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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사도행전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행21:21)

1. 성경 (행21:15 ~ 26)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5)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16)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7)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8)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19)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0)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1)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2)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3)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4)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5)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2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5  행장을 준비하여~~~~~” ;. 바울의 동료들은 그들이 바울을 위험에서 건지려 했을 때,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교회의 공통된 안전을-보다 더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기들의 좌절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결과는 그들이 똑같은 위험을 나누기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법이 없어도 한 사람의 고집을 통해 죽음으로 같이 꿀려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그럴 듯한 변명이 있었다. 우리가 두려움에 놀라서가 아니라 각자의 노력에 따라, 할 수 있는 한, 우리가 그분율 기쁘게 해드 릴 수 있는 것을 수행하려고 할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 그에게 기꺼이 가까이 하려는 자나, 그를 주인으로 대접 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강한 충성의 불꽃이 타오르는가 하는 것은 더군다 나 더 분명하다. 그듈이 많온 곤란한 일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것이 당연한 경우에도 그렇다.

 

“17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 누가는 정당하지 않은 풍문 (風聞)이나 곡해(曲解)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형제둘의 공명정대한 마음율 칭찬하기 위해,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 많은· 독종들과 사악한 사람둘이 차례로 매일 바울에게 증오로 무거운 짐을 지워 주었다 해도, 야고보(James)와 그의 동료들은 바울의 성실을 충분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대적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지금 형제애와 예절 바른 모습으로 그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영접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오심(his coming)이 그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기대해서 비도덕적인 비난을 믿어 버리지 않도록 이런 겸손한 태도에 성실하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자기들의 정당성에 대해 어떤 증거를 우리에게 준 자들, 곧 우리가 경험상 보기에 주님을 성실히 섬기는 자들이 의심스럽거나 혹은 확실치 않은 의무를 짐지워쳤을 때 그렇다. 사단은 신도들의 불화나 질투보다 하나님의 왕국을 흩어버리는데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서로를 의심하계 하는 간접적인 풍문을 쉬지 않고 퍼뜨린다. 따라서 우리논 좋은 소식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목자들에 관한 어떤 비난도 믿지 않도록 우리의 귀를 닫아야 한다.

 

“18 장로들도 다 있더라.” ;  이 귀절은, 15장에서 우리가 이미 본 것 같이 곧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장로들(seniores)이 모이는 습관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시끄러운 군중 없이 그들의 숙고가 보다 질서있게 전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조금 후에 일반 신도들은 역시 자기들의 차례에 따라 허락되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장로들이 스스로 보다 충분한 숙고를 한 후의 일이다.

 

“19절”  ;  바울은 그가 행했던 일들을 스스로 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오직 자신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노동만을 사용하시는 봉사자(the minister)라고 일컬음으로써 확실히 자신의 겸손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비슷하게 우리도 화려하고 칭찬받을 만한 것이 모두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힘에 의해 이루어전 것임을 고백해야 한다. 특별히 사실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문제일 때는 더욱 그렇다. 장로들온 그들이 홉족한 성공 덕분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그들에겐 자만심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과는 달리, 여기서 언급된 유일한 사도가 ‘야고보' 한 명이기 때문에 동시에 그들이 자신들의 임무가 요구되는 대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각기 다른 지역으로 가버렸었다고 추측해도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예루살렘에 그들이 머물러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그분은 거기서 시작하도록 그들을 명령하셨고, 그후에는유대와 그리고 마지막으로 땅끝까지 전파하도록하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15장에서(証4) 우리는 이 야고보를 바울이 교회의 세 기등들 가운데 포함시켰던 그 제자둘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실수를 반박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그의 동료들 중 남은 사람처럼 같은 책임을 가쳤다고 해도 그가 외국인들이 매일같이 관계를 몰려드는, 예루살렘에 남 아 있도록 그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고립된 장소에 멀리, 그리고 광범위하게 복음을 전했다떤 갈은 일을 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20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수만명이~~~~” ;  이 말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로 장로들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왔으나 모두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이`얼마나 많은가률 상기하고 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전적으로 그 모세의 율법을 배반하려는 목적에 열심을 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들은 바울로 하여금 진지한 서약을 하계 함으로써 스스로를 변호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더 이상의 의심이 그에게 가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바울 앞에 많은 신자들을 제공해 준다. 그가 그들에게 보다 쉽게 양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융통성이 없는 사람들 몇몇이 있었다면, 그는 그도록 크게 영향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는 수 많은 사람의 숫자와· 교회 전체의 성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윤법을 위한 열심이 잔못된 것임은 절대로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장로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도 옳게 보이지 않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을 공개적으로 정죄하고 있지는 않다 해도, 그들이 그런 자들의 태도와 스스로를 구별하고 있기 때문에 장로들은 그 유대인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만일 열심이 지식과 조화를 이루었었다면, 거기서는 그돌 스스로가 시작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싸우고 있지 않고, 변명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마땅한 존경심을 변호하지도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온 소위 열심당원(zealots)임을 인정하고 있지도 않다. 따 라서 그들은· 자기들이 다른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과 백성들의 미신을 인정 하고 있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쁜 평판 때문에 부담을 갖게 되었다 고 말함으로써 바울에 반대 하는 인상을 주고 있 다. 둘째 로 그들이 바울에 게 배상을 하도록 요구할 때, 그들은 그 열심당을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 나·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계 했던 그 풍문이 어느정도 사실이었다 해도 이계 그것은 비방으로 더욱 더럽혀졌다고 나는 말하겠다. 바울은 율법의 페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럽에노 봉구하고 율법의 권위 가 완전히 납을 뿐 아니타 보다 거록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율법 의 효과 (effectus) 가 그리 스도 안에 서 보여 지 지 않는다면 7 장 (社5)에 서 본 ~ 것처럼 의식들온 공허한 일들이 될 것이다. 따라서 율법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의식들이 페지되었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오히 려 율법의 전실성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의식에 관해서는 두 가지 면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효과적인 떤이 연결되어 있는· 전실과 둘째로는 외 적인 방법에 관한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전 의 식의 외적 인 실천의 철폐는 그 자신의 참 실체 (the true substance; solidum corpus)이시고 초기에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 주신 것이 없고 완전 한 것이 그분에게는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율법으로부터 의 탈피에서 그 적절한 목적을 보여준다는 것은 참으로 상치되는 일이다. 외형이 사라지고 그 영적인 전리만이 늘 영향을 미치게 한다는 목적일 때 구렇 다. 따라서 우리 는, 바울이 신자들에 게 율법 의 외 적 인 복종으로부터 되 몰아 서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배교의 책임만을 내세워 바울을 설득하고 있었던 자들의 해석이 의곡되고 부당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 신이 율법을 존경하는 자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특별한 목적으로 공중 앞에 서 서약케 하는 것은, 바울은 배교자 주님의 멍에를 스스로 벗어 버리고 비 슷한 불복종을 남에 게 강요하는 불경 스런 배 교자와는 달리 율법 을 증오하는 사람이 아님울 증명하려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았다.

 

“21 할례를 하지 말고~~~~~” ;  사실 그러했다. 왜냐하면바울은 자유가 유 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획득되었음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는 이런 만씀들을 모두에게 적용시킨다. "할례는 무익하다"(고전 7 : 19) 또 다시 "우리는 손으로 된 할례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세례로 할례를 받노라" 혹온 차타리 lxxeepo7roeiJ젝) (아케 이 로포이 에 -토-; 손으로 하지 아니 한 ; 골 2 : 11) 또는 "먹고마시는 것과 절기를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 것 들온 장차 울 일들의 그림 자나 실체 (substance; corpus; 한굴 개역 성경은 몸'이타고 했음-역자 주)온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 : 16,17). 또는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고 전 10 : 25, 27) 또는 "다시 는 종의 멍 에 를 매지 말라"(갈 5 : I)등의 말씀들이다. 그가 도처에서 예외없이 이린 식으로 말했었기 때문에 그는 율법을 지켜야 할 필연성에서 유대인들을 벗어나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 릅 더욱 오래 다루려고 소모할 필요도 없이, 한 귀절로도 충분하다. 그곳에 서 바울은 율법을 봉학 선생(a tutor)에 비교하고 있다. 마치 어린 시철에 그 몽학 선생의 보호 아래서 엣 교회들이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이제 그리스도의 은해가 알려지계 되었고 그것이 성숙하계 되었 키 때문에 모든 의식들로부터 자유하다고 이야기한다(갈 3 : 24 이하). 거기 서 그는 확실히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나란히 포항시킨다. 바울이 그리스도 께 서 "의 문에 쓴 중서 를 그리 스도께 서 도말하지 고……십 자가에 못 박으시 고" (골 2 : 14)라고 말할 때 , 그는 이 방인들과 마찬가지 로 유대 인들을 그가 ‘의 문(儀文)’이라고 부론 모든 의식들로부터 자유하계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악의를 품은 사람들이 상상한 것과 같은 그려한 율법에 대한 바울의 변절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의식들을 지 키는 것이 끝이 난다고 가르쳤을 때, 바울은 절대로 의식들윤 모두 집어 치 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로들은 화실히 바울의 자유(freedom) 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야고보와 장로들은 그 상황을 보다 적절하계 포 착하고 있다 해도,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경멸하도록 유대인을 설득할 의도 가 전혀 없었음이 그 무식하고 경험이 미숙한 자들에게 알려지기만 원하 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온 단순한 전리 (眞理)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 이지 않고, 악평에 기인된 바울에 관한 일반 대중의 여론이 무엇인지를 알 았기 때문에 그것을 수정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나는 바울에게 그들이 이렇 게 맹렬히 요구했던 이 일이 정당하기보다는 성급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 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사람들은 그둘이 무고(甄告)를 들을 때, 얼마나 불합리하계 쉽게 믿는가 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한번 곡해 (曲解; 誌6)가 무 분별하계 채댁되면,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야고보와 그의 동료들이 바울의 평판을 에씨 보호해주고, 그의 좋은 명성을 손상시키는 거짓말을 제거하려 고 애썼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나쁜 평판을 갖고 있는 것으 로부터 그를 막아줄 수는 없다. 곧 그들이 너무 느슨해서, 그들 자신의 지 방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려는 나머지 결국 나중에는 그들 자신도 스스로가 다스털 수 없는 일이 있지 않는 한 그렇다.

 

“22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 무리가 함께 올 것임에 틀림없으니-칼빈의 성경 ; 여자 주) 그 동사는 중립적이다. ace (데이 ; 를힘 없으니) 마치 그들이 저희가 함께 오리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라고 말 한 것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그렇게 큰 평판을 가전 사도가 신자들의 전체 모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 빛을피했었다면, 사람들의 눈초리, 곧 그 사악한 의심은 커쳤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장로들이 얼마나 온건하계 성숙한 조화 속에서 스스로 처신 했는가를 볼 수 있다. 그들이 그 대충의 불쾌한 일을 재빨리 예견했을 때 그렇다. 그들이 자기들의 약점 때문에 너무 너그럽게 생각해서 바울로 하여 금 맹세하도록 요구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다 좋다. 마지막으로 이런 온 건함은 교회에서 보존되어야 한다. 목자들이 실제로 권위를 높이 세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것을 자만스럽게 뽐내지 않고 그 교회의 나머지 모든 지체들을 경멸하지 않게 해야 한다. 평화로 연결된 서열의 구분 (ordnum distinctio)이라는 것이 불화를 위한 어떤 구실도 마련해 주어서는 아 니된다.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 내 가 방금 말했듯이 , 그 장로들은 그 들 자신의 민족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바보스러운 관용에 빠져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냉정한 판단은 오늘날에는 감추어져 있으나, 당시 그들에게는 분명했던 그 상황에 의존하고 있다. 대체로 대부 분의 교회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을 공격한다는 것은 위험이 없었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의 관습에 다라 행동하고, 그것을 하나의 법으로서 타인에게 부과하기를 원했던 것이 분리 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율법의 의식들을 지 키기 위한 많은 유인(誘因)들을 갖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오히려 그 의식들 울 서 서 히 포기 했 다면 더 잘 변 명 을 할 수 있 었 을 것 이 다. 그러 나 그 열 심 이 결점을 갖고 있었다면, 수정(修正)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려운 것처럼 그같 이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후인, 지금 우리는 이런 미신 이 사도들에 의 해 서 도, 거 의 파기 (破棄)되 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왜 냐하면 새로운 제자들이 매일 신앙의 킬로 길어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부드러움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길러지고 있다. 그러나 장로들은 관용적이라 해도, 완고함에는 무지가 곁들여 있음이 부인되어서는 아니된다. 실제로 그들은 과격한 구제책을 갖고 심각한 해를 끼쳤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핵심에서 너 누 멀리 떨어져 있는지 어떤지는 미해결로 남겨 두겠다.

 

“서원한~~~~” ;. 비록 이 네 사람들이 신자의 숫자로 계산되어도 좋다고는 해 도 아저 그들의 서원은 미신적인 것이냐 이로부터 사도들은 그 민족에 대 해 대단히 어려운 일을 많이 갖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 어려움은 율법의 훈련을 나날이 실전함으로써 더 욱 굳어 져 가고 있을 뿐만이 아니 라 자연히 대단히 독선적이고 거의 완고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초신자 렀고 따라서 그들의 신앙이 연약했고 아직 확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겨도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대중 앞에서 무지로 인하여 성급히 했던 맹세를 완성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바울에 관한 한, 그가 그 자신의 양심에 다타 이런 맹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실수를 관대하계 처리해 준 바 로 그들을 위해서라는 그의 이유는 이것과는 다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신자들이 주의해도 좋고 무시해도 좋았던 막연한 의식들 중 하나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그것과 혼합된 어떤 것들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신앙의 고백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어떤 것 말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우리가 전에 18장 18절에서 이미 보아온 대로 감사의 행위이므로 의식 그 자체로는 그리스도의 신앙과 모순되는 것이 하 나도 없기 때문에, 바울은 그 자신의 신앙(religionis)을 중거하기 위해 그 정도에는 주저없이 복종했다. 따라서 바울은, 마치 자기가 율법의 의무 아 래 있는 자처럼, 율법의 고수자들과 제휴하고 있다고 어떤 곳에서(고전 9: 20) 말한 것을 몸소 실행해 보이고 있다. 한 마디로 여러 사람에게 여러가 지 모양으로 된 것은· 모두를 얻기 위 함이 었다(고전 9 : 22). 그는 사랑을 내 제위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는 범위에서 스스로를 하락시켰다. 심지어 제 단 문제까지도 그렇게 했다. 그것온 자기가 속죄의 거룩한 회생제물이 되는 것이 마치 허락이나 된 것처럼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하나님울 예배하는 일이 서원에 의촌하여 있었지만, 그는 그다지 신중을 기하지 않고 이행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서원을 이행하는 일이 하나님 예배(religlonis)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약한 자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적했다. 그러나 이런 의식을 동해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어떤 의도도 갓고 있지 않았었고, 그의 양심이 어떤 의무 아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그리스도를 약한 형제들에게 복종지켰던 것이다.

 

“24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 . 그들은 바운에게 위선을 행하도록 자극하고 있는 것 같다. 그 풍문은 그가 유대인 으로 하여금 의식을 제거하도록 했다는 거짓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더구나 그가 율법을 춘수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이미 말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이 부당하계 낙인찍히게 된 그 비방, 곧 율법의 배신자라는 비방을 그들이 제거하려 했다면, 그것은 바울과 장로들 에게 가능했었다. 그리고 다론 한편으로, 보다 나은 기회가 짧은 순간에 주 어질 수 있었다. 즉, 그 자신을 깨끗케 함으로써 그들을 그들의 잘못으로부 터 서서히 되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바울이 율법을 오랫동 안 존중했던 자로서 간주되도록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확실히 없었다. 왜냐 하면 그 당시에 제자들도 그런 부류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두꺼운 베일이 그들의 · 눈을 가리워서 그리스도의 빛을 가로막았을 것 이다. 따라서 바울이 그가 율법에 대해 증오륜 하지 않았음은 그저 그런 척 한 것이 아니타, 성실하계 고백한 것임을 깨닫도록 하자. 오히려 반대로 율 법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일종의 존경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그 사람들의(駐 7) 비용도 지불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공기금에 헌금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 회생제물을 드리기 위함이었다(許8).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  그들이 이것을 부가하는 이유는 그들 이 전에 이방인에게 주었던 자유를 빼앗기를 원하거나, 또는 어떤 이적의 절정(praeiudicio)으로 그들이 침지위지게 되기를 요구하고 있지 않느냐 하 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들은 종의 멍에 아래 구속해 두고 이방인들만을그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의 조건은 평동했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권리와 같은 것에 대 해 똑같은 허 락을 받았다고 나는 대 답한다. 그러 나 유대 인들에 대 한 언급은 없다. 유대인들은 아칙도 그들의 의식들에 매우 몰두하고 있어서, 그 자유 가 비록 자기들에게 허락되어 있을지타도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도들은 특별히 이방인들을 위해 결의했다. 믿는 유대인들이 자기 들의 관습에 따라, 할례 받지 도 않았고, 율법 을 존중하지 도 않았다고 믿 는 이방인들을 더럽고 불경건한 자들이타고 거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다. 그러나 내가 불필요한 반복으로 이 지면(紙面)을 채우지 않기 위해 독자들께서는 15장에서 이 교령(敎令;decree)에 대한 나의 실명을 읽어 보시 71 바란다(행 15 : 20).

 

”26절” ; 나는 이미 바울이 실제적인 상황과는 다른 무엇을 제시했다는듯이 그를 교묘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어떤 이들의 비난을 이미 물리쳤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 형제들의 탄원에 못이겨 거의 양보하도록 강요되었음을 부정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곧잘 복종한다는 것 은 보다 그럴 듯하고. 그들이 말한 대로 하자면 보다 의문이 많이 남는다. 그러나 나는 사대가 바울에게 불행하계 판명되었다는 어떤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새롭고 익숙치 않은 역할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늘 했던 것 보다는 덜 확고하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자유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리석은 계획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때로 벌 을 받게 됨을 확실히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어째서 이런 사실을 바울에게 적용시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바울이야말로 자발적인 복종을 동 해 무지한 자들 그리고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 을 그들과 같이 낮추었지 않는가? 확실히 그는 그 일을 기꺼이 철저하계 해 나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견해를 위해 항거하기보다는 차 라리 그 형제들에개 복종하는것이 낫다고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가 일단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와 갈은 열심을 그가 조절한다는 것은 적절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신중한 고려 (humanitas)는 큰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무지한 자들, 즉 대중들의 이익을 위해 정중 하계 굴종하였을 뿐 아니타 자기를 부당하고 불합리하계 의십을 품고 대했던 그런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기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을 충고했다 해도 정당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보고들 을 속아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참음으로써 그는 놀라운 관용성을 보 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들을 설득함으로써 그는 놀람 만한 온건함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 훌륭한 것은 그가 야고보와 그의 동료들의 봉사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가 부지런히 사람 들의 과오를 일소시키는데 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충실하게 가 르쳤다는 것이 확실하다 해도 성전을 바라보는 것과 율법과 가까운 태도가 그 듄이 자유의 구가(調歌)를 옹호하려는데 방해물들아 된다는 것은 그럴 듯하 다. 그러나 그자신의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거나 혹은 그들이 편리한 것 올더 잘 본다고 생각하거나 간에 바울은 그들의 계획을 묵인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니고데무스(Nicodemitae)의 거짓 추종자들을 논박한다는 것은 그 다지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교황의 더러운 일들로 스스로를 타락시키 고 있으면서도, 바로 여기 나오는 바울을 예로 들면서 자기들의 기만스러운 불의를 애써 감추려 한다. 마치 바울이 실제로 구별없이 약한 자들로 모든 것을 행하도록 허락했던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악한 형제들에게 이것!¾ 양보하고 있 다고 자랑하고 있 다. 만일 그들이 유대 인들처 럼 우상숭배 로 타 락되지 않은 서원을 유대인들 가운데서 율법의 하나님께 이행하려고 했다 떤, 거기서 그들온 스스로를 바울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이 대체로 스스로를 불경스러운 꽁꽁연한 미신 속에 빠뜨리고 십자가를 피하려 는 갈망으로부터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것이 바울의 사건과 무슨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