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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후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

1. 성경 (벧후1:1 ~7)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2)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3)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4)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5)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6)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7)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시몬 베드로" ;  본 서신의 머리에는 먼저 기도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유대인들을 권면하여 감사하게 함으로써 그분의 손으로 받은 바 선수많은 하나 님의 친절한 은혜와 유익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감사의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우리는 많은 곳에서 사도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칭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는 곧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교회에서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 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이라는 말은 무릇 교회에서 공적인 직무를 행하 의미를 갖 는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을 다 포함하고 있으므로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한편 '사도직'은 보다 존귀한 직분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한 말의 의미는 그가 단순한 종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주께서 사도의 서열에(in ordine apostilico) 두신 자로서 나머지 다른 자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해언하여 신실한 자들이 깨달음과 가르침 종이라는 것이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  이것 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모든 자들에게 차별이 없이 베푸신 은혜를 찬양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들이 모두 다 동일한 믿음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은 보통 은사가 아니었다. 믿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고상한 선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 믿음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 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믿음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동일한 그리스도와 그의 의와 및 구원을 소 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믿음의 분량이나 정도에는 다양한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지식에 서 나오는 열매를 방해하지는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와 및 다른 사도들과 더불어 진정한 믿음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
 
사도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라는 말을 덧 붙여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자기 자신의 노력이나 힘으로 믿음을 얻은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순전한 은사로 말미암아 얻은 것임을 깨달아 알게 하고 의미의 의)와 사람의 공로는 서 .동기로 불리우는데 이는 아무도 있다. 하나님의 의(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로 대립된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의 유효적 스스로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의는 본래부터 하 나님 안에 남아있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로마서 3장 22절과 같이 것이 사람들에게 전가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는 더 나아가 이 의를 공히 하나님께와 그리스도께로 돌린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2. 하나님과~~~~~앎으로" ;  문자적인 의미로는 지식 안에서 이다. 그 러나 전치사 (엔)은 2******과 더불어'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어느 것도 문맥에 다 잘 어울리겠으나 전자의 의미를 택하겠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면 갈수록 그로 말미암는 온갖 은혜와 복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지각과 더불어 넘쳐나게 된다. 그러므로 무릇 복된 삶의 풍성 한 열매를 사모하는 사람은 베드로가 지적한 이 길로 나아가야만 한다. 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하나로 '묶어놓고 있는데 이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 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는 말씀이 확증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 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바로 알려지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은혜'라는 말은 분명히 우리 에게 대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호의를 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큰 은혜를 입게 되었으나 우리 각자의 믿음의 부분량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은 헤를 깨닫게 되므로 사도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삶으로 |우리 동안에 은 혜가 더욱 전념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는 또 '평강'이라는 말을'덧붙이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의 복 된 삶이 시작되듯이 그가 우리의 마음 속에 그의 사랑을 확증하시면 하실수 록 우리가 그의 복을 더욱더 풍성히 받아 모든 면에서 복을 누리고 형통하 게 되기 때문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  사도는 그들이 이미 체험한 하나님의 무한 한 선을 언급하여 앞으로는 하나님께 더욱 더 그들의 신뢰를 두도록 한다. 우리가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가로막지 않는 한, 끝까지 베푸시는 것이 그의 일관된 특징이다. 그의 권능은 다함이 없고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시는 기쁘신 뜻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앞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선한 소망을 갖도록 바로 권장하고 있 것이다. 그 확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말도 역시 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는 보다 간단하게 '그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풍성히 주셨으니'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신기한 능력이라는 표현을 써서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을 얼마나 풍성하게 드러내어 보이셨는지를 강한 논조로 지적하고 있다.
 
이 하반절은 아버지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된다. 이렇게 두 분에게 다 적용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은 특히 그리스도에게 더 적절히 적용되는 표현이다. 사도는 마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 은혜는 곧 그의 신성을 입증하여 주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사람 혹은 인성으로써는 그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여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  어떤 이들은 경건이 보다 뛰어난 은사인 생 명에 뒤따르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현재의 생명이나 삶을 뜻하는 것으로 생 각한다. 그들은 베드로가 마치 이 두 증거들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빛 가운 들어오게 하셨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공급 데 하여 주셨으며 마지막에는 영적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그들에게 경건을 부어주셨으므로 신자들에게 향하신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너그러운 것인 가를 입증하고자 했던 것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이 연구별은 베드로의 마음 속에서는 생소한 것이었다. 이는 그가 생명을 언급하고 나서 경건이 마치 생명의 화신이나 되는 것처럼 즉시 경건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께서는 그의 의에 따라 우리를 재창조하실 때 우리를 참으로 소성시키셨다. 베드로는 여기서 하나님의 자연적인 은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의 하신 모든 자들에게 자연의 일반적인 상태에 서 뛰어난 방법으로 베푸신 은사들을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 났고, 우리가 이성과 지각을 부여받았으며, 또 우리의 생명이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받아 유지된다는 사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덕으로 말미암은 일들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은혜를 모르는 사악한 기존재들이어서 이처럼 다 양한 자연의 모든 은사들을 그들이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 비로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기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인간생활의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 근원을 두는 새로운 영적 생활의 특 수한 은사들이다. 경건과 구원을 이루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 사들 가운데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되므로 인간들은 그들의 쓸 것을 하나님 당연하다는 듯이 권리로써 요구할 것이 아니라, 검손히 구 께 구하되 마치 해야 하며 무엇이나 받은 은혜와 축복을 그의 공로로 돌려야 한다. 모든 경 선포하거 건과 구원의 도움을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위하여 베드로는 여기서 그것들이 인간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분 우 명히 보고하고 있다.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  '영광을 통해서' 가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본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본들은 idiof δ6ξη(이디아 도크세), 곧 '그의 영광으로써'로 되어 있고 고대의 주석가들 역시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나는 이 후자의 본문을 채택한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더 쉽게 통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목적은 분명히 구원의 모든 공로를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서 모든 면에서 그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위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 점은 그의 영광과 덕(혹은 권능)으로써 라는 말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다른 본문은 비록 더 애매하기는 하나 그 결과는 동일하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으로 옷입히시고 그의 미덕을 부여하여 주시기 전에는 우리가 수치로 덮여 있었고 전적으로 죄악에 빠져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부르심의 효력이 그들 속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이 회복되어 의와 거룩함에 있어서 변화를 받는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앓으로 말미암음이라" ;  사도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 큰 복에 우리를 참여시키신 방법을 묘사한다. 곧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그 자신을 계시한 바를 서술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생명의 근본이요, 경건에 이르는 최초의 관문이다. 우리는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기 전에는 영적인 은사들 중에 아무것도 우리의 구원에 유익이나 도움을, 얻을 수가 없다. 사도는 이 지식의 근원을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 이는 우리가 부르심을 입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유효적 동기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지 우리 마음의 지각이나 인식이 아니다. 사도는 지금 외적인 부르심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외적인 부르심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는 지금 성령의 숨은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내적인 부르심도 아울러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귀에 인간의 음성으로 복음을 들려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그에게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사도가 여기서 단지 영광과 덕만을 언급하고 있는지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다른 것들도 역시 언급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려움은 이 귀절이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베푸신 영광이 덕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그의 영광과 덕으로써라고 읽는다면 아무런 어려움이나 혼란 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모든 것은 정당하고 적합하게 그의 영광과 덕의 결과로 간주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본들은 다양 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떤 사본은 δι δν(디 혼를 인하여)으로 되어 있어 그 언급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다. 어떤 것을 택하든지간에 그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가장 값진 것이 로되 우리에게 은사로 주셨으므로 값없이 거저 주셨다는 뜻이다. 사도는 그 약속들이 뛰어난 것은 그것들이 우리로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하게 .하여 준 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며 그 이상 더 뛰어난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의 .절정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바로 거기 서부터라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본래 상태가 얼마나 무가 치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셔서 그의 모든 소유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 사실은 우리의 지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오직 이와 같은 생각만이 우 리에게 세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늘로 높이 오르게 하는 충분한 이유를 마 련하여 준다. 복음이 목적하는 바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즉, 그것은 일종의 성화인 것이다.
 
성품이라는 말은 본질을 뜻하지 아니하고 성질을 뜻한다. 마니교도들은 하나님의 줄기에 우리가 뿌리를 박고 있으며 우리의 생애를 다 마친 뒤에는 우리의 본래상태로 되돌아간다고 몽상하곤 했다. 오늘날에도 그와 마찬가지 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 안으로 넘어 들어가서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성품을 흡수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광신자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고린 도 전서 15장 28절에서 사도 바울이 가르친 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 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한 말씀을 해석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들은 단 순히 우리가 육체의 모든 악을 벗어던지게 될 때 우리는 .신의 불멸세계와 복된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어느정도 하나 님과 같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같은 가르침은 플라토에게도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여러 커 절들에서 인간의 최고 선을 신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오류의 안개 속에 휘말려버렸고 그 후로 그는 자 기 나름대로 고안해 낸 이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는 이 헛된 생각들을 제쳐두고 오직 이 한 가지 사실, 거룩함과 의로운 하나님 의 형상이 우리가 영생과 영광을 함께 누리는 조건 위에서 우리 .안에 회복 되어 완전한 복락에 필요한 수준에까지 이른다는 사실로 만족해야만 한다.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색어질 것을 피하여~~~~" ;  하나님께서 우리를 청하 여 불러들이신 하늘 영광이 얼마나 조사자 것인가를 제시하여 주고 그로써 우 리로 현재 이 세상의 헛된 것들에서 돌이켜 떠나도록, 하게 .하고자 한 것이 사도의 목적이었다는 점은 우리가 이미 설명한 바 있다.는 세상의. 부패 한 것을 신의 성품과 대치시키고 있다. 그는 이 부패한 것들이 '우리 주변에 서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서도 '발견된다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사악하고 '부패한 욕구들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마음 속 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욕 이라는 말로써 우리 마음을 부패의 근원으로 '서술하고 있다. 부패라는 말이, 세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문맥에 들어 있으므 로 그 부패한 세상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5~7. 이러므로"  : 이것은 어렵고 또 끝이 없는 일이므로 사도는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것들을 벗어던지고 진지하게 이 목적을 위해서 살 것을 명한다. 이 말씀은 조금도 나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곧 우리가 하 나님의 부르심에 응함에 있어서 안이하거나 부주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하라' 고 말하 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사용하고 있는 분사의 의미이다.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공급하라." ;  사도는 신자들이, 마땅히 힘 써야 할 바는, 곧 바른 윤리와 분별력과 절제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믿음을 갖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믿음은 부족하거나 헛된 것이어 서는 안되며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덕목()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 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믿음에 무엇을 공급한다는 것은 믿음에 무엇을 더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말들이 그 의미상 어떤 정 점에 이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아 니다. 사랑은 절제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뒤따르는 것이 아니며 또 앞서는 것도 아니다. 본절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 그리고 사랑을 네 믿음에 더 하도록 유의하라고 단순하게 설명될 수가 있다.
 
나는 덕이라는 말을 하나의 정직하고 질서정연한 삶의 의미로 본다. 곧 ёνёργεια(에네르게이아; 능력)의 의미가 아닌 αper(아레테 선)의 의미로 본다. 지식은 분별 있는 행함을 뜻한다. 일반적인 용어들을 제시하고 나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전문 용어들 가운데 몇몇을 열거한다. DtAadeldia(필라 델피아)는 하나님의 아들들 상호간의 사랑을 뜻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 랑 (charity)은 보다 광범위한 뜻을 가지고 있어서 온 인류에 대해서도 적 용된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우리의 믿음에 덕을 더할 것을 명함에 있어서 자 유의지의 힘과 능력을 권하고 있는지 어떤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고히 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 께 앞자리를 내어드려서 우리 안에서 그가 일을 시작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과 협동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활동이 헛되거나 혹은 무효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바로 자신의 공로라고 말 할 것이다. 한편 성경의 완전한 가르침은 이 오류를 반박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바른 생각을 갖고 또 그것이 효력을 갖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 님이시며, 우리의 발전과 보존은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 을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성경은 지식과 절제와 인내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라고 정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질을 갖출 것을 요구함에 있어서 사도는 결코 우리가 그 자질들을 갖출 수있 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마땅히 그와 같은 자질들을 갖추어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신자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 있는 것 고 그들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음을 알 때 그들에게는 달리 방법이 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