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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14)

1. 성경 (갈3:6 ~ 14)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6)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7)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9)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0)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1)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6. 아브라함이" ;  ‘그러나 오히려'라는 접속사구가 보충되어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질문울 한 뒤 곧 주저없이 모든 의문의 일체를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으매' 혹은 ‘마침… ... 할때'라는 말은 가장 가까운 부분인 바로 앞절, 즉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과 그 능력의 사역을 저들이 받았다'라는 말만 관련된 말이다. 그래서 ‘저들이 받은 은혜 중에, 아브라함을 닮은 모습이 빛난다'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으메……이 인용문에 의하여 바울은 로마서 제4장에서와같이 여기서도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를 의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첫째 바울이 여기서 말한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간단히 말해야 하겠고?  둘째로 의란 무엇이며, 세째로 어째서 믿음이 칭의(稱義)의 원인으로 간주되는가 등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진리에 관하여 인간이 가지는 어떤 확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가인이 그에게 형벌을 통고한 하나님을 수백번 믿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가 의를 얻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의 약속을 받아 그것을 확실히 신봉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사람이 하나님께 몸을 맡겨서 거기서 휴식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며 그 말씀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의'라는 말에 관해서는 모세의 표현을 주목해야 하겠다.  모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할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는 의인(義人)’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속에 의가 없기 때문에, 의 대신에 저들이 믿는 믿음을 하나님이 수납하시는 중에 사람이 의를 얻는 것은 전가(轉隊)에 의하여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어떤 습성이나 양질(良質)을 불어넣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째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믿는 데 원인이라고 불릴 만한 놀라운 영예를 신앙에 돌리는가? 첫째로 신앙이란 기구적(器具的)인 원인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적절히 말하면, 우리의 의는 다만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시는 것 외에 이무 것도 없으며, 그리고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시는 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그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심으로써 내가 지금까지 말해 온 저 의를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원인을 신앙에 돌릴 때, 그것은 칭의의 주요 원인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이 참된 의에 이르기 위한 수단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의는 본래 사람 속에 타고난 양질(良質)이 아니므로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에 의해서만 소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정당한 보수(報iii)처럼 믿음의 공덕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이 값 없이 주시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갈은 각 표현, 즉 ‘우리가 하나님의 온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 의의 원인이다'' '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다'' '의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의를 얻는다'는 표현들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믿음과 행위 두 가지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명제에 동의하려는 자들이 얼마나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믿음에 의하여 의로워진 자는 자기 자신에 속한 의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무(無)로 여기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한다. 

 

그 래서 바울이 로마서 4장 2절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었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의의 일부로써 그에게 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적(端的)으로 의로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신앙이 온전히 그의 의가 된 것이다. 더우기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만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는 원인을 전적으로 믿음에 돌릴 때에 모든 행위의 공덕은 거기서 제외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값 없는 자비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 그리고 복음 안에서 입증된 우리의 양자 됨의 증거-이런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믿음은 보편적으로 율법과 행위의 공덕,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는 전적으로 대립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단지 의식(儀式)과 반대된다고 말하는 궤변가들의 생각은 뒤에 논쟁의 결과로써 간단하면서도 쉽게 논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자기 밖의 의,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로 인해서 또 바울을 멸시하여 ‘모세는 의를 성실이라고 하면서 그는 단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선한 사람으로 인정 받은 것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무리의 어리석은 퀘변도 물리칠 수 있다. 사탄은 지금도 이러한 경솔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위험한 중상으로써 성경의 확실함을 뒤엎고 왼전히 매장하려고 하고 있다. 모세가 아이들에게 문법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울은, 의라는 말을 신학적으로 아주 적철하게 이해했다. 우리가 하나님 잎에서 의로 간주되는 것은.인간에 대하여 그의 성실함을 상찬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에 왼전히 순종할 때이다. 왜나하면 의라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과 반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율법의 일점, 그것도 그 중의 가장 작은 것을 범해도 벌써 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측에서는 그러한 의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이것을 값 없이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나 유대인은 여기서 바울이 모세의 말을 자기 의도에 맞추려고 부당하게 남용한다고 바울을 공격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세라는 인물은 그리스도나 혹은 영생에 관련시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땅 위의 약속에 관련시켜 언급하고 있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유대인들은 말한다. 교황과의 무리도 유대인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비록 저들은 감히 바울을 비방하지는 않지만, 바울의 의도를 완전히 파괴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자명한 공리(公理)로 지키고 있는 것을 바울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약속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며, 너의 씨로 모든 국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첫째 약속에 다 종속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부터, 네 씨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들을 때 그는 단지 이 말씀에만 머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양자되는 은혜에까지 귀결시켜 마치 부분이 전체 속에 포함된 것처럼 그 은혜도 이 말씀 속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식으로, 다른 모든 약속도 그를 통하여 주어졌는데, 말하자면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은혜의 증거로써 주신 것이 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로부터 구원에 대한 신뢰심이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다르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자녀들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는 있지만, 저들은 짐승처럼 받아 먹기만 하고 보다 높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모든 은혜가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성별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은혜 속에서 하나님이 저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인정한다. 이렇게 하여 저들은 확실한 토대, 다시 말하면 양자가 된 확신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항상 영생의 소망으로 인도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도, 다만 그가 자손의 번영에 관하여 말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고, 약속된 중보자를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선언한 대로 그 중보자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 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둘리게 되느니라"(고후 I : 20).

 

"7.  그런측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  또는 ‘너희는 안다' 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읽 는 방법은 둘 다 헬라어 원문에 맞는댜 어느 쪽을 취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따른 옛 번역을 제외하고는 의미가 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따른 옛 번역이 훨씬 힘이 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 즉 행위에 대한 신뢰를 일체 단념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만 의지한다고 말한다. 누가 그렇게 해석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울 자신이라고 나는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4장 4절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삶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자기의 의와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의 자비 속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앞에서 전술한 결정으로부터 귀납하여 그러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결론 한다.  왜냐하면 만일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그의 자손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와 같이 믿음에 굳게 서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을이 한 가지 생략하고 있는데,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이들이 아니면 교회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충해도 좋을 것이다 ..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 ·바울이 앞에서 일반적으로 말해 온 것을 이번에는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이방인이 부름 받는 것은 새롭고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저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부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례 받는 일과 율법을 준수할 것이 요청되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계약에 동참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민음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이 부름의 은혜에 이르며,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영접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밝히 말하고 있다. 그가 어떻게 이것을 증명하고 있는가?  그것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확실히 아브라함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모범이요, 심지어 규칙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필경 아브라함과 갈은 복을 받을 것을 의미 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복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똑 갈은 방법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9. 그러므로……믿음이 있는" ;  이 말은 매우 강조적인 말이다. 왜냐하몀 바울이 말하려고 한 것은, 저들이 복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과 갈이 할례를 받았다든가 율법의 행위가 있다든가 해서가 아니고, 또 히브리인이기 때문이라든가 자기의 존엄성에 의해서도 아니라, 다만 아브라함과 갈이 믿음에 의해서만 이 복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개인의 자질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오직 믿음만이 인정된 것이다. '복'이라는 말은 성경에 여러가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생의 유업으로 택함 받은 것을 의미한다. 

 

"10. 무롯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니니(託 1)……" ;갈은 한 샘에서 더운 물과 찬 물을 낼 수 없는 것과 같이 율법에서 복 받고자 하는 것은 모순된 논법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모든 사람을 저주 아래 가두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부터 복 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구원의 신뢰를 두는 자들을 일컬어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법은 언제나 문제의 양상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논점은 분명히 의의 근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주를 면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율법의 선고는 율법의 어느 부분이든지 범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도록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을 만족하게 성취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어떤지 보기로 하자. 그러한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최후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모두 유죄를 선고 받고 있다. 이 논의에는 결론과 소명제(小命題)라고 할 수 있는 둘째 명제가 빠졌다. 왜냐하면 완전한 삼단 논법은 다음과 갈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어느 부분이라도 범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주를 받는다. 이 판결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유죄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저주 받는다. 더우기 만일 우리에게 율법을 성취할 충분한 힘이 있다면, 바울의 논거는 확실한 것이 뭇 될 것이다. 왜냐하떤 소명제에 관해서 곧 예외를 주장하계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의 두 가지에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 은 ‘바울이 불완전하고 부당한 이론을 제시했다'든가 혹은 ‘인간이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볼가능하다'하는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일 것이다. 곧 바로 ‘범법자는 누구나 저주 받는다는 것을 나도 승인한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단 말이냐?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선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기 때문에'라고 항변할 반대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오늘날 교황과의 무리가 진저리 나게 생각하는 교의 (敎義),즉 ‘사람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항의할 여지 없이 명확한 사실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하고서 그는 대담하게 결론 하기를 ‘모든 사람 에게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도록 명해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저주 받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생래적으로 부패하여 율법을 지킬 능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비록 영구적이며 동시에 불가분리의 성질이라고 하지만 율법이 저주하는 것은 우유성(偶有性)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좌우간 우리 본성의 부패에 의하여 율법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복이 방해를 받으며 거절당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저주뿐이다.

 

"11.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  그는 다시 상반(相反)되는 것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면,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도 인용했지만, 하박국의 성구에 의하여 이 명제를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대 명제는 칭의 방법의 차이에 의하여 증명한다. 칭의방법의 차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율법은 율법이 명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자를 의롭다 하며, 반면에 믿음은 행위의 모든 공덕은 벗어던지고 그리스도만 의존하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의 공덕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타인의 은혜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두 가지는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 한 가지는 반드시 다른 것에 의하여 전복 된다. 이것이 논의의 대체적인 요지이다. 이제 각 부분을 하나 하나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 이 성구는 이미 로마서에 해설했기 때문에 여기서 그 주석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줄안다. 선지자는 확실히 육에 대한 신뢰를 참된 신앙과 대조시키고 있다. 선지자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언했는데, 그가 의미한 것은 저들이 잠시동안 지탱해 나가다가 급박한 폭풍이라도 불어닥치면 넘어질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삶을 계속할 것과 심지어 죽음 속에서도 끊임없이 살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롱하는 자들이 선지자는 이 믿음이란 말을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리 비웃고 중상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요, 또 저들이 그럴만한 요지(要旨)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선지자가 말한 것은 믿음이란 단순히 하나님만 의뢰하는 고요한 양심의 확신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성경 귀절을 여기에 적철하게 인용해 쓴 것이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  그러나 율법이 믿음과 모순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답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항상 상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바울이 쓴 말은 현재의 주제, 다시 말하면 특별한 상황에 상응(相應)하는 말을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믿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칭의의 ~ 거에 관해서이다. 사실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믿는다는 것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불과 물을 결합시키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율법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과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 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를 행하는 자……" ; 그 차이는 사람이 율법을 완성할 때 법적 의에 의하여 의로 여김 받는다는 사실에 있다. 바울은 이것을 모세가 한 말을 인용하여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 믿음의 의란 무엇인가?  바울은 그것을 로마서 10장 9절에서 정의하기를  "네가 만일……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란 게으르거나 믿는사람들은 선한 행실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논하고 있는 것은 믿는 사람은 할 수 있는 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가, 어떤가 (그런 것은 의십할 여지가 없지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저들을· 행위에 의하여 의를 얻는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더우기 율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므로 그런 사람들이 의인인데 왜 바울은 그것을 부인하는가 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대하여 답하는 것은 쉽다. 즉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만일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의인이라는 것을 우리도 확실히 승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율법에 의하여 우리와 체결하신 언약은 조건부이기 때문에 요청되는 의를 완전히 성취한 사람이 없는 한, 모든 사람은 생명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미 앞에서 충고한 바대로, 율법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의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성취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이러한 완전함으로부터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

 

"13. 그리스도께서……우리를 속랑하셨으니" ;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저주에 복속시켰다. 이로 인해서 유대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심히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바울은 유일한 구제책을 제공하여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 주며,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주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 말로 인해 그의 의도는 더욱 확고해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 언은 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의는 틀림없이 율법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자유롭게 되었는가 하는 방법에 관한 말을 덧붙였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리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을 위하여 그런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공연히 십자가에 못 박히셨든지 또는 우리가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연히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가 그에게 부과되었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저주 받았다고 하지 않고 저주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저주가 그에게 놓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계 말하기는 어렵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치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광은 오로지 이 십자가를 고백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고 선포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떠한 죽음을 죽으실 것인가에 대하여 모르셨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아들을 그의 아버지가 저주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단 말인가 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두 가지 일, 즉 그리스도의 위격(the person o f Christ)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성에 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은혜로써 충만한 하나님의 홈 없는 어린 양이 되셨으므로 저주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인간의 형체를 취하사 죄인이 죄를 받으셔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이다. 실로 그가 그렇게 하심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벗어나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를 참고 견디어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적(敵)으로 여기고 또 아버지가 그를 미워했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를 아버지와 화해 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항상 그의 뜻을 그에게 위탁하사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로부터 자신에게로 옮기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그가 못 박히셨고 하나님의 준엄함을 성난 재판관으로부터 받은 것처럼 느끼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어리석음이요, 천사도 놀랄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지혜를 능가할 뿐만 아니라, 삼켜 버릴 수 있는 것이다•

 

"14. 이는 ..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 받았다고 앞에서 말한 그의 논의를 자기의 목적에 엄밀하게 적용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온 그리스도에게 근거하고 있으며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기 위하여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다면 이방인이 꼭 같은 은혜를 받는 것을 무엇으로 풀이하겠는가? 그리고 이 복이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고 하면, 우리가 이 복에 참여하려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  나는 성령의 약속이란 말을 히브리인의 관용을 따라 ‘영적 약속' 이라는 의미로 본다. 비록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욜 2 : 28)라는 약속이 신약 성경과 관계 되었자만, 바울이 이 귀절에서는 다른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여기서 말 하는 영은 의식(儀式)뿐만 아니라 육신의 혈통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부적인 것과 대조 되는 것을 말하며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약속의 성질에 의하여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약속이 영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받는 것도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