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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행20:6)

1. 성경 (행20:1 ~6)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1)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2)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3)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4)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5)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절" ; 이 장(章)에서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 아시아를 어떻 게 떠났고 또 다시 항해했는가롤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주의깊게 고찰될 가치가 있긴 하나, 그다지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교회가 폭풍치는 파도 한 가운데 처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에베소 교회는 아직 어리고 연약했다. 예기치 않았던 혼란을 한번 경험한 그 신자들이 때때로 일어나는 비슷한 폭풍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했다. 바울이 그들로부터 떠나는 것울 주저했던 것온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보다 큰 요청이 도처에서  그를 부르고 있기 때문에 , 그는 그들이 이미 겪었던 것 처럼 또 다시 겪게 될 난파의 위험을 지닌 채, 최근 험난한 바다에서 얻은 사람들 곁을 떠나지 않올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 편에서 볼 때도, 비록 바울의 떠남이 슬프고 가슴아픈 경험이라 해도,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교회에 해를 끼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바울을 못가게 하거 나 붙잡아 두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이기적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배려와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왕국을 존중했음을 보게 된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 곧 자신들의 공동의 이익을 생각한 것만큼 그 형제들을 존중했다. 이런 모범은, 우리가 서글픈 분리에 처해도 서로를 도우려는 고통을 겪기 위해 세심하게 주목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득이 되는 도움을 놓치게 되는 일이 늘 일어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심을 깨닫고 흔들리지 말자.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그 형제들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출발시에 그들을 격려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비슷하게 누가는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들을, 조잡하지 않은 모양으로 마치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는데 필요한 듯 권고했음을 한번 더 말한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바울은 도처에서, 그것들이 결코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부적절한 때에서조차 촉구하고 그리고 꼭 알아야 할 일들을 철저히 가르침으로써 그것이 행해지도록 당부하고 있다(딤후 4 : 2).

 

"3.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 하나님은 그의 종을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고 끊임없는 고투로 훈련시켜서, 그가 우리에게 불굴의 견고한 모범을 보여 줄 수 있게 하셨다. 그가 길고 험난한 여행에서 오는 수고와 지루항 때문에 기전백전하계 된 것도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그의 생에 음모의 위협이 또 부가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의 종들로 하여금 성가신 어려움이 그들을 결코 약화시지키 못하게 이 거울을 그들의 눈 앞에 놓도록 만듭시다.

그러나 바울이 자기 걸음을 바꿔, 방향을 둘려서 자신을 노리고 있는 복병을 피할 때, 동시에 그는 우리도 경솔하게 위험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지 않을 정도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존중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확실히 그와 동반한 동료들은 자신들의 고귀함에 대한 평범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몇 명의 선택된 동료들이 그를 위해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험난하고 거친 여행을 계획하는 것을 볼 때 우려는 바울의 생이 그 신도들에제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보게 된다.

 누가는 바울이 무교절 기간 동안 빌립보에 머물렀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때에 가르칠 수 있는 보다 좋은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율법의 취소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무지한 자들이 자신을 그 축제일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특히 그것은 그가 가르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인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런 경우에 배우는 일에 보다 더 마음이 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