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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후서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

1. 성경 (벧후2:1 ~ 8)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1)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2)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3)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4)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5)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6)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7)(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8)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  거룩한 교리를 부패시키거나 왜곡시키는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서 일반적으로 연약한 심령들을 심히 위태하게 뒤흔들어 놓을 것이므로 신자들을 끝까지 견디도록 격려함으로써 이같이 거치는 돌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사도는 그의 서신을 받는 자들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주며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시련으로 항상 자기 교회를 연단시키셔서 그들의 마음이 다른 일로 인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는 복음 아래 있는 교회의 상태는 율법 아래 있던 교회 상태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옛날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교회를 혼란에 빠뜨려 놓았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교회의 상태는 바로 평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특별히 이 점을 말해 둘 필요가 있었다.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면 영속적인 평화와 하늘 지혜의 완전한 빛과 만물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였으므로 그들은 교회가 더 이상 싸움에 처하게 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께서 단번에 교회를 이같은 내적인 갈등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 믿음의 연단은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선조들에게도 역시 공통점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신명기 13장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그를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이와 같은 시련과 연단을 통해서 분명히 가려내시고자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적인 예를 들 필요는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선조들처럼 우리도 불경건한 교리들과 맞서 싸워야만 하며 우리의 믿음이 이단들의 공 격으로 말미암아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 다. 사단은 틈만 있으면 하나님의 진리를 뒤엎으려 시도하기 때문에 모든 난폭한 훼방을 확고히 진압해야만 할 것이다. 베드로가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는 ,말을 할 때 어떤 특정한 시기를 언급하지 않고 모든 시대를 다 포함시키는 사실에도 역시 주의해야 한다. 사도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옛 백성들과 비교하고 있다.

 

우리는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진리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시험에 빠질 것에 대비하여 이 가르침을 우리의 시대에도 적용시켜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을 것을 경고하고 있다. 바로 다음의 내용도 역시 같은 말씀이다. 비록 사도가 여기서 각각의 이단들을 그 특색 을 따라 서술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훈계의 초점은 특히 하나님을 멸시하 는 불신자들에게 맞추고 있다. 그 일반적인 내용은 곧 우리가 거짓 선생들 에 주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보다 큰 위험을 초래할 한 가 지 예를 지적해 주고 있다. 이것은 이와 동일한 논증을 전개하고 있는 유다 서의 본문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가만히 끌어들여" ; 이 말씀으로써 사도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사방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사단과 악인들의 교활성을 지적하고 있다. 신자들은 그들 이 가려놓은 함정을 피하도록 더욱 철저히 경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 이 제아무리 멸망시키려고 시도한다 하더라도 깨어 있는 자들을 함정에 빠뜨 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도는 "멸망케 할 이단"을 언급함으로써 무릇 자기의 구원에 관심을 가 진 사람들로 가장 독성이 강한 역병과도 같은 이단들을 피하게 한다. 이단 이라는 명칭에 관한 한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항상 악하고 높은 가증한 것들이며, 또 거기에는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거룩한 무리를 하나 로 묶어주는 띠는 하나님의 단순한 진리이다. 따라서 그 진리를 버릴 때에는 언제나 두려운 멸망만 남을 뿐이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부인 하였으나 베드로는 여기서(나의 견해로는) 유다가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었다고 표현한 바를 언급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모든 불의에서 구별되어 거룩하고 분결하게 사는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우리를 구속하셨다. 바른 길을 떠나 온갖 방종에 빠져버리는 자들은 자기들을 사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해도 부당한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가르침이 우리 안에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로 남아 는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삶과 죽음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셨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 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우리의 목적 이 되어야 한다. .사도는 - 계속해서 "임박한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휘말려들지 않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  거짓 선생들이 세상에서 일 .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게 되고, 그리하여 소수의 사람들만 남아서 그리스도를 순전히 섬기게 되는 것을 안다는 것은 연약한 자들에게는 매우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변절만큼 오늘날 신 자들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어 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 들 어온 자 가운데서 끝까지 자기의 신앙을 -지켜 나아가는 자는 거의 찾아보 기가 힘들 정도이다. 거의 모두가 다 부패하여 방자한 거짓 선생들로 말미암 아 길을 잃고 자기 믿음을 저버린다. 이같이 우리의 믿음이 파괴되는 일을 막기 위하여 베드로는 적절한 때를 택하여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며, 사악한 거짓 선생들이 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어가리라는 예언을 언급한다.   이 귀절을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헬라어 사본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어떤 이들은 색욕거리 로 읽고. 또있었다. 어떤 이들은 '멸망 으로 읽으나 나 는 다수가 받아들이는 편을 택한다.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  나는 이것을 사람들이 하 나님을 두려워하고, 고결한 삶을 살고, 순결하고, 정직한 생활을 하게 될 때 적어도 악한 자들의 입이 닫혀져서 복음을 훼방하지 아니할 때에는 종교가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되지만, 온갖 방종에 휘말려 버리게 될 때에는 그리스도 의 이름과 그의 가르침이 불신자들의 비방과 모욕을 받게 되기 때문에 기록 한 말씀이었다고 본다.  어떤 이들은 달리 해석하여 이 거짓 선생들이 건전한 교리에 대해서 더 러운 개들처럼 짖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베드로의 한 말이 원수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뻔뻔스럽게 모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리라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그들이 자신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비방하 지 않을지라도 다른 이들로 하여금 비방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저희가~~~~~지은 말을 가지고~~~~~" ;  베드로는 신자들이 악한 선생들에 대해서 적개심을 품게하여 그들을 보다 예리하고 지속적으로 대적하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다. 우리가 천한 노예들처럼 팔려 간다는 것은 참으로 증오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도는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자유에서 꾀어낼 때에는 이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증거한다. 그는 이같은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구상해 낸 지은 말'로 칭한다. 그러므로 무릇 자진해서 자기 영혼의 구원을 거짓 선생들에게 싼 값으로 팔아넘길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면 그 거짓 선생들의 왜곡된 가르침에 일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의로운 자들이 불의한 자들로부터 놀라서 떠 나도록 하기 위해 사도는 그 악한 자들이 받을 멸망이 결코 사라지지 않으 리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임박한 멸망을 당하게 되어 있으므로 무릇 그들과 연합하는 자는 비참하게 멸망할 수밖에 없다.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 ;  우리는 자기의 악한 가르침으로 교회를 부패시키는 불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가를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사도는 이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하나님의 세 가지 심판을 예로 들어 서 증거를 제시한다. 그 세 가지 예는 곧 하나님께서 천사들도 용서하지 않 으셨다는 것과, 홍수로 온 세상을 결하셨다는 것과, 또 소돔과 이웃 성들을 재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심판주가 되신다 는 사실이 우리에게도 자명하게 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 '기서 하나님이 옛 세상을 용서치 않으시고 불경건한 자들과 악인들에게 내 리신 형벌을 오늘날 옛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패역한 자들에게도 역시 똑같 은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 `으시거니와 사람을 차별하여 똑같은 죄를 놓고 누구는 용서하시고 누구는 벌하실 수 없으신 분이다. 그는 불의를 미워하시되 그것이 어디서 발견되든 지간에 한결같이 미워하신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곧 사람은 불공평하게 판단하나 하나님께서는 언 제나 한결같이 공정하게 판단하신다. 그는 택하신 자들의 죄를 용서하심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행하신다. 이는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깨 곳하게 하시기 때문이며, 그는 오직 우리를 의롭게 하신 사실에 기초하여서 만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신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우리와 하 나님 사이에 항상 긴장의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 뜻 '천사들'에 관해서는 논증이 보다 큰 자들로부터 보다 작은 자들로 전개 되어 나아간다. 비록 천사들은 훨씬 더 뛰어난 '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위엄은 하나님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 주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천사들의 불경을 답습한 죽을 인생들은 훨씬 더 무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베드로가 여기서 천사의 타락에 관하여 간략히 다루고 있으나 그 타락의 시기나 그밖의 다른 상황에 처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주제에 관하여 신중히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이 와 같은 일들을 끝없이 파고들며 특별히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 으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그 문제를 드물게 다루시며, 또 슬쩍 지나 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단편적인 지식으로 만족할 것을 경 고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지나친 열심에서 그 이상 더 캐려드는 자들은 어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을 알려주신 참된 교훈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헛된 사색에만 마음을 기울이고 싶 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성경을 통해서 범죄한 천사들은 본래 하나님께 복규례에 되었고, 종하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들 자신의 과오로 은혜의 길에서 떨어지게 그 결과 그들에게 돌 아간 악은 부수적인 것이었지 그들의 본성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것이 아 니었다. 그러므로 그 악은 하나님의 탓으로 돌려질 수 없음을 가르쳐주신 베드로는 타락한 전사들을 사람보다 우위에 둘 때 이 점을 아주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유다는 그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곳을 떠났 있다고 기록할 때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증거들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은 소르본느의 엉터리 신학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그 신학은 그들에게 천사들에 관하여 그들이 만족하고도 남을 때까지 계속 가르쳐줄 것이므로 끝내는 그들이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깊은 지옥의 구덩이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어두운 구덩이에 묶어 두어능칼빈 사역)~~~~~" ;  이 은유는 그들이 끝날까지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게 될 것을 뜻한다. 이 비유는 범 조직자들의 처벌방법에서 온 것으로 범죄자들은 그들이 정죄를 받은 후에 최 종형을 받기 위해서 이끌어낼 때까지 도지옥에 가두어서 지독한 고통을 가하 여 그들의 형벌의 반을 치르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들이 죽은 후 에 받을 형벌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처 지가 어떠한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록 그 축복을 다 누리지는 못할지라도 확실한 소망 조중에 평안히 거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들 위에 ,쌓인 진노에 대한 생각으로 끔찍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 ;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류 를 홍수로 멸하신 다음 다시 새 세계를 창시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논증은 보다 큰 것에서부터 .보다 작은 것으로 진행된다. 온 세계가 일단 하 나님의 진노의 홍수로 뒤덮이면 악인들은 그것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사 도가 여덟 사람이 피하였다고 말할 때, 그 뜻은 곧 다수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을 보호해 .주는 방패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수가 많든지 적든지간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은 죄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극사도가 왜 노아를 의를 전파하는 자로 칭하고 있는가를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자로 이해하는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돌보시고 그들이 죽은 바 되었을 때 생명으 로 회복시켜 주신 일에서 나타난 그의 의를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의를 전파하는 자로 불리운 것으로 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는 타락한 세상으로 하여금 제정신이 ,들게 하려고 ,애를 썼으며, 또 그들에게 거룩한 삶 끊임없이 온갖 열정을 다 기울여 을 살도록 가르치고 권면했을 뿐만 아니라,  120년에 걸려 방주를 짓는 일로 수고하였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목적은 바로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눈앞에 제시하여 우리가 성도들을 닮아가도록 고무시키고자 하는 데 있었다.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  이것은 하나님의 보응을 보여주는 하나의 뛰어난 예이므로 성경이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보편적인 멸망을 언급할 때마다 그 전형적인 예로 이 성을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도 역시 이 성읍들이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다른 예를 들 수도 있 었을 것이나 베드로는 특별히 이 :성읍을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성읍 이 ,하나의 생생하고도 두드러진 예가 되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불신자들에 대한 그의 진노가 모든 세대에 알려지게 되기를 원하셨으므로, 그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이 은혜의 행위에서 교회의 영 원한 안전을 우리에게 묘사해 주고 계신다. 이것은 영원한 불의 형벌에 관 하여 언급할 때 논한 바가 있기도 하다.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  일반적인 해석은 롯이 그의 모든 감각을 소돔의 범죄에서 피하였으 므로 보고 들음에 있어서 그는 의로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고 들었다는 것은 다른 것을 언급할 수가 있다. 그 의미는 곧 그가 소돔의 백성들 중에 서 의롭게 살 때에 그가 보고 듣는 일로 말미암아 심령이 괴로왔다는 것이 될 수가 있다. 우리는 의 상한 심령이 억지로 보고 듣게 되었을 것으로 안다. 간단히 .말해서 비록 거룩한 성도들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을 지라도 의로운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베드로는 앞서 말했던 것보다 더욱 힘입게 못을 자진하여 고통을 받은 의 로운 사람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경건한 모든 성도들이 세상의 온갖 악 으로 치닫는 것을 볼 때, 결코 적지않은 슬픔을 당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기 때, 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특히 이 조점을 분명히 하여 불신앙이 도처에 있을 때 우리가 악의 유혹에 사로잡히고 물들어서 남은 자들과 함께 망하지 않도록 확신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또한 세상의 모든 쾌락을 택하기보다는 차라리 주님이 당한 주거룩한 슬픔을 택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