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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행16:18 상)

1. 성경 (행16:16 ~ 25)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6)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7)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8)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19)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0)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1)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2)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3)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24)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6절"  ; 누가는 교회가 불어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 사실을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문맥을 살펴볼 때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거나 최소한 교회가 상당한 숫자로 불어났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바울이 기도 시간에 회중을 자꾸 모이게 했던 일은 헛수고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진전이 사단에 의하여 중단되었음을 보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도들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다음에 결국에는 그 성에서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단이 무엇을 피했든간에 본 장의 마지막에서 보면 그둘이 떠나기 전에 상당한 수가 된 교회가 함께 보였음을 알 수가 있다.

 

"점(pythonis)하는 귀신 들린~~~~"  ;  시인들은 파이돈(Python)이란 이름을 가진 뱀이 아폴로(Phoehi)의 화살에 맞아 죽음을 당했다는 우화를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로부터 또 다론 이야기가 생겼으니 귀신에 흘린 사람들은 파이돈의 신이 그 안에 가득한 자들이며 신들린 여자들(Phoehades)은 아폴로에게 경의를 표하여 그렇게 호칭되었다고 시인들은 말하고 있다‘  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견해를 따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평법한 사람들의 과오룔 지목하고 있으며 무엇이 그 소녀로 하여금 예언을 할 수 있도록 저를 감동시켰는지를 지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귀는 속이기 위하여 아폴로처럼 가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모든 우상과 계략은 그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소년를· 충동하여 소리를 질렀던 그 마귀가 그렇게 훌륭한 칭찬을 한 장본인이었다는사실은 이상하계 여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소녀는 마귀의 시킴을 따라서 바울과 실라와 다른 사람들을 칭찬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의 아비'인데 어떻게 하여 그에게서 진실이 나올 수 있었는가?  둘째로 그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고 있는 그리 스도의 종들에게 스스로 양보하는 일은 어떻게 있을 수 있었는가? 자기가 철천지 원수로 되어 있는 복음을 듣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놓는 일온 어떻게 그의 본성과 일치가 될 수 있는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도록 하는 일보다 그에게 특유한 일도 없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는 지금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롤 기울이게 하고 있다. 무엇이 그러한 급한 변화를 일으켰으며 전에는 없었던 변천을 가져다 주고 있는가? 그러나 마귀는 그렇게 함에 있어서 사실상 거짓의 아비'이다. 그는 진실을 거짓되게 나타냄으로써 자신을 감추고 있다. 그러므로 술책과 교활함으로써 마귀는 본래 그의 성질과는 다른 역할을 했다. 은밀하계 침투함으로써 더욱 손상을 끼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치 그는 언제나 공공연하게 거짓만 말하고 속임수는 전혀 쓰지 않는 것처럼, ‘거짓의 아비'라는 그의 칭호를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그의 간접적이고 교활한 간계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실을 구실로 삼는 것을 대항함으로써 그가 공급한 겉모습으로 우리를 속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그가 매일 유사한 속임수를 쓰고 있음을 알고 있다. 교황의 칭호 역시 이보다 더 칭찬할 만한 그 무엇이 있는가? 교황은 자기의 칭호로써 자기가 그리스도의 적이 아니라 대리자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그가 하고 있는 그 엄숙한 서두의 말보다 더욱 칭찬할 만한 다론 어떤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위장을 한 사단의 일꾼들이 그처럼 진실을 주장할 경우 에 우리는 그것이 치명적인 전염병에 의하여 감염되고 변질된 것임을 알고 있다. 때로는 사단이 공공연한 방법으로 공격을 자행하고 때로는 거짓말을하면서 실제로 살살 기어드는 복음을 반대하는 두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는 거짓말을 하는 데에도 두 가지 방법을 갖고 있다. 거짓 교리와 엄청난 미신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복시키거나, 마치 땅 속에 있는 통로 ` 로 기어드는 것처럼, 자기가 말씀에 우호적인 것같이 민첩하계 가장을 한다.

   그렇다, '더욱 심한 경우가 있다. 그가 자신을 빛의 천사로 변모시킬 때 보다 더욱 손상을 주는 원수가 될 때도 없다. 이제 우리는 그가 바울과 그와 함께한 종들을 추켜 올렸던 그처럼 훌륭한 칭찬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가 복음을 향하여 공개적인 전쟁을 하는 것이 그렇게 이롭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은밀한 계략으로 복음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러고 했던 것이다. 만일 바울이 마귀의 그 중거에 동의했더라면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와 사단의 조롱사이에는 어떤 다른 점이란 없었을 것이다. 복음의 광채는 거짓의 어두움 속에 갇혀서 그 빛은 꺼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단이 참된 예언을 하여 불행한 사람들을 속이고 매혹시킬 만큼 많은 자유를 갖도록 허락하신 이유에 대한의문이 생길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마귀의 총명에 관하여 일으키는 소란스러운 논쟁은 그만두고 마귀가 은밀한 것이나 장래일에 관한 예언을 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의한 것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마귀의 속임수에 대하여 경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부여주고 계신다.

  왜냐하면 예언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에 사람들 가운데 예언이 자주 임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 하지만 않으면 그들의 마음은 반드시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으로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 다. 열렬하게 거짓을 원하기 때문에 스스로 진리에 순종하기보다는 속이기를 택하며, 감사를 알지 못하는 세상 위에 형벌을 내리시려는 경우를 제외하면 하나님은 그처럼 많은 자유를 사단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솜씨(莊9) 가운데서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그 하나님께 사람들은 영광을 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전리를 억압하는 사실에 관하여 바울이 로마서 1장 21절에서 불만스럽게 말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 어디에나 퍼져 있는 악이다. 사단이 자유로운 지배권을 받아서 좋지 못한 태도로 하나님의 빛으로부터 돌아서는 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갖가지 행동을 다하는 것은 그처럼 큰 배온행위에 대한 공평한 보옹이다. 그러므로 사단이 발하는 예언을 읽을 때면 하나님의 공평한 보응을 생각하도록 하자.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만을 자기들의 선생으로 세웠던 불경스러운 이방 사람들(gentibus)이 하나님의 빛을 경멸한 데 대하여 그처럼 엄중하게 형벌을 내리셨다면 율법과 복음 안에서 분명하게 받은 구원에 관한 순전한 교훈을 한사코 고의적으로 짓누르는 자들은 얼마나 더 무서운 형벌은 받아야 마땅하겠는가?

   그러므로 사단이 수 많은 세대를 거쳐오면서 그의 계략으로 세상을 거침없이 속여온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알려진 복음의 진리가 악하게 무시를 당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 예언이 그처럼 퍼질 때 이 예언에 의하여 위험을 당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리가 어두워지게 될 때 악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한 사람들까지도 사단의 울무에 걸려들게 될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 말에 대한 대답온 쉽다. 사단이 모든 사람들을 차별없이 잡으려고 울무를 놓고 있지만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전되어 다론 사람들과 함께 붙잡히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더욱 분명한 구분을 가르치고 있다  이 방법으로 주님은 자기 백성의 믿음과 경건올 시험하신다.  그러나 버림을 당한 자들은 소경되게 하셔서 그들의 당연한 응보대로 멸망을 당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단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싫어하는 자들의 경우에 (살후 2 : 11 이하)만 그의 그릇된 것으로 성공을 거두도록 허락받고 있음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온 ‘사단이 그처럼 많고 다양한 술책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 때 우리는 누구에게 호소할 것인가? 그러므로 신앙의 열심을 가짐으로씨 우리들에게 멸망을 불러오느니보다는 모든 신앙을 버리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더 낫다’는 핑계를 하면서 모든 교리를 멸시하는 데 대한 구실을 찾는 자들의 악과 불경건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핑계 속에 나타난 그 두려움을 물리치고자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짐승들처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도 없이 무사태평하게 떠돌아 다니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어떤 종교도 자기들을 붙잡아 두지 못하게 하려고 그들은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나는 사단이 헤아릴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데 있어서 악한 만큼이나 매사에 간교하며, 또 '모든 악은 주님의 이름으로 부터 생긴다' 라고 교황이 실제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격언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사실적이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겸손한 자들의 교사이시며(시 25 : 9와 바교)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가까이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바울온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 (엡 6 : 17)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복음의 신앙 위에 바른 터를 잡을 사람들은 사람들의 궤술에 넘어가지 않을 것율(엡 4 : 14) 중거하고 있고 베드로는 성경이 "어두운 데 비치는 등불,,(밴후 1 : 19)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 : 7)라는 그리스도의 너그러운 부르심은 우리에게 실망을 줄 수가 없기 때문에 사단이 무엇을 하려고 하든지 거짓 선지자들이 어떠한 어두움을 흩으려고 하든지 우리는 지혜와 총명의 신에 의하여 버림을 당할까봐 두려워 해서도 안된다. 이 지혜와 총명의 신은 자기의 권세로 사단에게 고삐를 매어 어거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통하여 우리가 그를 이길 수 있게 해 주신다.

 

"18 바울이 심히 괴로와 하여" ;  바울이 처음에는 그 소녀의 고함소리에 유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고함소리는 별스럽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그 소리는 처절로 멈추어지기를 바라고 있었기 대문이다. 그러나 계속적인 반복은 마침내 그를 성가시게 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잠잠히 참음으로써 사단은 더욱 무례하게 되는데 이를 내버려 두지 않는 한 그는 더 이상 자기의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하고 있는지롤 스스로 분명히 알게 되기까지는 사단의 그 행위를 경솔하게 금지시키지 않아야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가 아니고서는 바울이 내리는 저주가 헛되고 효력을 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매우 성급하게 그 더러운 귀신을 처치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가 너무 조급하게 행동하고 있었다고 그를 감히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바울이 그 귀신의 역사를 급히 막아버리지 않았더라면 사단의 교활함이 우세하게 나타나기 전에는 그가 귀찮거나 분노롤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성령께서 시키심이 없이 ... 그 무엇도 해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가 하늘로부 터의 능력을 덧입을 때에만 싸움에 임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성경의 다른 귀절에서 주장하고 있는 말씀을 생각하면 그가 모순을 일으키는 것 같이 보여진다. 그는 어떤 방법에 의해서라도,.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과 고의적으로 자기에게 악평을 해오는 사람들에 의해서라도 복음이 전전되는 것을 보면 기뻐한다(빌 1 : 18)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나는 대답한다. 냐하면 당시에 모든 사람들은 그 소녀의 악한 영이 바울과 충돌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복음에 대한 교훈을 믿을 수 없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순전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다론 경우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이름이 그럴 만한 가치없는 사람들에 의하여 찬양을 받도록 히락하시는 (눅4:36) 반면에 악령이 잠잠할것도명령하셨던 것이다(막1:25).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 우리는 바울이 한 말의 형식울 주시해야 하겠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알려지게 하고, 자신은 사단의 거짓된 속임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하려는 것이 바울이 행한 기적의 두 가지 용도였던 것처럼, 권세와 능력을 그리스도께만 돌려 드리면서 자신이 그의 사역자임을 선언하고, 그리스도를 그 악한 영에게 공공연하계 맞서시계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악한 영에게 공공연하게 맞세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악령은 서로 원수가 되는 것을 이 싸움으로 부터 누구나 알게 하려고 했다. 그처럼 큰 속임수에 넘어간 많은 사람들이 그것과 철저하게 관계를 끊고 건전한 믿음에 순응하기 위하여 각성하는 것은 은혜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19 종의 주인들은~~~~~~ 보고"   ; 잠시 전애 그 소너의 입을 통하여 아첨과 유혹의 말로 바울을 붙잡으려 했던 그 마귀가 지금은 바울을 죽음으로 몰어 가고자 그 소녀의 주인들을 격노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분명히 새로운 역할을 함으로써 마귀는 비극을 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까지 했던 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열렬했던 그 열정적인 열심이 태풍같은 핍박을· 일으켰지만 그 때문에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간주해서는· 안되며 바울 자신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하지 않았다. 왜냐하떤 그는 어떤 힘에 의하여 그· 소녀에게서 마귀가 떠나가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어떤 불행한 결과가 생긴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시행된 것이라면 바르게 시행된 일은 비난하지 말아야 함을 우리에게 교훈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자기 백성의 참을성을 시험하고 계시며 마침내 더욱 기쁘고 우호적인 결과는 모든 슬픔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그 종의 주인들에 관하여 누가는 그들이 바울을 향하여 그처럼 분노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불명예스러운 이득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복음과 그 사역자들을 미워하계 되었던 것은· 오직 탐욕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온 공중의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관례법이 침해를 당했으며 평화가 교란되었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기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고 당국자들에제 호소를 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뻔뻔스럽고 추악하게 행동하떤서도 항상 자기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어떤 다른 이유들을 생각해낸다、 그렇다. 그들의 악한 탐욕이 분명하게 보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면피하게도 자기들의 더러운 행위를 덮어 가리는 어떤 것을 항상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자기들이 만든 법을 지키기에 극히 격렬한 열심자들인 교황과· 그를 섬기는 모든 자들은 자기들의 이득과 지배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자기들은 경건의 동기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고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대로 온갖 신성한 것으로 맹세하도록 내버려 두자.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온 그들의 열심이 차가운 부엌으로부터 불붙게 되었고 야심에 의하여 부채질 된 것을 폭로(注10)한다. 그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배고폰 개들이거나 잔인성만을 보여주는 사 나운 사자들이기 때문이다 .

 

"20 이 사람들이~~~~~ 우리 성을~~~~~. 요란케 하여."  ;  이러한 고소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당한 상황을 더욱 나쁘게 하기 위하여 교묘하계 조작되었다. 그들온 한편으로 로마인들이라는 칭호를 주장했는데 당국자들에게는 이 칭호보다 더욱 우호적인 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당시에 나쁜 평판을 가졌던 유대인들이라는 이름을 부름으로써 사도들을 향하여 악한 감정을 갖게 했다. 종교에 관한 한 로마인들은 유대인들만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민족들과 크게 친근성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헬라에서나 아시아 그리고 다른 곳, 우상과 미신이 성행하고 있었던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들의 신성한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단은 여러가지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모순이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로마인들온 세계에 있는 오직 한 종교만을 미운 것으로 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울과 그의 동행자들이 공중의 평화를 교란시켰다 고 주장했으므로, 세번째로는 그들이 치안방해의 죄를 지었다는 협의를 만들어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동일한 터무니없는 주장에 의하여 치욕과 악평을 당하셨다(눅 23 : 5). 지금 교황과 그를 섭기는 사람들은-우리들의 가르침이 마침내 모든 것을 무서운 혼란으로 꿀내게 하려고 소란을 일으키 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목걱하고 있지 않다고 큰 소리를 치므로써 우리가 미움을받게 하는그럴 듯한 방법을갖고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바 울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야 하며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 원수들의 악의를 드러내시고 그들의 건방진 행위를 반박하실 때까지 이 거짓되고 악한 비난 을 물리치는 데 용기를 가져야 한다.

 

"21~~~~~~~못할 풍속을~~~~~~" ;  그들은 관례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에 관하여 아무런 반대도 없게 하려고했다. 이는 마치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총회에서 명한 것이다.' '그것에 대한 정당한 의문율 갖기에논 하나의 견해란 용납될 수가 없다.' '이는 일천년(saeculorum) 이상동안 반대없이 확립되어 왔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의 요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두지 아니하려고 하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의 의견들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온 하나님의 법을 위해서는 가장 낮은 위치조차도 양보해 주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는 본 질로부터 이 관계들이 얼마나 힘을 가져야 하는지 결정하게 될 것이다·

  로마의 법온 훌륭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론 어떤 것에 의존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일에 있어서 사람은 질서를 지켜 하나님의 권세만이 우월하게 하고 이 세상에 뛰어난 모든 것을 자기에게 굴복시키도록 항상 유의하지 않으떤 안된다.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 몇 사람 안되는 하찮온 사람들, 다시 말하면 욕심이 많기로 잘 알려져 있었던 돈벌이 사기꾼들이 소란을 일으키자마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 들었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는데 그는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역하기 위하여 움직일 때 그들의 행동은 얼마나 억재하기 어 려운가에 관하여 경고하고 있다. 진실로 어리석음과 변덕스러움은 어떤 사람에게나 있으나 거의 영구적인 결점이다. 그러나 다른 일에 있어서는 정숙하고 잠잠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가 처항을 당할 경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급히 격렬하계 되어 가장 하찮은 자들과 한 패가되고 연합하게 하는 면에 있어서 사단의 뛰어난 능력은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재판관들의 바른 의무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들에게 온건성이란 전혀 없었음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세를 가지고 그 백성의 사나움을 조사하여 그들의 폭행을 철처하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재판관들은 죄없는 자들올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혼란(tumultuose)중에 사도들을 붙들어 심문해 보지도 않고 옷을 벗긴 다음에 벗은 몸에 매질을 하도록 명령했다. 정녕 사람들의 패역은 통탄할 만하다. 공평하고 신성한 곳이 되어야 할 세상의 모든 재판정이, 이 패역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을 향하여 불경스럽고 모독적인 공격을 가하므로, 믿을 수 없는 곳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단 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힌 이유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감옥은 감금의 장소로서 존재해 왔다. 그들은죄인들을더욱 심문하기까지 이런 종류의 제재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간음자들이나 강도들이나 모든 다른 범죄자들보다 더욱 잔인하게 취급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이 사실을 볼 때 사단의 능력은 복음을 박해함에 있어서, 재판상의 조사를 할 때, 그 어떤 유례를 생각하지 말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음을 더욱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진리를 옹호함에 있어서 경건한 사람들이 당하는 형편이 불경건한 자들의 범죄에 있어서의 그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그 형편이 잘 어울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하는 모든 손상 중에서도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사자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럽게 승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들은 모욕과 치욕을 견디어 낸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흔적'이 이 땅의 실속없고 시들어가는 자랑거리보다 하늘나라에서 더욱 값지고 공덕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더욱 불공평하고 능욕적으로 고동을 준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더욱 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세속의 저작가들이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를 심히 존경하여 재판석이나 판정보다는 그가 갇혔던 감옥을 더 좋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여 얼마나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그의 대의(大義)는 충성스러운 자들이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마다 자주 심문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공정하지 않은 재판관들에 의하여 바울과 실라가 손상을 입도록 허락하셨다 하더라도 주님은 그들이 결과적으로 더욱 더 큰 영광을 얻게 되지 못할 어떤 치욕으로 낙인찍히게 내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 고난을 당해야 하는 모든 핍박을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남은 것(골 I : 24)이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되신 분이 십자가를, 그것이 저주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개선의 병거가 되게 하셨던 것처럼, 사단과 모든 불경건자들에 대한 승리가 있도록 자기 백성이 당한 감옥생활과 교수대 (patihula)를 영 광스럽게 하실 것 이 다.

 

"옷을 찢어 벗기고~~~~~~"   ; 벌게이트 성경이 이 귀절을 바르게 번역했으므로 "상관들이 자기들의 옷을 찢었다"고 바꾸어 쓴 에타스드스의 번역은 옳지 않다. 누가는 재판상의 심문에 있어서 법적인 절차가 지켜지지 않고 거룩한 사람들은 혼란 중에 학대를 당하여 그들이 난폭하계 손질을 당하였기 때문에 옷이 벗겨졌음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론 한편으로 재판관들이 시장에서 공공연하게 자기들의 옷을 찢는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습상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특별히 그들이 신중하게 관심을 갖지도 않은 알지도 못하는 종교에 관하여 심문을 하고 있었으니 그럴 이유는 더욱 없게 된다. 나는 확정적인 어떤 것에 관하여 더욱 논쟁하고 싶지 않다. 

 

"23 든든히 지키라"  ;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가 무사하게 지켜지도록 극히 임중한 지시를 했을 때 그들온 사건에 관하여 더욱 심문을 하기 위하여 그렇게 했다. 그들은 그 소망을 전정시킬 목적으로 사도들을 매로 쳤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온 극히 맹목저인 분노로 복음의 일꾼들을 향하여 격노했기 대문에 세상온 그 가혹함에 있어서 어떤 정당한 한계를 지키지 않는다고 내가 잠시 전에 말한 것은 사실 그대로이다. 이 사실온 별 문제로 하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오래 전부터 당해왔던 그 사나운 취급방법을 실예로써 안다는 것은 극히 유여하기(駐11) 때문에 누가가 그들의 용기와 인내에 관하여 즉시 기록하고 있는 것을 안다는 것 역지 유용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발이 착고에 채웠어도 이들은· 기도 중에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누가는 말해주고 있는데 이 사실온 그들이 당한 학대와 그들의 몸을 피로 물들인 상처나 깊은 감옥의 악취며 그들을 위협했던 죽음에 대한 위험도 간절하고 줄거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막을 수 없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우리는 기도와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바르게 기도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규범을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않된다.

 우리가 필요를 느끼거나 어려움을 앎으로써 기도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간다. 그러므로 이 의욕은 대개 슬픔과 정신적인 근심과 연결되지만 믿는자들은 자기의 감정을 절제하여야 하며 하나님을 대항하여 부르짖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기도의 바른 방법은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감정을 연합시킨다. 그두가지 감정은 우리를 압도하는 궁핍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생기는 근심과 숟픔이 그 하나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순종과 항구가 가까운 것을 보여 줌으로써 파선 중에서도 우리에게 새 힘을 주는 희망으로부터 얻게 되는 줄거움이 그 다른 하나이다. 바울은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했을 때 빌립보서 4장 6절에 서 우리를 위하여 그와 같은 형식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사건에 있어서는 그 형편을 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매맞은 상처의 고통 은 심하고 감옥은 진저리나는 곳이며 부딪친 위험은 컸지만 바울과 실라 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지속걱으로 용기를 내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와 똑같이 누가는 앞에 서 사도들이 ‘‘주님 의 이 름을 위 하여 능욕받는 일 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보고했다(5 : 41).

 

"25 듣더라."  ;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기도했을 때 음성을 높였던 것은 자 기들과 함께 갇혀 있었던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양심의 확신을 증거하기 위 한 목져이었음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전에도 늘 그렇게 했듯이 마음 속으로 조용히 탄식을 하면서 기도하거나 속삭임으로 주님께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이 음성을 높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 온 겉치레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선한 대의 (大義)에 의존하여 · 용감하계 하나님께로 피하여 가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고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에는 신앙의 고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도는 공중 앞에 서 모범 을 보이 는 효과를 갖게 되 었 고 최 수들은 말할 것 도 없고 그 간 수Unsularit")의 식구들이 기적에 주의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