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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행15:24)

1. 성경 (행 15:22 ~ 35)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2)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3)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24)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5-26)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7)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8)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29)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0)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1)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2)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3)(없음) (34)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5)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22 사도와.~~~~~~~~ 가결하니"  ; 큰 바람은 잔잔해쳤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그 사건이 바르게 토론되었을 때 그들 모두는 일치하게 참된 교훈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그 교인들이 얼마나 겸손했던가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들과 다론 교사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맡기고 그들이 명하는 것에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사도들 역시 그들의 공평한 행위에 대한 중거를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교인들과 의논하지 않고는 그 모든 경건한 자들이 공통으로 갖는 대의(大義)에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체 교회의 공통된 상황에 속한 일들이,  일시저인 기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모든 교인들은 참여하지 못한 채 소수의 사람들의 판단에 맡겨진다는 것은 포학을 지닌 목사들의 교만임이 틀림없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그 사건이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지혜롭게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지나치게 까다로운 많은 사람들을 만족케 하고 믿을 수 없고 무식한 사람들을 막고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잘못들을 몰아내며 불평을 없애고 논쟁을 진정시키고 그릇된 소문을 억제하기 위하여 불경건한 자들의 중상을 제지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있다. 바울과 바나바의 원수들온 아마 자기들이 편지를 받아 왔다고 간교하게 말했을지도 모르며 어떤 새로운 트집을 생각해 냈을런지도 모른다. 무식하고 약한 자들은 즉시 불안해했을저도 모른다. 그러나 지도적 인물들이 이 사건에 관하여 그들 앞에서 신중히 말 하려고 편지를 가지고 나타났을 때 온갖 불길한 의심은 없어졌다.

 

"24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 나가서~~~~~"  ; . 우리는 그 거룩한 사람들이 언제나 건전하고 바론 판단을 망치 는 태도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자들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속한 양떼 중에서 가치가 없는 자들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악한 자들을 눈감아 주거나 잘못 이꿀린 호의로써 그들의 잘못을 덮어 주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그들을 사정없이 정죄함으로써 그들을 아껴보지 않았다. 그리고 첫째로 그들이 속이기 위하여 그릇되게 사용하고 있었던 가면을 벗겨 버렸다. 그들온 자기들이 사도들의 마음을 안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사도들은 그들이 그러한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을 때 그 속이는 허울을 쓴 그들의 허식을 드러내 보였다.

  둘째로 사도들은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영혼들을 멸망시킨 일에 대하여 그들을 심히 엄중하고 엄격하계 책망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들은 그들이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싫어지고 미워지는 자들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용납해 주면 그들온 자신들을 멸망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세째로 하나님의 진리는 영혼들을 훌륭하게 세우는 반면에 거짓 교사들은 영혼들을 멸망시키므로 이 말씀은 일반적인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즉, 만일 우리 영혼이 무참하게 끌려가서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영혼의 파멸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순전한 복음으로부터 이꿀어 내려는 자들을 극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관하여 그들이 하고 있는 말은 의식 (儀式)에 관계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들이 사람의 의와 구원을 그 요정으로 여기도록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짓 사도들은, 마치 율법이 행위에 의하여 의와 구원을 주는 것처럼, 그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5,-26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  ; 사도듣온 거짓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향하여 하려 했던 그 중상에다 이 칭찬을 맞세워 놓았다. 그리고 첫째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바 있었던 그 불일치에 대한 인상을 없애기 위하여 자기들은 일치하고 있음을 알렸다. 둘째로 그들온 바울과 바나바의 불타는 열심과 그들의 극한 대담성과 훌륭함을 근거로 그들을 칭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온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의 사역자가 가르치는 임무를 행합에 있어서 부지런하고 지칠 줄을 모르며 뿐만 아니라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죽음의 위험을 기꺼이 맞는다면 이는 뛰어난 미덕이며 가장 칭찬할 만한 일이다. 주님께서 이와 같온 실예들로써 자기 종들의 충성과 성실성을 시험하시는 것처럼 주님은 그둘이 자기 교회안에서 구별된 자들이 되도록, 말하자면, 미덕의 표에 의하여 그들이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자들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교훈에 관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가치없는 자들을 물리치는 방패처럼 자기 몸에 가진 그리스도의 표를 설교했다(갈 6 : 17). 그러나 복음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그 환경 중에서 ,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기들의 생명이 위험에 이르는 지경까지 복음을 위하여 싸워야 하는 경우는 대부분의 활기있고 맡은 일에 전력을 다하는 교사들 앞에 부 딪쳐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증인들을 기억될 만한 투쟁속으로 자주 이끌어 들이실 때마다 그둘을 위하여 눙력 (autoritatem)을 준비하고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와 동시에 자기를 위해서는 싸울 필요가 없는 때라도 피를 홀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것으로 보여질 때에는 주처없이 그렇게 하도록 하자.

 끝으로, 사도들은 단지 좋은 이유 안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용감성을 칭찬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용감하게 위험을 겪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과 광신자들, 그리고 검투사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칭찬을 받고 있는데 그들이 자신들을 위험 앞에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 여 죽음을 피하지 않았기 대문이다. 아마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고난도 당하지 않고 교회들을 소란스럽게 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줄거운 여가 중에 나타난 그 악한 자들을 간접적으로 책망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기도 했을 것이다. 이 사실온 용기를 잃지 않는 그리스도의 군병둘에게 큰 의미를 주었다.

 

"28 성령과 우리는~~~~~ 가한 줄 알았노니"  ; . 사도들과 장로둘이 성령께 연합한 자둘이 되었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독자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령께서 자기들의 지도자는 인도자시며 자기들이 편지를 쓰는 내용에 관한 결정은 성령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의미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한 다음에 사역자들을 그 다음에 두는 이 어법은 성경 가운데 너무도 많다. 백성이 하나님과 그의 종.모세를 믿었다(출 14 : 31)고 말했을 때, 마치 영광의 한 부분은 하나님께 드리고 다론 한 부분은 육을 가진 사람에게 주는 것처럼, 그들의 믿음은 여러 부분으로 찢어져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유일하신 창조자로 모실 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사역자들도 믿게 된다. 그들은 이전에 모세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멍에를 벗어 버렸다. 모세가 그들에게 주는 교훈을 받아들 이는 방법 외에 다론 방법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음이 사실이다. 그대로이다. 그리고 이 사실온 뻔뻔스럽게 믿음을 자랑하면서 교만할 뿐만 아니라 공손하지 못한 마음으로 교회의 일꾼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무례함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비록 약한 정도의 믿음이라도 사람인 자신에게 의존되도록 한다면 이는 신성을 모독하는 바론 길에서의 이탈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말씀하시는 일꾼들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자기의 ,선생님이 라고 간주하려는 자들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율 웃음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자기들이 이방인들에게 전달하는 그 명령은 자기들 스스로의 머리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단순히 성령께서 시키시는대로 움직이는 사역자들임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을 명령하고 있으며 이것을 신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갈 1 : 11)에 관하여 ...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지어낸 새로운 복음을 소개하고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맡기신 것을 전하고 있었다.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은 교회가 어떤 특별한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이 말씀으로부터 증명하려고 하고 있으니 어리석다. 그렇다. 그런데다가 그 들온 분명히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성령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다스리심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교회가 잘못을 범할 수 없음을 주장할 어떤 구실도 막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폭로하는 것을 성령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시끄럽게 자랑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리석게 ‘가한 줄·알았노니'라는 말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사도들이 성령을 떠나 어떤 것을 독자적으로 결정한다면 회의에서는 성령께서 선언하신 것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결정될 수 없다는 이 기본적 원칙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요긴한 것들 외에"  ; . 이 말씀을 구실삼아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은 마치 사람들이 양심을 묶어놓는 법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하고 의기양양 해 한다. 그들은 교회가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를 피하는 것 같은 노력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자기들이 명한 것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 가치없는 말에 대한 쉬운 설명이 있다. 왜냐하떤 ‘반드시 지켜야 한다' 는 말에는 연합을 파괴하는 위험 이외에 다른 점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말하자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은 우연 혹은 부대적인 것, 다시 말하면 본질적인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피하려는 것에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 명령이 즉시 페지된 사실로부터 더욱 분명하게 보여진다. 왜냐하떤 그 자체에 있어서 필연적인 일들에 관한 법은· 영속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란과 말다툼이 끝나자마자 이 법은 바울에 의하여 페지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바울은 깨끗지 않은 것은 없으며, 어떠한 음식,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이라도 먹을 수 있는 자유와 허락이 우리에게 있음을 가르쳤다(롬 14:14, 고전 10:25). 이에 따라 그들은 이 말씀으로부터 양심을 읽어매는 헛된 핑계를 붙잡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필연성온 사람들의 외적 행위에만 관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필연성으로부터 어떤 추문도 생겨나지 않게 하고 그들의 자유는 하나님 앞에서 본래 그대로 보존되어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 귀절로부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어떤 것 이라도 결정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추론하려는 것도 헛된 일이다. 교황온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법을 만들며 이 법으로 교회를 다스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열 가지나 스무 가지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포악스럽계 영혼들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영혼들을 괴롭히는 데 무서운 고문을 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잔인함을 변명하기 위하여 교황이 고용한 궤변가들은 사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고 있지 않는 것을 이방인들에게 금지사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것도 보태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사도들의 목적에 유의하기만 하면 이 사실온 상당히 분명해진다· 나는 사도들이 믿는 자들을 얽어매는 영구적인 법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음을 잠시 전에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들은 때가 되면 이방인 들이 유대인들에게 적응하도록 교회 중에 형제다운 화평과 일치를 증진시키기에 합당한 한 가지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면 사랑(caritas)이 중립적인 일에 있어서 우리 중에 규칙을 정하여 놓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하계 된다. 다시 말하면 그 자체에 있어서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그 몇 가지의 외적 실행은 사랑의 규범에 따라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랑이 율법의 온전함과 목적을 위한 피가 되며 하나님의 명령은 신실한 자들이 피차의 연합을 명하고 각자가 덕을 세우기 위하여 자기 이웃에게 봉사할 것을 명한다떤 여기서 사도들이 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포함되고 있음을 알지 못할 만큼 무식한 사람온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규범을 자기들의 시대에 적응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앞에서 말했던 것을 생각하자 양심에 대하여 어떠한 울무도 놓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한 헛된 예배를 소개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는 행정적인 법에 관한 것임을 나는 말했다. 그리고 성경의 어디에서나 정죄되고 있는 인간 전통에 있어서의 두가지 잘못이라도 이 사실이 교황과 그를 섬기 는자둘을 옳다고 지지해 주지는 않는다.

   회의가 성령의 계시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글자그대로의 표현에 맞지 않는 어떤 것을 명하는것온 합당 할 것이다. 이 권세는 물론 합법적이 회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굴복시키려는 명령에 있어서는 그것을 정한 회의가 가진 경건과 거룩함이 증명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더 이상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본 장의 시초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교회들의 일치를 위하여 필요한 그 시대의 형편에 따른 외적 행위에 관한 법을 제의 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계를 넘고 있지 않았다는 본 절이 충분하게 의미하고 있는 내용을 알기로 하자.

 

"30 무리를 모은 후에~~~~~~"  ;   이 편지를 읽고 또 모든 사람이 이를 듣도록 온 무리를 모으는 것은 바론 일이었다. 믿음에 관한 교훈에 있어서 어떤 논쟁이 일어나면 이에 관한 결정은 성경을 잘 알고 경험이 있는 유식한 사람둘, 특히 바르게 세워진 목사들이 이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붙잡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관심거리이므로 교사들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결정한 것을 각자 형제된 입장에서 전체 교회와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교황이 다스리는 횡포 아래서 늘 그런 일이 생기듯이 일반 백성은, 마치 돼지때인 것처럼, 일반적인 교리에 관련된 문제로부터 배제되는 것보다 거룩한 그리스도인 질서에 있어서 더욱 모순된 일도 없다. 왜냐하면 교황과 주교들은 그 백성이 우둔한 무지에 이르기 전에는 충분히 순종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묻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요점이란 성직자인 자기들의 의견에 따르기 위하여 교인들은 전적으로 무식하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이편이나 저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사람들은 보호를 받아 야 한다. 이 는 지 배 당국 (praefecturae) 이 아무런 소란이 없 이 그 말은 일 올 계속하고 한편으로 그 백성온 노예들처럼 억압을 당하지 않고 그들의 자 유가 보전되기 위해서이다.

 

"31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 그편지는 극히 짧았고 공적인 기록외에 아무 것도 부가되어 있지 않았는데 믿는 자들이 그 편지로부터 어떤 위로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 편지 속에 위로를 위한 많은 근거들이 있었음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도들이 일치하고 있었던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만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일치하지 못했던 마음들도 훌륭한 상태로 되돌아 갔기 때문이다. 모든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반대하고 있다는 거짓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이 소문은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을 요란스럽게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의심을 가지고 망설였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때를 중상의 기회로 삼았으며 다론 사람들은 호기심과 색다른 것을 줄기는 마음으로 자극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의 판단이 바울과 바나바의 교훈과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장 원하는 것, 죽 바론 믿음 안에 서서 일치된 중에 조용한 마음으로 서로 화평을 이루는 것을 얻게 되었다.

 

"32 유다와 실라도~~~~~"  ;   이 두 형제들은 말로써 그 편지에 증거를 더 보태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 이들이 보냄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도들은 그처럼 중요한 일에 관하여 그처럼 짧고 간결한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며 믿음의 신비에 관한 어떤 것을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경건하게 헌신하도록 상당히 긴 권면을 썼을 것이다. 당시에 누가는 그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아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 교회에 덕을 세웠다는 사실도 전해 주고 있다. 그는 마치 그들이 급한 상황에 있어서 자기들의 임무를 신실하게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가르치고 권면함으로써 그 교회를 위하여 유용한 봉사를 했다고 말한 것과 같다. 누가는 그들이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교회를 격려했다고 말한 사실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별된 기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은혜의 분량안에 머물러 있어야한다(고전7:20. 어~ 4:1)고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갈이 아무라도 자기의 한계를 경솔하게 넘어서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떤 안된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일은 특별한 일이라는 누가의 말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가르칠 만한 능력도 없이 그저 야심에 의해서나 분별없는 열심이나 다른 어떤 어리석은 욕심에 의하여 그 위치에 서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계 하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선지자라"  ; 이 ‘선지자’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갖겠지만 본 절에서는 미래 사건을 예고하는 선견자로는 보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떤 이 귀절은 다론 상황이 취급되고 있는 도중에 매우 어울리지 않게 삽입되고 있기 때문이댜 누가는 유다와 실라가 하나님의 신비를 잘 이해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받아 하나님에 관하여 설명하는 데 뛰어났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3절에서, 예언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 예언을 다른 모든 은사들보다 강조하면서도 미래의 것은 말하거나 알려 주는 것을 중점적으로 말하지 않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위로함으로써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결과를 내세워 이를 권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방법으로 누가는 마치 권면이 선지자들이 가졌던 직무의 주요한 의무였던 것처럼, 이 권면하는 일을 선지자들의 의무로 정하고 있다.

 

"33-35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받고"  ;  그들이 출발했을 때 친구들 간에 보통 그렇게 하듯이 그곳의 형제들은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그들이 평안하기를 빌었다. 그러나 이 귀절에는 제유(提輸)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즉시  "실라는 저희와 함께 유하기를 작정하고"(駐15)라고 고쳐 쓴 기록이 붙여져 있다. 그러나 누가가 이 두 사람을 함께 결합시켜 말했을 때 그는 그들이 되돌아 올 것을 생각하기 전에 교회는 평온해졌음을 가르쳐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머물고 있었던 동안 그들은 가르치는 데 열중하여 있었고 계속하여 이 일에 힘쓰고 있었으며 많은 다른 사람들도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을보면 그들은 모두가 질투하지 않고 같은 일에 헌신하고 있었으며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그들의 노력을 공적으로 결합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다수한 다른 사람들'이란 말은 일부러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이후에 많은 교사들이 계속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보살펴주는 자들이 없었다고 생각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은 곧 다시 홍왕하게 되었고 최근에 사단이 자기 사람들을 통하여 가장 비참하게 제거하려 했던 그 축복은 교회 안에서 다시 흥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