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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

1. 성경 (행18:1 ~1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1)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2)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3)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4)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5)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6)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7)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8)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9)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0)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1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절" ;  이 이야기는 고린도 교회의 시작을 내포하고 있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실로 기억할만한 말씀이다. 한편으로 그교회가 많은 수의 사람들과 그들이 받았던 그 특별한 은사들로 인하여 유명했던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다론 한편으로 이 교회는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과오들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는 여기서 바울이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꿀어 오는 데 그 수고가 얼마냐 컸으며 위험과 곤란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고린도라는 도시가 얼마나 많은 인구를 가졌으며, 교역의 중심지로서 그 명성 때문에 얼마나 부유했으며, 이 도시가 얼마나 쾌락에 빠져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사실상 ”고린도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라는 옛 격언은 이 도시가 낭비가 심했으며 방탕이 만연되고 있음을 중거하고 있다. 바울이 이 도시로 들어갈 때 그의 마음 속에 그는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었는지 나는 묻고 싶다. 그는 부와 권력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웅변과 재기를 갖고 있지 않는 이름없는 번번치 않은 사람이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복음을 전파하려는 그의 확신과 열심을 삼키지 않았던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능력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은 어떤 인간적 방법이 아니라 하늘의 방법으로 자기의 대리자를 통하여 역사하고 계셨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고란도인들은 그의 사도됨을… .. 인친" 자들이라고(고전 9 : 2) 그가 자랑스럽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처럼 겸손하고 멸시를 당하면서 하는 사역 중에 더욱 분명하게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소경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사람들의 조종을 받으면서 괴로움을 당했을 때 굽힘이 없는 견실함에 대한 확실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교만한 자들에게 그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했다. 그러나 누가가 그의 개인적인 형편을 순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형편을 눈여겨 보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2 아굴라라 하는~~~~ 유대인 하나를."  ;  바울이 두 곳으로부터 쫓겨난 아굴라를 제외하고 고린도에서 대접을 해주는 사람을 하나도 얻지 못한 것은 그에게 심한 시련이었다. 아굴라는 본도에서 출생했으나 자기의 본토를 떠나 로마에서 살기 위하여 바다를 건넜었다. 그는 굴라우디오 가이사의 칙령에 의하여 그곳에서 다시 떠나야 했다. 내가 말한대로 이 도시가 광대하고 극히 부요하고 환경은 쾌적하며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바울온 자기의 본토와 외국 땅으로부터 쫓겨난 사람 외에는 적합한 주인을 찾지 못했다. 이 어설픈 시초와 그가 설교를 하자마자 나타난 그 큰 성공을 비교 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능력은 더욱 분명하게 보여진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특별한 목적에 의하여 육적이고 적대적이며 불길하게 보이는 것들을 자신에게 영광이 되고 경건한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것으로 바꾸어 주신 사실도 보게 된다. 육적으로 이해할 때 추방보다 더 비참한 것도 없다. 그러나 아굴라로서는 로마에서나 자기 나라에서 모든 높은 행정관의 자리에 앉는 것보다 바울의 동행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일이었나. 그러므로 아굴라가 당하고 있었던 그 행운을 위한 불행은 때로 주님께서 우리를 심히 사랑하시는 것보다 심하게 고통을 주실 때, 그리고 우리를 하늘의 평화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방랑의 곤란을 겪게 하실 때 우리의 행복과 이익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계심을 말해 준다.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  당시에 유대 민족은 극히 좋지 못한 환경 중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 대부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라나면서 습득한 그 신앙이 가이사의 포악을 대항하여 이겼던 사실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빛을 발하고 계셨을 때 그에게로 돌아오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자신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그들이 더욱 자진하여, 도리어 더욱 열렬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시려고 일부러 그들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리저리로 쫓겨 다니도록 내버려 두셨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게 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당하는 불행에 의하여 우둔하계 된다. 아굴라와 그의 아내와 같은 사람들의 수는 많지 않은데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 아래서 유순항을 증명해 보였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면 그들온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Christiani nominis) 미움을 받고 추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재난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갖고 있었던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3 업이 같으므로~~~~~"  ; 이 귀절은 바울이 고린도에 오기 전에 친히 손으로 일을 했으며 그가 일한 것은 일하기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육체적인 일을 하여 자신의 생활비를 얻고자함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가 어디에서 이 기술을 처음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하고 있는 증언에 의하면 그는 고린도에서 많은 일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자신이 손으로 일한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거짓 사도들이 간교하게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모범이 되지 못하는 교훈을 베풀고 있었으므로 이 거룩한 사람은 그들에게 양보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욕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모범적 으로 손으로 수고했다는 것이다(고전 4:12, 9:12,15).

 이 귀절로부터 우리는그가 어디로 가든지 쉴 사이 없이 가르치는 일로 바쁜 중에서도 생활비롤 얻기 위하여 그의 기술을 촬용하고 있었음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크리소스톰이 바울은 구두만드는 사람이었다고 가르쳤을 때 그는 누가가 말하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론 것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에 사람둘은 가죽으로 장막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 어떤 독자들이 하나의 평범한 문장의 약점을 보충하려고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라틴 어 사본들(許2) 속에 공통적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개했다’는 말을 슬그머니 삽입시킨 것온 이상하다. 누가는 바울이 유대인들과 논쟁을 했으며 실라와 디모데가 도착 한 후에 그는 더욱 공공연하계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기 지작했다는 이 두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교훈에 대한 요점을 생략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처음부터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증을 위한 다론 방법이 그에게 나타나지 않은 것온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설득시키다'라는 의미인 '페이데인'을 ‘조금씩 소개하다’ 라는 의미 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내 의견으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냉담하고 온전하지 않은 마음으로 논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바울은 부패되고 못쓰게 된 사람의 본성과 은혜의 필연성, 약속된 구원자, 그리고 구원을 얻는 방법에 관하여 말 했음을 누가가 의미하고 있기 때문니다.

 둘째로 바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기 위하여 ‘정신적으로(spiritu) 붙잡혀 있었다'고 누가가 말 했을때 이 말씀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더욱 거침없이 그리고 공개적으로 전하기 위한 더욱 더 큰 열심에 이끌려 갔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가르침을 형편에 맞도록 조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적당하게 하는 것은 오늘에도 유익한 것 이므로 신실한 교사들은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숙고하는 것은 옳다. 이는 때에 맞지 않고 혼란된 이론이 가르침 그 자체의 진전을 방해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바울이 충분히 열렬한 중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새로운 도움을 얻고 더욱 담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모순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동료들에 대한 존중히 여기는 마음과 확신 때문에 용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이 협력자들은, 말하자면, 하늘로부터 자기에게 보내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신적인 붙잡힘 '은 아볼로의 여자 사제들(Pheobades)과 신들린 사람들이 정신없이 소리지르는 데 도취되는 난폭한 이른 바, 외부로부터의 쾌락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정상적인 감동을 의미한다. 이 감동은 바울안에서 힘이 있었고 열심도 더하여 졌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능력에 의해 이끌려 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의 의지를 성령의 인도를 따랐던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라는 바울의 중거를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 그가 유대인들에게 구원자의 직임에 관하여 철처히 가르친 다음에 율법과 선지자들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한 모든 것이 이 예수님께 바르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증거로써 그는 기대되었던 분이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의 단순한 주장만을 내세우지 않고, 마치 어떤 엄숙한 증언을 하는 것처럼,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폐허가 된 세상을 생명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실 그리스도시라는 그 의 요점을 설명해 갔다. 

 

"6 저희가 대적하여"  ;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명백하게 전파하기 전까지 참으면서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파하는 순간 그들의 격노는 실제로 폭발되었다. 우리는 저희가 대적하기 시작하여 즉시 훼방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이 진리를 대적하는 데 자신을 방임하게 될 때 마귀는 점차 그들에게 더 큰 분노의 불을 붙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어떠한 부패된 열정도 우리를 충동하지 못하도록 엄중하게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별히 바울의 입을 통하여 성령께서 말씀하신 모든 반역자들을 향한 그 두려운 심판에 관하여 듣고 마음 속에 두려움을 갖자.

 왜냐하면 바울이 그의 옷을 떨어버림으로써 보여주었던 저주에 관한 행동은 인간적인 혹은 그의 개인적인 분노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심령에 계신 하나님에 의하여 격렬하게 된 열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하나니은  말씀을 대적하는자들이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형벌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바울을 움직여 자기가 내릴 보응에 대한 포고자가 되게 하셨다. 제13장 51절에서 저주에 관한 이 행동에 대하여 약간 설명했으므로 독자들은 그 설명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것의 요점은 이렇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범하는 어떤 죄에 의해서 보다 자기의 말씀을 경멸하는 행위에 의하여 더욱 심상치 않게 분노하시며 사람들은 모든 병페에 대한 유일한 구제책인 말씀을 발 밑에 밟고 이를 멀리하게 될 때 반드시 멸망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역이 하나님께는 참으실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처럼 이 행위를 보는 우리는 마음에 심한 슬품을 느껴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말하자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고, 이른바, 그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무장을 갖출 때 우리는, 마치 하늘의 나팔이 소환하는 것처럼, 이 전쟁을 위하여 소집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경건자들이 실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훼방하는 정도까지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비웃는데도 우리가 그들을 향하여 손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너희 피가"  ;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벌을 선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배척하고 생명의 불빛을 끄려고 한 후에 그들이 받아야 할 책망의 어느 부분도 다론 누구에게 전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당할 멸망에 대한 이유를 갖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들이 형벌을 당하게 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바울이 자기는 깨끗하니라’고 말함에 있어서 자기의 의무를 이행했음을 중거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기의 모든 일꾼들에게 주시는 에스겔의 기록(겔 3 : 18) 중에 있는 "악인…깨우치지…아니하면…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라고 경고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들의 지각을 되찾지 못한 것은 바울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잘못으로부터 자신있게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선생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의 피에 대한 죄의식을 갖지 않고자 한다면, 방황하는 자들은 바론 길로 인도하고 알지 못하여 멸망하는 자가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도록 이 말씀으로 경고를 받아야 한다.

 

"나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 ;  만일 형편이 달라서 유대인들이 아무리 가르침을 잘 받았다 하더라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가르치는 데 그의 수고를 바치게 되어 있었다. 이방인들을 위하여 그는 사도와 일꾼으로 세우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자기가 그 완고한 유대인들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실행하고 있었던 가르침의 방법은 유대인들로부터 시작하여 공통된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그들과 연합시켜 차별없이 이들로써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성공의 희망이 없어졌을 때 이방인들에 대한 성공의 가망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유업이 이방인들에게 옮겨지기 위하여 그들온 이를 빼앗기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두려움에 잡히고 이방인들이 은혜를 받고 있음에 당황하여 그들이 바른 정산을 되찾게 될 뿐만 아니라 이 방인들에 의한 경쟁의식이 그들로 히여금 회개하도록 그들을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정할 수 없는 자들이므로 그들을 수치스럽계 하는 한 가지 목적은 그들을 절망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7 거기서 옮겨~~~~~들어가니"  ;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의 생활에 싫중이 나서 그들과 함께 했던 숙소를 옮간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갖기위해서였다. 왜냐하면누가가 기록한 이 유스도는유대인이라기 보다는 이방인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집이 ‘회당옆’이라는 사실이 그 추측을 틀린 것으로 단정하지는 않는다. 유대인들은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도시의 어떤 정해전 지역이 그들의 거주를 위하여 할당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바울은 회당에 가까운 집을 선댁 함에 있어서 상당히 신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대인들을 더욱 용이하게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유스도는 하나님을 공경했다는 그에 관한 기록은 이 견해를 확증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중에 건전한 신앙이 그만큼 왕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는 항상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공헌하고 있었으므로 이 경건의 마음은 그 민족 전체속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 중에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맞서는 이 괄목할 만한 증거는 유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나는 누가가 잠시 후에 언급하고 있는 고린도인들 역시 이방인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서 바울의 사역이 전혀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도록 누가는 그들 중에서 믿게된 두 사람, 그리스보와 소스데네의 이름을 적고 있다. 이들에 관해서는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가 전하는 문안에 있어서 바울은 소스데네를 자기의 동료로서 자기에게 연합시키고 있으며 후에 그는 그리스보가 자기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다(1 : 14)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회당장'을 혼자서 회당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의미로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스데네 역시 참시 후에 같은 칭호로 불려지고 있으나 그 주요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9. 주께서~~~~~~말씀하시되"  ;. 그의 가르침에 대한 성공은 그 일을 계속하도목 바울을 격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몇 사람들을 구원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강하게 하기 위 하여 하늘로부터 의 말씀이 부가되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큰 싸움이 그를 맞서고 있었고 그는 여러가지로 가혹하게 괴로움을 겪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떤 주님은 자기의 말씀을 함부로 주시지 않으며 바울이 환상을 보았던 것은 그가 매일 갖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꼭 그렇게 하셔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리고 이 상황온 그 거룩한 사람이 큰 어려움 아래 눌리고 있었으며 만일 그가 새로운 도움으로 격려와 새롭게 해주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 큰 어려움 아래서· 고생 할 뿐만 아니라 거의 기진상태에 임하게 되었을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울이 자기가 고린도에 갔을 때 멸시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고전 2 : 3)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진실로 나의 견해는, 바울이 전에 받아서 지금 가지고 있는 성령에 의한 그 놀라운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민수기 12장 6절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환상을 꿈과 구별하고 있으므로 누가는 ‘환상’이란 말로 바울이 무아경에 빠졌을 때 하나의 명확한 형체 (speciem) 가 그에게 나타나셨고 이 형체로부터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표적으로 나타나셨음에는 의심이 없다.

 

"두려워하지 말며." 이 권면의 말씀은 바울이 두려워하게 될 어떤 이유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모든 일이 조용하고 순탄하며, 특별히 어떤 사람이 극히 자발적이며 열렬한 경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필요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자기 종이 충실하고 분투적으로 맡은 과업을 실행하게 하시려고 주님은 두려움을 점검하심으로써 그 일을 시작하게 하실 때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소심하여 난처하게 되는 것보다 순전하고 거침없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합당치 않은 행위도 없음을 알 수 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소심 때문에 일하는데 방해를 당하는 사람은 말씀을 위한 신실하고 온 마음을 바친 사역자가 아니며, 가르침을 위히여 바르게 준비한 자들은 굽힘이 없는마음으로 어떠한 위험이라도 극복하는 힘을 받온 자들임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의 전파자들에게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으며 ‘‘능력과 사랑과 근신(sobrietatis)하는(딤후1:7)" 마음을주셨다고 편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 하지 말며 ·… .. 말하라"는 두 말씀의 연결을 눈여겨 보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마치 하나님은 "두려움이 너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가 겁을 먹게되면 전혀 말을 못하계 되지는 않으나 억제를 당하여 해야할 말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하지 못하게 되므로 그리스도께서 는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두 가지를 간략하게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보통 격언이 말하는 것과 같이 ‘반쪽 입을 다물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속에는 말씀의 사역자들을 위한 하나의 일반적인 규범이 정해져 있으니 주님께서 자기 교회에게 알리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순하계 그리고 겉치레나 허위가 없이 설명해야 하고 신앙을· 세우거나 자라나계 하는데 가치가 있는 것 온 무엇이든지 숨겨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0. 내가 너와 할께 있으매"  ;  여기에 바울이 두려움을 억누르고 그의 업무를 말없이 그리고 용감하게 이행하는 첫번째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곁에 서 계신다는 것이다. 이 사실온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 짜기로 다닐지타도 해를 두려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타,,, (시 23 : 4), 그리고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시 27 : 3)라 는 다윗의 영광스러운 주장과 일치한다. 바울온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자주 체험했기 때문에 그는 다론 곳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알지 않았던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타"(마 28:20)는 약속온일반적이며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우 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 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주님께서 모든 일 중에 자신이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형편상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특별한 상황에 이물 적용시키시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어떤 특별 한 상황에 부딪칠 때 고마운 도우심이 우리에게 다른 때보다 더욱 잘 임해 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와 “아무 사람도 너 믈 ...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라는 두 귀절이 밀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죽음에 붙잡히는 때에타도 그를 잊지 아니하셨던 것처 럼 우리를 도우시면서도우리가 곤란에 압도당하도록내버려 두시는 것처럼 보이계 하시는 일은 때때로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친히 그 손으로 특별하 계 도와주시는 약속을 하고 계신다.

  그 손으로 하나님은 원수의 공격에서 바울을 막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온갖 위험을 자진하여 당하려고 했던 바울을 위하여 그러한 약속의 확증이 필요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는 자기가 죽어야 했더라도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그가 두려움 앞에서 아무렇게 행동해도 된다는 어떤 권리를 주었는가? 나는 이렇게 답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 이 어느 기간동안 안전하고 손상을 당하지 않게될 것을 말씀하신다면 이 말 씀은 그들이 용감하계 죽음을 맞기 위 하여 준비 하지 말라는 의 미 는 아니 다. 우리가 ‘소용있는 것'과 ‘필수적인 것'은 다르다고 구별하는 것처럼 우리는 신실한 자들이 약속들 가운데 어떤 것을 상실할 경우 그들은 필연적으로 포 기하계 되고 만다는 사실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필수적인 것이 아닌 약속들이 성취되면 유익하기는 하지만 이런 약속들은 여분의 것들로 부가되 어 있다. 그리고 그 여분의 약속둘이 상실되어도 경건한 자들의 신앙은 붕 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확고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바울온 스스로 근심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원수도 그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당시에 그들의 폭력에 의하여 압도되어야 했더라도 그는 그 공포 앞에 항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위험 중에서도 아무 일도 당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부터 그의 용기와 담력을 더하여 주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만일 주님이 그 정도로 우리에게 호의져이시라면 우리의 약점을 위하여 주시는 그러한 우]안 울 우리는 물리쳐서는 안된다. 우선 우리는 우리 육신의 온갖 쓸데 없는 두 려움이 우리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우리가 주님의 도우십 아래서 전쟁을 치 르고 있는 동안 주님은 우리를 버리실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사실로써 만족 그러나 주님께서 "너를 해몹계 하기 위하여 아무도 일어 히 여기도록 하자• 서지 않을 것이다"(麟)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그 직후에 유대인들의 ° 받았던 바울이 폭력과 소동을 당하지 않게될 것을 의미하 치명적인 공격늄 지 아니하셨고 이 말씀은 굼 }나님께서 그들의 손에서 그를 안건하게 붙들어 내실 것을 이미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온 소용이 없게될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를 얻기 위하여 민첩하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 내 백성이 많음이라. 바울이 용기를 얻었던 두번째 이유는 하나 님께서 그곳에 많은 사람들로써 큰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다는 사실이다. =z.. 러나 이 귀결이 앞 귀절에 부속되고 있는지 의심이 생긴다. 왜냐하면 하 나님께서 바울에게 일을 시키시고 그의 노력에 의하여 큰 교회를 이룩하실 것을 작정하셨으므로 원수들이 그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 실 것이타고 이 두 말을 연결지어 생각하면 그 연결이 순탄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은 "내가 너를 그 사역자로 세운 내 백성을 네가 돕는 데 있어 서 네가 실패하지 않도록 나는 너를 도울 것이다"타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앞뒤의 귀절들이 동떨어져서 읽혀지도록 여러 이유들은 게 시되고 있지 않으나 이 귀절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각 각 명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설명을 주처없이 택한다. 이뿐 아니타 주님은 그 사람들을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고 계신다.

 그들 이 당시에 이국인이라고 불리어도 정당하겠지만 그들온 이 칭호로써 존귀 하게 된 것이 마땅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며 선택되 어 곧 그 가족으로 받아 들여져야 할 자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이리 들이 양과 함께 섞여 있는 것처럼 많은 양들이 어느 기간동안 밖에서 방 황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머지 않아 자신을 위하여 획득하기로 작정하신 그들을 주님온 그들이 장차 갖게될 믿음을 근거로 자기 백성 중에 있는 자들로 인정하신다. 그러나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 며 ,,(요 17 : 6)라고 기 록된 말씀처 럼 그리 스도의 몸에 속하게 된 그들은 하나 님의 영원한 아들삼으심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계 되었음을 명심하 자.

 

"11.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ㅡ ;  우리는 바울이 어떤 다른 곳에서도 여기 에서 갈이 자원하여 그처럼 오태 머물러 있었다는 기록을 읽을 수가 없다. 그 러나 그가 쓴 두 서한서를 볼 때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동을 참아야 했음과 그 사람들의 교만과 은해에 대한 배반행위 때문에 많은 참기 어려운 일들을 견디어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훌륭한 방법으 로 그를 연단시키시지 않은 전쟁은 없었음을 알 수가 있다. 역시 우리는 국 히 뛰어난 건축가가 한 교회의 기초를 놓는 데 그처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떤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생스러운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그 과업이 자기 혼자에 의하여 끝나게 되었다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그가 후에 자기는 심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전 3 : 6)고 말한 것처럼 자키가 놓은 기초우]에 건물을 세우도록 주님께서 자기 대신에 다론 사람들 을 세우셨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