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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후서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벧2:9)

1. 성경 (벧후2:9 ~ 16)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9)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10)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11)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2)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13)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4)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5)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16)

 

2. 묵상 (Calvin선생주석)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  연약한 자들이 넘어지는 첫 번째 원인은 신자들이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때 늘 곁에 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즉시 도움을 받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들이 매일매일의 시름과 괴로움 중에서 위축을 당하도록 주님께서 허용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는는 것이다. 두번째의 원인은 악인들이 하나님께서 마치 그들의 악을 눈감아 주시듯이 잠잠하신 동안에 아무런 형벌도 받지 않고 오만하게 행하는 데에 있다. 베드로는 이제 이 두 가지 문제를 처리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때가 차면 경건한 자들을 시험에서 건지시리라고 증언한다. 이 말로써 그는 우리에게 이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문제들이므로 시험의 때를 인내로써 극복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에 대하여 그의 보응을 연기하실 때 굴복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와 같은 위로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하다. 이것은 주께서 만일 자기 백성을 홈없이 지키기를 원하신다면 어찌 그가 자기 백성이 서로 거룩하게 살도록 장려할 수 있는 세상의 어떤 곳에 그들을 함께 모아놓지 아니하실까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찌 성도들을 악인들 가운데 섞여서 살게 하시는가? 성도들이 악인들에게 오염될 염려가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돕고, 보호할 책임을 지시고, 그들을 선한 싸움에서 실패하지 않게 하시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되어 더 열심히 싸우게 된다. 전반절의 요점은 곧 경건한 자들이 온갖 시험을 당하되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에서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복된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이 원리를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이다.

 

"불의한 자" ;  이 하반절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얼마동안 그들의 시간을 갖도록 그의 심판을 늦추시지만 결코 그들을 처벌하지 않은 채 버려두지는 않 으시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사도는 특히 가혹한 악이 우리를 깊이 상하게 할 때 우리가 자주 갖게 되는 지나치게 조급한 마음을 바로잡아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악인에게 벼락이라도 내리시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가 만일 지체하시면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심판주가 아니신 것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일시적으로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우리를 혼란시킬 것에 대비하여 사도는 우리에게 주께서 심판날을 정하여 두고 계시니 비록 그날이 당장에 오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악인은 그 날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지키시며," ;  이 말 위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사도는 마치 그 악인들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심판날에 이끌어내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사슬로 단단히 결박하여 두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콜라죠메누스'는 비록 현재분사이나 그들에게 형벌을 내리기 위해 지키는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사도는 우리가 인내로써 끝까  지 역경을 이겨나가도록 최후의 심판날을 기대하며 소망을 굳게 붙들 것을 권면하고 있다.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  사도는 이제 그의 특별한 주제에 이르러 그 일반원리를 특수한 명제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는  극악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하나의 엄청난 보응이 필연적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실 것인데, 이성 없는 짐승같이 온갖 불의와 죄악에 자신을 내던져버린 그들이 어찌 그 형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육체를 따라"라는 것은 마치 짐승들이 이성에 따라서, 혹은 책임감 있게 행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들 육체의 욕구를 좇아 행하듯이 자기 육체의 정욕에 따라 행하는 것을 뜻한다. "더러운 정욕"이라는 말을 우리는 사람들이 모든 정직한 동기를 다 내던지고 수치감을 다 팽개치며 타락으로 치달을 때 갖게 되는 호색적이고 무절제한 정욕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사도가 그들을 지적하고 있는 첫번째 특징은 곧, 그들이 악에 빠진 부정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밖의 특징을 예를 들자면 그들이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주신 사람들을 훼방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가 결국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들이 권위를 모욕한다는 말을 하고 나서 사도는 이 악의 근원은 그들이 약하게 고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교만을 더 훼방하는 일조차 겁없이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 사도는 그들이 명예 있는 자를 훼방하는 일조차 겁없이 행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높은 지위에 두신 명예 있는 자를 훼방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사도가 영광 있는 자라는 말로써 황제들과 관원들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비록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는 존경할만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관리의 직분은 다른 직분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인류를 다스림에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대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사도가 하반절에서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곧 그가 언급하고 있는 자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혼란을 초래하는 미친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누구든지 세상을 무정부상태의 혼돈(dvapxias;아나르키아)으로 만들면 반드시 무질서(ditagia; 아타크시아)가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뻔뻔스럽게 관원들을 훼방하여 공공법률과 질서에 대한 모든 존경심을 말살시켜 버린다. 이것은 사실상 그들이 참람한 말로 하나님을 공격하는 행위였다.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광포한 자들이 많다. 그들은 모든 칼의 권세는 야비하고 불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치체제들을 뒤엎는 일에 분주히 날뛰고 있다. 복음의 진보를 뒤엎는 그러한 난동들은 사단의 사주를 받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사 이 치명적인 독소에 주의하도록 경고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옛날의 본보기를 통해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굳세게 해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우리가 그 폭도들을 가르침으로써 무기를 제공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이 부당함은 마치 교황주의자들이 그책임을 사도들에게 돌릴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인데, 사도들은 이런 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  사도는 그들이 감히 천사들보다도 더 값진 자유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분별없는 생각을 지적해주고 있다.  사도가 천사들은 관원들 앞에서 그들을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좀 이상하다. 그들이 어찌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으로 알고 있는 신성한 질서(sancto ordine)를 반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어찌 일어나서 그들과 동일한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관원들을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할 것인가? 이와 같은 이유로 어떤 이들은 여기에 언급된 바가 마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하면서도 그 난제를 피하여 나가지 못하고 있다.어찌 사단이 그처럼 온화하게 사람을 아낄 것인가? 그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모든 훼방의 원흉이 돌아니던가? 그들의 견해는 유다의 .말로써 반박되고있다.

 

우리가 만일 그때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여기에 언급된 바가 거룩한 천사들에 대해서 매우 적합한 말인 것을 알게 된다. 이는 그 당시에 거의 모든 관원들이 불경건하고 피흘리기를 좋아하는 '복음의 원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복음의 수호자들인 천사들에 대해서 증오심이 가득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관원들의 증오와 저주를 산 자들이 그 관원들에 의해서 정죄를 당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능에 대한 존경심은 보존된다고 말한다. 사도는 천사들이 이처럼 자제하고 있는데도 이 무분별한, 악인들은 그들의 사악하고 무절제한 훼방을 담대하게 계속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 사도는 불경건하고 패역한 자들에 대하여 앞에서 시작했던 말을 계속해 나아간다. 먼저 그는 그들의 삶 전체에서 드러나는 타락한 도덕과 부정한 악을 지적하고 그 다음에 그들은 욕지거리로 교활하게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일에 담대하고 고집스럽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그들을 먼저 "이성 없는 침승"에 비유한다. 짐승들은 올가미에 걸리면 자기 스스로의 몸부림에 의해서 '죽기를 재촉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도는 마치 그들이` 어떤 유혹으로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사단과 죽음의 올가미에 뛰어든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이 "이성 없는 짐승같아서"라고 번역한것을 베드로는 문자적으로 자연 그대로 태어난 김승같아서 라고 언급하지만 그가 어느 쪽을 염두에 두고 이 귀절을 사용했든지간에 의미상에는 별차이가 없다.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 ; 이 말은 앞에서 방금 언급한 교만을 가리킨다. 사도는 온갖 뛰어난 것이 그들에 의하여 무례히 멸시를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말할 수 없이 어리석어서 짐승이나 다를 바 없이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내가 "저희 멸망가운데서", 혹은 "저희 부패 가운데서'로 번역할 수 있는데 어느 편을 택하든지 간에 상관이 없다. 헬라어 원어 '프도라스' 는 그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것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부패 가운데서 멸망하리라는 말로써 사도는 그들의 부패가 그들의 운명을 자초하게 되리라는것을 뜻하고 있다.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여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 이것은 마치 사도가 그들은 그들의 현재 연락에서 그들의 행복을 찾는 자들이 마음을 쓴다는 사실에서 짐승보다 더 나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현재 상태에 몰두하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다. 사도는 이 말로써 우리가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현재의 쾌락과는그 인연을 끊어야 마땅하리라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이 사람들이 경건한 자들을 더러운 것으로 얼룩지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그들이 경건한 자들과 즐기는 동안에 그들의 잘못에 도취되고 그들의 표적과 행동을 통해서 음란한 정욕과 무절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이 귀절을 '그들이 그들의 잘못 가운데서 즐김으로써 너희를 조롱하며' 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너무나 무리한 번역이다. '그들이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 자신의 잘못으로 너희를 조롱하며' 로 풀어쓴다면 적절한 번역이 될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가장 적합해 보이는 뜻으로 번역해 두었다.

 

"14. 음심이 가득한 눈  " ;  이런 눈을 가진 자들은 곧 호색적인 자들을 뜻하며 무절제한 죄에 끊임없이 도취되는 자들을 가리킨다. 사도는 이제 그러한 자들에 관하여 서술해 나아간다.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  이 유혹의 비유는 신자들에게 유혹자들의 숨겨진 간사한 속임수에 주의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사도는 그들의 속임수를 부주의한 자들을 사로잡아 연망에 빠뜨릴 수 있는 올가미, 혹은 유혹에 비유하고 있다. "굳세지 못한 영혼들"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는 우리가 각별히 유의하여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는 믿음에는 굳게 뿌리를 박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동시에 그들의 간사한 유혹에 .말려드는 자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선언한다. 이는 그들이 확고한 뿌리가 없는 탓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한 믿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불경건한 자들의 유혹에서 안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될것이다.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 ;  에라스무스는 탐욕을 강탈로 번역하고 있으나 그 헬라어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나는 탐욕이라는뜻을 택한다. 그 이유는 사도가 방금 음심이 가득한 눈을 정죄한 것처럼 여기서도 역시 마음 속에 숨겨진 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악이 단지 탐욕에만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저주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능동태와 수동태의 의미중 어느 것으로도 해석될수가 있다. 곧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저주는 그들과 함께 다닌다는 뜻, 또는 그들은 스스로 저주를 받은 자라는 뜻으로도 해석될수가 있다

 

여기까지 사도는 악인들이 그들의 타락한 생활의 본보기로서 경건한 자들에게 끼친 해들을 서술하였다. 이제부터는 그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불경건의 치명적인 독을 퍼뜨리고 있으며, 그 독으로써 그들이 어리석은 자들을 파멸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다. 사도는 그들을 돈에 매수된 허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던 브올의 아들인 선지자 발람에게 비교한다. 그들은 길게 반박할 가치도 없는 자들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는 발람이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나귀에게 책망을 받았으며 그의 미친 짓이 그 책망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그 증거로서 사도는 신자들에게 그들과 상종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천사가 그 선지자에게 나타나기에 앞서 나귀에게 먼저 나타났으며 하나님께서그 이상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나귀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 걸음을 하는데도 그 선지자는 자기 자신의 탐욕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로막고 서 계신 그 길로 강행해 나아가려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었다.

 

마지막에 그에게 내려진 가라는 응답은 허락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의분의 한 표시였다. 드디어 그 의분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입을 여셨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규례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던 그는 나귀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뜻은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데 있었다. 여기서 발람이 무슨 권리로 선지자의 이름으로 구별되었는가를 물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수많은 사교들에 속하는 자였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예언의 은사는 특수한 것이어서 참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리고 참 종교를 붙들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그 은사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더우기 우상숭배 가운데에도 예언을 두셔서 사람들로 핑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무릇 베드로가 말하는 바의 취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경고가 우리의 시대에도 역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될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그와 같은 질병이 만연하여 사람들이 상스러운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재치를 빙자하여 모든 종교를 훼손하고, 짐승처럼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고행하면서도 신자들과 섞여 있음을 본다.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많은 말을 지껄이나 항상 그들의 혀로 마귀를 섬기므로할 수 있는 대로 온 세상을 파멸로 이끌어가려 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발람보다도 더 악한 자들이다. 그 이유는 발람은 적어도 그가 저주를 하려 할때, 그가 받게 될삯을 인하여 유혹을 받았지만 그들은 아예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