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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행 20:12)

1. 성경 (행20:7 ~12)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7)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8)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9)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0)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1)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1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7 안식 후 첫 날에(駐2)." ; 그는 그 주간의 첫째 날 혹은 안식일 다음 날, 또는 한 특정한 안식일을 말하고 있다. 관습에 따르면 그날은 모임을 갖기에 가장 직합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후자가 내게는 보다 그럴 듯하게 보였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이 처음’ 대신에 ‘하나'를 집어넣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에 (마 28 :1,, 눅 24 : 1, 요 20 :1) 히브리 관용어법에 따라 그들 이 안식일 다음날 자신들의 모임을 열었다는 것은 매우 적철할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너무 당연해서 도대체 이것이 어떤 날인지 구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시간의 적절성과 시간의 선택을 주목시키려는 것을 제외한다면 무엇을 위해서 안식일을 언급하고 있는가?  바울이 자기가 출발하기 전 날 한 장소에 모든 제자들을 쉽게 모으기 위해 안식일을 기다렸다는 것온 대단히 그럴 듯하다. 그러나 예리한 그 모든 것들도 다 소용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비록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배우기에 지쳐 있었다 해도 한 밤중까지 가르치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바울에게는고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를 연기하는 유일한 이유는 청중의 열성과 집중을 생각해서였다.

 

"떡을 떼려~~~~" ; 떡울 떼는 일이 때때로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가정적인 축제를 뜻한다 해도 아직도 두 가지 이유가 나로 하여금 이 귀절에서 그것이 거룩한 만찬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해 준다. 왜냐하면 한 큰 무리가 그 장소에 함께 모이게 된 다음에 잇달아 생기게 되는 문제는 쉽게 예측되므로, 만찬이 개인 집에서 준비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그 사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누가는 바울이 저녁시간이 아니라 실제로 한 밤중에 떡을 떼었다고 우리에게 곧 알려 줄 것이다. 부가해서 그는 바울이 떡을 뗀 것은 자신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맛보기 위한 것이 었음을 말하고 있다(誌3).

 따라서 나는, 모두에게 보다 적절했을 한 진지한 날이 주의 성찬을 축하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에게 지정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랜 부재로 인한 침묵을 다론 방법으로 대치시키 기 위해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평상시보다 더 길게 하고 있다. 사람들의 큰 무리에 관한 나의 진술은 그 다락방에는 많은 둥불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곧 그것은 확설히 허식적으로 진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성 때문에 설치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목적을 위한 필요에서가 아니라면 그것은 사람을 사치스럽게 하는 욕심과 공허에 불과하다. 더구나 동불로 전체를 환하계 해서, 수치스러운 의심이나 비도덕적인 행위가 그 거 룩한 모임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또 다론 추측을 해 본다면, 만일 그 다라방이 가득차지 않았더라면 거기 참석하고 있었던 자들은 유두고(Eutychus)가 그 창에 결터 앉게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방이 아직 여기 저기 비어 있는데도 창 쪽으로 물러섬으로써 그 하늘의 교훈을 일축하거나 거절해 버린다는 것은 거리낌이 되는 추축이 되었 을 것이기 때문이다.

 

"9 깊이 졸더니~~~~"  ; 나는 어째서 어떤 주석가들이 그 젊은이가 그의 수면 때문에 죽음이라는 벌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졸온 태도를 그토록 강하고 날카롭게 저주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한 밤중에 졸음과 싸우다가 결국 쓰러진 것이 무엇 때문에 이상스러운가?  그라고 어떤 사람은 그가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리고 자신의 기대와는 반대로 잠에 몰리고 압도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결국 쉴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끌어들일 지도 모른다. 잠을 자기에 적당한 장소를 애써 찾으려 한다는 것은 탐탁치 않은 표시가 되었을 것이다. 창문에 걸터 앉아 있을 때.' 잠에 의해 압도당한 그의 상태는 지나친 혹은 과도한 피로로 사람이 의식을 잃어버릴 때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는 약점에 순순히 굴복한 것 와에는 다론 무엇이 있 는가?

 졸음이 세상적인 일들에 침투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접근을 스스로 조소하는 자들에게 나타나게 될 때면 그것은 응당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곧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람닉한 결과로 졸게 된 자들, 다시 말하면 다론 일들에는 신경을 곤두세우나, 말씀을 듣는데는 부주의한 자들에게 그러하다. 그러나 누가는 분명히 한 밤중에 그가 깊은 참에 빠져서 떨어졌다고 말함으로써 유두고를 용서하고 있다. 더구나 주님은 그분 자신의 백성들의 신앙이 잠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청년의 죽음을 통해서도 깨어나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바울의 교훈을 보다 열렬히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마음에 철저히 새길 수 있도록 하셨다.

 처음으로, 사실 결코 쉽지는 않은 시험, 가장 굳은 사람이라 해도 그 심중까지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시험이 있었다. 그 모임에 속한 한 불쌍한 청년이 떨어져서 곧 죽었을 때, 누가 그리스도가 그 모임을 이끌어가고 있었으리라 생각했겠는가?  누가 이것이 하나님의 저주의 표시였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곧 구원책이 마련됨으로 주님온 불안한 그들 모두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셨다•

 

"10 바울이~~~~그 위에 엎드려" ;. 사도들이 이적을 행했을 때, 그들은 때로는 어떤 외적인 형식을 이야기 하고 그것으로 기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돌리려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바울이 그 젊은 청년 위에 엎드렸던 유일한 이유는, 자신이 기도의 수고를 하도록 자극된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 젊온이와 함께 묶여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엘리사를 본떠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관해서 성서(聖史)가 비슷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왕하 4:34). 그러나 그를 움칙이게 한 것은 그 예언자의 흉내라기보다는 열정적인 동정심이었다. 왜냐하면 :그 만남은 주님께 속한 그 젊은이의 생명을 위해 모든 심정을· 다해 기도하려는 보다 큰 자극을 그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그가 그 죽온 자의 몸을 안았을 때, 그는 이런 몸짓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소생케 하시도록 그 사람을 자기가 하나님께 드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문맥으로부터 바울이 자신의 포옹을, 그 사람의 생명이 다시 회복 되었음을 알았을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아다. ` 떠들지 말라. 우리는 이 애처러운 사건이 믿음 좋은 사람들의 신앙을 혼들리게 하거나 그들의 마음을 아프계 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이 관심을 가진 주요 원인임을 주목해야 한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설교를 허락하셨고 그래서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치 그들의 눈에 도장으로 날인하듯이 인상적으로 설교했다. 그가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이 죽었음을 부정하려는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한다면 그 기적의 영광을 말소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참 뜻은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에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크게 "위로를 받았더라"는 잇다론 진술을 그 젊은 사람의 회복 때문에 그들이 느꼈던 기쁨으로만 제한하지는 않겠다. 동시에 나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와같은 놀라운 자기 사랑의 증표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의 확신도 지대했음을 포함시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