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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5)

1. 성경 (행20:25~38)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5)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6)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7)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8)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29)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0)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1)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2)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3)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4)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5)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6)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7)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3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5 보라 내가~~~~~ 아노라.” ; 그가 차라리 조심스럽게 암시만 했었던 것을 이제는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의 말을 보다 확고하게 그들의 기억에 심어주기 위해서 그들로부터 자신이 되돌아 오는 것에 대한 희망을 의도적으로 빼앗았다고 말해 왔다. 왜냐하면 떠날 때나 그리고 죽을 때나 마지막 말들이 얼마나 힘을 갖고 있는가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 그둘이 ‘이러한 예고에 주의했으면' 하고 원했다. 그가 돌아 온다는 것에 대한 아득한 불회실성 때문에 그들의 신앙이 피로로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 다시 복음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 로 불리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쇄신시키면서 이 세상에서 그 기초를 다져가다가 드디어는 마지막 부활 때 완성되기 때문이다.

 

“26,27절.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중거하노니.” ; 이것은 ‘내가 너희를 중인으로 부르노니’ 혹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증거하노 니(社8)'하고 그가 말했었던 것과 똑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는 보다 큰 권위로서 그들에게 그들의 임무의 규칙들을 지시해 주기 위해서 이 말을 하고 있다. 더구나 이 절은 올바르고 적절한 교육 방법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귀절은 강하고 엄격한 규칙아래 선생 자신들이 자기들의 과업에 헌신하도록 그들을 권고하고 있다. 결국 어떤 교육 방법에 목자들이 집착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로 하여금 무엇이 공적(公的)으로 제공되기에 적절한가 또는 생략되기에 적절한가를 결정하기 위해 자기 자신들의 판단을 사용하지 맡게 하자.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그 문제에 관한 결정은 하나님께 넘기도록 하자.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가는 문은 인간의 조작으로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죽을 인간은 성경을 찢거나 삭제하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이 부분 혹은 저 부분만을 선덱하거나 어떤 것을 모호하게 하고 많은 것들을 무시해도 좋다고 스스로 외람되이 월권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그가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조심스럽고 적절하게 그렇게 할런지도 모르나 그는 성경에 계시된 것은· 무엇아든지 산포할 것이다. 그는 아직도 순수하고 어떤 위선도 없이 충실하고 솔직한 하나님의 해석자로서 적격이다. 나는 신중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자신의 방법에 맞도록 변경시킬 때,. 그리고 우리를 종잡을 수 없는 철학으로 이끌 때, 혹은 좀 더 마음이 내킨다는 이유로 복음과 그들 자신의 공상을 섞을 때 만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친 자만심을 갖게 하는 교활한 생각이 조금도 없다면, 우리는무엇이 유익한것인가를 늘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자유의지를 주장하게 되고, 행위의 공로를 주장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방금 말한 것에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말한 것, 곧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그 분의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 밖의 다론 어떤 곳에서도 찾으면 안된다. 많은 일들이 이생에서는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새로운 눈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그분 그대로 보게 될 날이 오면 온전히 드려날 것이 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는 성경을 산실하게 해석하는 자이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주님께 대한 경외와 믿음을 갖게 하며 모든 경건한 행동을 하계 된다. 그러나 이 문장을 사람들의 평범한 이해와의 보조를 벗어나서 공격적인 어떤 것도 가르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들의 철학적 논쟁을 통해 그들 자신의 잠재적인 영향력으로 성경의 순수성을 망치는 자들을 저주하고 있다고 방금 말했듯이, 바울은 십자가와 박해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오직 수수깨끼 같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자들을 무섭게 공격한다.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지자가 만일 사악한 자들을 회개하도록 촉구하지 않는다면 피의 벌을 받으리라고 선언한 에스겔서의 귀절을 바울이 언급했다고 의심없이 생각한다(겔 3 : 18 이하). 왜냐하면 만일 어떤 것이 그들의 태만 때문에 없어진다면 그들로부터 한 정당한 이유를 요구할 수 있다는 이 원칙 위에서 그분은 목사들을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능가하계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만일 그들이 속임없고 애매하지 않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어그러진 길로 가는 자듈의 멸망은 그들 때문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러한 엄한 위협으로도 취한 데서 깨지 않는 자들은 말할 수 없이 둔 한 자들이다.

 따라서 로마 교황청의 에피큐리안 파의 불경건성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굉장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토록 많은 멸망하는 영혼들을 구원할 말은 한 마디로 하지 않는 데, 이것은· 마치 하늘에 심판하시는 분이 계시지 않다는 것과 갈은 처사다. 그리고 그들의 사악성온 전 세계의 사람들 보기에 염오감을 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양들울 훔쳐 먹는 데만 신경을· 쓰면서 그들의 목자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께서는 목자들의 게으름 때문에 양둘이 파멸 되는 책임을 물어 심한 벌로 다스리심을 볼 때 자신이 얼마나 영혼들을 귀히 여기고 계신가를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것에 대한 관심을 갖고 실제로 관여하실 때.,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구원에 대해 과소 평가하고 있는가를 보게 된다.

 

”28  너희는·~~~~·삼가라.” ; 그는 이제 자신의 말을 그들에게로 둘리고 그들이 근면해야 하고 깨어 지켜야 함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많은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단지 그것을 요구하는 필연성 때문에 심히 걱정율 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그들이 그 무리에 대해서 신실성이 보증되어 있어서, 권위가 자기들이 그 무리들 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둘째 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그들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세째는 하나님의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보통 귀중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네째는 주님은 교회를 자기 자신의 피로 구속하셨을 때 자신이 교회에 대하여 높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층거하셨다는 것이다.

 

 첫번째에 관한 한, 그는 양때에게만이 아니라 우선 그들 자신들에게 삼가라고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구원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다론 사람의 구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집착도 보여 주지 않는 사람은 다론 사람을 선동하여 헛되이 신앙 생활을 하게 한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비록 자신이 양떼편에 속해 있다 해도 양떼에 대한 그의 헌신과 노력을 부지하지 않는 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들에게 맡겨진 양떼들에 대해 열중하게 하기 위해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스스로 삼가라고 바울은 그들을 개인적으로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실하게 양떼들 교회에 자신들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결론 짓고 있다고 우리는 말했다. 이것온 마치 바울이 그들이 목사들이 된 후로는 독자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공적(公的)으로 온 양때와 묶여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episcopos)를 삼고.” ; 바로 이 말로써 (감독, 감독자) 바울은 그들이 모두의 공동의 안전을 위해 망대에 울라가 지켜 보기 위해 세워졌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중요한 강조점은 그들이 사람에 의해 임명된 것이 아니라 교회를 보호할 책임이 하나님에 의해 그들의 임무로 위탁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보다 철저한 양심적인 행위가 그들에게 요구되고 있다. 왜냐하면 최고의 재판석 앞에서 하나의 어려운 계산(計算)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기는 주님의 권위가 더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당연히 우리는 더 큰 존경을 주님께 드리게 되고, 또 그 존경은 우리의 열심을 북돋아 준다. 

더구나 주님께서 처음부터 사람들의 투표에 의해서 그 말씀의 사역자들이 택해지도록 계획하셨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늘 스스로 그 교회에 방향율 제시하신다. 우리가 그분을 단 한 분 유일하신 통치자로 알게끔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구원의 보화가 그분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복음이 우리에게 우연히 또는 인간의 의지나 행위에 의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의 영광이 모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 특별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그를(성령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주관하시는 성령께 돌리고 있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소명을 각 사람의 양심 속에서 각 사람에게 증거하고 있다. ‘감독’이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이 말로 구별없이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간단히 주목해야 한다. 그로부터 우리는 성경의 용례에 따라 어쨌든 감독이 장로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악하고 나쁜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도시들 중에서 대표적인 도시를 다스린 사람들만이 ‘감독’이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한 사실이 생겨나게 되었다. 내가 ‘악’이라고 말할 때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뛰어나다는 것이 나쁜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말씀들을 자기들의 관습에 맞게 의곡시키거나, 성령님의 말씀을 변경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참을 수 없는 무례함 대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駐9) 하셨느니라.” ; 헬라어 동사 ‘포이 마이 네 인’은 ‘먹이다’ 는 뜻이다. 그러 나 아주 유사하계 그것온 어떤 종류의 지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뜻이 변화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 훌륭한 임무로부터 유도된 세번째 논쟁임을 말했다. 바로 이 바울이 다른 곳에서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집은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인 것이다(딤전 3: 15). 그것은 마치 그러한 곤란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게으름 피울 여지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을 관리하도록 임명한 청지기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바울이 말한 것과같다. 그 직무는 높은 영예를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같이 위대한 권위에 합당하게 행치 않는다면, 곧 그들이 성실하게 자기들의 임무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이제 감독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세위지고 성령에 의해서 교회를 양육하도록 되어 있다면 가톨릭의 교권은 가소로운 것이고 거기서 주교들은 그들의 공허한 명칭에 대해 자만하면서도, 꼴을 먹이는 작업은 하는 척도 않는다. "자기 ~~~자신" 바울이 목사들에게 그듈의 임무 수행에 부지런하도록 촉구하는 네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피를 홀리심으로써 교회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최고로 확증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일이 그분께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명백하게 밝혀준다.

 그리고 확실히 목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보다 열정적으로 해나가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피의 값이 자기들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일보다 더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그들이 교회를 위한 노력을 신실하게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뿐만이 아니라 신성 모독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에 관한 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피를 더럽혔고 그분에 의해 얻온 구원을 처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무가치하게 될 뿐 아니라 그 열매가 파괴되고 사라진다면 그것은 소름끼치는 무서운 범죄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사신 바 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이 교회로 하여금 그분 자신을 위해서 완전히 남아 있도록 계획하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구원하신 자를 그분 스스로가 소유하시고 잡으신다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사단의 폭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고 아버지의 기업에도 우리를 모으실 때까지 사단의 지배에 모든 인류가 넘겨져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도 바울에 의해 사용된 그 표현이 거칠게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함으로씨 바울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왜냐하떤 하나님도 육적이고, 죽게되어 있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갈이 말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도 분리된 본성들이 있다는 사실의 입장에서, 성경은 때때로 록히 서로 에 속되어 있는 것을 따로따로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께 우리서 앞에 육체로 나 타나셨다고 해도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아니 다. 그러나 한편으로, 두 가지 본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한 인격 을 구성하기 때문에 한 본성에 져절히 속하는 것은 때로는 다른 본성에도 속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가령 이 귀절에서 바울이 그리스 도의 피를 하나님의 피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피를 홀리신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논법은 교부들에 의 해 서 communicatio idiomatum (콤무니 카티 오 이 디 오마툼 .; 속성 의 교통) 이타 불리어졌다· 왜냐하면 한 본성의 속성온 다른 본성에 적용되기 때문이 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이 분명히 표현되고 있어서, 우리가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한 때 시도하려 했던 방법처럼 그분을 두 인격을 가전(twofold) 분으로 생각할 슈는 없음을 말했다. 아 최 우리는 유티커스(Eutyches)가 애써 소개하려 했던 것과 갈이 두 본성의 혼합을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이 러 한 잘못은 스페 인의 망나니 , 세 르베 투스 (Servetus) 가 오늘날 날조하고 있 다. 그에 게 있 어 서 그리 스도의 신 성 은 하 나님 안에서 언제나 빛을 발하계 되는(社10) 인간본성의 한 영상;(spectrum) 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0 너희 중에서도~~~~~~~ 사람들이 일어날 줄~~~~~” ; 이리들 중 어떤 이들은 그들 중에 존재하며 심지어 ‘목사들'이라는 명칭 아래서 해를 끼칠 기회만 기다리고 있기도 한다는 사실이 그 고통의 심각성을 더 심화시킨다. 동시에 그는 그러한 이리들로부터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곧 교회가 신앙의 통일성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여러 종파들로 분리될 때 그 양떼가 분산되는 일 둥이다. 그들의 직무에 충실치 않는 모든 목사들온 이리가 아니라 때로는 삭군이요, 그다지 해를 끼치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다. 그러나 교리의 부패는 양에게는 치명적인 재난이 된다. 세째로 이 악의 근본과 출처가 주목되고 있다.  곧 그들이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하기’를 원하는 일이다. 따라서 야심은· 모든 이단의 어머니이 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은 목자가 평범한 태도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얻을 때 드러난다. 왜냐하면 교회의 생태는 오직 그분만이 유일하신 스승이라고 말해 질때만이 건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두가 다스리 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힐 때 구원의 가르침이 파괴되고, 양떼의 안건은 간 곳 없게 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다. 각 사람이 자기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유명해지기를 심히 욕망할 때, 그런 인간들의 자만으로부터 거의 모든 타락의 교리가 흘러나온다고 이 귀전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우리는 이 귀절에서 야심적인 사람들이 그 적절한 순수성으로부터 고개를 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타락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짐작하게 된다. 성경을 순수하계 다룬다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홀로 현저 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다른 한편 사람온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는 일이 없이는 그들 자신에게 어떤 영광도 돌릴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완전히 가리고 그들 자신 그들 자신에게 헌신하는 자들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자둘은 건전한 가르침의 파괴자들인 것이다· 주님 자신이 그것을 요한복음 7장 18절에서 확인하셨다. 더구나 바울이 ‘일어난다’는 단어률 사용함으로써 그 이리들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침입할 수 있도록 이제 몰래 파괴의 힘을 기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론 점에서 볼 때, 이 귀절은 사단이 약한 양심을 혼란시키기 위해서 모든 제대에 제시하 는 끔찍한 장애물율 훌륭히 제거해 준다. 만일 외적이고 공인된 원수들이 복음에 대항해서 싸운다떤 경건한 신자들은 경계하게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내적인 적들이 교회의 밑바닥 한가운데 나타나서 갑자기 나팔을 불거나 반역적으로 사람들을 파멸하려고 선동한다면 이것이머 큰 문제이다.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은 태초부터 이런 유혹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혼란시키셨고 교회를 초조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방파제로 인정되도록 하자. 어느 때 목자가 이리떼로 추측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신앙이 부서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그들이 ‘흉악한 이리’가 되어서 신도들올 더욱 무서운·공포로 몰아 넣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로 그들이 의곡된 교리의 주창자들이 될 것이고, 특히 자신들의 제자들을 얻기 위해서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야심은 복음의 순수성을 더럽게 물들게 하지 않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 교황들이 자기들의 계속적인 계승에 대해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는 분명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들이 완전히 낭패당했을 때, 그 뿔달린 짐승들은 스스로 존경받기를 원할 수 없음율 우리가 손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온 그들을 연결해 주는 고리를 봉해 사도직을 계승해 왔다고 주장하는 데서 위안을 얻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백성의 견고성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혹은 바로 심판하시 기 위해 때로 이리들이 가면을 쓰고 ,노략질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해도, 권위라는 것은 이름이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과 성실이 동시에 존 재하지 않는 한, 계승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교황들이 이리떼라는 이름은 자기들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만대 한다면, 바울의 한마디 말씀이 그 문제를 판가름하는데 하나의 시금석 (Lydian stone)이 될 것 이다.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변덕이 지배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교황의 종교의 전체 목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이 유일한 스 승이라고 인정되지 않을 때는 제자들을 갖지 않으신다. 내가 아노니.

이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로 하여금 주의깊게 깨어 지키도록 권고하고 있다. 역시 필요성 때문이고 그것이 가장 날카로운 자극어기 때문이다. 그는 ‘이리’에 의해 심한 충격을 받으리라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사실 말하자면 이리때에 의해 해를 당하계 되는 것이 교회의 계속 척인 운명이다. 따라서 참을 잘 시간이란 도처히 있을 수 없다. 사실 침입 하논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한 그들이 해 로우면 해 로울수록 목자들아 지켜야 할 파수의 역할도 보다 더 날카로와야 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고난을 가법계 해 주신다. 그 양떠]들이 조용히 그리고 평화스럽게 양 육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양데가-깨끗하고 청명한 하늘 아래서는 들 판에서보다 머 안전하계 사육되는 반면, 구름끼고 어두운 날씨가 닥치떤 보다 더 큰 위험을· 당하계 된다. 때로 어떤 청명한 날씨가 하나님의 교회 에 허락된다면 그것에 이어서 폭풍치는 시간이 온다. 그것은 이리들의 전략 에 안성맞춤인 시간이다. 따라서 바울의 뜻은 더 큰 위험이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욱 경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이런 생각을 어디서 얻었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무 엇보다도 그의 존재함이 이리들을억누르거나내어 쫓는데 효과져이었다는것 온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사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성령의 권능이 불신자들에게 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 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감히 그들 자신의 독율 내뿜지 못하계« 된다. 그렇다 그 하늘의 광채는 사단의 깊은 암흑율 훈어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바울 온 잠시동안 자기의 노력 때문에 사단의 간교가 억제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 기 때문에, 자신이 떠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손쉽게 예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마 그는 주님의 예언의 성령을 동해 머 확실해졌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일어났던 것을 보고 있듯이, 다른 사람들이 그.를· 동 해 경고받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여간 능력있고 신앙·깊은 목자들이 떠날 때마다, 우리는 가장 철저한 파수로서 이리들이 양의 우리 를 가까이 하지 못하계 지키기가 어려우므로 이리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도록 하자.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  다시 바울은 자신의 모범을 통해 그들이 근면하도록 촉구한다. 비록 그가 그것을 위험의 두려움과 연결시키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파수를 보는데 최선의 주의를 기 울일 필요가 있다고 바울이 말했던 바와 갈다. 그리고 사실 삼년동안 변하지 않고 참아온 것을 본 사람들에게, 나태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역시 자기의 권고에 큰 힘을 더해 준 자신의 ‘눈물’을 회상시키고 있 다. 그가 각 사람을 훈계'했다는 전술은 장로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걱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온 교회롤 위해 일반적인 말씀올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처럽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목자들에 대한 명령으로만 국한시키기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기억에는 새로왔을 것이다. 그들의 열심이 현재의 말씀에 의해 불붙을 뿐만이 아니라, 많은 권고들, 곧 삼년 동안 그가 끊임없이 눈물로 그들에게 주었던 많은 권고가 그들의 기억에 새로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가 모두를 상대로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한 것 같다.

 

“32 내가 너희를 주~~~ 께 부탁하노나~~~” ;  그는 기도를 삽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생생한 설교와 불일치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수사학자들같이 자기의 연설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별로 부담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를 정열케 한 그 감정의 격렬함을 어떤 말로도 채울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하고 어려운 일들을 다루 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기도로 다시 둘 아감으로써 비록 그가 직접적인 기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원을 표현하고 있었건 해도,. 그는 자신의 설고의 맥락(脈絡)을 잠시 동안 끊는다. 그 것은 확실히 그들이 그처럼 커다란 침이 아니었음을 말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중 하늘의 신선한 도움을. 간구했다• 그들이 그것에 힘입어 모든 유혹을 넘어서, 승리의 개가를 울리계 하기 위함이다. 그러 나 그가 목자에게만설교하고 있다 해도 그는 온 교회를 이 기도에 포함시키 고 있다. 그는 그들을 첫째로 하나님께, 그리고 둘째로 ‘그분의 은혜의 말 씀에' 위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요 똑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바운 온 주님께서 그자신의 구원을 예비하신 방법을 묘사하고·싶었다. 그것은 베 드로가 가르치는 바, 믿음으로 알미암아 보호하십을 입었다(밴전 I:5). 그 보호의 방법(ratio)은 말씀에 의존하고 있다• 그 많은 위험 가운데서 위태 롭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합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보촌 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아는것은매우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분의 위험성은 우리로부터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으로 오시지 않는 한 불확실성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우리를구원하자마자, 그는 그의 말씀을 우리의 구원을 준비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하신다. 그의 ‘은혜의’라는 형용사를 엇붙인 것은 그런 이유이다. 왜냐 하면 히브리 관용어구로 소유격은 결과를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나. 믿는 자둘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총을 계시하신 그 말씀에 보다 안전하계 의지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섣명은 평이하고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이타는 어떤 사람의 해석은 너무 거리가 멀어서 영 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이 분사 '두나메노스'의  '할 수 있게 하사' 는  ‘하나님 '을 언급하는 것이지 ‘그 의말씀'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런 위안이 그들이 자기들의 약점 을 깨달음으로써 실망하지 않게 하려는 이유 때문에 덧붙여진다. 왜냐하 떤 우리가 육체의 악에 의해 포위되고, 또 그렇게 되는 한, 우리는 채 짓지 못한 건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그기초를 놓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완전하고 온전해지기에는 너무 나 멀었다. 반대로 비록 기초가 굳건하다 해도 건물의 어떤 부분들이 망가 지고 주저앉는다. 따라서 기존 건물과 때때로 새로운 수선하는 것이 둘이 모두-필요하다. 동시에 바울은 그들이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하 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의 사업을 불완전하게 남겨두기를 원치 않으시 기 때문이다. 마치 바울아 빌립보서 I장 6절에서 "너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타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시편 138편 8절에서도 비슷한 사상이 있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 을 버리지 마옵소서.» 생의 ‘기업’에 대해 한번 그가 덧붙이고 있는 것은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기쁨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보시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논 실제로 죽음에서 생명에로 옮기는 것이고 신앙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입구 인 것이다. 그리고 양자(養子)삼으시는 영은 헛되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그어이 기업이타 불리어전 것을 보고 그것을 소유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은혜가 커질 것을 신자들에게 약속하고 있다‘ 그 기업은 지금은 그들을 위해 하늘에 쌓여져 있다.

그는 아무 효과없이 우리가 그것을 상상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으로가 아니라, 보통 ‘실제의’ 것으로 묘사되는 그 무엇으로서, ‘하나님의 권능' (~12)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는 그것을 꼭 잡고 있어야 하기 때 문이다. 그들이 사단의 모든 간계를 막기위해 하나의 방패처럼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경이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 속에서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주님 안에 있는 강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로 확신을 말하는 자들이고 그분께 의지하는 자들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바울온 그분만이 세우실 수 있음을 아주 올바로 주장하고 있다 .   

 

“33 은이나 금~~~~” ;  그가 저주스러운 욕망이 얼마나 해로운가를 방금 이야기했듯이, 이제는 그들이 욕망을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 리고 또 다시 그는 그 자신의 모범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어떤 사람의 건물을 탐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는 그 손으로 일해서 살았다. 이것은 그가 해야 할 어떤 댓가를 받지 않고도, 생활을 영유하기에 충분했 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애써 수공으로 일하면서, 그들로부터 어떤 신세도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가 도울 수 있는 한, 그가 교회를 아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고픈 자는 자주 격렬하게 나쁜 짓을 저지른다고 하는 그러한 도적질도 그가 하지 않았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악한 욕망으로부터 결백함을 말하고 있 다는 사실까지 주목해 야 한다. 그 것으로부터 우리는 동시에 돈을 거의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아무도 말씀의 선한 전달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하케 된다. 부끄럽게도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자들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킨다는 사실보다 더 일반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도처에서 바울은 감독들의 잘못을 엄격하계 꾸짖고 있다(전 3 : 3).

 

“34 너희 아는 바에~~~~” ;  그는 이 말씀들을, 하나님의.말씀의 모든 사역자들이 늘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율법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건방져서, 주께서 그의 종들에게 허락하신 것을 자기 자신이 털어 버리려고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많은 경우(許14)에 그는 그들을 위해서 그 자신의 권리를 긍정한다. 그듈이 공금으로 지탱해 나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는 많은 교회들이 음식과 옷이 자신에게 공급되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사실 그가 손으로 일한 풍수k을 기쁘게 받았을 뿐 아니라, 고린도에서 궁핍해 있었을 때, 자기의 가난을 덜기 위해 ‘다른 교회들을 탈취했다,(고후 11_:8)고 말하고.있기도 하다. 따라서 프가 목자들에게 단지 수공으로 하는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곧 이어서 어느 정도로 자기가 그들로 하여금 약한 자를 돕기 위해 자신의 모범을 따르라고 촉구하고 있는가를 명백히하고 있다. 그들 고린도인들은 그가 정해전 푼산을 받는다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짓 사도들이 일 안해도 좋다고 스스로 말 하고 있기 때문에, 또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의 인기를 애써 얻으려 하기 때문에, 바울은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에게 양보하거나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고전 9 : 15, 고후 11 : 12) 거짓 입장 속에 자기를 가두어 놓을 기회를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어떤 장애물도 약한 자들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그래서 그들의 신앙이 파괴 되지 않도록 그들을 잘 보호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약한 자를 돕는다'는 것은 로마서 14장 1절에 나타난 것과 같이 관대하게 그둘의 무지를 인정해주는 그 무엇과 똑같은 일이다.

 

“35  친히 말씀하신 바~~~~ 하심을 기억하여야~~~~” ;  이 문장은 축자적 (逐字的)으로는 그밖에 다론 곳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는 말씀둘을 기록하고 있 다. 그것들로부터 바울은 이 문장을 끌어낼 수 있었다. 두번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 전부가 다 기록되도록 위임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돈을 경멸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을 반복하고있다. 사람이 ‘받는 것보다도 주려'할 때, 그 사실이 순수히 증명된다. 마치 주는 자(the liberal)는, 단지 혜택을 베풍으로써 혜택을 받는 자가 빛진 것과 같은마음 율 품계 하기 때문만이 아니타 그리고 다론 한편으로 어떤 것을 빛진다는 것은 하나의 노예의 형태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한 것처럼, 그리스도께 서 어떤 타산적인 것을 말했을 뿐 아니타, 그분은 보다 깊은 무엇을 마음속 에 풍으셨다. 곧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는 자는 주님께 꾸이고 있는 것(장 19: 17)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충실하고 정직한 청지가들(stewards)유 자 기들에게 맡겨주신 그 돈을 형제들과 나누는 자들이라는 것, .그리고 자선을 베푸는 것보다 며 하나님께 가까이 갇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 셨 다. 자주성 (liberality)에 대 한 이 런 말씀들은 세 속 작가들의 작풍 속에 서 도 읽혀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씀들이 진실임을 받아들인다. 그 러나 그들은, 속담이 말하는 것처럼, 당나귀의 귀처럼 그처 끄덕이기만 한다. 즉 우리의 일상 생활을 통해 볼 때, 우리가 가전 재물로씨 형제들을 돕는 것보다 머 글바람직한 일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 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런 지복(至福)에 대해 보다 더 큰 열 십올 가지고 숙고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의 어떤 부를 탐내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오히려 주는 일에 익숙해지고 교만하지 않은 정신으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이다. 마치 그들이 어떤 사람에게 빛을 지게 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고, 또 타인운 그들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은 사악한 욕십으로부터 나온 일이라 함과 같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계 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들의 양자(養子)된 은혜를 증거하도록 해야 한다.

 

“36 무릎을 꿇고~~~~~~” ;  내적인 대도는 확실히 우선 기도로 작정되나, 외저 인 표시 들, 즉 무릎을 꿇는다든지 , 모자롤 벗 는다든지 , 손을 들어 올린 다든지 하는 것둘은 두가지 효용성을 갖고 있다. 첫째로는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하 ~ I 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섭기도록 하기 위함이고, 둘째로 우리는 말하자면 이 런 외적인 도움으로써 우리의 게으름을 자국시켜 주기 위해서이다. 대중 앞 에서 하는 전지한 기도에는 제 삼의 효용성이 있다. 즉 이런 식으로 하나님 의 자너들은 자기들의 경건성을 고백하고 하나님에 대한 존중심으로 서로를 가열(加熱)시키기 때문이다. 그라나 손을 들어 울리는 것이 확신과 소망의 상징인 것과같이 우리의 겸손을 보여주거 위해 우리는 무릎을 꿇는다. 

 마지막으로, 그는 방금 그가 기도로 한 내용을 확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성공적인 가르침을 바탈수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나오 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가르치고 경고하고권고하는데 마 라오는 고통에 대한 어떤 보상을 바란다면 늘 이런 결론, 곧 다시 말하떤 키모로 꿀을 맺도록 하자.

 

“37  다 크게 울며~~~~~”  ; 그 신자들 모두가 이 거룩한 사람들에게 넘치 는 애정율 표시했다는 것은 놀타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에게 그토록 많은 뚜렷한 선물로 채워 주셨는데, 자신들이 그를 도외시한다면 큰 배은망덕의 표시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가 말한 대로, 그들의 울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하계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상황을 한탄할 충분한 이유가 있 었고, 아시아의 모든 교회의 상황이 측량할 수 없는 보화를:빼앗기고 있음 율 그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누가의 입을 통해, 성령께서 마치 그들이 신실한 믿음의 증거 자들이었던 것처럼 그들로 눈물을 홀리계 했을 때, 그는 엄격하고 냉정한 굳은 마음을 산자들로부터 요구한 자들의 무분별을 정죄하고 있다. 왜냐하 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십어주신 그 감정이타는 것온 단지 결 함 (defect)에 서 나온 것 으로 그들이 잘못 상상하고 있 기 때 문이 다 .. 따라서 신자의 완전성온 그들 자신의 모든 감정을 벗어 버리는 데 달려있지 않고, 그것들에 맡기고 또는 보다 적절한 이유가 있을 때는 그것들을 다스 리는데 달려 있는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