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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후서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벧후1:19)

1. 성경 (벧후1:8 ~ 21)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8)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9)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0)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11)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2)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3)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4)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6)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7)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8)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19)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0)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21)

 

2. 묵상 (Calvin선생주석)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사도는 우리가 덕과 지식과 절제, 인내, 경건 등의 덕을 부여받게 될 때 비로소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 되었음을 인정받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효력을 발생하는 것, 곧 열매를 맺게 하는 살아있는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 지 않게 하려니와." ; 이것은 사랑과 인내와 절제 등의 은사가 없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자랑하는 자들은 근거없이 거짓으로 자랑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 20절 이하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자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써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는 바와 같다. 사도의 목적은 신자들을 인내와 경건과 절제와 사랑에 굳게 세우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이와 같은 은사들 가운데서 계속하여 바로 성장해 나가도록 하는 데 의도가 있었다. 이는 우리가 푯대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전진하여 하나님의 은사들이 우리 안에서 넘쳐나도록 해야만 한다.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  사도는 이제 믿음 자체만을 내세우는 자들은 사실상 믿음이 무엇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한 자들임을 분명히 지적한다. 그들은 복음이 빛으로써 우리에게 밝혀준 길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므로 마치 소경처럼 어두움 가운데서 헤매고 있다고 말한다. 사도는 그들이 이와같이 된 이유로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긍훌로 말미암아 그들의 옛 죄를 깨끗하게 하신 사실을 잊은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의 앞서 한 말을 확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기초이다. 바로 여기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아니한 자들은 믿음의 기본적인 규칙조차도 지키지 않는 자들 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베드로는 아직도 정욕의 진흙 구덩이에서 딩굴고 있는 자들은 "옛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잊은" 자들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가 다시 더러워지라고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사도는 옛 죄를 언급하고 있다. 옛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우리의 삶이 새로와져야 하고 달라져야 할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가 죄로부터 씻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도는 지금 누구나 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모든 악에서 깨끗하게 될 수 있다거나 혹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그 죄 씻음이 단순히 사죄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우리를 택하여 불러내셨은즉 마땅히 불신자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 고 있다. 우리가 비록 매일 범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일 용서하시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할지라도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되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가 지배하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6장 11절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사도는 이 말로써 한 논증을 끝맺는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선한 양심과 정직한 삶으로 그 열매를 맺게 함으로써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이며 헛되이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있다. 사도는 이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힘을 써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이는 그가 이미 앞에서 믿음의 열매가 없는 메마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본들은 '선행 에'라는 말을 갖고 있는데, 이 말이 덧붙여진다 하더라도 그 의미에는 변동이 없다. 왜냐하면 그 말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는 비록 순서상으로는 택하심이 먼저이고 부르심이 나중이나 부르심을 먼저 언급한다. 그것은 곧 택하심이 더 중요하고, 또 문장의 서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은 끝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너희가 헛되이 부르심을 받거나 택하심을 입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힘쓰라는 말이다. 사도는 여기서 부르심 이라는 말을 선택의 결과나 증거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누가 만일 그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본다면 반대하지 않겠다. 이는 성경이 때로는 이 두 단어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보다 주석다운 의미를 제시하였다.

 

이제 문제는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의 확고한 여부가 선행에 달려 있느냐, 달려 있지 않느냐에 있다. 만일 그것이 우리의 선행에 달려 있다면 곧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 연관된 가르침은 우리의 택하심이 우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에 기초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비로소 우리의 부르심이 시작되어 그의 은혜로우신 선으로 말미암아 완성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소피스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는 것을 우리에게로 돌림으로써 이 증거를 왜곡시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궤변은 쉽게 반박할 수가 있다. 만일 누가 자기의 부르심이 사람들에 의해서 확고해진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잘못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므로써 누구나 자기의 부르심을 확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소피스트들이 내린 결론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동기에서 끌어온 증명이 아니 라 표적이나 결과에서 끌어온 증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택이 왜 자주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여 주지 못할 뿐더러 여기에서는 선택의 효력이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결론도 이끌어낼 수가 없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의 은밀하신 경륜 가운데서 생명을 얻도록 예정하신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그의 순전하신 은혜로써 그의 부르심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나가신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되 그의 앞에서 정결하여 점도 티도 없이 드러나게 하실 목적으로 부르셨으므로 정결한 삶은 선택의 확증으로 인정된다. 그로써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믿음에 자신을 일치시키게 된다. 이리하여 그들은 확실한 믿 음의 토대 위에 서게 된다.

 

나의 견해로는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이 확증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사실 부르심이란 거룩한 삶으로써 확증되어 나타나는 것이라는 의미로 단순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본문을 '너희 부르심이 확실해 지도록 힘쓰라' 고 읽을 수가 있다. 이는 동사 '포이에이스다이'가 중간태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지간에 그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그 요점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들이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표적으로 말미암아 버림받은 자들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런 사악한 자들이 그들이 받은 무조건적인 선택을 온갖 방종의 구실로 삼을 때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인가는 분명하여진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의와 거룩함으로 예정되어 있으므로 내어놓고 범죄를 해도 벌을 받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  베드로는 다시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의 '과정을 진행시키시고, 또 우리가 그의 은혜 가운데서 요동치 않고 계속해 나아갈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는 단순히 위선자들은 확고한 터 위에 서 있지 않아서 위태하지만 선행으로써 자기의 부르심을 확증한 자들은 그들을 받침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확고한 터가 되므로 실족할 위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일본이다. 이와같이 우리 구원의 기초는 분명히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동기와 원인이 확실히 우리 밖에 있음을 알 한 게 된다. 베드로는 주께서 참되고 확실한 소명의 근거를 그들 안에 놓아주 셨기 때문에 그들 안에서 성령이 유효적으로 역사하고 계신 것을 느끼는 지자 뒷 는 들에게 장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  이 말로 사도는 성도의 견인의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이 귀절의 의미는 곧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새 은혜를 넉넉히 주셔서 너희로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 말이 덧붙여진 것은 비록 우리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나 그것은 또한 우리의 장래 소망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 혹은 구원의 궁극적인 완성에 이 르기까지 우리는 아직도 가야 할 먼 길을 남겨놓고 있다. 그 먼 길을 가는 동안에 우리는 수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주께서 너희에게 그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필요한 은혜를 넉넉히 주시리라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의심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칭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오직 그의 인도하심과 은총으로만 .하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12. 이러므로~~~~~~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 사도는 우리가 자주 사람들에게 무엇을 상기시킬 때에 그들의 주의를 충분히 끌지 못하고 또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봄으로써 신자들에게 그 주제가 중요하고 또 큰 것이기 때문에 이미 잘 알려져 있고 그들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을 재삼 강조하는 일에 대하여 양해를 구한다. 그는 너희가 실로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있는 한 내가 마치 너희가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너희를 강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처럼 중요한 경계와 권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는 법이 없으니 그것을 지겨운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역시 로마서 15장 14절 이하에서 비슷한 형식의 변명을 하고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도니"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확실한 믿음으로 이미 소유하게 된 바를 사도는 "이미 있는 진리" 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는 저들의 믿음을 칭찬하여 그 믿음을 더욱 굳게 붙들도록 권하고 있다.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 로 여기노니." ; 이제 사도는 그의 충고가 유용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밝힌다. 이 충고는 그대로 두면 육신의 나태함으로 승리하지 못할 신자들을 격려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사도는 비록 그들에게 교훈이 부족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 권면이 좋은 자극제가 되어서 부주의와 방종으로 도말미암아 그들이 바로 배운 바를 집어던지고 끝내는 아주 망각해 버리는 일 (자주 그러할 때가 있는 바와 같이)을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가 이 뜻을 그의 마음에 더욱 굳게 품은 이유를 덧붙인다. 그것은 그가 자기의 때 가 얼마 남지 아니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내 시간을 진지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주께서 나에게 이 세상에서의 내 생명이 오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알리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권면을 받는 신자들이 자기가 잘못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사도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우리는 권면을 듣는 자들로 노엽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과 동시에 충분히 교훈하고 훈계하는 일도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보다 엄격한 명령이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온건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재치있게 격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우리의 남은 생애가 짧으면 짧을수록 우리가 더욱 열심히 우리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우리가 우리의 임종할  날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은혜를 받는 것은 보통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이 들었다거나 몸이 쇠약해져서 자기의 남은 때가 많지 않음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주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들을 제때에 완수 해야 할 것이다. 실로 신체가 가장 강건하고 또 꽃다운 나이라 할지라도 매일 하나님께 바람직한 순종을 드리지 않는 자라면 그도 마땅히 자기에게 죽음이 다가올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일에 부주의하고 태만해서 선을 행할 기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나는 베드로가 이제 죽고 나서도 그들로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가르침의 권위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우리에게 하는 일말은 마지막 유언이요, 또 약속의 의미가 있으며, 우리는 대 개 그것을 보다 정중하게 받아들인다.

 

"14. 이는~~~~~~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  문자적 으로는: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함이라 가 된다. 이 절과 그 다음에 따라나오는 말로 그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표현이다. 이는 우리가 여기서 죽는 것과 멸망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당하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에 충분히 유의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또한 오는 생의 .영원성을 굳게 붙들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가?  그는 죽음이란 세상에서부터 나가는 출구이며 우리가 그 출구를 통해서 다른 곳, 즉 주께로 간다고 선언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죽을 때, 아주 멸망이라도 하는듯이 그 죽음을 끔찍하고 두렵게 여겨서는 안된다. 사도는 우리가 일시적으로 입었던 세상의 장막을 벗는 것이 곧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 장막 벗는 일을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5장 1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바 이 땅에 있는 무너질 장막 집과 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사이에는 하나의 암시적인 대조가 있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지시하셨다고 말할 때, 그는 죽음의 종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때를 언급하고 있다. 만일 그가 임박한 죽음에 관한 계시를 바벨론에서 받았다면 그가 어떻게 로마에서 십자가를 질수 있었겠는가?  그가 만일 순식간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에 상륙하지 못하였다면 그는 어디론지 먼곳으로 떠나서 죽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이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을 논박할 것인데, '이는 곧 '그들은 베드로의 시체에 대한 것을 옹호하기 위한 주장을 그들이 바벨론 사람이고 베드로가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것들을 생각나게 하려고 말하는데, 그가 죽은 후에라도 뒤에 오는 자들이 그에게서 배우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자기 시대의 신자들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후대의 우리들까지도 바라보고 같은 유익을 끼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지금은 가고 없으나 그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무성하게 자라고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가르침을 글로 남긴 것은 마치 그들이 지금도 우리 눈앞에 서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그 글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자 한 것이었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  사도는 이 말로써 복음을 요약하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귀절은 명백히 지혜의 모든 보화들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 귀절을 둘로 구별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의 능력의 성질과 효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가 오래 전에 구속주로 약속되었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강립하사 우리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사셨으며 죽음을 맛보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을 알고, 또 후자는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고, 그가 자기 안에 서 우리의 입양을 확실히 보증해 주셨으며, 그의 영적 은혜로 ,말미암아 그 가 우리를 우리 육체의 모든 죄악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성 전으로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고, 그가 우리를 음부에서 하늘로 끌어올리셨으 며, 그의 대속적인 죽음으로써 세상의 죄를 담당하셨고, 그가 우리를 아버 지와 화목하게 하셨으며,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의와 생명의 근원이 되어주셨 다는 사실로서 이 모든 일들의 목적과 결과들을 알 때, 우리는 복음의 모든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셈이 된다. 무릇 이 진리들을 붙잡고 있는 자라면 모두가 복음을 올바로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좋은 것이 아니요" ; 우리가 어떤 확실한 일에 관여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큰 보탬이 된다. 자기가 헛수고를 하고 있는 줄로 신자들이 생각할 것에 대비해서 사도는 이제 복음의 확실성을 제시하고 그가 알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명백하고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이로써 그들은 인내하도록 격려를 받았 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그의 부르심의 복된 면을 확신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우선 그가 친히 본 자라고 선언한다. 이는 그가 다음에 서술할 그리스도의 지극히 큰 영광을 친히 본 자라고 하였다. 사도는 이 지식을 교활한 사람들이 단순한 사람들의 생각을 혼란시키기 위해서 공연히 꾸며낸 이야기와 대조시키고 있다. 옛 주석가는 이것을 가공된'(fictas)이라는 말로 번역한 반면에 에라스무스는 그것을 공교한 기술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속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하나의 교활한 이야기를 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은 때때로 헬라어 σodiCeobat(소피 제스다이)가 나타내는 뜻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단지 어떤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하찮은 논쟁에 얼마나 정력을 쏟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의 생각은 우리를 속이거나 아무 가치도 없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계시하여 주는 진리에 집중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  우리는 여기서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이론들을 떠벌이기 위해서 무모하게 강단에 뛰어오르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사도들과도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하나님의 참 종은 자기가 전파하는 가르침의 진리에 대해서 확실한 증거를 가진 자이다. 그러한 증거를 가진 자가 전파 할 때 비로소 듣는 모든 자들에게도 같은 확신이 전달되는 법이다. 베드로 는 자기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난 음성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될 당시 그 현장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곳에는 오직 세 사람만 있 었다. 그들은 완전한 증인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많은 이적 가운데 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보았고, 또 그의 부활에서 그의 신성의 현저한 증거를 친히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확신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눈앞에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그의 부활 사실을 손에 손으로 전하여 준 자들에 의해서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양심의 내적 증거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지각의 증거들 위에 뛰어나시는 성령의 인침(나는 이렇게 칭한다)인 것이다. 처음부터 복음이 막연한 소문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을 기억하자.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이 친히 목격한 바를 전하여 준 권위 있 고 신빙성 있는 사신들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17. 지극히~~~~~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베드로는 이 음성만으로도 복음을 충분히 뒷받침하여 줄 수 있는 것처럼 언급하고 있 다. 사실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의 아 들로 인정될 때, 이것이 바로 우리 지혜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 본 문장은 두 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내 아들"이라고 하실 때 아버지 께서는 예수가 그처럼 자주 약속되었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사실에 큰 강조 점을 두고 있다. 무릇 율법과 선지자들에서 메시아에 대하여 언급된 바가 이제 아버지에 의하여 이같이 '선포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 다. 두번째 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의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그의 안에서만 사랑을 받으며 하나 님의 사랑은 다른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 문제는 이 정도 지나가면서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  사도는 다른 모든 것보다 뛰어난 한 가지 예를 골라서 들고 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하늘 의 영광을 입으셨으며, 그로써 그의 뛰어나신 신성의 일면을 세 제자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셨다는 사실이다. 비록 베드로가 역사적인 상황을 일일이 다 열거하고 있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 리가 그에게 들렸다"는 이 짧은 한 마디로써 그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곧 거기서는 세상의 것은 하나도 안보였고 보다만 하늘의 위엄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고 있는 그 영광의 뛰어난 표적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러한 위 엄과 영광 가운데서 들려온 음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따금씩 들려주셨 던 그런 음성을 듣는 것보다 한층 더 두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그의 음성이 공기를 통해서 전달되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임재의 표적들을 더하심으로써 그의 명령에 증거를 보이 셨다.

 

"18. 이 소리는~~~~~거룩한 산~~~~~" ;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 던 땅이 거룩한 땅으로 불리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이 산을 증거룩한 산으 로 부르고 있다. 무릇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곳은 '그가 모든 거룩하심의 근원이시므로 그의 임재로 모든 것을 거룩케 하신다. 이 말에서 우리는 무 릇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는 곳에서는 .경외심을 갖고 그를 모셔들여야 할 것을 배울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 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그같은 명령을 받았던 것처럼 그가 우리에게 가까 이 임하실 때는 지체없이 우리 자신도 스스로 성결케 하여 그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도 역시 배우게 된다.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1:44, 19:2)는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이다.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  사도는 이제복음의 확실성이 또한 선지자들의 말씀 위에 기초되어 있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이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리는 일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것에 대비하기 위한 말씀이었다. 사람들이 만일 주저한다면 그들은 영적으로 태만한 것밖에는 안된다. 사도가 우리에게라는 말을 할 때 자신과 제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교사들도 역시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도들은 그들의 후원자로서 선지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선지자들은 말하자면 사도들의 가르침을 뒷받침하여 주었고, 신자들은 그 동일한 출처에서 복음의 확증을 얻었다. 나는 이 견해를 취한다. 왜냐하면 사도가 전체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특별히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시사하고 있을지라도 자신을 다른 .자들 중 하나에 포함시키고 있다. 나의 좁은 의견으로 미루어 볼 때에도 사도는 그들의 말이 더 확실해졌다고 한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원형 대신에 비교급이 사용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 자들은 전체 문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예언하신 바를 이루신 것이 바로 그 예언의 말씀 안에서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보다 더 확실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바는 단순히 두 가지 증거로써 입증된 복음의 진리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엄숙한 선언에 의하여 확실한 승인을 얻으셨다는 것과, 둘째로는 선지자들의 모든 말씀도 역시 이와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 는 것이다. 처음에는 선지자들의 말씀이 하나님 자신의 입술에서 나온 말씀 보다도 더 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하나님 권위는 태초에도 그리하였듯이 오늘도 여전히 변함 없이 동일하다. 다음에, 히브리서에서 길게 논의한 바와 같이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이 전보다도 더욱 확실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어렵지 않다. 이는 사도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자기 민족인데, 그들은 선지자들에게 익숙해 있었으므로 그들의 가르침 을 논란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무릇 선지자들이 가르친 바는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아니하였으므로 베드로가 선지자들의 말이 더 확실해졌다고 말한 데에는 이상할 것이 없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역사가 깊으므로 그 존경심 제또한 깊다. 더우기 주의해야 할 상황들이 그밖에도 있다. 특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그처럼 오랜 세월동안 예언되어 은 이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는 선지자들이 복음서보다 더 신뢰할 만한 이들인지 아닌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유대인들이 선지자들을 아무 의심 없이 하나님의 참 종으로 보는 자들과 어려서부터 그들의 회당 학교에 서 자라난 자들에게 기울이는 존경심에 관심을 쏟고 있을 뿐이다.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    이 귀절은 다소 더 난해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그 '날'이 언제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날이 사람들이 복음을 완전히 받아들 일 때 이루어질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하게 되는 날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어두움을 복음의 가르침이 아직 '아우토피스토스 ; 자명한 것'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상태로 설명을 한다. 그들에 의하면 베드로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그리스도를 찾고, 또 앞에서 비취는 등불을 좇아가듯이 힘써 의의 태양이신 그리 스도를 좇아가고 있는 유대인들을 칭찬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지 아닌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자들을 누가가 칭찬하고 있는 것(행17: 11)과도 같다.

 

그러나 본 귀절을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해석은 선지자들의 효용성을 단기간에만 국한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의 빛이 비칠 때는 마치 선지자들이 불필요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만일 누가 접속사 '~~~~~~까지' 가 항상 최후를 뜻하는 것은 아니므로 필연적으로 같은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나는 명령법에 있어서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네가 길을 마칠 때까지 행하고 네가 이길 때까지 싸우라. 이와 같은 표현에 있어서 우리는 여기에 일정 기간의 시간이 지적되어 있음을 본다. 내가 만일 이와 :같은 논리로써 선자자들의 글을 읽는 일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누구나 다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까지만 유효한 충고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항상 필요하다.

 

둘째로 우리는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명심해야만 한다. 그는 아직도 기본이 되는 원칙을 모르는 무지한 초신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으며 또한 현재의 진리에 확고히 섰음이 인정된 자들을 가르치고 있다.이 극심한 무지의 어두움은 그와 같은 백성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누구든지 다 동일하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사도가 지적하는 것은 아직도 특별히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초신자들을 다루고 있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 말씀들이 동일한 수신자에게 전달되고 있음이 문맥상 분명하다. 때문에 본절은 어쩔 수 없이 이미 그리스도를 섬기며 참빛 가운데서 행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적용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이 어두움이 인생의 전 생애를 뒤덮고 있는 어두움의 세력으로 본다. 그리고 나는 그날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 나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같이 밝히 볼 수 있다고 한 그 때가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해석한다.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실로 복 음 안에서 빛을 발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의 장막(e carnis ergastulo) 을 벗어나 하늘로 옮겨질 때까지는 항상 사망의 그림자가 우리의 마음을 뒤 덮고 있으므로 아직은 어두움에 처하여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날이 되면 무지의 구름과 안개가 완전히 걷히고 밝은 태양이 환하게 비치는 것이 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완전에서 멀듯이 그 완전한 날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 삶이 어두움으로 지칭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복음이 우리 를 부르시는 지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행하고 있는 한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하나의 길을 인도하는 빛으로서 우리에게 필 요하며 만약 그 빛이 없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두움 가운데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선지자들이 우리의 길을 밝혀주 는 빛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예언과 복음을 분리시키지는 않는다. 그의 유일 한 목적은 우리 인생의 전 행로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되어야 한 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방에 가득찬 무지의 어두움으로 둘러싸여 있고, 또 우리가 주의 말씀을 우리의 등불로 삼을 때 만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기 때문이다.

 

사도는 빛이 희미하고 가날프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서 등불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귀절을 서로 균형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 자신에게는 빛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바른 길로 행할 수 없어 아주 깜깜한 밤중에 길을 잃은 사람이 내내 제자리를 맴도는 것과 도 같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두움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할 불을 비추어 주심으로써 방황에서 구하여 주신다.

 

사도가 즉시 그의 논증을 샛별이 떠오르는 것에 연관시킨 것은 이 해석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우리가 전 생애를 통해서 전진해 나아가야 할 그 확고한 지식이 날이 새는 것으로 표현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도가 그날의 하루 하루를 서로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들을 다 포함하는 그날은 주께서 그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강림하시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지각을 완전히 가릴 것이라는 어두움과 대조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귀절이다. 이 말씀은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통치하시는가를 알게 하기 때문이다. 교황주의자들은 항상 교회는 잘못을 범할 수가 없다고 말을 한다.

 

또 그들은 비록 교회가 말씀을 잃었다 할지라도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와는 달리 말씀의 빛에 주목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자진해서 미궁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 않다면 말씀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극히 주의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라 할지라도 말씀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교회의 인도자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이 귀절에서 베드로는 역시 모든 인간적인 지식을 정죄하고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우리의 능력보다는 다른 어떤 참된 규범을 찾아서 그 참 지식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말씀을 떠나서는 어두움 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사도가 성경의 명확성에 대하여 하는 말은 주목할 가치가 있 다. 만일 성경이 우리에게 그 길을 분명히 보여주는 적합하고 올바른 안내 자가 되지 못하면 이것은 하나의 거짓된 권고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순종의 믿음으로 자기의 눈을 여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 자신의 체험으로 말미암아 성경이 무조건 등불로 불리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될 것이 다. 불신자들에게는 그 빛이 희미하다. 그리고 고의적으로 자신을 죽음에 내던지는 자들은 아주 눈이 먼 장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빛은 단지 눈을 부시게 하고 멀게 하는 것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지극히 단순한 말씀을 읽는 것마저도 미리 겁을 먹는 교황주의자들은 정죄 받을 만한 불경죄가 아닐 수 없다. 자만심의 허세에 들뜬 교만한 자들이 주 께서 오직 겸손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에게만 나타내신(마 11: 25) 그 빛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윗은 시편 19편과 119편 에서 비슷한 용어로 하나님의 율법을 찬양하고 있다.

 

"20~21. 먼저 알 것은" ;  베드로는 이제 여기서 성경을 바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 있는 해석이 있다. 그 하나는 다른 이들이 보는 바와 같이 ёπηλσεακ(에멜뤼세오스), 곧 접근, 공격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채택하고 있는 ёπιλσеωS(에필뤼세오스; 해석)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들이는 그 뜻은 곧 우리가 자신의 이해력을 믿고 성경을 마구잡이로 읽 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성령이 성경의 참 해석자이신 사실에서 이 뜻에 대한 뒷받침을 얻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해석은 분명히 하나의 참되고 경건하고 유익한 교훈을 함축하고 있는데, 곧 오직 우리가 육체적인 이해력을 제쳐두고 성령의 가르침에 복종 시킬 때에만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읽을 때에 유익을 얻을 수 있으며, 또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제넘게 우리 자신의 이성에서 나오는 재간을 부릴 때에는 그것이 성경을 모독하는 사악한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 면 성경은 우리의 육의 눈에는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신비들을 포함하고 있 고 또 인간의 지혜로써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값진 생명의 보화들을 담 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리가 위에서 말한 바가 있다. 곧 성경 안에서 비취는 빛은 오직 겸손한 자들에게만 이른다는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은 이 귀절에서 개개인의 사사로운 해석은 아무것도 믿을 만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이중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들은 베드로의 이 증언을 왜곡시켜서 성경 해석의 최종적인 권위를 부당하게 자기들의 종교 회의에 돌림으로써 그들은 실로 어린 아이와 같은 짓을 자행하고 있다. 베드로는 사사로운 해석에 관하여 말할 때 개인이 혼 자서 성경을 다루는 일을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무릇 사람들이 자 기 자신의 사사로운 것을 성경에 끌어들이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말 할 뿐이다. 성경을 사사로이 풀면 그 결과도 사사로운 것이 되리라는 데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일치된 의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이는 그 주제가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와 대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보여주고자 하 시는 것만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의미가 나에게는 보다 단순해 보인다. 그것은 곧 베드로가 성경은 사람에게서 혹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존경하고 순종하며 배우고자 하는 의욕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성경을 읽는 바른 태도를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다. 성경에 대한 참된 존경심은 우리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이는 죽을 인생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베드로는 특별히 우리 를 권하여 선지자들의 말씀을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으로 믿으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어떤 사사로운 인간적 충동에 의해서 주어진 것 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뒤따라 나오는 바는 같은 취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곧 거룩한 하 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였 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뜻으로 낸 혹은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 라 꾸며낸 이야기를 떠들어댄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내용의 핵심은 우 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함과 같이 그의 거룩한 선지자들에게도 동 일하게 둘 때 비로소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도는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선지자들이 그들 에게 맡겨진 성직을 충성되이 수행하였고, 또 선지자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받들어 모셨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었 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기 본 정신이 아니었기느이교도들 이 그들의 선지자들에게 ёθονσιασμσS(엔두시아스모스; 황홀경)를 생각하듯 이-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감히 그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그들의 입술을 지배하신 성령의 지도하심에 순종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의 예언은 곧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바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