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전 1: 1 ~9)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1)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4)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5)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6)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7)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8)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9)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하나님의.뜻을따라" ; 사도 바울은 그가 받은 모든 축복을 기쁘게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생각하므로, 여기서도 그는 그의 사도직에 대하여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교만의 요소를 모두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시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모두 은혜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사도직에 부름을 받는 것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회를택하여 세웠나니(요15 : 16)" 라고 가르치신 말씀과 갈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사도직을 박탈하려 하며, 또한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반대하려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반대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그의 사도직의 권위에 대한 어떤 허영적인 명예심을 자랑하려고 이 주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악한 방법으로 그의 사도직을 비방하려는 사람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도성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충분히 알려졌기 때문에 만일 불의한 자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이 명예를 공격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특벌히 재론 할 팔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 사도 바울은 그의 사도직에 대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하여, 또 그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서신의 거의 모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임무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과, 또 그의 편지의 수신인이 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의 사랑을 증거함으로써 그들이 바울 사도를 받아들이는 이 모든 일을 통하여 그는 스스로 권위를 얻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순수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우리의 관심에 대하여 신실하게 마음을 기울여주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신뢰하기는 쉽다? 그러므로 이 인사말에서 그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또 참으로 하나님의뜻을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자신을 설명하고 있을 때, 스스로 권위를 선포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가르치는 선생의 일에 전념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즉 첫째는 그 소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하고, 둘째로는 그 임무를 신실하게 잘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이 두 가지가 다 그에게 적용되고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 사도라는 이름으로서 그는 그가 그리스도의 대사(大使)로서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며, 또 참 복음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명예를 인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되므로 그는 그가 무분별하게 이 직무에 뛰어든 것이 아니랴,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누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인정하여야 하는가를 알기 위하여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고 지나가자. 즉 소명과 그소명에 대한 성실한 이행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정당하게 이 칭호와,사역자의 직무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만일 그가 이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역자들을 말 못하는 벙어리 우상이 되라고 택하신 것은 아니며, 그들이 소명을 받았다는 구실로 독재를 부리도록 허락한 것도 아니고, 또 그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변덕을 율법처럼 숭배하도록 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하여주고, 또 그들을 하나님의 율법 아래 두신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역자로 선택한 자들은 첫째로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둘째로 그들의 임무의 한계를 깨닫고 그 한계 안에서 처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직분은 소명에 달려 있으며, 만일 어떤 사람이 사도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그가 참으로 사도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하며, 그래서 사도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도록 하여야 하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그의 권위의 선포를 바로 이 근거 위에 두었으며, 만일 어떤 사람이 여기에 근거함이 없이 사도직을 소유하려고 든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오만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 그러나 참으로 이 두가지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지 않으면, 소명을 가졌다거나 그의 소명을 성실하계 시행한다고 선언하는 선포 그것만으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을 인정하기에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 하여야 한다. 특별히 그들 자신 하나님의 신실한 소명을 받은 사도라고 가장 자만한 자들일수록 사실은 하나님의 참 사역자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는 종종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오래전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고 오만스럽게 군림 한 적도 있었다.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성직 수임과 사도들로부터 그들에게 계승된 신성 불가침의 사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수선을 피우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결국은 그들이 그렇게도 우쭐대고 있는 그런 것들이 이 모든 필요한 소명과 그 직책 수행에 있어서 완전히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참으로 필요한 것은 자만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러나 참사도나 거짓 선지자들이 모두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누가 참사도이고 누가 거짓 선지자들인지 분별하기 위하여 시험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도 바울을 부르신 것을 나타내어 보여주며, 또 여러 기적적인 사건들로 그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참 교훈이 그를 통해서 선포되고 있는가 아닌가의 그 신실함이 이런 방법으로 확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소명과 교회의 소명에 관한 소명의 이중성(二重性)에 대해서는 나의 〈기독교 강요〉(4. 3, 11)를 참고하시라
"사도" ; 이 단어가 그 기원적(起源的)으로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질지라도, 더 나아가서 이 말은 때때로 구벌없이 모든 성직자들을 나타내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이 말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할 그리스도의 대위임령과 관계없는 그런사람들울 특별하게 지적하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두 가지 이유로 그들의 수(數)에 들어 간다는 것 은 중요한 일이다.· 그 첫째 이유는 복음의 다른 사역자들에게보다 그들에게 더 많은 존경이 주어졌다는 것이요, 두번째는 엄밀히 말하면 그들만의 모든 교회를 세울 권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형제 소스데네는" ; 이 사람은 고린도에 있는 회당장(會堂長) 소스데네(Sosthenes)로서 누가가 사도행전 18장 7 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그의 이름을 여기에 기록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위한 그의 헌신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있는 이 사람에 대하여 이해하고 관심올 가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바울 사도의 형제라 불리운 것은, 전에 그가 회당장으로서 가진 명예보다 더 큰 영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사도 바울이 사람들이 모인 곳, 하나님보다는 사단이 더 기세를 부리는 허물이 많은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 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 이상한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부하는 일이 없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부패 속에서도 어떤 형태의 교회의 유사성이 계속 나타나고 있을까?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즉,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이 성 (城)중에 내 백 성이 많음이라"(행 18 : 9)고 말씀하셨으므로 사도 바울이 이 약속을 기억하여, 교회 안에 많은 불의한 사람들이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수의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이런 큰 영예(하나님의 교회一역 자 주)를 교회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어떤 또는 다른 많은-악과 교훈과 예의에 대한 여러가지 타락이 교회 안에 침입하여 온 사실에도 불구하고, 참 교회의 표지가 아직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서 교회가 흠과 점도 없는 곳이라고 기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혹은 모든 것이 우리의 표현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모임으로부터 이 교회라는 명칭을 즉각 삭제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 구절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완전한 순결이 결여된 곳에는 교회가 있을.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시험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런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세상에서 자기만이 성자(聖者)인 척하거나 또는 다른 위선자들처럼 자기 자신을 위주로 한 다른 종파(宗派)를 분리하여 나가게 될 우려가 다분히 있다는 사 실이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인정하여야만 하었을까? 그것은 그가 그들 가운데 복음의 교훈이 있고 세례와 주님의 성만찬이 시행되며, 교회를 결정짓는 표지들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비록 일부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있으며, 또 오류가 온 교회에 스며들고 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교회의 이름이나 실재성(實在性)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야니다. 성만찬 시행에 어떤 결함이 있고 훈련과 도덕적인 추세가 크게 퇴보하는 경향이 있으며, 복음의 순수성이 비난을 받고 그들 스스로가 허례허식과 가식에 몰두하며, 그들의 사역자들의 만용 때문에 여러 당파로 갈라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그들이 근본적인 교훈 ---유일한신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기도하는 일-------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며,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성직자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교회는 아직도 그들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계속되는 곳마다, 그리고 내가 이미 말한 대로 기본적인 교훈이 존속하는 곳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축복을 다시 환기시키고 있는데, 그는 그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 그들이 그 축복을 감사하계 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도들의 봉사를 하나님께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들을 반대하는 것 이상 더 무례한 일이 어디 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이 두가지 특질을 사용하여서 누가 참교인 중에 포함되며, 누가 교회의 회합에 적절하게 속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만일 당신이 성결된 생활로서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사실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당신은 분명히 교회에서 숨기게 될 것이며, 동시에 당신은 교회에 속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聖化)되어야 한다. 더구나 ‘성화’ 라는 말은 분리 (分離)를 의 미 한다. 이 성화의 현상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봉사생활을 하게 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인간 본연의 부정한 본성으로는 성화될 수 없으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분리시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성화는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股體)로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그리스도 밖에서는 오직 부정이 있을 뿐이며, 성령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오고, 다른 근원이 없으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화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우리가 하나님께 연합되고, 그리스도안에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피조물' (고후5:17)이 되는 것이다. 다음에 오는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이란 무슨 뜻일까? 나는 그 뜻울 '당신이 거룩하다고 인정을 받았을 때' 라는 의미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첫째,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화의 이유는 한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은혜이지 인간의 어떤 선행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또 햐나의 의미는 복음의 가르침의 목적 그것 때문에 우라가 거룩하여진다는 우리의 고백과 일치하는 것이다. 첫번째 의미가 문맥상 더 적절한 것 같으나, 나머지 다른 의미와도 별 차이가 없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근거한 것이며, 또 그것은 우리의 소명의 묵표이므로, 이 두 의미는·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적어도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임을 항상 깨달아야 한다.
왜냐햐면 하나님만이 오로지 본성적으로 부정한 인간들을 성화시컬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사도 바울이 마치 그의 손가락으로.솟구치고 있는 성화의 샘물을 가리키듯이, 점점 차원이 높게 하나님의 은혜의 목표를 향하여 (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오신 것이다) 나아가게 하는것은 참으로 그럴듯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우리가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아 부끄러움 없는 생활을 하게 될 때에 실제로 우리가 성화되어야만 우리의 소망이 유효적(有效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별로 많지 못하다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약한 자가 이 숫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오직 그의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이며, 참으로 점진적으로 차례 차례 그 일을 성취하여 가시기 때문이다. 나는 사도 바울이 그 사역에 있어서 그들의 잘못 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임무에 대하여 등한히 하고 있는 그들의 게으름에 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치를 느끼도록 만들고 있 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처에서" ; ·사도 바울은 그의 일상적안 습관에 이 반대를 덧붙이고 있는 데, 왜냐하면 그의 다른 서신문의 인사 부분에서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그 대상들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볼의한 자들의 오전(誤傳)을 미리 제지하기를 원하였고, 그가 고 자세와 또 위엄을 갖춘 태도로 고린도교인둘을 대한다는 것을 위하여 그리고 그가 다른 교회둘에 대하여 가식을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서이다. 곧 분명히 밝혀지겠지만, 그가 자신을 위하여 작은 안식처를 만들었다는 잘못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마치 빛으로부터 벗어나거나, 혹은 비밀리에 사도들의 제계에서 자신을 탈피하여 버린 것처럽, 이 거짓말을 논박하기 위하여 그는 고의로 당당한 위치를 만드는 것 같이 보이며, 이 위치에서 그는 그의 복음이 널리 두루 전파되게 하려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 이 명칭은 모든 믿는 성도들에게 다 공통되는 호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믿음이라 할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 의무로 말미암아 그 신실성이 주로 평 가를 받게 된다., 신실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고 사도 바울이 말한 점을 우리는 역시 주의하여야 하며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위업이 확립된다. 왜냐하면 전도는 하나님 경의에 대한 기본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에서 기도는 제유법(提哈法) 에 의하여 나타내면, 그리스도 안에서 밑음에 대한 건(全;) 고백 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많은 귀절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오직 완전한 경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고백인 것으로만 설명하는데,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있는 것같이 보이지는 않으며, 그것은 성경 내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우리들의 것'과 ‘그들의 것'이라는 소유격의 단어들을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이것을 장소를 나타내는 탈격(奪格)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앞에서 그렇게 생각한 것은 크리소스톰(Chrysostom)을 따른 것이다 이런해석은 아마 각처에서' 라는 단어 들이 중간태 로 나타나기 때 문에 부적 당하게 보일는치 모른다. 그 러나 여기에서바울 사도의 헬라어 문장 구성온·조금도 무리가 없다. 내가 이 문장의 벌계이트 여운더 택하는 이유는,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장소를 .나 타내는 것으로 설명한다면, 부가천 귀철이 볼팔요할 분 아니라 아주 부적당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을 어떤 위치로 부르는 것일까? 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그둘은 그가 유대인三 말할 '수 있을까? 그러면 그가 다론 사람들은 어떤 칙무로 나타내고 있는 것 모든 다른칙무들이 남아 있다고주장한다. 그러나그 일까? 그들은 제상위 생각 역시 대단히 져합하지 못하다 •. 참으로대가 제의한 그 의미가 가장 적 절한 것잎데, 왜냐하면 사도바울이:‘각처에서 우리의 주(主).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모든 자’라고 이미 말하였고, 또 그리스도가 유대인이나 이방 인을 막론하고 그를 부르는 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의십할 여지없이 그리스 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저희와 우리의'타는 말을 덧 불이고 있거 때문이다.
"3. 은혜와 평강이 있기틀 원하노라" ; . 독자들은 이 기도에 대한 설명운 나의 로마서 주석 첫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루 나는 여기 에서 그 내용에대한 재론의 필요성운 갖지 않는다.
"4. 은혜틀 인하여" ; 은혜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모든 축복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축복은복음의 수단으로얻게 되기 때문이다. 은 혀1 라는 단어 가 여 기 서 는 하나님 의 호의 가 아니 고, 환유법 (換哈法)으로, 하나 님께서 인간에게 값 없이 아낌없이 부어주시는선물이다• 그태서 바울사도는 목별한 예(例)를 들고 있는데, ‘너희가 모든 것에 풍족하므로’라고 그가 말 할 때,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교훈과 말씀으로 실명하고 있다. 왜냐하 떤 기독교인들은 이런 부(富)를 풍요하게 누려야 하며, 이것온 우리에게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명예스럽고 더 높이 평가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이 풍요함이 무시를 받는다. 나는 ‘그 안에 서’라는 귀절을:::‘그로 인하여'가 보다더 타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내 생각 으로는 그것이 더 분명하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그리스도 안에서 풍 요함을 누리는데, .:z.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그에게 접붙임을 받았고, 더 나아가'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받은 모 든 것을 우리에게 분배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인사 부분에서 그의 권위가 그에게 직무를 주신 바로그 칙무에 있는 것이타고밝한후에~ r사도 바울은 이제 '그들을향 한 그의 사랑을 설덩하면서, 그의 교훈을◄그그들이 받아둘이게 하고있다. 아f 런 방법으로 그는 미리 그들을 달태서 그들이 그의 책망울 인내로주t 받아 들이게 하고 있다. 참으로 그는 그들이 받은 축복을 그· 자신이 받은것처 럼 기 뻐 함으로써 '그 가 그들을 사합한다는 확증을 그들에게 먼저 주고, 둘째로, 그가«그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과 그들의 미태에 텐한 좋은 소망을 가지고있다 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 다.-더 구나 바울 사도는 그가 그들이 받고 있는 모든 축복의 원천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기때문어i1·,,.그들이 그들 자신에대한 축복에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구여 기쁨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모든 축복이 하나님 께 로부터 왔으므로, ' '모든 찬양을 ,하나님 께 돌려 드려 야 한다:--~4본 말론 구는 이렇게 표현한고 있다 •. "나는:._tj회들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턴나이청객 합으로 하나님께 일광을 들리계 하려 함이라~--" 나는 로마서 주석f에서바울이 ‘그의 하나날’이라고 부름으로서· 무엇을 나 타내고 있는지를 설명하였다· . ,..,지 l 더 구나 1 바울-사도는 그가 고린도 호 고희 혼~인둘이· 우출대 기를:;-원차 않았던 것처럼,' 그들이 마땅히 긴집 권리를 갖지 않는 것을 칭찬하지두-않았다.-무 든 사람둔안 그런 '청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지타도, 도 그둘이 공 명십으로 많은 하나님의. 은사둘울 해칠지타도, 그는 그 은사들이 별 가치가 없는 것처럼 그것을 무시할수?l-없었다·국과거에는그런 현상들이 실재로있 었다. 그러나,이하나님의 1은사는:번의 경의를갖는 것이다. ' ' . _;" 다시, 하나닙희 온A}가 모든 것을 수입후}는근거로주어졌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것운 전(全~u교회에 대한~,공통켜인 온산로 생각하는 것은정당한 일이다.
"6. 그리스도의 중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_,에라스무스(Erasmus)의 번역은 ‘이 모든 것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증거가_너희를 견고케 하며' 라고 하여 다른데, 지식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 두 단어는 모든 것에 대하여 다론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만일 그들이 잘뭇된 것이 아니라면, 그 의미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모든 것이 다 잘 확립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인쳐 주신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온 두 가지 방법으로 성취될 수 있는데 그것은 기적이나, 혹온 내적(內的)인 성령의 층거를 통한것 이다. 크라소스톰(Chryspstom)은 기적의 방법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더 광범위한 방법으로 생각한다.무엇보다도 먼져 복음은 믿음으로 우리에게 확충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라가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한 바로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시다"(요 3 : 33) 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적이 믿음을 확고히 하는데 가차가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더 차원이 높은 근원, 곧 성령께서 창되시며 , 또 .그 보증이 적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즉,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께서그의 복음이 그들 가운데서 결실하게 하신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그때도 그 지직에 있어사 풍요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것울 한가지 방법으로만 나타낸 것이 아니라, 정링의 대면적인 여사와 은사의 학월성과 다양성흥동하여, 그리고 기적불과다릅-여러 가지를통하여 돕는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나J그리츠도에게 판 계되는 모든 것이 바울이 복음울 증거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 훌음 증거의 전 목적이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갑취어져` 있는~(골 2 : 3)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디다; 만일=-어떤 사람 아,' 복음의 원처 자(原著者)가 그리 스도아기 때 문에 , 사도들은 제 2 차적 일 분이 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증인들에 블과할 분이 라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람 과 다툴 의사가 조금도 없다; 그러나전자(前者)의 설명이 나에게든훨씬 더 타당한 것 같다. 나는 조금 뒤에(2°:-1) ' '하나님의 증거' 가` 수동적인 의미 로는二부적합하기 때문에 툴림없이 능동적인 의미가되어야 한다놉간실을인 정하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며,' 더 나아가서 바울(사도까'곧인용하고 있는 ‘그리스도 의에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르;(2 : 2)라는 말씀이 부가되었기 때문에 바로 이 귀철은 나의 견해를 확고히 한다.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 '휘스테레이스다이'는 사실상 당신이 절실히 필요한 것을 무엇인가 갖지 못한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모든 하나님의 은사에 필요하며 참으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은 여러분이 복음의 빛으로서의 가치를 가졌다고 인정하실 뿐 아니라 여러분이 믿는 자의 구원의 발전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모든것을 여러분에게 제공하여 주셨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이 은사를 말하자면 믿는 자에게 구원의 방편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믿는 사람을 이 어떤 은혜의 결핍을 느끼지 않을 만큼 결코 그렇게 풍요하여 본적이 없으며, 그래서 그들은 항상 "주리고 목마르다' (마 5 : 6)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불완전하치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그들이 필요한 은사를 충만히 받고 있으며, 또 그들이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그들을 채워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풍요를 보증 받고 있다고 바울사도가 말한 것이다. 동일한 이유로 그는 나타나심울 기다린다 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그런 부(富)를 가졌다고 바울 사도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완전에 이를 때까지 만족 시킬 그 무엇을 가졌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이라는 현재 분사를 ‘당신이 기다리는 동안에' 라는 의미로 나는 본다. 그러므로 그 뜻은 ‘여러분이 영적 은사의 부족이 없는 동안, 우리의 지혜이신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나타나실 완전한 계시의 날을 기다리는 동안' 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8. 주께서 너희를……견고케 하시리라" ; 여기 관계사는,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을 나타낸다. 비록 하나님의 이름이 더 멀리 앞에 나타나 있지만 사도 바울은 계속 그의 기쁨을 나타내며, 위에서 그가 그들에게 대한 느낌울 말하였던 것처럼, 이제 그는 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을 향한 그의 사랑의 확신을 그들이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자신의 모범으로서 동일한 희망을 갖도록 그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너희들이 장차 다가올 구원을 기다림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러나 결코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포기하시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시작하신 것을 직접 이루시어,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는 그 날이 올 때에, 우리가 흠 없이 나타나도록 하실 것이다"(고후 5 : 10)라는 말과 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자." ;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우리의 소명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서 거룩하고, 홍이 없게 하시려는 것(엡 1:4, 골1;22)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성결이 우리 안에서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메일의 참회를 통하여 계속 향상 되어가며, 하나님 앞에 정죄를 받아 마땅할 우리의 죄가 정화되어서 마지막에 사망의 몸(롬 17 : 24)을 벗고, 죄의 모든 불의가 제거될 때까지 계속 성화의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9. 교제케 하시는" ; 이 말대신에 에타스무스는 ‘협력커F하는'이라고 쓰고 있 다. 벌게 이 트(Vulgate) 성 경 은 마교’ 라~ • 발을1 쓰고[-셨 다. 그러 나 나는 ‘교재'타는 말아더 타당한 것으로본다.· .. 왜냐하면 그것이 헬라어 Koeuwu,d(.코이 노니 아)를 더 강력 하계 표현하돈 말이 기 때 문이 다. 복음의 전 목적은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만들고, 또 우리를 그의 지체(It!{體)로 접 붙임받게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그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을r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롱하여 역시:하나님 자신을 천히 나타내 보이시는 것 이다.,-::z.리고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모든 축복을 참으로1분배받게 되는것 이다. 그러므르-사도 바울의 논증은 이렇다• 즉 너희들이 복음을통동R여 그 리스도와 교제하게 되었으며,~ .이 복음은믿음으로 받은 것이다. 또 너희문 온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그리스도에게 참여자가 되었으므로 죽음의 위험 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잡i는 것이다. .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이 인간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는 불안하고'참으로-~ 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구 원의 확증에 관한한, 다른방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일원으로나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크티스도의 모든 축복이 그의 것이 되는 것이다.-이렇게 노가 결코 실패를모르시는 그리스도의 일원으로서의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는최 후까지 인내할 수 있는 확실한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 . 하나님은미쁘시도다. 성경이 하나님을 미쁘시다고 표현할 때 그것은 하 나님의1 불변성과 그의 영원하신 속성의 일관정(perpetuum-tenorem)을 의 미하며{-뇨러므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무벗이나 완성을 하신다는 것 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십에는 후회하십이 없느니라"(름 11 :29)고말하였다O I. • ' 그러므로 나는 이 귀철을 하나님의 목적에는 동요합이 없으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우리를 부르십을 장난으로 하시는 것이 아 니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을 영원히 이루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에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미태 에도 항상 좋은 희망을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그의 관십올 더 높은 데로 들리고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버림을 받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 온 밝히고있다.. '그러나 이 논증이 무손 가치가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처 모 든 사람이 그의 선택에 대한 그 자신의 소명의 증거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소명에 대하여 동일한 확증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 러나 우리는 사랑으로 우리의 판단력을 발휘하며, 많은 사람들이 부르십(소 명)을 받은 것처럽, 우리도 구원으로 부르십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증하자 나는 둘 다 효과적이며, 좋온 결실을 맺은 것을 확신한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뿌리를 십어 주시고, 그 뿌리 속에서 어떤 열매가 그 결과로 나타난 그런 사람들임을 가리키고 있다 •. 어떤 사람은, 말씀을 받은 많은사람이 후에 타락하는 수도 있다고 반론을 재기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나는 성령만이 홀로 선택받은 사람들 각자에게 신실하고 확실한 증가이시며, 그 견인(堅忍)에 달려 있다고 대답한다 .. 그러 나 더 나아가 나는 이것이 바울의 설득을 제지하지 못하며, 사랑의 십판에 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부르십온 바울 사도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 지의 선한 뜻의 증거를 발견하기 때문에, 더욱 ·확고하며 혼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이런 증거들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단순한 육신적 안전성 에 대한 감성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참으로 우리에게서 그런 안전성에 대한f감성을 제거하는 우리 자신의 연약성에 대하여 때때로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도 바울에게는 그들이모든 과오에 부딪칠 때마다, 그들이 낙십하 게 될 것을 막기 위하여 이 서신을쓰는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이 문재에 대 하여 그가 후에 그들에게 나타넬 것이지만, 이 모든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 면 다음과 갈다. 신실한 기 독교인들은 바론 구원의 길로 나아오는 모든 사 람둘에게 대하여, 또 그들이 구원의 과정에 머물러 있는 사실에 대하여 항 상 선한 소망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아직 많은 악으로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그때부터 그 사람은 그리스도률 깨닫는 하나님의 성령 의 조명을 받고 있으며, 우리 각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어 그71-영생의 기업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 여야 한다. 효과적인 소명(召命)은 하나님의 양자된 믿는 사람들에게 증거 가 되어야 한다. 이 문재에 대해서 후에 10장에서 더 자세하계 언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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