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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19:6)

1. 성경 (행19:1 ~ 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2)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3)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4)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5)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6)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절 "  ;. 여기서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돌아옴으로써 이 교회는 견고 해지고 그· 수가 증가될 뿐만 아니라 한 가지 기적을 얻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적이라 함은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혜가 그곳에 있던 몇 사람의 체험이 없는 새로운 제자들 위에 임한 것이었다. 그들이 원래 그곳의 거주자들이었는지 그 곳에 최 근에 이사해 온 자들 (hospites) 이었는지 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온 요한의 세례를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을 그 곳에서 만난 것을 보면 그들 온 에베소에 살고 있었던 자들 같다.

 

"2.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  여기서 바울은 중생의 성령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고 교회의 전반적인 건덕을 위하여 자신이 원하시는 자들 위에, 하나님께서 복음의 시초에,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누어 주셨던 특별한 온사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을 이 이야기의 결론이 말해 주고 있다. 그런 데 바울의 질문으로부터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당시에 어느 곳에서나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성령을 받고 있었느냐는 문제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성령을 주시고 계셨다면, 마치 그 결합은 나눌 수 없 는 것처럼, 바울이 성령을 믿음과 결합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이 사람들온 양무리에 속하지 않았거나 혹은 열 둘이라고 하는 그들의 수는 많지 않은 수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 모두가 성령의 은사들을 갖고 있지 않은지를 묻고 있다. 그러나 내 자신의 판단은 이렇다. 극히 많은 유대인둘과 제자들, 즉 신실한 양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여 일차 이방인들의 눈 앞에 제시되었다. 이는 신령한 은사들 속에서 현저하게 보여지는 복음이 지닌 최고의 영광이 아칙 그들 이방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공언(公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하여 바울의 사역이 빛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극히 적은 수의 제자들이 아볼로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지않은 상태로 에베소에 남겨져 있었을 것 같지 않으며 아볼로 자신이 아굴라와 브리스킬라에 의하여 주님의 도리 를 꼼꼼히 배운 것을 생각한다면 그 제자들은 아볼로에 의하여 철저하게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더군다나, 나는 누가가 앞에서 언급했던 그 형제들은(18 : 27) 이 특별한 사람들과는 달랐으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요약하여 말하면,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바울이 보았을 때 그들이 가진 신앙에 관하여 더욱 정확한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묻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교리에 대한 신뢰의 여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처는 "내가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 : 2)라고 묻고 있으므로 그러한 질문의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방법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하노라 "  ;. 유대 사람들이 성경의 어느 부문에서나 선지자들이 전파하고 있고 이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 가득차 있는 성령에 관하여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바울이 성령에 관한 일반적인 말로 질문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질문하는 그 말에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나라에 공급해 주셨던 그 눈에 보이는 은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음을 알 수가 있 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와 갈은 온사들을 내려주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이라는 말 속에는 환유가 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다음 사실에 의하여 확증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에 관하여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고 완전히 부인했었다면 바울은 그와 같이 크고 기괴하기까지한 과오를 말없이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어떤 목적 또는 어떤 방법으로 그들이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눈에 보이는 은혜의 광채가 모든 교회에 두루 비치도록 그리스도가 바르게 전파된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이 광채가 찬란하계 빛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어디서나 두드러지게 역사하시려고 하였으므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그 영광에 대하여 무식한 데 대하여 이상히 여긴 사실에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이 이미 받아들인 믿음의 초보의 상태에서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하면서 그들을 곧 시정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요한의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4 요한이~~~~~~" ;바울이 했던 시정(社4)은 자기들의 무식을 확설히 알아차린 그 사람들이 더욱 믿음의 전진을 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는것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심을 요한이 전파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제자들이 경주로를 달리면서 아직 나타나시지 않은 그리스도를· 목표 지점으로 정하도록 그들을 출발선에서 출발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사림들이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더 건전하는 것을 경멸하면서 거철하지 않도룩 그들이 목표점으부터 멀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 결점을 알면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얻고자 사람들은·고무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하고 있었던 말의 요지는 이렇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그가 가지신 능력은 이 세상에서 작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자기 능력이 작용하는 방법을 따라서 자기 나라가 흥왕하계 되기를 뜻하셨던 때는 그가 마침내 승천하셨을 때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오른 핀에 앉아 계심을 지금 증거해 주고 있는 성령의 은혜는 요한이 그의 사신으로서 활동하고 있을 때에는 훨씬 적게 임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서 자신을 세상에 공공연하게 나타내고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목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니 훨씬 더 전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라. " 그러 므로 바울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았던 경건한 자들의 신앙은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이는 그 사람들이 첫번째의 원리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죄의 회개와 사하심을 받은 데 대한 표적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고 그의 죽으십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 구원의 모든 부분이 완성 되었 다는 사실 외에 오늘날 그 세례와 우리들이 받고 있는 세례 사이에는 다른 점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는, 내가 말한 죽음과 부활의 근원되신 분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믿음은 은혜로 말미암은 의를 구하기 위하여 역시 그 근원되신 분께로 옮겨가기 때문에 세례 는 그 효능을 발휘 한다.

  요약하여 말하면, 바울은 요한의 세례가 우리들이 받고 있는 세례와 마찬가지로 중생과 새롭게하는 세례였음을 분명하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생명이 정결케 되고 새롭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고 있으므로 바울은 세례가 그리스도의 성실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세례가 상정해주는 그 모든 실체를 붙잡을 수가 있으며 외적 표적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감소시키지 않음을 알게 된다.

 

"5 저희가 듣고~~~~ 세례를 받으니"  ;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세례도 달랐다는 견해가 옛 사람들 중에 지배적이었으므로 요한의 세례만을 받온 자들이 다시 세례를 받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두가지 세례가 오늘날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얻게 되는 동일한 ‘아들 삼으심 ' 과 동일한 '새생명 ' 에 대한 표와 서약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할 때 거짓되고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요한으로부터 자기에게로 온 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푸셨다는 기록을 읽을 수가 없다.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징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연합시키기 위하여 자기 몸에 세례를 받으셨다. 그 러나 만일 그 세례들은 다르다는 꾸며낸 이야기가 인정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공통된 세례를 받았다 (Baptismum habemus cum Fl/lo Dei communem)는 이 특유한 특혜를 놓치고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관해서는 또 반대 설명이 팔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세례들은 달랐다고 우리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우선 필연져으로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다론가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세례가 서로 유사하고 일치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두가지 세례는 모든겁에 있어서 서로 균형과 유사성운 갖고 있다. 이런 사섣둔은 우리로 하여금 이 두 세례가 같은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런데 세례를 반복해서 받는 것은 옳은 일인지 의문이 생긴다. 오늘날 열광적인 사람들은 여기에 기록된 사실을 증거로 재세례를 이끌어 둔이려고 애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라는 말을 ‘새로운 교훈'으로 간주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설명이 어쩔 수 없이 꽁격적인 기미룹 보여주고 있으므 로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당시에 세례가 반복된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한을 흉내낸 어떤 우매한 사람에 의하여 그릇되 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추측에는 근거가 없으 며, 더군다나, 바울의 말은 그들이 참되고 순전한 요한의 제자였음을 암시 하고 누가는 그둘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를 수 있는 영예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물로써 행한 그 세 례는 반복되지 않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누가는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 았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의미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례의 명칭이 성령의 은사들로 옮겨간 것은, 우리가 제 1장과 11장(1 : 5, 11 : 16)에서 알아본 것같이,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 성구들 가운데서, 누가는 성령이 보이는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보내신 바 될 것온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을때 그는 그-성령을 ‘세례'라고 칭하셨다.

 그리고 성령이 고넬료에게 임하셨을 때 베드로는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었다. 둘째로 우리는 그 보이는 은사들이 여기 본문 중에 분명하게 언급되었으며 그 은사들은 세례와 함께 주어진 바 되었음을 본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는 이어서 기록된 말씀은 설명으로서 부가되었음을 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간략하게 말해 놓고 이어서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빈번하고 습관적인 성경 의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수함으로써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고 말함에 있어서 누가는 더욱 간단히 말했으므로 그 의미가 분명하저 않았던 어떤 사실을 더 잘, 그리고 더욱 충분하 설명하고있는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례'타는 말이 성령의 은사들을 대신해서 쓰일 때에는 단순 형으로 취급되지 않고 부대저 의미가 부가되어 취급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누가의 생각이, 문맥을 볼 때, 충분히 분명하며 누가도 그가 언급한(駐 5) 세례를 암시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만일 이 ‘세례'타는 말이 외적 상 징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세례'가 어떤 충분한(mellore) 설명도 없이 그들에게 베풀어전 사실은 불합리할 것이다. 그리고 ‘세례.'가 은유 적으로 가르침 (institutione)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귀절의 표현 은 더욱 거북스러우며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다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 셨다'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 .

 그리고 나는 이 안수가 하나의 성례전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연장하고 영구히 모방하는 자들은 무지하계 된 자들이 타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은 그 상징에 의하여 나타난 일시적인 은해였음에 일치하고 있는데 실체가 없어진 후에 그 표적만을 보전하는 것은 잘못이고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와 만찬은 이것과는 전혀 다르다. 왜 냐하면 주님은 이 세례는 만찬과 함께 교회가 세상 끝날까지 계속적으로 받아 줄거워할 은사들을 주시겠다고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구적인 성례전과 일시적인 것을 조심스럽고 저혜롭게 분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가치가 없고 우스운 모조품들(larvae)이 성례전들 중에 끼지 않게 하기 위 함이 다. 나는, 제 롬 (Jerome) 이 루시 퍼 파 (Luciferians )를 대항 하여 주장한 것같이, 성령의 은혜가 그와 같은 의식에 매여있지 않다고 생 각하기만 하면 신앙고백에 있어서 성인(成人)들을 견고하계 하기 위하여 엣 사람들이 안수한 것을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 들은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엣 의식으로써 만족 하지 않고 세례에 대한 확증 뿐만 아니라 더 큰 가치가 있는 성례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실로 보기싫온 기름붓기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의식으 로 그들은 이전에 온건하지 못한 자들이 온전하계 되며 죄를 용서받을 만한 자들이 믿 음의 싸움을 위 하여 무장을 갖추계 한다고 상징 한다. 그들은 이 협 오할 만한 불경스러운 행위들을 발설해 내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