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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 19:21)

1. 성경 (행 19:21 ~ 27)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1)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22)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3)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4)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5)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6)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1  성령 안에서 목적을 세워(駐 14)" ; 누가는 바울이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이 여행을 하고자 작정했다고 알고 있다. 이는 우리가 그의 생활 전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해져 있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바울이 성령께서 자기의 모든 행위를 주관하시도록 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기 위하여 자신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존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조금 후에 기록된 그. 여행의 실제적 결과가 그의 기대에 어긋 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때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그 성과를 숨기시면서 그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환경이 애매하고 앞을 내다보지 (oculis clausis) 못할 때 자기가 그들에게 , 성령으로 정해 놓으신 것을그들이 따르는 데까지 자신에게 헌신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철저하계 교회에 헌신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불편을 무시하고 등한히 하면서 마게도냐 사람들을 위하여 관심을 갖지 않느니보다는 가장 훌륭하고 충성스러우며 가장 절친한. 실제로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합당한 동료인 디모데를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23, 24절 이 도로 인하여·~~~~소동이~~~~~~" ;'도' (道)라는 말에 관한 한, 독자들은 그 말이 여기서는 라틴 철학자들이 ‘학교’ 혹은 ‘학파' 를 의미하는 secta 라고 부르는 말과 헬라 철학자들이 ‘사상의 학교’ 를 의미하는 '아-레 시스' 라고부르는말로 간주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연합이 지배적인 교회 안에서는 각자가 자기의 추종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보다 더욱 싫은 혹은 미워할만 하기까지 한 것도 없기 때문에 나는 경건한 자들이 평판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겼던 말을 피하고 ‘생활 양식’을 위하여 방법을 정한다는 히브리어의 관용어를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점으로 되돌아 가자. 우리는 주님께서 자기 종을 얼마나 훌륭하계 사용 하셨는가를 본다. 그가 여행을 위하여 준비를 했을 때 그는 자신이 떠난 후예 교회가 평안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라! 소동이 갑자기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데메드리오의 사건에 있어서 욕심이 얼마나 손상을 주는 재난인가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자기의 사적 이득에 몰두하여 한 거대한 도시가 소동으로 동란을 겪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들 장색에 의하여 불 붙여져 그것을 사방에 번지계 하는 해와 같은 장색들은 자기들의 배만을· 위하여 전념하는 탐욕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어떤 죄라도 범하게 하기가 얼마나 쉬운지에 관하여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있다. 특별히 그들의 생활비가 보람이 없는 직업으로부터 들어오고 돈벌이에 대한 기대를 빼앗길 때 이는· 얼마나 심하겠는가 ! 이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이야기 중에서 우리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상황을 생생하계 보여주고 있음을 인식하계 된다.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들은 소동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자기들의 생활비를 벌어왔던 그 사교를 빼앗긴다면 그들의 사업은 끝나게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치 자기들의 생명을 위해서처럼, 맹렬하계 싸우고 있었다. 데메드리오는 자기의 약탈풍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어떤 열정이 교황과 뿔이 달린 감독들과 수사들, 그리고 교황이 거느린 그 모든 성직자 무리들을 충동하고 있는가? 그렇다. 어떤 열성이 그들로 하여금 그처럼 신랄하게 복음을 반대하도록 그들을 격동시키고 있는가?  진실로 그들은 자기들이 가톨릭 신앙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자랑한다. 분명히 데메드리오 역시 아데미 숭배에 대한 구실을 주장하면서 그와 비슷한 핑계를 갖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을 볼 때 그들은 제단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정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살 뜨거워진 부엌을 갖고자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서도 자기듣의 수입만 줄어들지 않는 다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무서운 모독도 말없이 눈감아 버린다. 그들은 자기들의 맷돌에 곡식만 갖다 준다민 사교를 보전하는데 극히 힘차다. 그러므로 이런 실예들을 경계하떤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생활을 택하는 것을 배우기로 하자. 이는 이득을 얻고자 하는 열정이 우리를 충동하여 불경건하고 악한 전쟁을 위하여 무기를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무지나 과오에 의하여 어떤 나쁜 직업 중에 빠져 들어갔거나 어떤 다른 악하고 불결한 생활 방식에 얽힌 사람들은 그런 불행한 형편에 있다하더라도 그처럼 분별없는 신성모독을 경계하도록 하자. 경건한 교사들에 관한 한, 이런 선생들은 이 실예로부터 온 세상이 자기 부정을 통하여 평화를 얻기 전에는 원수는 항상 있게 될 것과 이 자기 부정을 통한 평화는 우리가 알기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을 알도록 하자.

  바울의 교훈이 데메드리오와 그 온장색들의 생계를 잇지 못하게 하므로 그들은 격분하여 이 교훈을 멸절시키려고 날뛰었다.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도 이와 같이 하지 않을까? 그러나 싸움을 하게 되지 않을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육신의 온갖 욕심은 하나님께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대항하기 위하여 많온 원수들이 있는 그만큼 세상에서 그 힘을 떨치고 있는 육신의 욕심들이 있기 마련이다. 때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이 소란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공공 연한 분노를 터뜨리지 않도록 그들을 어거하기는 하신다. 그렇기는 하나 그 리스도의 멍에를 지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미움을 받도록 할 것 이다.

 그러므로 경건하고 충성된 선생들은 안제나 많은 수의 원수들을 만나게 될 것을 확실히 알아 두자. 데메드리오의 탐욕은 실로 명백하다. 그러나 이 사실과 함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데메드리오가 온갖 수단을 써서 바울의 가르침을 멸절시키려 하고 그를 편리한 도구로 삼은 그 사단에게 붙잡힌 선동자였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단이 그리스도와 전리에 대한 달랠 수 없는 원수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가 공공연한 폭력으로 분노를 선동하고 은밀한 술책으로 복음을 전복하고자 하며 그가 가진 증오의 독을 쏟아내고, 최소한 불평과 큰 소리로 적개심에 대한 어떤 증거를 보여주는데 자기 일꾼들을 거느리지 않을 때가 있겠는가?

 

"25 이 업에 있는데~~~~~" ; 여기서 데메드리오는 수치스러운 수단으로 자신의 원한을 쏟아내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사적인 수입원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주의를 기울일 권리을 갖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권리를 의곡하고 폭행과 살인을 하며 정당하고 바론 것을 파멸하고자 심각하게 시도하는 것은 분명히 수치스러운 일이다. 데메드리오는 이 사건의 핵심이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전 신들은 전혀 신이 아니라고 하는 바울의 말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진실인가 아닌 가를 묻지 않는다. 단지 돈벌이를 위한 열정으로 소경이 되어 그는 참된 교훈을 멸절시키기 위하여 끌려가고 있다.

 이렇게 눈이 어두위 그는 난폭한 방법을 쓰려고 돌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공들 역시 자기들이 가난과 굶주립을 당하게 될 것이 두려워서 똑같이 서둘러 난폭해졌다. 배는 귀와 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공평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인은 자기의 개인적인 이득과 유익이 문제시 될 때 자신을 향하여 더욱 비판저이어야 한다. 이는 저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그 동일한 탐욕이 공평과 불공평, 그리고 치욕과 명예에 대한 모든 식별력을 없애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  우선 결론적으로 데메드리오가 신앙을 두번째로 여기고 있음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여신 대신에 배를 택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아데미에 대한 숭배가 위태롭게 되고 있다는 구실을 내세운 것온 역시 무익한 짓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바울의 가르침을 통하여 아무런 손실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말없이 집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며 아데미에 대한 숭배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한 사람에 의한 일진의 바람이 아니고 무엇이 그처럼 열심있고 열기에 찬 행동을 일으켰는가? 진실로, 그는 자기와 자기가 거느린 사람둘이 싸우는 데 충분히 적합한 혹은 그럴듯한 이유가 없을 것을 알고 그 이유를 갖가지로 좋게 꾸미느라고 (ascititio colore fucare)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그 범법에 대한 비행을 감추기 위하여 그는 종교에 대한 그럴 듯한 구실로써 그것을 가리고 있다. 그러므로 불경건자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아무리 담대하게 일어선다 하더라도 그들은 사방으로부터 (許15) 흉하지 않는 핑계들을 얻고자 뻔뻔스러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을 그들의 속임수로부터 빛 가운데로 끌어내신다. 데메드리오의 위선을 반박하기 위하여 다른 증인이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개인적 손실에 대한 근심을 표명했을때 자신의 입으로 자기의 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의 행위도 이와 유사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톨릭 신앙과 성모와 교회의 옹호자들임을 자랑하기 위한 파렴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적인 행동에 있어서 이런 식으로 시작하여 사실을 제시함에 있어 그 들은 입을 벌리고 부엌의 냄새를 뿜어내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분명하고 진지하계 경건에 대한 이유를 주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들 자신의 이익은 잊어버리기로 하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계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이득에 대한 기대는 그것에 대한 매력으로 우리의 감각을 극히 둔하게 만들어 온갖 죄악된 것들 중에서 방황하는 동안, 우리의 의향이 우리들의 사적인 이익을 향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 미혹을 당하계 되기 때문이다.

 

"아시아와 천하가~~~~" ; 온 세상이 아데미 여신의 위엄을 중시하고 그 여신을 섬기는 경우 그 위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데메드리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같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신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내세우는 공통된 구실이 다. 그러 나 참된 종교는 사람들의 뜻보다 더욱 견고한 지지를 필요로 한다. 오늘날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억제하고 있는 꼭 한 가지는 어디에서나 사용됨으로써 인정된 과오를 용감히 버리고자 하지 않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켜 온 것은 어리석고 분별이 없기는 하지만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고 상상하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거스려 ,단순한 관습이란 명목하에 그것을 강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단히 다른 규범을 정하고 계신다. 즉 하나님의 권위, 그분 한 분의 권위로써 만족하고 우리는 사람들의 의견이나 우리들 스스로의 오랜 사용이나 많은 민족의 관습을 중요하계 여기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