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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3:2)

1. 성경 (갈3:1 ~ 5)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1)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4)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 ;바울은 꽤 신랄한 질책을 교훈에 섞어서, 아니 오히려 질책으로써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끝까지 그렇게 계속하지 않았는가 하고 어떤 사람은 이상히 여길지도 모론다.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자기가 진술해 온 아주 중요한 사실에 자기 스스로 감격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모든 은총과 함께 배척당했다든가 더우기 그의 죽음이 일고의 여지도 없이 일축당했다는 것을 들을 때, 경건한 마음을 가진 자라면 어찌 의분을 터뜨리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아노에토이';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며, 천박하며 오성(悟性)을 상실한 자라고 부론 것이다.  바울은 저들이 몹쓸 신성모독(神聖冒濱)에 싸여 심히 거만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저들은 말하자면 마법의 요술에 기만 당하고 매혹 되었기 때문에 꾸짖고 있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저들의 탈락(脫落)이 어리석고 경솔하다기보다는 광기적(狂氣的)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갈라디아인을 야만인 출신이기 때문에 다루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바울이 저들의 국민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것을 단순히 논의의 주제 및 사건의 상황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이런 위대한 빛 가운데서도 오히려 악마의 요술이 존재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마법에 걸려 올바론 정신을 잃었다고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단지 저들이 복음을 좇지 않았기 때문이 이니라, 저들이 그렇게 확실히, 분명히, 친철히, 다시 말하면 아주 효과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즉시 변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 고 번역한 말을 에라스무스(Erasmus)는 ‘믿지않는'이란 말로 바꾸어 즐겨 사용했는데, 나는 그것을 철처히 반대하지는 않지만 본문의 문맥을 보면 내가 번역한 편이 보다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저들을 비난한 것은 처음부터 저들이 복음을 저버렀기 때문이 아니고 끝까지 복음을 좇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이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저들의 과오를 확실히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더욱 더 좋게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리스도를 반역한 저들의 죄가 더욱 더 중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교훈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단순한 교훈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생하고 분명한 형상으로서 저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저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지식을 얻었다. 어거스탄의 해석은 약간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의 보좌에서 벌써 버림받기로 규정(pro-scribed)되었던 것처럼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프로스크라이브드(pro-scribed)로 읽고 있지만, 이 말을 ‘모든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선언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부적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를 따라서 헬라인 사이에서는 이 동사에서  '프로그람마타'; 기본적인 지식 이라는 명사가 생겼지만 이것은 재산을 팔기 위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광고로써붙여 놓은 공고판과 갈은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림을 그리다’ 라고 하는 편이 덜 애매하다. 그래서 나의 판단에는 이 번역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 선교의 효과가 얼마만큼 힘이 있었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우선 그것을 그리스도의 형상이 실물대로 그려진 그림에다가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다음 비유로써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것은 너희 눈 앞에다’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이 저들의 눈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 것처럼 바울의 설교에 감동 되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사람처럼  ‘갈라디아 사람들이 순수한 복음에서 이탈하고 또 적어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밖은 사기한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신뢰한다면 그것은 주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밖는 것이요 주를 희롱하는 것이다’ 라는 의미로 본다면 그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갈은 의미로 이해한다. '바울이 저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교훈 할 때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림 가운데 생생하게 나타나 처들에게 보여진 것처럼, 심지어 저들 가운데서 못 박히신 것처럼 그런 방법으로 가르쳤다' 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선명하게 묘사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언급한 바와 갈이 성령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어떠한 웅변을 쓴다해도, 수사가의 어떠한 문장력에 의해서도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을 맡은 자로서 거기에 합당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맡은 일을 하려면 단순히 말하는 것만 배울 뿐 아니라 사람의 양심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가 그 속에 흐르도록 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가 그러한 화가를 모셨다면, 교회는 벌써 석상(石像)이나 목상(木像), 즉 죽은 자의 화상이 팔요 없었을 것이며, 교회가 더 이상 어떤 그림들을 구하러 다니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성상(聖像)이나 성화(聖畵)들은 로마교에서 먼저 허용한 것인데,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목사들이 벙어리가 되고 사실 우상이 되었을 때 그렇게 된 것이며, 목사들이 강단에서 몇 마디 말하는 것조차 냉냉 해지고 천박해져 그들의 사역의 효과와 성과가 사라져 버렀을 때 그렇게 된 것이다.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 이제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새로운 논거로써 확실히 하고 있다. 그 첫째로 바울은 갈라디아인의 경험한 것을 거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 저들 가운데 복음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저들이·복음을 들을 때 곧 성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은총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나 온 것이다. 베드로도 무할례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에 관하여 형제들 앞에서 변명할 때 이것과 똑 같은 논법을 썼다(행 11 : 4). 바울과 바나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예루살렘에서 논쟁할 때도 같은 논법을 썼다(행15 : 12). 그러므로 갈라디아인들이 바울의 교훈에 의하여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교훈에 머물지 않는 것은 분명히 배은망덕이다. 바울이 저들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는 것은 의심의 표시라기 보다는 오히려 큰 확신의 표시이다. 왜냐하면 저들도 자기들의 경험을 살펴보면 바울이 말한 바가 진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른 데서는 복음을 ‘믿음의 법' (롬 3 : 27)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값 없는 은혜가 행위의 공덕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성령’이라는 말을 나는 여기서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중생의 은혜로 이해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때 주님이 복음 선교를 장식하신 특벌한 은사라는 의미로 이해하지만, 거기 대해서 나는 이의를 갖지 않는다. 그런데 성령이 그런 형태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울이 의도한 것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이 바울의 교훈에 함께 하여 갈라디아에 있는 주의 교회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믿는 자들이 다 함께 교화되기 위해 성령의 여러가지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인데 바울의 의도대로 저들이 그런 사실 을 밝히 알았다는 것으로써 충분하다고 대답한다.

 

여기에 대하여 그런 은혜들은 양자가 되었다는 확실한 표시라고 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이 은혜는 지금 논하고 있는 논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나는 주님이 바울의 교훈을 그의 성령의 명백한 은사로 말미암아 확증 하셨다고만 해도 족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것은 더욱 더 단순하다. 즉, 저들은 저 사기한들이 저들의 쓸데없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찾아오기 전에 양자가 될 공통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회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서술한 대로이다.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 이 귀절에 관해서도, ‘성령으로’라는 말과 ‘육체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의 의견이 여러가지로 갈라졌지만, 나는 바울이 성령에 관하여 앞에서 서술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가 말하려는 것은, ‘복음의 교훈은 너희에게 성령을 받도록 했기 때문에 너희의 시작은 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은 영에서 육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보다 악한 상태에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육체로라는 말은 의식(儀式)―특히 의식들이 그리스도와 분리 된 때에 있어서 一이나 혹은 죽고 약한 교훈처럼 외부적이고 사라져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인들이 올바로 시작했지만, 그 후 끝까지 계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 ; 이것은 또 다른 논법이다.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이제 저들이 단번에 그것을 잊어야 했는가? 오히려 바울은 저들에게 저들이 믿음을 위해 감행한 놀라운 전투의 수없는 혼적을 그렇게 잊고 싶었느냐고 꾸짖는 형식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바울이 참된 신앙을 저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된 주장을 계속 지키기 위해 견디고 참았다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이 실제로 체험한 것은 저들이 한창 핍박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저들을 도우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귀한 명예를 갈라디아인으로부터 탈취해 버린 거짓 사도를 책하고 이를 싫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논의의 엄중함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여기에 교도적(敎導的)인 말 한 마디를 첨가하며, ‘과연 헛되냐'하고 말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바울은, 저들이 바론 소망을 품고 회개를 간절히 하도록 하기 위해 저들을 격려하고 있다. 무릇 교도의 목적은 사람을 절망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가 아니고 보다 낫게 행동할 용기를 저들에게 주기 위함이다.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중생의 은혜에 관해서가 아니고, 성렬의 다른 여러가지 은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순서로 보아도 이것이 앞에서 논한 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른 논의에 관하여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저들이 받은 성령의 아름다운 은혜는 모두 복음의 열매, 곧 바울이 자기 입으로부터 저들에게 전파한 그 복음의 열매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복음을 버리고 다른 교훈을 따라갈 때 고것은 이와 같은 은사를 저들 스스로가 벗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중히 여기면 중히 여길수록 저들은 또한 확고히 서서 복음을 지키기 위해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온사와 은혜에다 사도는 능력을 덧붙이고 있는데 능력은 곧 기적이다.

 

바울은 저들 자신의 문제와 저들의 경험에 의하여 저들을 설득시킨 다음에, 이번에는 성경을 근거하여 논증하려고 한다. 우선 그는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예를 드는 논증은 반드시 결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경우는 예외로 주제나 인물에 어떤 격이 없기 때문에 논지(論 旨)가 가장 강하다. 왜냐하면 의로 나아가는 길이 많지 않으며, 더우기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의 수호자요, 모범이기 때문에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호칭(呼稱)되고 있으며 사실대로 말하면 의를 얻기 위한 보편적인 법칙이 우리를 위해 그의 몸에 규정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