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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1. 성경 (행20:13 ~ 24)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3)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4)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5)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6)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7)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8)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19)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0)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1)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2)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3)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3 우리는~~~~배를 타고~~~~~~” ; 어째서 바울이 육지로 여행하는 것을 더 좋아했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혹 항해가 그에게 어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길에 형제들을 심방하기가 좋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으로는 그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이런 경우에 바다를 피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 자신을 위한 고려는 제쳐 놓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동료를 아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그는 그들을 고통에서 위안시키지 않고, 자신에게서 멀리 떼어 보냈는가?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순서에 있어서 그리고 훌륭한 태도와 친절한 행동에 있어서 서로 서로 경쟁했음을 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봉사에 대한 준비하고 있었고 기꺼이 할 뜻이 있었다. 다른 면으로 본다면 엄격한 감독과는 거리가 먼 바울은 별다론 문제 없이 그들이 수행하려고 준비했던 그 의문에서 친절히 그들을 놓여나게 했다. 더욱 훌륭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제쳐놓고 그들을 편안하계 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지리학자들에 의하면 앗소(Assos) 도시가 드로드(Troad ; 타)에 속해 있다는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같온 도시가 플리니 (Pliny)의 고증에 따르면 아폴로니아(Apollonia)로 불리어겼다. 그들은 그것이 이토리아인들 (Aetolians)의 식민지 였다고 밀한다.

 

”16 바울아~~~~·작정하였으니.” ;  사실 그가 예루살렘에 급히 갈 강력하고도 중요한 이유를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이는 그날의 거룩함이 자신에게 많은의미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축제일들을 위해서 도처에서 이방인들이 예루살램으로 떼지어 몰려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와 같이 큰 무리 앞에서 어떤 효과적인 사업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따라서 율법에 따른 예배라는 것은 바울이 그토록 성급하계 서두른 이유는 되지 못함을 기억하자. 오히려 그가 마음에 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그 신자들에게 보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와 아직도 친숙하지 못했던 자들을 얻어 둘이고, 또 다른 편으로는 못마땅한 자둘의 비방을 물리침으로씨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동시에 교회에 소속된 자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에베소의 장로들(presbyteros)을 밀레도(Miletus)로 청하면서 그는 자신이 아시아를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청함을 받고 그들이 함께 오는 것은 일치의 표시일 뿐 아니라 겸손의 표시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해도 그둘은 자신들이 그 놀랄만한 온사로 인해 잘 알게 되었던 그리스도의 한 사도에게 복종하는 것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문맥으로 보아서 장로들 (seniores) 이라 불리어진 자들은 나이가 많이 든 자들이 아니라, 교회를 다스렸던 자들이었음은 아주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권위 있는 위치를 차지한 자들이. 심지어 그들의 나이에 걸맞지 않을 때조차도 ‘선조들' (se'IJ'les) 과 ‘원조들' (patres) 이라고 보통 불리어지기도 한다.

 

“18 너희도 아는 바니.” ;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서 임명 했던 장로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도록 하키 위해 주로 자기 자신의 예를 애써서 들고 있다. 선생이 그가 전에 행하지 않았던 것을 말로도 가르치지 못할 때, 질책이나 가하고 가르치는 권위나 획득하는 것이 혼한 일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덕을 본받으라고 명하는 바운에게는 일치되 지 않는 점이 없었다. 사실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있어서 야심이나 히망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성안(聖人)의 고상함과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똑바로 알려졌기 때문에, 특히 그가 필요성에 의해서 자신의 믿음 과 근면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한 예로서 보일 때, 자만이타는 의구심을 일 으킬 두려 운 요인은 없었다. 확실히 그는 그 자신의 노동, 인내 , 용기 그리 고 그외 다른 덕들에 대해 상당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왜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가? 분명히 그의 신도들의 박수갈채를 받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 의 귀중한 권고가 예리하고 스며드는 것이 되어 그들의 마음에 새겨지고 깊 숙이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곧 그의 성실이 이후로는 자신의 가르침을 명할 수 있는 효과를 지니게 되리라는 것 이었다. 그리고 그는 알지 못하는 일들에 관해 말로만 한다는 식으로 보이 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실지로 목격자들에게 호소한다. 내가 목격자들이라 합 온 그 모든 일에 지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 뿐만이 아니타, 어떤 수난을 겪고도 파괴되지 않는 분명한 판단을 가졌던 사람까지도 뜻한다. `

 

“19 주를 섬긴 것과.” ;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자신이 버티어 온 큰 어려 움 뿐만이 아니타, 특히 그의 비참이 세상의 유혹, 모함 그리고 박해와 관 계되었음을 회상하고 있다. 그가 자신이 영광이나 칭찬을 받지 못했고 오히 려 십자가의 비천한 모습아래 그들과 함께 있었음을 말했던 것과 같다. 다 론 한편으로, 비록 우리가 세상의 잔인한 거만에 의해 천대받은 자신들을 보게 된다 해도 우리가 꺾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힘을 잃은 시험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모습에 목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주를 섭건 일이 여기서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믿음이 깊은 자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 곧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타 공적(公的)인 기 능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 편에 서서 어떤 사사로운 개 인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그 교회에 책임을 쳤던 담임으로씨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부과된 사도직을 겸허와 겸손함으로 맡아왔음울 증명. 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그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면서, 그가 자신(自信)을 결여했기 때문이고 다른 부분은, 자신의 임무의 중차대함을 고려하면서 `자신이 그 임무에 적한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또 다른 부분걱인 이 유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치를 스스로 기쁘게 참아 견디는 일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그레서 그 겸비함이건방전 태도는 물론 공허한 확신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둘째로 그는 눈물을 덧붙여 말한다. 고무와 사단의 여러가지 공격!.. 불신 자들의 난폭함, 교회 자체내의 혼란, 그리고 여러 장애물들이 그를 눈물나 게 했다. 그는 마지 막으로 '유대 인들의 간계 ’ 때 문에 불안한 상태 로 살았음 올 덧붙이고 있다. 비목 그가 굴복하지 않았다 해도, 자신이 쇠로 만들어치 지 않았기에 그것들에 의해 동요되 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약접 울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그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 비슷한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모든 욕망을 벗어난 채 자신들의 의무를 적절하고 꼼꼼하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에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사람들에 의해 경멸 받도록 조용히 내놓을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낙심해 보기도 하게하기 위함 이다. 왜냐하턴 고귀한 맛만을 보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를 섬기기에 알맞 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짓된 외모만 가전 덕은· 오래지속할 수없고, 그가 전실로 마음을 다해 그처럼 행동했던 것은 분명히 밝혀져도 좋온 것이어서 그는 3년 동안 시종여일 확고부동했음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있다. "첫 날부터 지금까지 내가항상……어떻계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하 고 그는 말한다· 요컨대 이것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요동되는 것이 아니타노 시종일관한 마음으로(sui similes) 관철하고, 늘 곧바론 진로를 고수한 그리 스도의 종들의 참된 증거 이 다.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 가르치고” ; 그는 세 가지 주제로 나누 어 가르치면서 그 자신의 믿음과 근면을 권면하고 있다. 곧 그는 그들의 구 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하나도 빠드리지 않온 건실하고 철처한 교훈을 그 재자들에게 주었고, 일반적 교훈에 그치지 않고 각 개인에게 봉사하는 수고를 담당했다. 세째로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도록 촉구했 나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교훈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이제 그가 선하고 신 실한 교사상을 우리에게 그려 주고 있기 때문에 주님에게 인정받을 만한 수 헉운 하기 원하는 사람 모두를 위한 적절한 방향은 자기들의 눈 앞에서 교 희를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마치 바울이 도처에서 디모데로 하여금, 그들을 가르치는데 애써 힘을 기울이계 하기 위해 이로운 일들을 생각하도루 명하고 있는 것(립전 4:6 이하)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모든 교훈 방법을 시험하는 규범이 되는 성경, 아니 차라리 적절한 교육의 유일한 방법인 성 경은 사람들이 편안하고 계으를 때 즐거움을 주는 현명한 사색물을 담고 있 지는 않다. 그러나 그같은 증거 곧 바울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만들기 위해 유익하다(립후 3 : 16). 그러나 바울은 자기에게 관한 한 알아서 유익이 되는 것을한목회자도 빠뜨리지 않도록 교훈하는데 그처럽 열심을 내고 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원칙만을 강요해서 결교 그들이 전리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게 하는 교사들은 해로운 선생들이 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써 섣익은 방법으로 우리를 .iil. 육시키지 않고 모든 일에 완전하고 온전한 지혜를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침묵을 통해서 사람들의 무지를 온닉하거나 조장시킬 뿐 아니라 큰 실수와 불경스러운 미신까지도 눈감아 주는 자들이 말씀의 봉사자타는 자랑만 하면 서 거만해 있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사실 그와 갈은 종류의 일들은 오늘 날교황권속에서도발견되고있다. 거기에서는많은사람들이 건전한교리의 빛둘을 말로만 나누어 주고, 무지의 어두움을 감히 소멸시키려 하지 않는다. 육체의 타락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움츠리계 하는가 하면, 그들은 사람들 이 보다 건실한 교훈을 받아들일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변명하기도 한 다. 사실 나는 모든 것은 단번에 가르쳐 질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우 리는 무지의 영역에 자신을 경응시키는 바울의 심정을 본받아야 한다. 그 러나 이것은 어떤 종류의 절제인가? 그들이 소경을 구덩이로 밀어 넣을 때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폭정아래 곤고한 영혼을 남겨 놓을 때, 그들이 우상 이 성행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변질되고 하나님의 율법이 위반되고 ::L. 래서 요컨대 모든 거룩한 일들이 모독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은 평계 잡 대는 사람처럼 그와 같은 파괴적인 혼란을 침묵으로 지나치고 말거나, 속 임수문 쓰는 사람처럼 조십스럽고 모호하게 암시나 주고 말 것인가? 따라 서 우리는 바울이 사람들의 이익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나 꺼림이 없이 말하 였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수하고 공평하고 거 리낌 없는 올바론 고백적인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요구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곧 간접적이고 교묘한 변장으로 씌r ° 암시보다 더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없다.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 이것이 두번째 입장이다. 곧 그는 모임 에 참석한 모두에게 뿐만이 아니라 각 개인에게 필요가 있을 때면 그둠의 칭에서 개인적으로도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목회자들에게 그들이 일반적 방법으로 공중 설교에서 교회를 지도하기만 하라는 원칙으로 명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역시 개인적으로 양을 돌보아야 하고 그 울에서 훈어지고 방황하는 것 을 데 려 와야 하고, 상하고 저 는 것 (luxatas)을 싸매 주고 병 든 것을 치료하고 연약하고 힘없는 것들은 먹여 주어야 한다(겔 34 : 2, 4). 왜 냐하면 일반적 공중 설교는 그것이 개인 개인에 대한 충고로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때로는 냉담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모임을 가진 다음에 마치 자기들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걱정없이 편안히 쉬면서 사는 자들의 태만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성소에서 일단 밖으로 나오면 곧 완전히 어리석어지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가 성~ 에서는 커졌던 것과 같다. 배우는 자들에게도, 실제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것으로 계산되기를 원한다면 그 목회자들이 때로 제자들 에게 을 때,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마찬가지로 경고된다. 개인적 인 경고는 피할 필요가 없다. 교회 건물(theatro) 밖에서는 그 목회자의 음 성 듣기를 중요하계 생각하지 않는 자들, 더구나 집에서는 경고를 받을 수없고 꾸짖음을 받을 수 없는 자들, 아니, 그와 갈은 필요한 요소를 값싸게 여기고 맹렬히 거철하는 자들은 양이라기보다는 곰이라 할 수 있다.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 중거한 것이라.” ; 세번째 주장을 하고자 그는 이제 자신의 가르침을 간단히 요약해 주고 있다. 곧 복음은 그와 같 온 두 가지 요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이전의 전술과 일치하도록 그가 모 는 사람에게 믿음과 회개를 촉구했던 가르침이 그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우 리는 교회의 순수한 발전은 본래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추측할 수 있고 또그것 때문에 목회자들은 책임이라는 침을 진다. 그리고 우리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학교에서 적절한 전전율 이룩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i..것을 목적으로 헌신해야 함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독자 가 천박한 질문에 얽매일 때 세속화된다는 사실을 이미 배워왔다. 그러나 :i..것이 닥치는 대로 읽히거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읽히지 않도록 하기 위 해 우리는 그 사도가 우리 앞에 던져 준 이 양면의 목적을 고수해야 한다. 애냐하면 그 밖의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그가 큰 잘못을 범하는 것 외에도 주변에서만 맵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거한다’는 말을 동해 그는, 마치 자신이 중거를 갖고 권면한다고 말했 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강조하여 드러내고 있다. 몰랐다는 변명의 여지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중거하는 것이 모든 의심을 제거시키는 법정의 관례를 암시하고 있다. 비슷하계 사람은 단지 교육받아야 할 뿐 아니라, .:z.. 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촉구되어야 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도 록 자신을 복종시 켜 야 한다. 하나닙 께 그가 아무도 무시 하지 않았다고 주장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유대인율 제일 먼저 언급한다. 왜냐하면 영예로운 위 치와 함께 주께서 그들에게 이방인에 비해 우선권을 주셨던 것과 마찬가지 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가, 그들이 그분을 완전히 버렸을 때까지는 그들에 게 제공된다는 것은 적절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 무엇보다도 신앙과 회개의 차이가 먼저 주목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온 회개는 신앙의 한 부분이타고 말함으 로써 그 둘을 그릇되개 그리고 어리석계 혼돈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 는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 게도 동시에 새 생명을 얻도록 중생 (重生)시키지 않고는 신앙의 영을 그냥 조명 (照明)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둘은 바움이 21절에서 분리시 키듯이 구별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회개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생 애 전체 를 그분의 복종에 맞출 때 , 하나님 께 로 돌아 서 는 것 (conversio) 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 전체의 목적은 우리 자신을 거룩함과 의로움과 헌신 하면서 주님을 순수히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는 그 분으로부 터가 아니타면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우리의 구원을 찾을 수 없으며 오직 그 리스도가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개 의 가르침은 믿음으로 사는 규칙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거부는 물론, 우리 육신의 금욕, 천국의 생에 대한 명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성상 모두 부패했고 의(義)와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하나 님께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둘째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대저하 시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을 피하기 때문에, 새로운 생을 획득할 수 있는 방 법과 마찬가지로 거처 주지는 화해의 길이 우리에게 꼭 주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신앙에 덧붙여지지 않는다면 회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렇다. 더구나 신앙을 무지하고 자제(自制)하는 삶과 선행에 대한 교훈만을 주장하는 회개의 교사들은 세속 천학자들과 다름이 없다.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그러나 그둘은 사람을 본성이 이끄는 대로 놓아두기 때문에 거기서 보다 좋은 상태로의 회복은 기대될 수 가 없다. 그들이 잃어버린 자에게 구원의 소망으로 이끌 때까지, 또는 그들이 최의 용서를 약속함으로써 죽은 사람들을 소생시킬 때까지 그리고 은혜 로운 양자(養子)됨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에는 사단의 노예들이었던 자들을 그의 아듣들로 삼고 계심을 그들이 보기 전까지는 그렇다. 곧 그들이 중생 (重生)의 영이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찾아져야 하고, 경건함과 의로움과 신 성함은 그분, 곧 모든 축복의 근본이신 하늘 아버지로부터 끌어 내려야 한다 는 것을 가르치기 전까지는 희망이 없다. 그리고 이런 것둘로부터 하나님을 합당하계 예배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우1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도가 잇달아 나오게 된다. 이제 우리는 회개와 신앙이 분리할 수 없는 연관 속에서 하나 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깝게 해 주 는 것은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그분은 우리의 죄를 따르지 않으시 고 죽어 마땅한 형벌로부터 우리를 해결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은혜로 대하 실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성령으로 우리의 죄의 더러움을 씻어 주시고 우리 를 그분의 형상으로 소생시켜 주신다. 그는 먼저 회개의 한 부분이 신앙으 로부터 나오고 신앙의 결과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 있어서 회개가 신앙에 우 선한다고 생각해서 회개를 먼처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의 시작이 신앙 을 위한 하나의 준비이기 때문이다. '시작'이라 함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하나님의 전노에 대한 심각한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우 리로 하여금 구제책을 강구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라스도께 대한 믿음을~~~~~” ;  성서를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의 앞에 목포로, 좀 더 평범한 표현을 쓴다면 신앙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은 아무 뜻없이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존엄하심은 인간이 울라가기에는 너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곧 중재자가 우리와 만나게 되지 않는다면, 모든 우리의 감각은 하나님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쓸모 없이 되어 버릴 것이다. 둘째로 그분이 세상의 심판자임을 알면서 그리스도 없이 그분을 관찰하는 것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 싸일 수밖에 없게 한다. 다론 한편 하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자기 자신의 형상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 내 보이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그의 부성애로써 재 창조하시고 우리의 생을 완전히 회복시키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온 그의 죽음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다. 또한 우리가 받을 형벌을 짊어지셨다. 그분은 우리를 그의 보혈로 정결케 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진노를 그자신의 복종을 통해 가라 앉히셨다. 그는 자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가 의를 획득하게 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은 철저히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으로 고정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22 보라 이제 나는~~~~~ 가는데~~~~” ; 그는 이제 왜 그가 자신의 성실에 관해서 이야기해 왔는가 하는 그 이유를 보다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곧 그 들은 결코 그를 다시 못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이 모방하도록 제공해 주신 그 모범이 그들의 눈에 언제나, 심지어 그가 죽은후 까지도 계속 기억으로 남도록 한다는 것온 대단히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순수한 가르침으로부터 쉽게 떠나버리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과는 달리, 비록 그가 예루살렘에서 자기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해도,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많은 예언들에 의해 경고되어 왔었기 때문에, 곧 이어서 그는 마치 자신이 이미 죽기로 작정했다는 듯이 자기가 되돌아울 희망이 없음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아직 그처럼 말하는 데는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서론적인 이야기는 불확실한 것에 대한 의도저인 기록을 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보다 쓴 바람이 불게 될 것을 미리 누그러뜨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려나 그는 앞으로 밝혀지계 될 모든 일들이 자기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음을 수 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사건들의 전체 과정에 관한 구체저이고 독 별한 계시를 받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심령이 매임을 받아~~~~~”  ;  어떤 사람은 이 귀절을 바울이 자기에게 연보를 전달하는 업무를 부과한 교회들에게 의무를 젊어지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 려나 네게는 오히려 이 귀절은 성령의 내적인 권능과 영향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열광(evOouo-cao-µij) ; 엔 두_:...시아스모―)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보다 확실하계 하 면서 자유롭고 조용히 성령의 영감과 비밀스러운 인도를 따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에 매임을 받아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기를 원해 그밖의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표현은 그의 말의 총 요약 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경솔함을 피하기 위해, 그는 성령이 자신의 여행의 후원자요 안내 자타고 주장한다. 그려 나 자신들의 공상의 어 떤 산물도 성 령 이 자기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라고 자만하고 있는 대단히 많은 열광주의자들 이 바울처럼 개인적으로 성령을 알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움직임이나 충동들이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타 그것이 보동의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상황의 특별한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고칠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어리석고 경솔하계 많온 일들을 기획하고 거기서 그것들을 완고하게 고집한다. 왜냐하면 변하계 되는 것이 수치스럽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성령이 명하시는 여행을 수행하는데 있어 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거절하는 것이 최였기에 그것을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거룩한 사람의 모범에 따라 우리도 하나님의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공손히 그분께 복종하여 우리 를 인도하여 주시도록 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그래서 마치 우리가 그분 께 매인 바 된 것처럼 그분이 자신의 뜻에 따라 우리를 움직이시도록 하고 우리가 강제로 질질 끌려가지 않도록 하자. 사단의 노예들인 악한 자들이, 그것도 기꺼이 정도가 아니타 열열히 사단의 선동에 이꿀렸다면, 이 자발적 oJ_ 예 속(eOeAOOOUAE&a ; 에 벨 로둘-레 이 아)은 하나님 의 자녀 들에 게 서 찾아 볼 수 있어야 하겠는가?

 

“23 오직 성령이~~~~~” ; 나는 이것이 비밀한 하나님의 말씀을뜻한다고생각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선지자들에게 이곳 처곳에서 들었던 예언을 의미 한나고 본다. 그러 나 이 진술은 그 예 언들을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증인으 로서 인용되었다는 것보다는 예언하는 것들을 칭찬하는데 더 가치가 있는 것입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들이며 성령이 그 주인이십을 우리 가 알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식으로 해서 그 권위를 세우시기 때둔이다. 이제 앞으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바울에게 경고한 바로 그 성령이 동시에 그로 하여금 그분께 복종하기를 거절하지 않도록 의무 로 침지워 주실 때, 그 사실로부터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이 무엇이 든지간에,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의 부르심을 따르는데 서 벗어나도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배우게 된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헛되이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고난없이 행해질 수 있는 한 행동하는데 틀림없이 제한을 가한다. 그리고 변명을 하 면서 불확신, 손해 그리고 결국은 죽음의 위험을 향해 치닫게 된다.

 

“24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노라~~~~~~~” ; 믿음이 좋은 모든 사람들, 특히 말씀의 사역 자들은 이 와 갈이 자신들의 마음에 새 겨 넣 어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 그들이 정당한 행동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주처없이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확실히 삶이란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다라 창조되었음을 볼 때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 너 무나 뚜렷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 나라에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불 멸의 축복을 깊이 생각하도독 해준다. 그리고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많은 중거를 통해 우리에게 아버지로서 나타내 보이신다. 그러나 그 것은 우리가 달려갈 길처럼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장애물을 극복하고, 그 과정에 있어서 어떤 것도 우리를 방해하거나 지연시키지 않도록 결승점을 향해 서두른다는 것온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에 대한 맹목직인 애착에 의해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생 때문에 오히려 생의 이유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씀들은 그런 것을 거부하고 있 다. 왜냐하면 그가 단지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관십 밖에 둠으로써 자신의 일을 마치고 그가 그리스 도로부터 받온 사명을 완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만족 시켜드리는 것 외에는 생을 위한 어떤 욕망에 의해서도 얽매어 있지 않았고 바로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제공하셨던 그 역할의 마지막 목져 지가 죽음이타는 것으로 가까와오고 있었다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생명을 잃는 것도 자기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 나 우리 로 그의 말씀, 곧 ‘기 쁨으로' (託6 을 참조하타)를 주목해 보 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신도들이 생명을 잃었을 때, 슬퍼하거나 애동하 지 않고 그들이 주안에서 살며 주안에서 기쁘게 죽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한 양심의 기쁨온 너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외 적인 고통이나 혹온 어떤 육체적인 술품에 의해 없어질 수가 없고 그것은 회열치고도 너무 생생해서 쉽게 말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달려갈 길에 관한 설명을 주목해야 한다. 곧 그것온 ‘주께로 받은 사명.,인 것이다. 바울은확실히 자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 신의 모범을 통해 주님께서 자기들의 갈 길을 주관하시도록 맡기지 않는 모 든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음을 가르친다. 결론은 그 한 사람의 소명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올바론 삶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주님께 인정받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생명이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확신은· 말씀· 의 사역자들에게 특별히 요구된다. 그둘이 그리스도를 주창자로서 모시지 않고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바울이 그의 사도칙 을 그 표시로 구별해서 내세우려 할 때,· 마치 그가 늘 일의 습관이 있는 것 처 럼 그는 그 사도직 의 순수성 (fidem)을 주장하고 있 음은 확실히 의 심 할 여 지가 없다. 그는 그것을 그 효과나 목적을 보아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복음에 의해 우리에게 제 공되었다는 것온 하나의 귀중한 진술이다. 거기서 하나님이 칭송되는 것으 로 발견됨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