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벧후2:17 ~ 22)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7)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8)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19)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0)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1)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22)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 ;이 두 비유를 통해서 사도는 비록 그들이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보일지라도 그 내면에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샘은 그 겉모습으로 사람을 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실 물과 그밖의 생활에 필요한 물들을 약속하여 주기 때문이다. 또 구름이 나타나면 그것은 땅에 물을 공급하여 줄 비가 내리리라는 기대를 갖게 해 준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 사람들이 마치 .샘과도 같다고 말한다. 이는 그들이 크게 자랑을 하고 그들의 말 가운데서 어떤 기민성을 보여주며 어떤 매혹적인 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샘속은 바싹 매말라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샘의 모양으로 사람들을 속일 뿐이다. 그는 또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안개는 비없이 그냥 지나가거나 아니면 재난의 폭풍우를 몰아온다. 이 비유로써 그는 그들이 유익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가져다 주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해롭게까지하는 일이 자주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임할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거듭 경고함으로써 신자들을 주의시킨다. "캄캄한 어두움"이라는 말로써 사도는 하늘을 어둡게 하는 구름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마치 그들이 지금 처하고 있는 '일시적인 어두움' 대신에 장차 그들 앞에는 더욱 캄캄하고 영원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 사도는 그들이 과장된 말로써 어리석은 자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의 속임수를 눈치챌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한 번 교활한 속임수에 넘어가 버리면 그와 같은 허튼 말에 사로잡히기 쉽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들이 허탄한 자랑을 하여 부주의한 자들을 함정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페르세우스(Perseus)가 말한 바와 같이 그 심령의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내는 이 과장된 말들은 그들의 속임수를 위장하기에 적합하게 꾸며져 있다. 우리는 이레니우스(Irenaeus)의 글에서 이런 종류의 교활한 속임수는 발렌티누스(Valentinus)와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들은 도무지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을 지어낸다. 그리하여 미숙한 사람들은 그 허탄한 말들로 말미암아 유혹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다. 오늘날에도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비슷한 종류의 미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성령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마치하늘위의 구름에서 천둥이 치듯이 한 입 가득히 뱉어내어 내어, 그들의 허탄한 말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이것을 보는 사람이면 사도들이 이들에 관하여 적절한 예언을 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농담과 같이 우습게 여긴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악에 탐낙하는 가장 어리석은 자들인데도 그들의 소위 익살에 호감을 갖는다. 그 결과는 선악간에 사람들은 택할 능력이 제거될때,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모든 순종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쾌락을 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신은 우리의 시대에도 상당한 유익을 끼칠 수가 있다.
"미혹한데 행하는자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 사도는 불경건한 자들이 무엇이나 다 정당화시켜서 약한 자들을 유혹하는 행위를 낚시 바늘에 비유한다. 이는 사람의 탐욕은 맹목적이고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방종이 허용되면, 그 즉시 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나 잠시 후에는 그 속에 낚시 바늘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의 말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는 사실상 미혹한 데 행하는 자들에게서 피한 자들이 또다시 새로운 유혹에 빠져서 온갖 방종에 빠져버린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씀으로 그는 우리에게 그들의 계략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가를 경고하고 있다. 거의 모든 인류가 다 눈이 멀고 캄캄한 어두움에 사로잡혔던 끔찍한 예는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이제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한 후에 세상의 일반적인 미혹에서 떠난 사람들이 다시금 짐승같은 무감각에 빠져들 징조가 보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한 번 비췸을 받은 후에 맞이하게 될는지 모르는가장 큰 위협은 사단이 자유를 가장하여 우리를 유혹해서 육체의 정욕을 행하게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거룩하게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자는 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될것이다.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 그 자신들의 모순을 통해서 사도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더욱 .비참한 노예가 되어있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자유를 약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자기가 갖고 있지 아니한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논증은 전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악인들이 그리스도의 유익에 대해서 설득력 있게 설교하면서도 그 자신은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이 행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여기서 정죄되고 있는 것은 불결한 생활을 합리화시키는 불경건한 교리라는 사실에 유의해야만 한다. 사도의 목적은 어리석은 자들이 올무에 걸리게 되는 유혹의 속임수에 대처하는 데에 있었다. 자유라는 이름은 달콤한 것이나 그들은.그것을 이용하여 그들의 회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두려워하는 데서 떠나 무절제한 방종에 빠지게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주신 자유, 그리고 복음이 날마다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자유와는 전혀 다른 자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정욕에 빠지게 하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게하셨다. 정욕이 지배하는 곳, 따라서 육체가 보좌에 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자유가 설 곳이 없다. 사도는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그것을 선언하고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 자원하여 이에 순종케 될때, 얻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를 추구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위장하는 악인들이 항상 있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다. 이것은 사단의 옛 계교였던만큼 우리는 광포한 자들이그와 동일한 계략으로 충동질하는 것을 볼 때 놀라지 말아야 된다. 교황주의자들은 이 귀절을 우리에게 곡해시키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철면피한가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먼저 가장 비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떠들썩한 술집과 창녀굴을 누비면서 도리어 우리에게 부패의 종들이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실상 그들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비난할 만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들이다. 다음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외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아무것도 가르치지 아니하는 동시에 우리를 중상하는 자들보다도 훨씬 더 엄중하게 절제생활을 요구하고, 또 진실되게 그러한 생활을 실천해 나가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들에게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확실한 권위자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까지도 그 저주와 악담을 퍼붓고 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 이 개념은 군법에서 취해온 것이다. 하지만 정욕이 지배하는 곳의 멍에보다 더 무겁고 더 비참한 것은 없다는 것이 이단의 저자들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을 부어주셨고 죄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세상과 육체를 이길 승리자가 되게 해주신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행하여야 하겠는가?
"20~21.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 사도는 다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그들의 이전 생활, 곧 이전의 불결한 생활과 세상의 부패한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는 이 악인들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는 한 가지 비교되는 사실로서 악인들의 위험성을 예리하게 폭로해 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가르침에서 떠나가는 것은 보통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는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저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제그들에게는 더 나을 것' 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알지 못하여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핑계하지 못하는 일인데, 하물며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멸시하는 종은 몇 배나 되는 형벌을 받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도 자진해서 하나님의 빛을 소멸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은혜를 내던지며, 명에를 벗어던지고 오만하게 하나님께 범죄하며, 실로 자기 힘이 미치는 대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확증된 하나님의 깨어질 수 없는 언약을 모독하고 파괴하려 드는 배은망덕한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의 길을 좇아 경건하고 진지하게 나아가도록 더욱 주의해야만 한다. 본 절을 한마디 한마디 상세히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세상을 단념하기 전에는 더러운 일에 몰두하고 또 완전히 오염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세상의 더러움"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앓으로"는 곧 복음을 안다는 것을 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도는 그 복음의 목적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세상의 더러움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려는 데에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로 잠시 후에 그는 그 복음을 의의 도로 칭한다. 오직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아는 자만이 복음 안에서 바로 자라갈 수 있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충고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법을 배운 자만이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가 있다.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말로써 사도는 자기의 옛 더러움으로 되돌아가는 자는 얼마나 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자인가를 지적하고 나서 우리에게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교훈이 비록 모든 자에게 공통되고 또 누구에게나 다 차별 없이 적용된다 할지라도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신 자들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서 그는 다시금 세상의 더러움에 빠져버린 자들은 복음을 배반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신자들도 분명히 죄를 범한다. 그러나 그들은 죄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변절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이 일단 받아들인 건전한 교훈에 대한 고백을 저버리지도 아니한다. 참으로 그들은 패배한 자로 보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육체와 그 정욕에 대항하여 맹렬히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22. 참 속담에이르기를~~~~~~~저희에게 응하였도다." ; 사도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던 자들이 아무런 수모와 두려움 없이 악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많은사람들이 혼란에 빠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이 말을 한다. 이런 못된 일은 그들이 개나 돼지와 같아서 그들 자신의 악의 결과로 일어나게 된다고 밝혀주고 있다. 여기서 복음에는 아무런 책임도 돌릴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이 목적을 위해서 사도는 옛잠언 두 가지를 인용한다. 전자는 잠언 26장11절의 솔로몬의 말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베드로의, 목적은 간단히 말해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온갖 더러운 것을 완전히 토하게 하는 약인데, 자기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한 그것을 다시 삼키려는 개들이 많다는 점을 밝히려는 데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은 우리의 모든 먼지와 때로부터 여기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는 하나의 세면대인데, 제 몸을 깨끗이 씻은후, 즉시 더러운 진흙 구덩이에 다시 드러누워 딩구는 돼지들이 많이 있다.이와같이 경건한 자들이 개와 돼지의 부류에 들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들은두 가지 위험을 다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