럼 귀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권리를 끝까지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싸움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사실은 그만두고라도 누가는 여기서 원수가 빼어든 칼과 타오르는 불길로 우리에게 주는 핍박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고 ‘환란'이라는 말 속에 경건한 사람들의 생활에 임해오는 온갖 괴로움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신자들만이 불행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되는 것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공통으로 당하는 상황이기 때문이 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가장 좋은 일온 태어나지 않는 것, 다음으로 좋은 일은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죽는 것'이라는 유명한 격언이 나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치 않온 사람들에게 벌을 얼론 내리지 아니 하시고그들이 잘 되도록 살찌우고 계시기 때 문에 자기의 자녀들을 대하심에 있어서 더욱 엄격하시고 엄중하시다. 왜냐 하면 다른 사람들과 공통으로 당하는 괴로움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불운에 의하여 유독 억압을 당하고 있으며 그들의 육신이 호색에 빠지지 않도록 이를 징계 아래 두시고 잠자지 않도록 그들을 깨우고 계시면서 이 모든-경험으로 그들을 겸손하계 만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덧붙여 악한 자들의 비난과 중상이 있다. 믿는자들은, 말하자면, 세상의 찌꺼기 같온· 취급을 받고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순박함은 비웃음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다론 사람둘의 불경스러운 희롱에 의하여 특별히 괴로움을 겪는다. 그리고 악한 자들의 열정온 공공연한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믿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많은 환란을 당하면서도 그 형편을 만족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많은 원수들 중에서 그둘의 생활 전부가 혼란스럽게 되고 어지럽계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어렵고 곤란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생활을 통하여 그들이 하늘나라로 가까이 나 아가고 있음을 그들의 마음 속에 충분히 확신시켜 줄 수만 있다면 이는 가 장 훌륭한 위안이다. 이 사실을 볼 때 경건한 사람들이 당하는 불행은 세상의 온갖 쾌탁보다도 더욱 복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환란을 당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우리를 위해 정해진 이 법칙을 우선 명심하자. 그러나 이렇게 함과 동시에 그 환란의 쓰라림을 우리 스스로 누그럽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려 가는 것은 이들 환란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또한 명심하자.
그런데 이 말씀으로부터 인내가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는 공로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은 순전히 쓸 데 없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구원의 이유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취급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론 한편으로 행위에 의한 가치나 공로를 칭찬하지 않고 믿는 사람들이 무거운 십자가 아래서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 위해 위 로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온 인류는 예외없이 많은 불행을 당하기 쉽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버림을 당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당하는 고통이 지옥에 대한 서막에 불과하지만 성도들에게는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을 유익하고 즐거운 목표로 이꿀어 가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 고난은 그돋이 받을 구원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성도들온 이 고난을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1 : 5 참고). 한두 번의 혹은 최소한 두세 번의 환란을 당한 후에 자신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침내 포기 하지 않도록 바울과 바나바는 ‘많은 환란들' 이 라고 복수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하겠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뚫고 견디어 나가겠다고 결심해야 하며 한 가지 핍박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핍박을 위해서도 대비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온 어떤 사람들에게는 온화하게 대하시지만 자기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가 환란을 전혀 당하지 않게 하실 만큼 관대하거나 자비로우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23 장로들(presbyteros)을 택하여." ; 이 말씀을 볼 때 사담이 경 건한 교훈으로 한 번 교훈을 받고 믿음의 본질을 붙잡는다 하더라도 계속적인 전진을 못한다면 이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보내실 뿐만 아니라 복음이 계속 전파되고 매일 전파되도록 목사들을 세우라고 명령하셨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떠난 후에 가르침이 중단되거나 잠잠해지지 않도록 각 교회 마다 목사들을 세웠을 때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이 명령을 준행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교회가 항상 일하는 교역자를 세우고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보실 때 그리스도인들로 인정되는 사람들은 일생을 통하여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임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본문에 나오는 ‘장로' (presbyteros)를 가르치 는 직분을 받은 자들' 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덤전 5 : 17)을 보던 어떤 장로들은 단지 품행의 검열관들(morum censores)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각 교회 위에 세움을 받았다고 누가가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의 직무와 사도들의 직무는 구별되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들에게는 어느 곳에나 정해진 머무르는 곳이 없었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면서 이곳 저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반면에 목사들은 자기 교회에 개별적으로 세움을 받았으며, 말하자면, 그 교회를 책임지게 되었다 (quasi locati ad praesidium) .
그들은 투표에 의하여 (suffragiis creassent) 임명 되었다. 헬라어 XEcp<Jrol.JECl.J(케이로토바인)이란 말은, 사란듣의 회의 때에 보통 그렇게 하듯이, 손을 들어서 어떤 것을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교회의 저술가들은 명사 XEcpor-ol.Jta(캐 이 로토니 아)를 다른 의미로 사용할 때 가 자주 있 다. 즉 임직을 위한 엄숙한 의식 인데 이는 성경 중에서 안수로 불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말함으로써 목사 임직에 관한 합법칙인 방법이 잘 설명되어 있다· 바울과 바나바는 목사들을 새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독특한 직무를 가진 권한자들로서 그들을 향하여 독단적으로 행동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투표에 의하여 목사들을 임칙시키게 했다· 그러므로 목사들을 세우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자유 선거를 했다. 그러나 어떤 질서 없는 일이 있을 경우에 바울과 바나바는 의장처럼 사회를 했다. 이 방법에 따라서 우리는 라오디게아(Laodicea) 회의의 결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 회의에서는 일반 교인들이 선거하는 것을 금했다.
"금식 기도하며." : 그들이 기도한 데에는 두 가지 목적과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가장 훌륭하고 적합한 사람들을 뽑기 위하여 지혜와 분벌의 영으로써 자기들을 인도해 주시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속을 수 없을 만큼 큰 지혜를 받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알았으며 하나님의 축복이 강조되어야 함을 알지 못할 정도로 자기들의 열심에 의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지 아니 하시면 사람들의 판단은 그릇되고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지 아니 하시면 사람들의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되고 있음을 날마다 보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이 경건한 사람들의 회의를 주관하시도록 그 성령께 호소하는 것은 경건한 자들에게 참된 도움이 된다. 그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일에 있어서 지켜야 할 규칙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교회의 행정에 우리는 자주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도자와 주관자로 모시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도록 크게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들이 기도했던 두번째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목사가 됨에 있어서 필요한 은사들을 주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직무를 충성스럽계 수행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진 힘이 감당하는 그 이상으로 힘이 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앞장을 서면서 (auctoribus)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금식'온 그들이 드리는 기도에 열의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시행 되었다. 금식을 하지 않을 때 우리가 열성이 없이 냉냉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항상 금식이 따라야 된다고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때보다 더욱 간절하계 기도할 필요가 있을 때에 이 금식은 대단히 유용한 촉진제가 된다. 우리는 목사를 선택하는 일이 얼마나 신중한 것인가를 이미 설명했다. 교회의 원만한 운영이 보전되는 문제가 이 일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특별 기도를 드렸다고 누가가 기록하고 있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의 금식과 금식의 다른 소용에 대하여 눈여겨 보는 것온 가치있는 일이다. 교황과 그롤 섬기는 사람들과 같이 금식이 공로가 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게하려는 것이며 금식 그 자체가 하나님깨 드리는 예배라고 간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금식이 다른 어떤 것과 관련을 갖지 않는 한 금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을 향해서도 중대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희를~~~~~ 주께 부탁하고" ; . 이 말씀을 볼 때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의 보살핌과 수고에 의하여 주님께 돌아온 사람들의 구원에 관하여 얼마나 관심이 켰던가를 우선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이 약한 육신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는, 견고한 믿음을 계속 유지하려 할 때 그 믿음을 위하여 많은 위험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울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단 영접하신 사람들을 계속하여 보호하시는 것만이 그들의 믿음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도움의 방법이다. 끝으로, 그들이 그 '믿는 바 주께 부탁을 받았다'는 누가의 말은 우리에게 큰 확신을 준다. 왜냐하면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된 믿음으로 영접한 그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까지 왔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들이 전에 보냄을 받았던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타우러스(Taurus) 산올 바라보면서 그 중간에 놓여 있는 밤빌리아를 통행하고 있다. 버가와 아탈리아는 서로 가까이 있는 성읍들이다. 그런데 누가가 그들이 이 두 성읍 중 한 성읍에서만 말씀을 전파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그들이 등한히 하거나 어떤 곳을 무시하여 지나치지 않고 시행했던 그 가르침을 위한 기회가 모든 곳에서마다 다 주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가 있다.
"26 이 곳은~~~~~~~·부탁하던 곳이라." ; 누가는 그들이 이 방인들을 위 한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던 곳이 바로 그 곳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완곡한 표현을 써서 그들이 사람에 의하여 보냄을 받았거나 자기들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여 무엇을 해보려고 했다고 말하지 않고 모든 원정과 그 성공은· 그것을 진홍하시는 분인 하나님께 맡겼다(Deo permlssam) 고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설교는 사람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일이었다. 그리고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나타난 다른 표적들이 그러한 것처럼, 성령의 능력과 효력에 관련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종들에게 주시는 모든 은사들은 은혜에 관련되고 있기 (gratultum est)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의 수고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은혜를 주시도록 그들이 기도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가 있다.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고하고" ; . 대사(大使)들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면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하여 보고를 하는 것처럼 바울과 바나바는 그둘의 여행들 중에 있었던 일들을 교회 앞에 온전히 보고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그 사역을 얼 마나 충성스럽계 수행했는가를 알리고 동시에 믿는 자들이 하나님 께 감사를 드리도록 격려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이 그렇게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서 누가는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행위를 찬양하지 않고 모든 일을 주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이 귀질은 ‘그들과 함께' (cum ipsis)라고 해석되지만 히브리어의 관용구에 의하면 ‘그들 속에 ' (in illis), '그들에 의하여 ,··(per Ulos), 또는 ‘그들을 향하여'(erga illos), 혹은 단순한 여격으로 ‘그들에게'와 같은 구가 쓰인것과 같다. 그러므로 누가는 (Jt})) 어roes-(쉰 아우토이 스 ; 그들과 함께 )라 고 말하고 있지 않고 µE-r-1 aU죠w))(메트 아우토-온 ; 그들과 더불어)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이 효과적으로 했던 모든 일의 유일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마치 그들이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협동자들이었던 것처럼, 어떤 무식한 사람이 그들에게도 찬양을 드리게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누가는 주님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사실을 즉시 말하고 있다.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파송되었지만 상황이 새로와진 사설은 실로 놀라왔다. 그리고 이 급한 변화는 유대인들만을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전에는 더러웠고 하나님의 나러와는 관계가 멀었던 자들이 아브라함의 거룩한 씨와 연 합되 었 다 (mt"sceri) 는 사실 이 그들에게는 신기한 일로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실제적인 결과로써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아무런 목적도 없이 보내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믿도록 문이 열렸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이 실제적인 음성으로 그들에게 전파된 것 뿐만 아니타 그들의 성령의 빛에 의하여 믿음을 갖도록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실제적인 전도에 의하에 우리 앞에 열려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령께서 내적으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 나라에 가까아 나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이 받은 소명이 눈 앞에 나타난 결과로씨 하나님의 인정과 학중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의 믿음은 이를 확증하기 위하여 바울이 로마서 (16 : 25)와 고린도 후서(3:7;駐1)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손으로 도장을 찍으신 것과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