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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행15:5)

1. 성경 (행15:1 ~1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1)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2)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3)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4)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5)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6)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7)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8)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0)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절"  ; 바울과 바나바가 공공연한 복음의 원수들과의 갖가지 격렬한 싸움에서 떠나게 되자 이제는 식구들끼리의 싸움에 의하여 시련을 겪고 있음을 누가는 말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단과 세상의 온갖 맹습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장되었음이 더욱 분명해지도록 그들의 교리와 사역 온 가능한 모든 방법에 따라서 시험을 받아야 했다. 그들의 가르침이 극히 많은 전쟁의 무기들에 의하여 타격을 당했을 때 확고하게 서 있고 그 가르 침의 진전이 그렇게 많은 방해에 의해서도 막히지 않았을 때 그들의 가르침온 특별하계 확증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 는 두려움"(고후 7 : 5)을 경험했다고 자랑스럽계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특별히 눈여겨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떤 우리는 본래 십자가나 어떤 팝박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더욱 큰 위험이 우리의 기백을 꺾거나 우리를 약하게 하지 않도록 이 큰 위험들은 내적인 분파(internal divisions)로부터 찾아 온다. 포악스러운 자들이 그들의 힘을 다하여 공겨 해 울 때 육신의 마음은 분명히 두려움을 느끼고 강한 용기의 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들 때문에 온통 떨고 있지만 이러한 형편 속에서도 그들 의 양심을 참으로 손상시키는 시험이란 있지 않으며 이러한 형편은 교회로서는 치명적인것으로 인정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이 서로 다투게 되고 교회가 내부져으로 큰 변동을 겪게 되면 약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혼동을 느끼며 믿음을 포기해버리기까지 한다. 특별히 교리에 관한 논쟁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교리야 말로 형제가 연합할 수 있는 거룩한 띠이다 (quae una ~acrum est vinczelum fraternae unitatis) .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 내부의 불일치만큼 복음에 손상을 주는 것도 없다. 왜냐하떤 이 불일치야· 말로 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실망시 킬 뿐만 아니라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복음을 악하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서 자만에.빠진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자기들 스스로의 헛된 생각들을 소개함으로써 그들이 미친듯이 요망하고 있는 명성을 얻을 수가 없을 때, 동일한 복음울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교리에 관한 논쟁이 생겨 난다면 이런 사례는 전에도 있었음을 우리가 알기 위하여 이 말씀을 조심스럽게 주시하도록 하자. 하나님온 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진리도 하나라는 사실온 분명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믿는 자들의 일치를 권했을 때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 4 : 5)라는 말씀을 활용했다. 그러나 불경건한 사람들이 거짓을 가지고 위조한 것으로 복음을 부패시키거 나 의심나게 만들어 교회를 나누어 편당을 만들고자 나타날 때에 우리는 사단의 속임수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온 성경의 다론 귀절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 11 : 19)고 이단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온 훌륭한 목적을 위 하여 사단의 음흉함을 분명하게 분쇄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와 같은· 시련을 통하여 자기 백성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주심으로써 자기의 말씀을 존귀하게 하시며 악한 자들이 애매하게 만들려는 전리를 더욱 찬란히 빛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대로 이 사건의 모든 형편을 깊이 고려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 그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왔다는 이 구실온 훌륭한 사람들까지 속이는 데 상당한 효력을 발휘했다. 예루살렘은 모든 교회들 중에서 가장 높은· 영예를 갖는 데 있어서 그럴만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모는 교회는 예루살렘을 그들의 모교회 (母敎會)로 여겨 소중히 여기고 우러러 보 았기 때문이다• 복음이, 말하자면, 통로를 통하여 흘러 나간 본래의 샘은 바로 이곳이었다. 사깃군들이 내려 왔다. 그들은 사도들이 승인해 주었던 자들처럼 행세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배운 것만을 가져왔다고. 말하고 거만스럽게 행동했다. 여하간 이러한 허울을 가지고 그들은 아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잘 변하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 한 자들이 제 시 하는 것 을 굶주린 자듈처 럼 잘 붙잡는다. 교회 안에 태풍처럼 일어나는 소만은 선량하고 온화한 사람들을 흔들어서 비틀거리계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성도라는 이름을 그롯되게 사용하는 경우에 사단의 속임수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단순한 사람들은 그들을 몹시 존경하는 나머지 그 사실의 진실 여 부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누가는 무엇 이 그 악한 자듈을 그렇 게 이끌어 갔는지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1ea1eol;r;Aca(카코젤리 아), 즉 잘못된 열심이 그들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계 한 것 같 다. 왜 냐하면 자기 자신의 것 말고는 즐거 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게 는 어떤 까다로운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할례와 율법의 다른 의식들이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디로 가든지, 마치 그 한 교회의 실예가 확고한 규칙이 되어 다론 모든 교회롤 구속하는 것처럼, 어먼 새로운 것이나 다른 것은 전혀 참아 보지 못한다. 그 사람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그릇된 열십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 속 에 는 야심 이 그들을 자극하고 있 었으며 어 떤 오만한 마음이 그듈을 충동했 다. 이와 동시에 사단은 원하는 것을 가진다. 왜냐하면 경건한 사람들의 나 음은 연막(煙幕) 때문에 혼동을 일으켜 무엇이 희고 무엇이 검은가를 분간 하지 못하계 되 었 기 때 문이 다. 그러드로 첫째로 이 악한 일을 조심하자. 자기 자신의 관습을 다른 사람의 법이 되지 않게 하고 한 교회의 실례가 전체의 규범으로 선례가 되지 않게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우리는 어떤 인물이 어떤 일을 한다고해서 그 일이나 명분을 묻지 않거나 애매하게 내버려 두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사단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고후 11 : 14) 바꾸고 모독적인 벤맨스러움으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횡령할 때가 자주 있다면 그 가 이와 같은 악으로 거룩한 사람들의 이몸율 가장하여 속임을 베푼다고 해 서 놀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결과를 볼 때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멍애를 메우고자 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단이 그들을 몰래 공격하려고 했던 방법은 바로 이 속임수였다. 그려 므로 그리 스도의 교훈을 반대 하는 자들이 그리 스노의 종들의 이 름을 가장하 여 몰래 행동하는 일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일의 진실성을 편견없이 (integris iudiciis) 알아보는 데에는 오직 하나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들이 서로 싸운다고 생각하지 않도독 우리는 부끄러운 소문을 피해야 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사단은 단순한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어떤 충성된 종들이 쓸데없이 논쟁하게 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다툼이~~~~~일어난지라"  ; · 바울과 바나바가 격렬한 다툼에 꿀려든 것은 작은 시험이 아니었다. 다툼 그 자체만 하더라도 나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들이 형제들과 원수처럼 싸워야 할 지경까지 논쟁이 격렬해지기 시작했을 때 이 악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고 마치 그들이 고집으로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이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 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오해에 의한 나쁜 평판을 생각할때도 역시 그러했다. 그리스도의 종들이 부당하계 고통을 당한다. 선한 대의(大義)를 변호하는 데 충성스럽계 일한 다음에도 마침내는 모든 괴로움을 당하고 악평을 받게 되는 일은 너무도 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들에 관하여 퍼지는 좋지 않은 소문을 무시해 버리도록 굽힘이 없는 큰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성경의 다른 귀절에서 자기가 요란함을 통하여 (E:l) 전 진할 수 있었음을 자랑하고 있다(고후 6 : 5).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들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불화로부터 떠나야 한다. 그리고 사단이 소동과 말다툼을 일으킬 때에는 이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애쓰고 마침내는 연합을 갖기 위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으면 이를 막기 위한 싸움을 피해서는 안되며 하늘과 땅이 부딪히는 한이 있어도 이를 반대하는 일에 용기를 내는 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우리들은 이 사실로서 분명히 경고를 받아 교회 안에 소동이 생기면 이에 대하여 누가 책망을 받아야 할 것인지 분간하기를 지혜롭게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들의 강인한 힘(gravr:tas)을 칭찬해 주는 대신에 그들을 경솔하게 정죄하는 일을 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처럼 사나운 사단의 공격에 견디어 내고 의기가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단은 하나님의 훌륭한 섭리에 의하여 제지되어 바울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게 했음을 기억하자. 만일 사단이 원하는대로 손상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면 이방인들의 믿음은 전복되고 소멸되었을 것이며 바울이 전파한 복음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며 이방인들을 부르시는 문은 닫히고 말았을 것이다. 세째로 불일치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론 단계에서 제지되어야 한다. 이 불일치가 불길갈은 논쟁으로 번지지 않게하 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사단이 노리는 것은 불화의 부채 (fan)를 부채보다 많이 불길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초대 교회가 소란을 당했으며 그리스도의 훌륭한 모든 일꾼들이 열심히 말다툼을 한 것을 볼 때 이와같은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생겨날 경우, 마치 우리가 어떤 새롭고 예기치 않았던 일에 끌려 들어간 것처럼 놀라지 말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당시에 주셨던 .그 해결과 갈은 해결책을 주시도록 구하면서 거센 소란 중에서도 동일한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하자.

 

"너희가~~~~~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 이 말로써 누가는 제기된 주요 문제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속이는 자들이 율법을 반드시 지 켜야 된다고 말하여 믿는 자들의 양심을 얽어 매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 에 할례만이 이야기되고 있으나 말씀의 전후관계를 볼 때 그들이 온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관하여 논쟁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할례는 율법에 속한 다른 모든 의식의 엄숙한 시작이므로 제유법(提陰法)에 의하여 이 할례는 온 율법을 가리키고 있다. 바울의 원수들온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이심을 부인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충성을 드리면서 도 그들은 율법의 옛 의식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얼른 보기에 이 과오는 용납될 만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바울은 싸움이 교회를 흔들지 않도록 최소한 잠시라도 침묵을 지키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왜냐하면 이에 관한 말다툼은 외부적인 것들이었고 바울 자신도 성경의 다른 데서 이같은 외부적인 것돌에 관하여 너무 심한 말다툼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강하게 맞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데에는사실 상 세 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근거해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라면 그 구원은 행위에 의한 것이 되고 만다.  믿음을 평화롭고 잠잠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의 의식이 믿음의 자유로운 의에 거스리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는 한 잠잠하고 있다는 것은 옳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원수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구원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며 그 영광을 행위 쪽으로 옮기고 있고 그들은 불행한 영혼들의 신뢰를 흔들므로써 그들을 괴롭게 하고 요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신실한 영혼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얻어전 자유를 빼앗는 것은 크계 중대한 문제였다· 성령의 내적자유는 조상들이나 우리들에게 공통된 어떤 것이지만 우리는 조상들이 율법이라는 유치한 보호아래 갇혀 있어서 노예와 거의 다론 바 없다(갈4:1,2)고 바울이 한 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뒤에는, 마치 우리가 보호를 받는 시간이 끝난 것처럼 (갈 3 : 23), 더욱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하여 율법의 속박(paedagogia)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가르침의 세번째 잘못은 이 교훈이 복음의 빛을 어둡게 하거나 최소한 어두운 구름과 같은 어떤 것을 끼워 넣어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의 충만한 광채를 발휘하시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만일 바울이 그러한 원칙 (initiis)에 굴복했더라면 이 교훈은 짧은· 시간 안에 전체 기독교에 퍼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외적인 육체의 할례를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싸웠다. 그리고 율법의 저주와 영원한 죽음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된 경건한 양심올 얻게 하려고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은혜의 광채가 맑고 잔잔한 하늘에서처럼 다시 빛나게 하려고 싸웠다. 그리고 그 악한 사람들은 율법의 바론 사용을 경건치 못하게 부패시켜 그 율법에 심각한 손상을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율법을 가진 바론 기능은, 몽학선생 (paedagogi instar)처럼 어린이들의 손을 이꿀어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를 약화시키는 구실로서 사용된다면 이보다 더 나쁘게 변질될 수 도 없다. 하나님의 진리가 사단의 술책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공격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음으로써 그 진리를 배반하지 않도록 우리는 모든 의문에 대한 숨은 근원(fontes)을 이 방법으로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어떤 위험이 있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향해서는 안되며 모욕과 비방을 받는다고 해서 그 앞에서 유순해져 버리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순전한 신앙은 항상 지켜지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다투지 아니 ' 해야 한다(딤후 2 : 24). 그러므로 어떤 말다툼이 생기면 하나님의 종들은 즉시 나팔을 부는 대신에 자신의 온건한 마음으로 이를 전정시키고 가라앉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필요하지 않고 소용도 없는 논쟁은 피하도록 끊임없이 경계해 야 한다. 중요하지 않은 말다툼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단의 오만이 우리의 신앙을 손상할 정도까지 커지는 것을 볼 때에는 그가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하나님의 종들은 아무리 유쾌하지 않다 하더라도 반드시 용기를 되찾아 대항하기 위하여 일어나야 하고 싸우기를 주처하지 말아야 한다. '평화'란 듣기 좋은 말임에 들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 율 잃은 만큼의 큰 댓가를 치르고 얻어지는 평화는 저주받은 평화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의해서만 경건하고 거룩한 연합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황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세상을 흔둘어 놓는 소동을 일으킨 것처럼, 우리를 향하여 큰 악의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 나 우리는 즉시 답변할 수가 있다. 우리가 반박하는 데 애를 쓰고 있는 하 나님께 대한모독이 우리가입을다물고있어서는옳지 않을만큼심했기때 문이고 또한 이 이유 때문에 천사들이타 하더라도 싸워야 할 것인데 사람둘 과 논쟁 한다고 해 서 우리 가 비 난을 받아서 는 안된다. 그들이 마음에 만족하 도록까지 소리지르계 내버려 두자 ! 사단의 종들이 자기듈의 힘을 다하여 겅 건의 교훈을 파멸하고 있을때 이 교훈을 지키는데 있어서 우리가냉담 하거 나 마지못해 하며 실천하지 않도록 바울이 보여준 모범은 훌륭한다. 왜냐하 떤 그들의 난폭한 행위는 하나님의 종들이 더 이상 참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맹렬하계 반대했율 때 마 침내 이 충돌로 말미암아 분쟁이 폭발했다. 그러나하나님의 성령은 이 때문 에 바울을 꾸짖지 (sugillat) 아니하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사람' 에게 주셨던 그 용기를 합당하게 칭찬하심으로써 귀하계 여기셨다.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 하나님의 성령은 소란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이 방법을 암시해 주셨다. 이 방법을 쓰지 아니 하였더라면 그 소란은 상당히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불일치를 해걸 하기 위해서는 알맞고 적합한 방법들을 언제나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 실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평화를 대단히 높이 칭찬하고 계시므로 교회가 평화롭지 않은 것은 믿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님을 믿는 사람들온 실제로 보 여 주도록 하자. 신자들에 게 는 진리 가 항상 무엇 보다도 중요하다. 이 진리 를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어떠한 소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 지만 그들온 어떤 명에로운 일치의 방법을 배격하지 않도록 그들의 열릴합 율 누그럽게 한다. 그럴 뿐만 아니타 그들 스스로가 가능한 어떤 방법을 궁 리하고 그 방법들을 찾는 데 자기들의 머리률 쓰게 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온건함을 지켜서 지나친 열심에 의하여 바론 길을 벗어나가 거나 정당한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참된 교훈을 지키는 데 있어서 용기를 가져야 하되 융통성이 없거나 경솔해서는 ° J되1I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칭찬하고 계시는 바울 속에 있는 그 두 가지 미덕을 서로 결합하도록 하자. 그가 경건치 못한 사람들에 의하여 싸움의 위치로 억지로 꿀려 갔을 때 그는 자기의 사건을 지혜롭게 제시하기를 (cordate se offerre)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제의된 해결 의 방법을 말없이 받아들이면서 자기는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도들을 존중히 여기지 않음을 자만스럽게 여기고 그러한 태도를 완고하게 고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크 논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내려 주는 판단을 얻 고자 했다. 그리고 무지하고 연약한 믿음을 가전 사람들아 그리스도의 모든 다른 종들로부터 그 두 사람이 분리하여 떠나는 것을 보았더라면 그들은 자 기들의 그릇된 관념을 그대로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교사들 온 자신들이 교회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믿음을 킬러 주는, 이 각별한 대도를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사도들이 시키는대로 할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사도들이 자 기와 일치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더라도 그는 자기의 의견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처 럼(1:8), 그는 천사에게라도 양보하지 아니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경건치 않은 자들이 그를 심히 교만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열중하고 있는 사람으로 말하지 않게 하고 다론 사람을 무시 하는 사람이 타고 그롤 비 난하 지 않도록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섣명하기 위하여 나서고 있는데 이는 바른 일이며 전체 교회를 위해서도 은혜스러운 일이 었다. 둘째로 그는 승 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도들 앞에 서 있었다(注2).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영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어떠한 결정율 하계 되리타는 것 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디옥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다 론 사도들에게 보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안디옥 사람 둘이 그 다른 사도들을 극히 존경하였으므로 그 사도들이 이것 아니면 처것 이 옳다고 발표하기까지 그들은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면 그둘의 믿음은 없어지고 있었으며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전혀 믿음이 없었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쉽다. 안디옥 사람들은 모든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같은 명령을 내리서서 똑같이 보내심을 받았으며 사 도들은 같은 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 논 것을 그들은 확신하고 있 었다. 이 계 획 은 악한 사람들이 베 드로와 야고보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정직하고 신중한 사 람들에게서 시작되 었음에는 의심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우호적인 결정(suffragio)을 내려 그 선한 대의(大義)를 지지해 주는 것이었다. 모든 거룩한 회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유명하고 정통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의견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도 론을 꿀내는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소집되어 왔다· 교황과 그를 따르는 사 람들이 그둘의 공연한 소만으로 누구타도 실망시키지 않도록 이 사설을 눈 여겨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함께 페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경건의 빛을 온전히 꺼버리기 위하여, 마치 사람듄 의 어떤 결정이 하늘에서 주시는 어떤 말씀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들온 회의(駐3)의 결정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거 룩한 교부들이 오늘날 회의률 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주셨던 말씀 외 에 (nisi Christo verha praeeunte) 다른 어 떤 것 율 제 의 하기 위 한 권리나 의도까지도 없음을 일치하계 선언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유일하신 스승이신 것처럼 그들의 유일하신 스승이셨다.

  나는 교황과 그를 섭기는 사람들이 우둔한 무지와 어리석음 외에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온 전하지 못한 회의에 온전히 의존하고 있는 것을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그 회의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모임온 필연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 옹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기준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어떠한 회의도 좋은 결 과를 가져 오지 못했 다는 나찌 안주스 (Nazianzus)의 그레 고리 (Gregory)가 말한 신랄한 불평이 있다. 교회 안에서 번창하고 힘있게 움직이고 있었던 온갖 좋은 것들은 기원 100년이 되면서부터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사 실온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레고리가 지금 살아 있다면 몇명 안되 는 둔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자기들에게만 맞는 결정율 하고 그 순간 하나님 의 말씀이 배 격 되 도록 부끄러 움도 모르고 정 당한 회 의 에 가면무도회 (larvarum praestigias)롤 끌어 둘이는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의 그릇된 행 위 (nenias) 를 얼 마나 분하게 배 척 하겠 는가 !

 

"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   ; 우리는예절을지켜 바울과 바나바름 전송하기 위해 교회가 인정하는 가운데 두 사도와 연합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그들의 편을 들고 있었으며 그들과 뜻을 갑이 하 고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출발에 관하여 두 종들이 계회했던 것과 갈은 목적 올 가쳤던 것이다. 그 목적을 거짓으로 사도들의 권위를 내세웠던 그 소란 스러운 정신을 억압하려는것이었다. 누가가 두번째로하고 있는 말은 바울 과 바나바가 여행을 하면서 이방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온 훌륭한 사실을 형제들에게 보고한다는 것인데 이 사실은 그들이 겁에 질려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여행을 하면서도 그들이 전에 가르쳤던 것을 두려움 없이 선언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주 장을 재판관들 앞에 호소하기 위해서가 아니타 양편이 일치하계 결정하여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의식 (儀式)의 페지에 관하여 내리신 명령율 확고히 히기 위하여가고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들의 판결을 일축하고 있지는 않으나 자기들이나 사도들도 이 일에 있어서 다론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되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피고들이 되는 것은 합당하지 않았기 때 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선율 갖고 있었으며 거랬다. 뿐만 아니타· 이는 경건한 사람들의 기쁨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과이방인들이 부르십을 받은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  교회.~~~~~~영접을 받고~~~~~~ "   ;  ‘교회 ' 라는 말로서 누가는 그 사람들(plebe mipsam)과 그 모임 전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서 사도들과 장로들을 다시 별도로 말하고 있는데 특히 이들에 의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영접을 받았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자리를 정하여 머물러 있지 않았고 계속하여 이곳 저곳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나 그들이 부름을 받아 가면 그곳 교회에는 장로들이 있었고 이 장로들이 그 교회의 일반적인 치리를.맡고 있었다. 나는 14장 13절에서 장로와 사도의 직무가 서로 어떻게 다론가를설명했다. 그런데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형제답고 인정있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절있게 바울과 바나바를 영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했던 성공적인 일에 관하여 들은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기 때문이다. 누가는 우리가 14장에서 알아 보았던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울 고하고"(14 : 27)라는 표현 방법율 반복하고 있다. 아 사실과 함께 우리는 내가 앞에서 말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일에 대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하셨던 일에 있어서 그들의 공력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를 도우시는 경우 그는 우리를 자비롭게 취급하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사람들이"   ; . 누가가 예루살렘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를 곤란하게 만들고 방해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관하여 설명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 악이 그 샘에서 솟아나오는 것 같다. 그라고 지금 누가는 전에 있었던 분쟁을 일으칸 자들이 속한 갈온 당파로부터 선동자들 (flabella)이 나타나고 있음을 머욱 분명하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께 충성을 드리고 있지만 그들이 전에 가지고 있었던 기 질에 대한 흔적은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교만하고 자만십 율 갖고 있으며 거만한지를 알고 있다. 만일 그들이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덧입고 있었다면, 바울 속에 바리새주의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다 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오랜 관습 때문에 완고한 습성에 젖어 있었고 이 습성을 단번에 없앤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위선이 그들을· 크계 지배하고 있었기-때문에 악에 대한 구실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외적 의식에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듣은 교만으로 기세를 울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자기들 의 원칙에다 굴복시키는 열심에 있어서 사나웠다. 수도자들 역시 이 두가지 의 병페로부터 심한 고통을 겪고 있음은 잔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역시 그 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교회를 분쇄하고도 스스로 잔인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일축하고 있으면서도 난폭하거나 엽치가 없음을 느 끼지 못한다. 실로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수도사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둥 의 소굴에서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 곳에서 받아들였던 그 관습을 잊지 못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6 사도와 장로들아 ~~~~~ 모여"   ;. 누가는 온 교회가 모였다고 말하고 있지 않고 교훈과 판결에 있어서 권한을 가지고 그들의 직임에 의하여 이 일에 합법 적 인 판단자듈이 었 던 사람들이 모였 다고 말해 준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 서 토론이 진행되었으리타는사실은 분명히 있을 듯했다. 그러나 일반 신자 둘이 이 문제를 아무렇게나 처리하도록 허락을 받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그 일을 맡았다고 분명 하계 말해 준다. 그들은 더욱 유능한 판결자둘이었기 때문이다. 다론 방법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어떤 논쟁이 생겼을 때 회의를 소집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형 식과 질서가 여기에 있음을 깨달아 알기로 하자.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바울을 거스려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 때 규모가 커진 이 재난의 위 험에 대한 위협을 느끼면서 이미 심한 말다툼이 시작된 이 문제논 그가 어 쩔 수 없이 예루산램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게 했기 때문이다.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던 뛰어난 사람들이 선택되어 모였지만 그들까지도 단번에 일치하지는 않았다. 이 사실을 볼 때 당시에도 주님은 교회가 지혜로워지는 것을 겸손하게 배우도록 사람들의 약점들에 의하여 교회가 고통을 당하게 하셨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자신이 친히 주재하시는 회의에서 그리스도인 교리의 주요 원천이 여러가지로 토의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그렇게 하시지 않을 경우 경건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생길지라도 우리가 놀라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이 일의 중요성을 예리하게 알아차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율법에 대한 지각없는 열심에 이꿀려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결정할 경우에 그들은 자기들 양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양십 올 얼마나 헝한 미로에다 꿀어 넣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할 례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외적으로 행하는 거역할 수 없는 상칭이라고 생 각하고 있었으며 온 율법에 대해서도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쎄드로는 문제의 요점을 지적하기 위하여 이 정을 가장 각별하게 생 각하고 있나· 왜냐하면 그들 중에 대부분이 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말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하나님의 견의에 일치하여 그는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강력히 하고 있댜 둘째로 그는 이 올무가 양심에 부담을 줄 때 사람의 구원은 모두 무너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자기를 보내시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음을 반복하고 있는 그가 한 말의 첫부분이 내포한 취지는 율법의 의식들이 사람에 의하여 경솔하게 페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계신다는 것이 었다. 하나님의 권세가 문제의 중심에 자리를 잡으면 모든 의심은 물러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말없이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모든 이론보다 높이 평가하는 데 우리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방 인들이 율법의 멍에에서 풀려나제 하셨다고 증거하는 베드로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좋을 것이다.

 

"너희도 알거니와"  ; 베드로는 그들을 증인들로 부르고 있다. 그리하여 누구라도 자기가 분명하지 않고 애매한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고 있다. 그가 말하려는 내용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이외의 사람들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들이 대낮에 소경이 되어 있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분명하게 나타난 사실을 오래 전부터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바론 관십을 갖 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들 윤 자기에게로 모으기 시작하신 이후에 교회가 시작된 당시부터 복음이 전 파된 시초를, 마치 ‘오래전'(pridem)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래 전부터' 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誌4)"  ;. 동사 ‘택하다’는 ‘마음 먹다'와 ‘정하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로 하나님의 은혜스러 운 선택과 이방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선덱을 함축져으로 말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방인듄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 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타고 말했다. '너희 가운데 서’라는 말은 ‘우리가 보는 데서, '우리가 증인들이 되어’ 혹은 ‘우리들 가 운데서'타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사실이 그들의 눈 앞에서 o] 루어졌으므로 그들에게 친근하고 잘 알려져 있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의미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귀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있어서 공통이다. 뭉 론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임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 고’ 라고 번 역 할 것 이 다. 

 

"믿게 하시려고"  ; . 이 말은 이 방인들의 부르심 을 확증해 주는 도장과 같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그듈을 가르치는 직임을 받았다. 그의 가르 침에 의한 성과는 그가 말한 것같이 그의 사역에 명성을 더해주고 그 사역 을 권위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특별한 은해에 의하여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역자들 속에 자기의 능력을 나 타내 어 주셔 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내 부적 으로 가르치 시 고 그들의 마음을 내적으로 이꿀어 주시지 않는다면 가르침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교훈이 전달될 것을 명령하셨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더 이상 더럽혀진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그듈을 자신에게로 거룩하게 구별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하여 그들의 마음에 양자(養子)삼으십의 표롤 재기지게 될 때에 비로소 모든 면 에 있어서의 전정한 성별은 완성되었다. 이어서 기록된 말씀은 앞에 나온 말씀을 설명하고 있다고 간주해야 하겠 다. 성령의 은혜는 분명히 우리를 믿음으로 가까이 데려다 주기 때문에 베 드로는 그가 말하고 있는 성령에 의한 눈에 보이는 은혜를 믿음에다 연결시 키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들이 할례나 어떤 의식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접붙임이 될 경우에 그들이 율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라 고 결론짓고 있다. 그런데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써 그들을 선택하신 증거가 되셨던 사실온 설득력을 갖는(minus firmum) 것같이 보여지지 않 는다. 왜냐하면 그 은사들은 그들이 경건한 사람들의 부류 안에서 인식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것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을 밖의 사람들 (alienis) 과 구별 하는 분은 오직 중생 의 영 뿐이 시 다• 나는 이 렇게 말하고자 한다. 다론 접에 있어서는 신실하지 못한 자들(vani)이었던 사람들이 방언의 온사와 이 와 유사한 은사들을 받은 사실에 도 불구하고 베 드로는, 마치 손가락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께서 성령에 의한 눈에 보이는 은혜로서 고넬료와 그의 친척들에게 은해로 운 양자(養子)삼으심을 인치신 사실온 정당하다고 간주하고 있다.

 

"8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   ;. 베드로는 회고하는 입장에서 이 말씀을 하나님께 져응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는 말없는 대조가 숨어 있다. 사람은 우둔하고 땅에 속한 이해력을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밖으로 깨끗히 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와는 반대로 마음 속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런 점에 있어서 그릇된 판단은 인간적인 이해 로부터 나오게 된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귀하게 여가는 것은 마음 속의 깨끗함이며 이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방법으로 베드로는 우리의 경박한 마음을 억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우리 자신들을 위주로 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반항하지 않게 하러 는 것이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신 중거의 본질을 너희 (tihi)가 분명하계 알지 못하떤 하나님께서 너희와 얼마나 다르신가를 생각하타 너희의 둔한 정신적 견해 때문에 외적인 장려 함이 너희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 영적인 신문(審問)을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대에 나아가계 될 때에는 그 장려함은 떠나가고 없어져야 한다." 끝으로 하나의 일반적인 교훈을 주장해야 하겠다. 그 교훈이란 하나 님은 어떤 보여주기 위한 일들을 보지 아니하시고 예레미야서에저 말씀하고 있는 것(5:3)처럼 정직한 마음올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마음을 아신다는 말씀에 대한 벌게이트 역~(許5)과 에라스므 스역은 누가가 헬라어로 하고 있는 말을 충분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다. 왜 냐하면 하나님 을 ,capoeor油qi-711.1(카르디 오그노―스텐 ; of음 을 아시 는 분) 이타고 부름에 있어서 누가는 하나님과 주로 외모로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 운 대 조하고 있 다. 그러 므로 사람을 하나님 과 비 교할 경 우에 사람은 7r:pot7w1r:opwqrae(프로소一포그노-스타이 ; 얼굴만 아는 자들)로 호칭될 수가 있 다.

 

"9 믿음으로~~~~~~~깨끗이 하사~~~~~"    ; 이 귀절은 누가가 앞에서 (8철) 하나님 께 적응시켰던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 누가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 방인받이-영적으루 깨끗함을 받도록 그들을 자녀로 삼으실만한 가치가 있다 고생각하셨을때 그들을 내걱으로 깨끗하게 하셨다고 말한 것과 카다 .i려 .. -" ~ 포_..; 반국^는 이 ·깨 끗활.이 믿 음에 의 한 것 이 라고 부;}하여 말하고 있 다. 그러 므로 누가는 첫째로 하나님의 신판대 앞에서 그 심판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참 된 성결은 아무런 의식을 행하지 않고도 이방인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음 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 그는 이 성결이 믿음에 의하여 얻어지고 믿음으로부터 흘러 나오게 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와 동일하게 바움 여시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롭고 거룩하게 인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타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경우 데 있어서 할례는 그가 의로와전 다음에 시행되었으며 시간져으로 이후였기 때문이다(롬 4 : 10).

  그러나 이 접에 있어서 다음과 같온 의문이 생긴다. '베드로는 마음의 깨 끗함만으로 만족하고 이방인돌이 율법에 의한 의를 필요로하지 않는 이 특 칭에 의하여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구별하고 있기 때문에 오래 전에 족장 들이 받았던 그 깨끗함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시는 그것과 다른 것인가?' 나는 그들이 본질에 있어서라기 보다는 형식에 있어서 서로 달랐다고 대 답한다. 왜 냐하면 하나님 은 언제 나 마음 속의 깨 끗함을_ 기 대 하시기 때문이다. 갖가지 의석들은 믿음에-도움야 되도보두 옛 사람들에게_주어 쳤다. 그러 므로 형 식 과 실 행 에 연 관된' (q?,fOad f(g_u_r~s er exer~citi(!,) 깨 끗함 _ ...... 온그리A --.,,.::;;-도께서 오시기까지 잠정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커 지금:우리에게~이런 깨끗함이 있어야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러는 참 예배, _ 一-' 죽 신령한 예배가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존속하기~ ' ....... , .,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식에 있어서는 三게 다른 점듄이 있기 때문이 ~ ' 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 의G깨끗함에 의하여 의로움 혹은 깨끗항을 얻었음율 알 수가 있다. 의식 그 자체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우연히 깨끗하계 해주는 보조직 역할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전리는 엣 사람들이나 우리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부수적인 것은 모두 다 없어졌다. 그러므로 그립자들이 없어집 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은 아무런 덮인 것이 없이 나타나 그대로 지속되고 있 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씨,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타고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사실온 쉽게 해결된다. 할례는 영구적인 혹은 영원한 언약으로 호칭되 었다(창 17 : 13). 그러므로 그들은 이 할례가 페지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 했다. 창세기의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상징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 람이 있다면 그는 바르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해 결 이 있 다. 이 는 내 가 말한 적 이 있 는 것 인데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한가지이기 때문에 그가 율법의 모든 그림자를 끝내셨다는 사실에 불합리한 점이란 없다. 율법의 영원성은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 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방인들이 깨끗하계 된 것은 믿음에 의한 것임을 베드로가 확실하계 말하고 있는 두번째 귀철에 이르렀다. 베드론긴二몇:t고 민덕에-의 한여' 혹은 ‘생활의 신성함에 의하여'라고 말하지 완곤 의가 자신이 ... 아닌 다른 분으로부터 온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바르코-적당하계 삶으로써 스스로 소의를 얻게 되어 있든지 태어 나 면서부터 깨끗하다든지 하다면 베드로가 하고 있는 이 선언은 쓸데없는 말 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첫째로 온 인류는 오염되어 불결해 쳤 으며 둘째로 이 불결함은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제거될 수 가 없음을 분명하계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호의로서 우 리를 도우시계 하는 방법이므로 이 믿음은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갖는 본성 과 각 사람의 개개의 공로와는 정반대에 서고 있기 때문이다. 온 인류가 더 러워쳤다는 판결을 받았다고 내가 말할 때 나는 우리가 모태로부터 더러운 것 외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음과 우리의 본성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갖고 계시는 호의를 얻을 만한 바른 것이란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生몬~포읍 시초에 실로 훌륭한 은사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부분은 죄로 말마암아 극히 부패되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깨끗한 것이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깨끗함은 우리들 자신이 아닌 다른 데로부터 --' 암 안타· 이 깨끗함이 공적 (功續)있는 행위에 의하여 회복될 수 있다 는 주창을 옳은 것으로 택하는 사람이 있다면, 패역한 본성이 그렇게 가치 있게 바뀔 수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망상도 없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에게서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을 다른 데서 얻어야 한다. 그리고 그라스도께 속한 것을 우리에게 옮겨다 주고 그것을 아무 렛 가 없이 전달해 줌으로써 우리의 것이 되게 해주는 것은 믿음이 가진 기능 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그리스도의 은혜는 서로 연관을 갖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들 영혼 속에 부어 넣은 어떤 힘이나 자질로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지 않고 o]_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깨끗함을 받아들으l..zl 때문 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회 마음을 깨끗이 하사'타는 말씀 역시 눈여겨 보아야 한다. 누가는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믿음의 조성자이시며 깨끗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임으 0 근 나마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누가는 사람 들이 스스로 = -,--그러나 믿홈이 맡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됨을 지적하고 있다. ----로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스도께로부터 얻은 것을 우리에게 전한다고 말씀했으므 혜가 어떻게 기 쁘시계 해드리는 자들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 방버 0 t:: 우리를 깨끗하계 하는지 알지 않으떤 안된다.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 째 로 그리 스도는 자기 의 피 로 ,단 번 에 속죄 하신 우리의 죄릅 날마다 멸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순결함과 의로움을 우 리에게 주신다.

  그리고 둘째로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으로 우리가 가전 육신 의 욕망을 억제하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계 바꾸어 주신다. 나는 본문의 말 씀으로 이 두 가지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누가는 한 가지 종류의 깨끗함만 을 말하고 있지 않고 율법의 의식들에 의존하지 않는 깨끗함이 온전하계 존 속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기때문이다.

 

"분간치 아니 하셨느니라"  ;. 실제로 분간은 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할 례 를 받음으로써 믿 음을 위 하여 준비 해 왔음에 반하여 이 방인들은 무할려] 의 상태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언약 속으로 급히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 나 베드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평동하계 같온 유업의 소망 안으로 이꿀려 왔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 며 , 마침 내 아브라함의 거 룩한 씨 가 되 고 제 사장과 왕같은 백성 (genus) 이 되는것 같은 존귀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 사실을 볼 때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유가 되게 하시려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자기 성전의 거룩한 그릇들로 거룩하계 구별하신 후에 그들을 깨끗지 않다고 간주-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행위가 될 뿐이다. 왜냐하면」그들을 서로 구별시켜 놓았덜 벽을 무너 뜨리심으로써 한 몸으로-함께 자라나게 하시려 고 하나님 은 이 방인들을 유대』냐과 연합시키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집안 식구 들과 바깥 사람들이 그리 스도 안에 서 하나가 되고 한 교회를 이루어 다시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할례를 무할례에 연합시키셨다고 말하고 싶다.

 

"10  그런데~~~~~~~ 너희가 어찌하여~~~~시험하여"   ; . 이 말씀은 바울의 원수들 이 그들에게 억지로 시키기를 원했던 그 교훈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베드 로가 지적하고 있는 말의 두번째 부분이다. 그 교훈이 치명적인 이유는 모 든전길한 사람들을 실망시켜 그들을 압도해 버리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만 일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자T가 앞에서 한 말로서 추론하여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머 욱―급급하계 종사하고 이 일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고 있다. 왜냐하떤 지금까 지컬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든것 이상을 이방인들에게 강요하떤 그들에게 손상이 됨을 설명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한 백성과 대등하게 만드셨 고 그들이 아들들이 되는촌귀를 가졌다고 생각하실 경우에 그들을 배척하 논 것은 부끄럽고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관대하심이 이렇게 증명되었음과 그들에게는 의식들이 없기는 하지만 믿음만으로 넉넉함을 설명 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전실로 더욱 뜻깊은 원칙을 말해준다. 사람의 구 원을 율법의 행위에다 묶어두는 사람들은 바람 만한 어떤 좋은 것을 끼쳐주 지 못하며, 반대로, 율법을 지키는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면 온 세상온 무서운 멸망을 향하여 둘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 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해당되는 성경귀절에서 어떠한 말을 하고 있는지 곧 보게 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인터간 진_1!법 으로 ‘시 험 ' 을 받으신 다고 말하고 있 다. 그란한의-본문~-로크一호에 AL겟츠르흐는-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침을 사람에게 지우고 하나님께서 느슨 --, ~ 번! 해 주시는 멍에를 더욱 든든하계 하여 하나님의/ 능렵율 제한할-경-우에 하나님께서는, 말하자면 고의적으로, 도전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의미한고 ----있다.

  그리고 이는 속담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본성을 거스려 싸움으로써 거인들처럼 되고자 하는 행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조상과 우리도. 베드로는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 뿐만 아니타 그듄 의 행위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지롤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거룩한 족장들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율법 의 명에를멜 수없었다고 말했을때 사람듈이 율법을 지킬 수없었음을확실 하계 말하고 있다. 나는 ‘율법 을 지 킬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저 주를 받을지어다'타는 제롬(Jerome)의 말이 거의 확고한 원칙이 될 만큼일 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있음을 안다. 그러나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판단하는 사실에 반대가 되는 어떤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뜻과 행위가 아니라 능력과 힘에 관하여 성령께서 베드로의 입을 롱하여 선언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육신이 약하므로 (롬 8 : 3) 율법이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었음을 주장하면서 베드로의 말 데 동의하고 있다.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율법 안 에서 약속해 주신 그 생명을 얻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으로 부터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부인하고 있으므로 율법 안에서는 사람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머욱 높은 의가 요망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롬은 믿 는 사람들이 성령의 은해의 도움으로 율법을 행할 수 있게 된다고 후에 성 명했던 것처럼 나는 그가 육신의 힘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그것이 가능함을 말했다고 인정 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 완화시켜서 하는 말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육신의 힘만을 생각할 때 사람은 율법의 명에를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실행하기 위해 한 손가락마저도 웅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하며 (창 8 : 21) 육신의 온갖 경 향(sensus)이 하나님 께 원수가 되 어 있고(몸 8 : 7) 하 나님을 찾는 자가 없으며 (시 14 : 2), 성경에 자주 보여지고 있는 이와 비 숫한 일들, 특히 바울이 로마서 3장에 열거하고 있는 것들(II절)이 사실이 라면 율법을 행하기 위한 사람의 능력은 약하고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 시 행을 위한 시작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라도 하나님 의 성령으로 거듭난 다음에 율법의 의를 위하여 열십을 가지고 이를 실행한 다면 그 율법의 전부는 커녕 그 절반, 아니 그보다 훨씬 저게도 시행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베드로는 에비구레오 파의 사람들이 나 세 상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모세 와 다 론 거룩한 족장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있었던 가장 훌륭한 사람들(perfe ctissimi)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의 침이 그들의 힘을 압 도하여 그들이 그 침 아래 굴복했 다고 말하고 있 다. 율법을 성취하는 힘이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부터 울 경우에 하나님 의 성령은 모독을 당하신다는 좋지 못한 반대가 있다. 이 반대에 대한 쉬운 설명이 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은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 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이 제상에서 자기 백성의 2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은해의 분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왜냐하며 하나님 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합당하며, 하 나님께서 친히 어떻게 되시겠다고 선언하지 아니 하시고 어떻게 하시겠음을· 원치 아니 하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우리가 물어서는 안되기 때문 이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들이 육신의 정욕과 싸워서 그 정욕을 억압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혜와 도우심울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그 육신의 정욕을 온전히 멸하시지는 않는다(許6).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새 생명 가 운데서 건도록 은혜를 주지겠음을 약속하고 계신다. 그러나 율법이 그 실행 을 요구하는 만큼의 은해 를 주시 겠 다고 약속하지 는 아니 하신 다• 왜 냐하떤 자기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생활 건부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정하신 질서를 구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손상시킨다고 우리의 원수들이 주장할 때 그들이 우리에게 부담을 주려는 것은 어리석고 쓸 데 없는 헐뜯기에 불과하다. 오히려 하나 님의 목적은 변동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경우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다른 분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오래 전에 펠라기아 파(Pelag1a~s) 사람들도 어거스턴을 향하여 그와 같은 비방을 했다. 어거스탄은 율법을 실행하기란 가능하지만 성경은 이 율법을 온전히 행한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증거하고 있으며 이 율법은 세상 끝날까지 온전하계 이행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 던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그들의 말썽많은 그 교활한 계책으로부 터 빠져 나왔다. 그러나 실행자(autore)로서 성령께서는 이를 행하실 수 있 으시다고 거침없이 그리고 분명하계 인정하는 데 그가 주저할 이유만 없었 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혜는 약속과 일치하기 위하여 한계 안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우리는약속 그 자체가 얼마나 멀리까지 확대되 는가를 이미 섣명했다. 분명히 누구의 마음 속에도, 만일 하나님이 원하신 다면 사람들을 온전케 하실 수 있으신지에 관한 의문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구별하는 사람은 모두 성경 중에 그것에 관한 명백한 중거를 갖고 있는데 이들은 불경건할 뿐만 아니라 헛소리를 하고 있 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기로 결정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백 번이라도 분 명하계 보여 주신다. 이는 사람둘이 신성모독을 하지 않게 하심이다. 제롬 온 철학적인 이론을 가침으로써 베드로와 바울에게 저주의 벼락을 내 던졌 다. 법은 그 법을 지킬 사람의 능력에 맞추어 누그러워져야 한다고 그는 말 했다. 인간의 여러가지 법에는 이렇게 될 만한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의 법 에 관한 한 이 말에 대한 타당성을 나는 부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의를 위한 요구사항에 있어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고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여기에 더욱 어려운 질문이 암시되고 있다. '율법은 사람듈이 하 나님께 순종할 것을 강요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영이 신 실한 자들로 하여금 그 율법을 지키도록 인도하시지 않는 한 율법을 주신 의도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해 준 그 엄숙한 증언은 모든 의심을 없 애 주는 것처럼 보인다· 모세는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명령을 전하는 것은 이 명령을 읽게 할 목저이 아니라 이를 행동으로 실행하게 할 목져이라고 겅 ` 고했다(신 30:12). 이사실로부터 우리는하나닙께서 율법을주셨을때 유태인들은 명에를 매개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들의 마음대로 살지 아니하고 이 율법이 그들을 하나님께 순복하게 했기 때문이 다. 이 질문에 대하여 나는 율법이 두 가지 방법에 있어서 멍에로 간주된 다고 대답한다. 율법은 육신의 정욕을 어거하고 경건하고 바론 생활을 하기 위한 표준을 정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의 목을 이 멍에에 순응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해드려야 할 의무를 정하고 온전히 순종하는 조건아래서만 생명을 약속하고 있으며, 반면에, 그 율법 중에 어떤 것으로부터 떠나서 방황하게 되면 처주를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견디기 어려운 멍에이다. 이 사실에 관하여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률 자신에게 부르지는 선한 생활 올 해 야 한다는 단순한 교훈은 모든 사람이 기 꺼 이 순종해 야 하는 명 에 이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활을 다스리지 아니 하시고 그들이 어떤 구속이 없이 원하는 대로 방황하계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보다 더욱 불합 리한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단순한 교훈을 고려할 때 그 율 법의 멍에는 배격될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 이률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 : 5),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 이 타" (신 27 : 26) 는 말씀들은 그 멍 에 가 견 디 기 에 힘 든 것 이 되 기 시작한 결과와 함께, 만일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한 다론 떤(aliter qualificant)에 있어서 율법을 제한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온전히 순종 한 사람들만을 위하여 구원이 약속되어 있고 그것 중에 어떤 것을 범한 자 가 심판을 받게 되어 있는 한 인류는 절대적으로 멸망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이치를 마라서 베드로는 사람이 오만하여 양심에 율법의 침을 지울 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드로는 사람이 율법의 교 훈에 의하여 지배를 받아야 함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멍에아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 가르치는 것 뿐 만 아니라 영원한 죽음의 정죄를 받게 함으로써 사람율 겸손하계 하는 것이 므로 가르침에 부가된 그것을 생각할 때 베드로는 경건한 사람들의 영혼이 율법의 멍에에 의하여 구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됨으로써 그들온 어쩔 수 없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개 되기 때문이다. 그리 고 우리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하여 우리를 인 도하시는 성령의 은혜 뿐만 아니타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에 의한 현실적 인 도움을 갖게 될 때 ‘‘이 명 령은……먼 것도 아니타"(신 30 : 11)는-모세의 말이 성취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가 얼마나 호감을 주는 것이며 그의 침이 얼마나 가벼운가를(마 11 : 30) 깨닫게 된다. 나님은 그 은혜로 ° T리가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실패한 것을 용서하시며 그 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간절히 그리고 겸손하계 명하시 되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는 것을 실행하게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엄격성이 율법의 교훈은 견딜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타 즐겁고 마음에 제거되고 떤 우리를 부드럽계 억제하면서도 드는 것이라 우리를 합당한 그 이상으로 멀리 끌어가지 않는 고뼈를 거전하지 않아야 한다. 

 

"멍에를~~~~~·목에 두려느냐"   ;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하다. 사람의 양심이 감 당할 수 있는 이상의 집을 그 양십에 지우게 될 때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신 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게 되면 영혼들은 실망 중에 사로 잡히고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으므로 구원을 받아야 될 영혼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 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권(lus)이 탈취를 당하여 그가 우리를 자유룹게 해방하실 수 없게 하는 하나님께 가하는 이 잘못을 우리는 잠시타도 참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 모든 설명을 떠나서라도 베드로가 단지 의식들만을 논 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당시의 실제 상황으로부터 침작할 수가 있다. 전 에 속박(paedagoglae) 아래서 보냈던 그 노예와 같은 생활은 어렵고 힘들 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멍에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이 는 극히 불합리한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많은 위선자들이 그 외적 의식들을 지킴으로써 정확하고 어김없이 자신들을 죄 로부터 해방시켰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그리고 그 뿐만도 아니다. 만 잎 도덤적인 법이 육체의 순종만으로 만족스럽고 영적인 의를 요망하지 않 훑민이 법을 만족스털게 실행하기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것이~-왜냐 한면조}.7-l~-손과 밭윷-it제하는 권한은 각잔L에게도주아졌기--때문]다. 그려 나―훌젖혼착제와:깨끗합이 모든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실제로 심히 어렵 ---수 • 단그체 뿐만 아니타 영혼 속에서도 동치되도록 다스린다. 그러므로 사람 둘이 베드로의 말을 의식(儀式)에다국한시키는것은 어리석다. 베드로의 말 온 마음의 의를 보여 주기 위하여 인간의 무력함을 설명하고 있다. 이 마음 의 의는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온 전히 반대가 되고 있다. 위에서 말한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의식들에 관한 것 뿐이라는 하나의 이론에 따라서 잘못 이그갈려 가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신중하게 외적으로 보이 는 모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얽힌 과오가 어떤 것인가를 바르게 찰 생가했 다는 사설을 그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거짓 사도들은 사람이 의식둘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 일 사람의 구원이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근거하지 못하면 은혜에 의한 화해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인간이 가전 힘 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 안에서 선언하시는 처주 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율법에 의하여 영원한 죽 음의 정죄를 당하는 것을 알 때 모든 사람은 절망에 사로잡힌다. 아마 거짓 사도들은 이런 일을 기민하게 숨겨둘런지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교훈 의 치명저인 해독을 공개하기 위하여 바로 그 근원을 찾아 말하고 있다. 우 리 역시 사단이 경건하지 못한 오류들을 몰래 둡여 .놓을 때마다 이와 같이 해야한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향하여 심한 논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왜 냐하면 우리 는 죽은 자를 위 하여 기 도하지 말야야 한다고-·강하게 준장하기 렌문으Jg. 죽표는-자를 위한 기도는 극히 옛부터의 -관습이라는 사실 의에」김 욘셀홉 기목를드리기는 해도 쿠게 위험스럽게 보여지지는 않는다고 말합다. 더욱 심한 것은, 이 -기도에는 인간의· 경건에 대한 모습이 있기 때 문에 찬성할 만한 교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식한 사람듣온 그 교리 . ' -의 근원을 찾아보지 않기 때문에 그처럼 생각한다. 죽은 자들이 이 세상에 서 자기들의 죄를 해결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지금 형벌 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해 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바르지 않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께 서 완성하신 구속의 효력은 사람의 행위에 의한 것으로 바뀌고 만다. 둘째 로, 사람들이 한브.님의- 말씀을 떠나서 제 몇대로 기도할 수 있게 된다면 바 르게 기도하기 위한 규범은 무너진댜 이 불합리함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난국곧 어렵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교리가 논란의 대상이 될 때 느리가 꿀고 오는 모든결과에 대한 근원을 따지고 구 근원을 철처히 삽 묘-않으-떤 어떤 의문에 대한 바론 결정은 내려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러으론 거짓 사도들을 그 숨은 곳에서 끄집어 내기 위하여 베드로가 일반적 인 방법으로 모든 율법을 다루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폐하고 영〕룹홈 두려운 낙담의 골짜기로 던져 넣는 교리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모는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 하여 단순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칠리 그 자 세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1  주 예수의 은혜로"  ;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은해 안에서 소망을 갖는 것과 율법의 멍에 아태 있는 것을 서로 장대적인 것으로 비교하고 있다. 이 비교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가 극히 밝은 빛 가운데 드러나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의 멍에와는 관계가 없고 그 멍에로부터 해방된 사람 들이 그리스도의 은해 안에 있는 구원운 구하며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 실을 이 비교에서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율법의 멍에가 두가 지 요소로 결합되어 있음을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 하나는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잘리라"(레 18 : 5)또 다론 하나는 ”이 율법의 모든 말 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 : 26)이다. 이와는 반대가 되는 입장으로 되돌아 가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해로 구원을 얻는다면, 마치 율법의 멍에가 잘못된 것처럼, 우리를 위한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데 달려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의 처주를 받게 되지 않는다. 아직도 율법의 멍에를 메고 있는 자들이 은해로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면 베드로의 말은 합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얻기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멍에 아래 굴복하지 않노라”는 말씀을 볼 때 이 말은 그 정반대의 사실에 근거하고 있 음이 확실하기 때 문이 다. 만일 그리 스도의 은혜 와 율법 의 명 에 (eius iugum) 사이에 간격아 없다면 베드로는 우리를 속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율법의 의에서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 반박은 교리에 관한 것이 아니타 의의 이유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온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로워졌으며 그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을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셨으며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거짓된 이론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어 를 상상하 고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멍에를 약간 느슨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율법 의 두 가지 요소로써 영 혼들을 속박하고 있 기 때 문이 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 약속은 항상 그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 이다. 반면에 율법을 꼼꼼하게 실행하지 아니한 모든 사람에게는 저주가 임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머무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 사람들어 꿈꾸는 것과는 극히 다르게 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죽 이는 그가 죽으신 희생에 의하여 얻어전 값없이 주신 화해, 또는 이와 동일한 결과에 이론 것 인 바 하나님을 전정시켜 드립으로써 원수 혹은 엄격하시고 화해가 어려우 신 재판관을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가 되시계 한 값없이 주신 겨 의 용서이다.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말할 경우에는 우리 는 속죄의 사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값없이 주시는 양자(養子)삼으 심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의를 얻기 위하여 행위가 인정된다면 율법의 멍에는 부러지지 않고 베드로가 내세우는 대조는 성립되지 않거나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희와 동일하게"  ;. 여기서 베드로는, 외형에 관한 한 조상들이 율법에 의 하여 노역을 치르기는 했지만, 그들의 양심은 고랑에 묶이지 않았고 자유 로웠음울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설은, 그렇지 않을 경우에 경건한 사 람들을 심히 괴롭게 했을 불합리함을 해결해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 음부터 세상의 문날까지 자기의 종들과 함께 맺으셨던 생명의 언약을 영원 하고 동일하기 때문에 조상들의 오태 전부터 갖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구원 을 얻는 또 하나의 방법을 오늘날 가르쳐야 한다면 이는 합당하지 않고 참 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가 조상들과 조금도 다 를 바가 없음울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와 똑같이 그들도 그리스도의 은혜 에다 구원의 소망온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교훈의 대상을 염두 에 두었 기 때 문에 (quad ad finem dectinae spectat) 율법 과 복음을 하나로 취급하여 유대인돋이 의견을 달리하여 스스로 상상하고 있었던 그 장애물을 그들로부터 제거하고 있다. 이 사실을 볼 때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으로부터 조상들이 구원을 얻 계 하실 목처이 아니었고, 의석들을 주신 것 역시 이것을 지킵으로써 그들이 의를 얻게 하실 목적이 아니었으며 온 율법은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었으니 행위에 대한 의촌을 버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소망을 두게 하시 려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사실온 옛 사람들이 땅의 복으로써 만족하고 하늘의 생활에 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둘의 허탄 한 말을 반박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조상들이 우리와 함께 믿음에 참예하는 자들이 라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나 조상들에게 믿음을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 함에도 불구하고 광신적인 사람 셀베부스(Servetus)의 가증스러운 신성모 독으로 즐거워하는 사람듈이 있다. 다시 우리는 베드로가 교훈하는 것을 주 시해야 하겠다. 다론 어떤 근원으로부터 우리는 생명율 얻율 수가 없고 사 람들이 하나님께로 오는 다른 수단은 없으므로 옛 사람들의 믿음은 항상 그 리스도에 근거하고 있었다고 그는 교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말씀 은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타"(히 13:8)는 말씀 과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