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18:18~22)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18)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19)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0)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1)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8. 여러 날 유히다가." ; 바울은 적당하지 않은 시간에 급히 그곳을 떠남으로써 아직 무식하고 약한 제자들을 당황케 하지 않으려고 두려움이 있었음에도 거기를 떠나지 아니한 사실은 그가 가진 성격의 확고함을 보여준다. 성겅의 다른 귀절들에서 우리는 그에게 핍박이 가열될 때 그가 일단 그곳을 떠난 사실을 자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고린도에 줄곧 머물러 있었던 아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이렇다. 바울은· 자기가 있음으로써 원수들이 그들의 분노로 교회 전체에 쏟게될 것을 알게 될 때에는 그는 떠남으로써 신실된 자들이 평온을 얻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형편은 다르다. 그가 원수들의 악의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을 알아차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양무리에게 어떠한 손상도 주지 못하계 하기 위하여 떠남으로써 그들이 분노를 쏟아내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보다는 그들의 분노를 견디기로 했던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한 것은 이번이 세번째이다. 그가 다메색에서 떠나 사도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갈 1 : 18) 올라갔던 때가 첫번째 였으며 여러가지 의식들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바나바와 함께 파송된 적이 있는데 이 때가 두번째였다. 누가도 그가 곧 돌아오려고 하면서도 그렇게 멀고 지루한 여행을 지금 출발하고 있는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다.
"머리를 깎았더라." ; 이 말씀은 아굴라에 관한 것인지 바울에 관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이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이 말씀올 기꺼이 바울에게 적용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곧 찾아가 만나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함으로써 적응하려고 하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개인 자격으로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리려고 하나의 의식적(儀 챠的)인 맹세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인정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 있던 옛 사람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와 같은 외적 요소들에 의존되지 않음을 그가 얼마나 유의하여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들의 철폐를 그가 얼마나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는가를 알고 있다. 그가 다론 모든 사람들을 그것 으로부터 자유케 해주었던 그 양심에 관한 문제 (religlone) 에다 자기 양심을 잡아매는 것은 분명히 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머리를 깎았던 것은 자신을 아직 무식하고 바르게 가르침을 받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적응 시키려는 목적외에 다른 것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율법 아래있는 자들을 얻기 위하여 자기가 이미 해방되어 나온 그 율법에다 자신을 기꺼이 굴복시킨다고 증거한 사실(고전 9 : 20)과 같다. 바울은 마음에 없는 서원을 겉으로만 할 수는 없지 않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는 쉽게 대답할 수가 있다. 그는 결례의 본질에 관한 어떤 것도 위조하지 않았다. 진실로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예배를 요망하시는 것 처럼, 그가 얽매일 필요가 없는 그 의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서가 아니라 단지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일치감을 주기 위하여 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이 사실로부터 서원에 대한 모범올 얻고 있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바울은 신앙에 관련된 어떤 거리낌 때문에 서원을 하지 않는다. 실제로 하나님을 그릇되게 섬기는 사람들이 곧 잘 서원을 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은 바울의 율법의 의식을 지키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율법의 의식들에 대한 자유는 오래 전에 확립되어 있었다. 율법의 의식을 강요하던 자들은 기독교를 미신에다 결합시키는 일외에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시대에 뒤진 의식들을 다시 활용하는 것과 아직 잔존하고 있는 것들을 그것들이 점차 페지되기까지 묵인하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나는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무익하고 어리석게도 자기들의 성직자들이 행하는 삭발식을 하나님께서 율법 가운데서 정하신 결례의 상징과 비교하고 있는 사실을 논하지 않겠다. 더 이상의 반박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약한 자들을 실족시키지 않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그 서원을 하계 되었다는 설명으로 만족하자.
"19절 ~~~21절. 회당에 들어가서" ; 이 귀절은바울이 고린도에서 저주하는 표로 자기 옷을 털었을 때 그가 유대민족 전체를 물리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시정할 수 없고 고집을 가졌다고 이미 경험한 그들을 물리치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 사람들 가운데서 더한 순종을 찾아볼 수 있을런지 알아보기 위하여 그들에게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누가의 기록을 볼 때 그는 다론 어떤 곳에서 보다 이 회당에서 더욱 조용하게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더 오래 머물려 달라는 요청까지 받은 것이 분명하므로 그가 그들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던 것은 이상하다.
이 사실로부터, 내가 이미 말한대로, 그는 급히 예루살렘으로 울라가야 하는 중요한 이유를 갖고 있었음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바울자신도 "나는 곧 다가오는절기를 예루살렘에서 지켜야한다"(注 13)고 말하면서 자기가 서둘러 가야할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을 위한 일들을 잘 마친 다음에 그들의 허락과 호의를 받으면서 떠났음은 의심되지 않으며 누가의 말로부터 그들의 요청에 대한 사양온 받아들여져서 그의 거절이 그들을 실족케하지 않았음을 침작할 수가 있다. 끝으로, 우리는 거두고 있는 성공보다 더 나은 성공에 대한 가망이 있을 때 마치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그렇게 되는 것처럼, 다른 일에 이끌려가게 되는 사실을 주시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기 위하여 우리들 스스로를 굴복시키는 것을 배우기 위해 서이다.
"다가오는 절기" ;. 잠시 전에 내가 서원에 관하여 말한 것은 이 절기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경건의 의무를 이행 하려고 의도하고 있지 않으며 연중 다른 때보다 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그 모임에 참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하나 만으로도 날과 절기에 관하여 그가 정한 가치에 관한 충분한 중거가 되고 있 다(갈 4 : 10) . 우리는 바울이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이라는 조건을 끼워넣지 않고는 자기가 돌아울 것에 대하여 약속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주시해야 한다. 진실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한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오만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지배권율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히 하나님을 물리치고 가까운 장래 뿐만 아니라 수년간을 위해서 어떤 것을스스로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우리들의 목적을 종속시키는 것을 베우기 위하여 이 신앙적인 공손과 신중성을 자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자기들의 행사에 행운이 있는 것으로 스스로 여기는 사람들이 상습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갈이 우리가 계획을 세울 경우에 우리들의 만용에 대한 공정한 형벌을 받지 않기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말 속에는 우리가 이것, 혹은 저것을 할 것이라고 말할 만한 자유가 없을 만큼 종교적인 힘 (religio)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 모두를 인도하고 계심을 생각케 하는 식의 말에 익숙해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22 가이샤랴에서 상륙하여." ;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램에서 ‘교회의 안부를물었다"고 간략하게 알리고 있지만 그가 어떤 중요한 일에 의하여 그곳으로 가게 되었을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장의 전후 관계로부터 그가 예루살렘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추측한다. 아마 그가 그곳에서 했던 일의 결과가 그의 기대와 소원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는 바울의 들아오는 여행이 불쾌하지도 않았고 유익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왜 냐하면 누가는 바울이 곧장 돌아오지 않고 수차 우회적인 길을 따라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정녕 많은 문제들을 가진 모든 제자들을 믿음 위에 든든히 세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사 '카데크세스' 는 사건의 지속적인 발생을 암시한다. 나는 성경의 다른 귀절(행 9 : 36)에서 그리스도께 충성올 바치고 복음에 나타난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제자들'로 호칭되는 이유를 말했다. 그 이유는 바론 가르침이 없이는 경건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들은 목사들을 세우고 있었다. 그 목사들 밑에서 그들은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더 큰 권위를 가지고 더욱 뛰어난 정신에 의한 능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들온 그가 다녀가게 되었을 때 그에 의하여 크게 힘을 얻었다. 특별히 그는 그들의 모든 교회의 기초를 놓는데 있어서 주요한 건축가였기 때문에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