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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후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3:8)

1. 성경 (벧후 3:8 ~ 13)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8)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9)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10)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1)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2)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사도는 이제 그의 말머리를 경건한 자들에게로 돌려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될 때, 그들의 눈을 위로 향하여 들라고 명한다. 이는 그래야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를 그들 나름의 엉뚱한 기대에 갖다 붙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려야 할 시간은 긴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짧은 현재의 생애에 주시하고 있고, 또 더 나아가서 날과 시간과 분,초를 헤아림으로써 지루함을 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원세계를 대하게 될 때에는 수세기가 일순간에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  사도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다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늦추고 계신다는 말씀으로써 과도하고 불합리하게 서둘러대는 이들을 저지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초조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주 주께서 왜 좀더 속히 임하지 아니하실까 하는 의아심이 은연중에 일어나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늦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쏟고 계시며, 그날을 늦추시는 것은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가 더디 강림하시는 일에 관하여 더 이상 질문할 근거를 잃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날을 늦추시는 것은, 사람이 자기 나태함으로 말미암아 넘어질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이 결코 있을 수가 없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시간을 어떻게 맞춰야 할 것인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다.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온 세상의 존속기간을 어떤 한 사람의 생애로 생각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회개하기에 이르도록 그 사람의 때를 늦추심으로써 그를 유지시키신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끝이 이르게 하시는 일을 억제하신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매우 유용한 교훈이다. 우리는 이로써 시간을 바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나태함에 대한 형벌을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이것이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멸망하는 자들에게도 안전을 가져다 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기에 이르러 아무도 멸망치 않게 되기를 원 하신다는 사실로 보아서 그 구원의 순서에 유의해야만 한다. 이 말씀은 구원을 얻는 방법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무릇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이 길을 따라야만 한다.

 

여기서 만일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신다면, 어찌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멸망에 빠지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악인들이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되어진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에 관해서는 그들의 아무런 언급이 없고 다만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자비에 관해서만 언급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그의 손을 내미시나 창세 전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만 붙드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로 이끄신다). 동사 '코레사이'는 헬라어에서 자주 중간태로 간주되므로 내가 괄호안에 넣어둔 말은 본절에서는 적절한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방황하며 흩어져 있던 모든 자들이 다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  이것은 신자들이 항상 깨어 있고, 또 내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덧 붙여진 말이다.  대부분 우리는 너무 조급하거나 나태한 가운데서 일을 한다. 우리가 너무 조급하면 그리스도의 날이 당장에 닥칠 것같은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게 되고, 또 부주의하면 그 날을 너무 늦게 잡을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우리의 분별없는 열정을 바로잡아 준 사도는 이제 우리를 나태한 잠에서 일깨워 항상 우리가 자주 포기하려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비하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생각하지 않고 육체의 일에 골몰하게 되면 그 결과는 어찌되겠는가?

 

우리가 만일 사도의 의도를 생각하게 된다면 다음에 나오는 하늘과 땅이 불살라질 것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불과 폭풍우와 그 밖의 어떤 일들에 관한 난해한 논지를 제공하는 것이 사도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우리도 역시 새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 세계에 이르도록 분투 노력해야 한다는 권면을 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는 하늘과 땅이 불로써 정결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나라에 합당하게 되듯이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정화의 단계가 더욱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난해한 이론을 놓고 많은 수고를 하는 주석가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다.

 

이는 사도가 여기서 이 모든 가르침을 경건한 삶을 촉구하는 권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과 땅이 우리를 위하여 소멸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일을 생각하지 않고 이 땅의 일들에 골몰하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비록 하나님의 파조물 자체는 정할지라도 하늘과 땅의 부패는 불로써 정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처럼 수많은 악에 싸여 있는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 겠는가 ?

 

경건 (pietatibus)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경건의 의무로 간주하지 아니한다면 단수로 사용된 복수이다.  세상의 모든 요소들에 관하여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곧 로마서 8장 21절과 그밖의 귀절에서 쉽게 결론을 얻을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것들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다만 하나의 새로운 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 불사른 바 되리라는 것이다.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나는 이 절을 마치 두 개의 분사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번역해 두었다. 우리가 위에서 각기 나누어 고찰하였던 바를 이제 한 문장으로 묶어 놓으면 우리는 마땅히 급급하고도 침착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취지가 된다.  서로 모순인 그것처럼 보이는 이 문장은 "천천히 서둘러라"와 같은 격언처럼 상당히 적절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바라보고 라는 말로써 사도는 소망의 인내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또 ,더딘 면과 급한 면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 두 가지 면 모두 적절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고요함과 잠잠함이 소망의 속성들이므로 우리는 육체의 경솔함이 틈을 타서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의해야만 제한다.이와같이 우리는 진지하게 선행에 힘을 쓰고 부르심의 경주를 신속히 하도록 해야만 한다. 우리가 앞에서 그리스도의 날로 칭했던 바 (그렇게 칭하는 것이 성경 도처에서 발견되는 관례이다)를 사도는 이제 하나님의 날로 칭하고 있다. 그것이 정당한 것은 곧 그날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되돌리시고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