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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후서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3:7)

1. 성경 (벧후 3:1 ~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1)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2)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3)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4)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5)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6)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수신자들이 이 두번째 편지에 싫증을 내고 첫번째 편지로 충분하다고 할 것에 대비하여 사도는 그 중 어느 것도 목적 없이 쓴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그들이 자주 깨우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다.분 명히 하기 위해서 사도는 그들이 튼튼히 방어하지 않는 한 위험에서 벗어 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정결하고 순수한 믿음 의 도리를 거짓 교리로 부패케 할 뿐 아니라, 모든 믿음을 완전히 뒤엎으려 고 난동을 부리는 악인들과 더불어 싸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 이 말은 곧 '너희로 진실한 마음을 갖도록 일깨우고 싶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내가 너희 마음을 일깨워 순결하고 깨끗하게 하려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 의미는 곧 권면을 단념할 때는 경건한 자들의 마음이 어두워진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녹이 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끊임없이 훈계로써 자극을 받지 않는다면 완전히 나태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그와 같은 훈계의 유익이 얼마나 큰 것이며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 분명해졌다. 훈계가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육체의 나태함이 이미 받아들인 교리를 집어삼켜서 무력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자기가 필요한 것을 굳게 붙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가르침을 받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는 동시에 또한 경건한 선생들에게 끊임없이 권면과 훈계를 받음으로써 그가 르침을 자기 마음 속에 굳게 간직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본래부터 새롭고 색다른 것을 갈망하여 흑평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우리는 베드로가 말하는 바를 명심하여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각자가 그 가르침을 항상 마음에 새겨서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순전하고 분명하게 이해하는 지식으로 빛나게 하는 것은 실로 유익한 일이라 하겠다.

 

"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  사도는 이 말로써 우리가 선지자들의 글과 복음서를 진지하고 바르게 묵상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일깨움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이 때때로 녹이 슬게 되거나 어두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나태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연구에 집착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시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믿음은 이 확실하고 믿을 만한 증인들 위에 굳게 설 것이다. 우리가 만일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일치 된다면, 실로 우리가 그들을 우리 믿음의 종들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이로, 그리고 천사들을 그 증인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불경건한 자들의 어떠한 음모에 의해서도 우리의 위치는 확고부동하게 흔들리지 않올 것이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은 곧 사도들이 경건한 자들을 가르친 교훈 전체를 가리킨다.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  '알지니' 라는 분사는 "내가 기록한 자들로 인하여 너회가 처하여 있는 위험의 성질과 범위를 알기 때문에 너희를 일깨우기 위하여 힘쓰노라"는 의미로 사도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될 수가 있을 것이나, 나는 달리 해석하여 그 분사가 동사 대신으로 쓰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사도는 마치 "먼저 이것을 알지니"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들은 이와같이 미리 주의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 이유는 불경건한 자들이 이와 같은 기록으로 그들을 갑자기 공격할 경우 그들은 몹시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들이 이것을 확실히 알아서 그 시험을 물리칠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힘쓰고 있다.

 

사도는 신자들에게 두번째로 그가 2장에서 다룬 바를 상기시켜 준다.  말세라는 말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키고 있음이 매우 분명하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0장 11절에서 "말세를 만난 우리"라는 말로써 그리스도의 그의 나라를 지적하고 있다. 그 의미는 곧 하나님께서 더욱 긴급하게 복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고 사람들을 청하여 나라에 들어오게 하기 위함인데, 그러면 그럴수록 악인들도 더욱 담대해져서 그들의 불경건의 독소를 마구 퍼뜨린다는 것이다.

 

성경의 일반 용법에 따르면 사도는 하나님을 경멸하고 모독하는 교만한 언사로써 자기가 현명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자들을 "기롱하는 자들" 로 칭하고 있다. 사람이 장난으로 하나님의 두려운 이름을 기롱하는 것은 모든 악중에 가장 악한 것이다. 시편 제1편은 이와같이 오만한 자의 자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다윗은 시편(119 : 51)에서 교만한 자가 그를 심 히 조롱하였어도 그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이사야 선지자도 역시 28장에서 그들에 관하여 언급하는 중에 그들의 경솔함과 부주의 함과 무지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롱하는 자들과의 싸움 이상으로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갈라디아서3장에 관해서 다소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성령께서 기롱하는 자들이 을 것을 예언하셨고, 또 우리 손에 그들과 맞서 싸울 무기와 방패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무슨 계략을 쓴다 할지라도 그들과 완강히 맞서 싸우지 아니할 수가 없다.

 

"4. 가로되 주의 강립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끝날의 부활에 관하여 의심을 야기시키는 조롱은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만일 이 끝날의 소망이 사라질 때에는 복음에서 남을 것이 하나도 없고, 그리스도의 능력도 쇠잔해지며, 또 모든 종교가 다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신앙을 파괴할 때, 곧, 바로 교회의 목을 조이려는 셈이다.  만일 우리를 구속하사 언젠가 우리를 모아 그에게로 이끌어 영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겠는가?  만일 부활을 믿는 신앙이 굳게 유지되지 아니한다면 경건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이 우리를 더욱 맹렬히 공격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롱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바로 파악해야만 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줄 곧, 마치 그들이 반대자들이나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상극의 존재들인 양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반대를 일삼아 왔다. 비록 우리 조상들의 신앙이 우리와 동일하였을지라도 그들이 잠잔 후에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그 후로 수많은 세대가 지나간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세상 끝에 관하여 언급된 바는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그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므로 그 끝날이 아주 이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있다.

 

"5~6.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  사도는 앞에서 말한 불경건한 자들의 기롱을 논박하면서 세상이 물로 성립되었다고 말한 후 바로 그 세상이 한때 물의 홍수로 멸망되었다는 단순한 논증을 펴고 있다. 이 홍수의 역사는 충분히 알려져 있고 또 유명한 것이므로, 그는 그들이 '부러' 곧 고의적으로 그 사실을 잊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히 보게 되는 것을 피하려고 악한 의도로 그들의 눈을 감아버리고 매일 매일 세상의 상태가 그대로 영속되리라고 주장한다. 땅은 분명히 물에서 기원하였다. 이는 모세가 창세기 1장 2절에서 땅이 지음을 받은 바, 그 혼돈 상태를 물들로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땅은 그 물들에 의해서 떠받쳐져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물로써 땅을 멸 하셨다. 여기서 자연의 힘은 땅을 보존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또한 땅은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면 언제라도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땅은 다른 능력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바로 서 있게 된 다는 것과, 제 2원인들이 하나님에게서 그들의 능력을 받는다는 것과, 그것들이 지정된 바에 따라 각기 다른 효력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만 한다. 이와같이 땅은 물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물이  스스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열등한 요소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땅을 멸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순간에 바로 그 물은 죽음을 가져다주는 홍수로 변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복종함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이제 마치 자기 안에 영원성이 있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의 본성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여 자연의 요소들 그 자체에서 멈추려드는 자들은 얼마나 잘못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간단한 말에는 물리적인 논증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려는 자들의 변덕을 충분히 논박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홍수의 역사(창7: 17이하)는 자연의 질서가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만 다스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하고 충분히 증거해 준다. 사도가 앞에서 하늘과 땅을 언급하고 나서 세상이 홍수에 의해 멸망했다고 말한 것은 좀 이상하게 보인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곧 대기권이 물과 물사이에 놓여 있었으므로 하늘이 물에 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언급한 구별(창1: 6)은 이제 희미해졌고 하늘이라는 명칭이 자주 이같은 의미로 취해지고 있다. 만일 누가 이 주제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제 20장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 사도는 이것을 하나의 결과로서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의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자연의 영원한 상태에 대한 기롱하는 자들의 교활한 주장의 속셈을 폭로하는 데에 있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철학의 기초원리를 놓고 경망스럽게 떠들어대며 단순히 자기를 하나의 위대한 사상가로 내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헛된 이론을 추구하는 자들을 많이 볼 수 가 있다.  전술한 바에서 주께서 어느 날 하늘과 땅이 불살라지게 되리라 하신 선언에는 불합리한 점이 전혀 없음이 분명하다. 이는 불의 원리는 물의 원리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만물이 여기에서 나왔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사도는 지금 불경건한 자들을 다루고 있는 만큼 특별히 그들의 멸망을 분명히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