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베드로후서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3:15)

1. 성경 (벧후 3:14 ~ 18)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4)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15)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6)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7)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18)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 ; 사도는 소망에서 그 결과를 바로 이끌어내고 있다. 그 결과는 곧 경건한 삶의 실천이다. 소망은 .살아있는 것이 요, 효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망은 우리를 그 자체로 이끌어주어야. 새 삶을 시작하게 될 만 한다. 무릇 새 하늘에 소망을 둔 자는 자기 안에서 것이고, 또 자기의 온 힘을 다하여 소망을 열망할 것이다. 한편 자기의 더러 운 길을 고집하는 자들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아무런}생각도 갖지 않을 것이고, 또 이 부패한 세상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홈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한 사도의 말에 유의해야만 한다. 이 말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세상의 겉 모 습에만 한눈을 팔고 그것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마땅히 우리의 눈을 주께로 돌려야 할 것을 뜻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진정으로 홈이 없는 상태는 사람들 가운데서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홈이 없 있다는 것이 입증되는 장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평강이라는 말은 나에게 양심이 평안한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처럼 생각된다. 평안은 소망과 인내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심판에 그들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끈질긴 육정에-사정없이 끌려가는 동시에 심한 불안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사도가 말하는 이 평강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근거한 마음의 안 정을 :뜻한다.

 

우리가 그처럼 수많은 죄 아래서 고심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 앞에서 점 도 없고 홈도 없이 나타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가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다만 신자들이 힘써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할 목표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신자들은 자기 육신의 장막을 벗고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기 전 에는 그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지만 자기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언 급한다.

 

"15.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재림의 날을 늦추시는 것은 그가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이로써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이 그들의 구원의 한 증표인 것으로 생각하라고 격려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평소에 사람들을 낙심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그리스도의 더디 오심을 오히려 신자들을 격려하는 방편으로 지혜롭게 바꾸어 놓고 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  우리는 갈라디아서와 그밖의 다른 귀절들 에서 도처에 다니며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아무 쓸모없는 악한 무리들이 신뢰할 만한 사도 바울의 말에서 그가 다른 사도들과 아주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는 구실을 끌어내어 그것을 악용하였던 사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사도 바울을 언급하여 그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음을 증거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은 중상 모략의 기회를 근절시키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나에게는 본서가 베드로 자신에 의해서 직접 쓰여졌다기 보다는 어떤 다른 사람이 베드로의 마음과 일치되게 본 서신을 저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의 가르침과 그의 호의가 되는 이 증거를 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는 그가 자신이 한 말과 다르게 본서를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 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  이 귀절은 '서신들':과 '일치되지 않는다. 이는 그 대명사가 헬라어에 있어서 중성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곧 그가 언급한 일들 중에 더러 난해한 것을 무식한 자들은 길을 잃고 방황할 기회로 삼아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 가운데서 그처럼 고상하고 난해한 문제들은 신중히 숙고해야만 하며, 어떤 '사람들의 어리석고 미련한 이론들이 우리를 혼란시킬 것에 대비하여 이같은 어리석음을 범치 못하도록 우리 자신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경고를 받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의 무식한 이론으로써 훈계하는 데 사용해야 할 단순한 교훈들을 복잡하게 만들어 그 의미를 왜곡시킨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이 가끔 이해하기 어렵고 힘든 것들을 포함하 고 있기 때문에 그 서신들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그 서신들은 우리가 조용하고 순종적인 마음으로 대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읽어야 할 것들이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에 게 유익을 주는 것을 고집스럽게 그들의 멸망을 초래할 것으로 바꾸어 놓는 천박하고 야비한 자들을 정죄하고 있다. 그는 성경 도처에서 이같은 일이 일반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우리가 그 성경 을 읽는 일을 금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고 다만 진보를 방해하는›이 와 같은 악들이 시정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정하신 바를 죽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등불과 같이 빛을 비추어 주고 우리의 길을 분명히 인도 해 주는 것인만큼 이와같이 알기 어려운 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고 물 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변은 특히 우리가 그 알기 어려운 것들이 어찌 우리의 육적인 지각에서 숨기어져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베 드로는 그것들을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신비로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 지만 하나님께서 채택하시는 교수법은 아주 세련된 것이어서 성령을 !자기 길의 인도자로 모시고 그의 인안내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 안에서 분 명한 빛을 소유하게 된다. '대낮에도 앞을 보지 못하여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가 하면, 교만하여 샛길에서 방황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험한 곳에 서둘러 올라가서는 곤두박질하여 떨어지고 만다.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  신자들에게 그들이 주의해야 할 위험을 보여주고 나서 사도는 .이제 그들이 지혜롭게 행하여 그의 충고를 받아들 이라는 사말로써 결론을 짓는다. 그들이 압도당할 것에 대비하여 깨어 있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 원수의 교활함과 그가우리를 사로잡기 위해서 설치해 둔 수많은 함정들과 또한 불경건한 자들의 [속임수를 생각할 때에 우리가 한눈을 팔 틈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서 사단과 불경 건한 자들의 계교에 우리가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우리 구원의 보 증은 미끄러운 땅 위에 서 있고 한가닥 실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사도가 신자들에게 그들의 굳센 데서 떨어질까 주의할 것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떨어질 위험에 처할 경우,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 것 인가? 나는 이 권면과 유사한 다른 권면들이 하나님께 기초를 두고 있는 우리 믿음의 안전을 흔들어 놓을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우리 육체의 나태함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본다. 누구든지 이 문제에 관 하여 보다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고린도 전서 10 장을 소개해 줄 것이다.

 

문제의 요점은 곧 우리가 육체에 거하는 동안에는 나태함이 항상 일깨워 져야만 하며, 연약함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여러가지 위험들이 우리 눈 앞에 밝히 드러나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들 에 기초되는 확신을 흔들어 놓지는 않을 것이다.

 

"18. 오직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  사도는 우리에게 전진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이를 보존하는 유 일한 방법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중도에서 멈추거나 주저앉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여기서 마치 매일 진보해 나아가는 일에 전념하는 자들은 안전하리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나도 은혜라는 말을 일반적인 의미로 보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 게 되는 영적 은사로 해석한다. 우리가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 에 참여하는 자가 되므로 지식이 은혜에 덧붙여지고 있다. 마치 믿음이 자 라감에 따라 은혜가 더해지리라는 말과도 같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 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뚜렷한 송영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는 아무에게도 돌려질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간을 뜻하는 부사 이제와는 우리가 세상에서 군사로 싸우는 동안에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영광을 빼앗지 말아야 할 것을 뜻한다. 사도는 이제와 라는 말에 이어 즉시 영원한 날까지'라는 말을 덧붙여서 우리가 이제 우리의 마음 속으로 그의 영원한 나라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그의 영원한 나라는 우리에게 그의 완전한 영광을 나타내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