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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행19:30)

1. 성경 (행19:28~4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8)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29)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0)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1)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2)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33)저희는 그가 유대인인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시 동안이나 하더니 (34)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5)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6)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 왔으니 (37)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8)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찌라 (39)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40)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4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9절 " ; 여기서 누가는 사람들의 본성을, 마치 그것을 그림에 그려놓은 것처럼, 볼 수 있도록 드러내고 있다. 일시에 수 천의 집들 위를 휩쓸고 지나가는 불길처럼 삽시간에 그 소요는 온 도시에 번쳤다. 그리고 그와 같은 폭풍이 일차 일어난 곳에서는 그것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들은 이 재해롤 피할 수 없으므로 굽힘이 없는 확고함으로 강건하게 되어야 한다. 이는 그들이 대중의 소요에 대항하여 대담하게 버티고 그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려고 나서는 것을 볼 때, 마치 어떤 새롭고 비상한 것에 의하여 그렇게 되는 것처럼, 혼동 중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경의 다른 귀절에서, 자기가 소란 중에서도 낙담하지 아니하고 계속 나아갔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후 6 : 5). 그리고 주님께서 는 자기 말씀의 사역자들이 파도가 높은 바다와 갈은 많은 파란 중에 밀려 다닐 때 ,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다스리 고 계심을 증거 하실 때 ,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순간에 그것들을 고요하게 만드시려고 모든 회리바람과 물결을 장악하고 계심도 중거하고 계실 때 주님은 최상의 위로로써 그들을 지속시키시고 최고의 확신으로써 그들을 견고하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폭풍우에 흔들리는 바다 위를 항해하지 않으면 안되며, 더군다나, 마치 우리가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자들인 것처럼, 이 악한 평판을 참아야 하고 그 무엇도 우리를 바론 의무의 길에 서 떠나계 하지 못함을 깨 닫기로 하자. 그러므로 이런 방법으로 지속하면서 우리는 진실로 가혹하게 타격을 당하겠지만, 최소한 주님온 우리가 파멸을 당하여 파선하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실 것을 믿기로 하자. 이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난동이 무질서한 것이기는 하지만, 마치 지금 에베소 사람들이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결박하고 미친 사람들처럼 소리지르면서 알렉산더를 배척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어떤 더 악한 것을 향하여 항상 움직여 나가고 있음올 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까? 사단이 그들을 소유하고 그들을 학대하여 그들이 악한 주장들을 지지하게 되는 사실 외에 다론 일에 의한 것이겠는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거짓된 고소에 근거한 심판이 그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그들은 상횡에 관하여 조사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30 바울이~~~ 가고자 하나."  ; 우리는 겸손과 병행하고 있는 바울의 확고함을 볼 수가 있다.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안전할 수가 있었지만 위험 앞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상황 올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충고에 따르기를 거절하지 않고 있다. 만일 그가 뒤로 물러나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가? 분별없이 행동하지 않았겠는가? 어떠한 소동도 그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좋아지고 있는 상황에 관하여 낙심하고 있지 않을 때 그가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않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상황을 알고 있는 그 형제들과 친구들이 바울을 말렸을 때 그의 겸손을 칭찬할만 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세운 계획을 고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33 유대인들이~~~~알렉산더를 앞으로 밀어내니." ; 우리는 유대인들이 그 민족의 공통된 목적을 제시하기 위하여 이 알렉산더를 내어보낸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가 죽음을 당하도록 그 사람들에게 내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고 믿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칭호가 그를 미움의 대상이 되게 하여 그들은 그가 그 상황과 그들의 목적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을 소란중에 거절했다. 그리고 그가 바울이 성경의 다른 데서(딩전 1:20, 팀후 4 : 14) 언급하고 있는 그 알렉산더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그 추측이 그럴듯하다고 본다. 만일 그가 그 사람이라면 이 두려운 실예로 부터 우리는 조심스럽게 행동하기를 배우기로 하자. 이는 사단이 우리를 그와 비슷한 변절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순교까지 하려고 했던 그가 배반하여 악한 배교자가 된 것을 보기 때문이다.

 

"34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 ; 마음 속에 있는 믿음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이 고백온 분명히 시끄러운 소리일 뿐 그것의 배후에는 견실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소리치고 있었던 그 위대한 아데미가 가진 신성의 근원은 무엇이었는가?  미친 사람들처럼 그들이 일차 받아들인 하나의 오류를 사납게 옹호하려는 것 외에 무엇인가 !  참된 종교에 있어서는 그 방법은 다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 10)고 말씀했다. 이 점에 있어서 순교자들의 견실성과 열심, 그리고 미친 떠들어대는 자들의 난폭한 행동과 굉장한 광란의 정신나간 고집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한 신앙의 고백에 있어서 그들이 그들의 비열한 오류로써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덜 솔직하고 단호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면목없이 태만한 자들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다윗율 통하여 하신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시 116 : 10)는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35절."  ; 여기서 누가는 소동이 끝나기는 했으나 사교는 그 지각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여전히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진리를 듣는 사람은· 없었음을 전하고 있다. 서기장은, 책략적인 사람들이 늘 그렇게 하는 것같이 어떤 수단이 되었는지 그 흥분된 군중을 조용하게만 할 수 있다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시에 그 사건에 대한 실제적인 이유는 간과되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서기장은 데메드리오의 악의를 알았을 것이며 종교적인 구실을 내세워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그 도시가 소동하도록 하는 것 올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기장은 무식한 사람들에게 숨겨진 그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있다. 어떻든 그 다툼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그는 아데미의 거짓 신성을 격찬하고 그 여신의 미신적인 의식을 인정하고 있다. 만일 바울이 그 순간에 연극장에 있었더라떤 그들이 아데미를 칭찬하는 것을 대가로 구출되어 나오기는 커녕 수 백번 죽음의 위험을 당했을 것이다. 서기장은 자기 중심으로부터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하늘로부터 임한 교리의 한 중인이요 포고자(布告者)에 의하여 그 군중 속에는 딴 마음을 가지고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서기장온 에베소인들이 섬기고 있었던 ‘우상’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과 그의 동행자들은 그들의 여신에 대하여 어떤 모욕적 언사를 쓰지 않았다. 바울은 그 거짓말로 꾸며댄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침묵을 지킴으로써 어떻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수가 있었는가?  그러나 이는 우상숭배에 항복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누가는 바울이 형제들에 의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도록 만류되었다는 그의 처음 기록에 대한 훌륭한 이유를 갖고 있다.

 

"37,38절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사람들"  ;. 그들이 그 여신을 훼방 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분명히 옳고 바르다. 그러나 그가· 아데미를 향하여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은 일종의 훼방이라고 다시 한 번 그릇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모든 사교는 비속하고 더러워져 있으므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는 존귀를 우상에게 주는 자는 모두 신성모독을 하는 자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은 그 서기장이 가진 총명, 더군다나 육져 총명이지 그의 경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오로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그 소란의 불을 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침내, 만일 데메드리오가 누구를 송사할 것이 있으면 재판이나 총독들도 있다고 말하고 공공의 사건은 빕적으로 구성된 민회에서 취급되어야 하며 소동 중에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행정관들의 명령에 의하여 함께 모인 곳에서 이를 취급해야 하고 한 사람의 분별없는 선동과 한 사람의 변덕에 의하여 급히 모인 자리에서 그것을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말학고 있다.

  누가는 복수형 ‘총독들' 이란 말을 쓰고 있다. 아시아에 총독이 한 사람 이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때로 대리관(legati)이 총독을 대신하여 재판을 주재했기 때문이다. 서기장은 그들을 두렵게 함으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말에는 총독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어 그 도시를 사납게 다스리도록 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