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갈3:15 ~ 22)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5)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6)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7)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8)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0)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1)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이 표현으로써 바울은 저들을 부끄럽계 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권위가 죽을 사람이 가지는 권위보다 못하다는 것은 너무도 심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저들에게 대하여 사람이 상호간 체결하는 협약이나 계약에 보통 나타내는 정도의 권위로 하나님의 거룩한 계약을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수준에다 두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얼마 만큼의 큰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을 저들의 생각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사립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 이것은 가장 작은 것에서 부터 가장 큰 것으로 나아가면서 논하는 논법이다. 인간이 저들 사이에서 체결하는 계약을 항의 할 여지 없는 확실하고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고 지킨다면, 하물며 하나님이 확증하신 계약이랴 ! 그런데 라틴역으로 "테 스타맨룹" 이라고 읽을 수 있는 말을, 바울은 헬라어로 "더아데-케-"라고 했는데 이것을 헬라어로는 자주 ‘유언'(testament)이란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 종류의 계약(contract)을 의미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 후자의 의미에서는 보통 복수형으로 쓰여지는 편이 많았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는 그것을 계약으로 번역하든지 유언으로 번역하든지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경우는 이것과는 다르다. 사도가 확실히 히브리서에서는 유언에 관하여 언급했다(히 9:16).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것을 단순히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란 의미로 보고 싶다. 왜나하면 사도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직유는 계약이란 의미로 보는 것이 유언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논법대로 인간의 약정으로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엄숙한 계약에로 나아가자. 다시 말하면,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전 계약이 거기에 더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한 것이라고 하면, 이 하나님의 계약에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는가?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 논의를 앞으로 더 계속 나아가기 전에, 바울은 계약의 본질에 관한 어떤 것을 삽입하고 있다. 즉, 계약은 그리스도에게만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 계약의 기초라고 하면, 계약은 응당 무상(無償)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약속이라는 말 속에 의미하고 있는 점이다. 결 국 율법이 사람과 그의 행위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약속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이 여기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단수에 의하여 특정한 자손을 지적하면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 시키고 있다. 그런데 가끔 이상하계 생각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이 귀절을 가지고 제멋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왜곡시키는 그들의 무례함을 보고도 애초부터 그들의 무례함을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평화로운 영토를 통과하듯이 가볍게 지나쳐버리곤 했다. 그러나유대인들의 반론은 아주 도리에 맞는 것 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제라; 자손'란 말은 집합명사로써 다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특정한 개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논의는 부당하게 여겨진다. 앞에서 인용한 귀절, 곧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는 말씀 속에도 아브라함의 종족 전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의 실수가 증명이나 된 것처럼, 도도하게 우리를 조롱한다. 그런데 내가 더욱 더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우리가 저들의 그런 중상을 물리칠 확실한 방비를 갖추지 못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침묵만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은 아브라함 자신의 아들 가운데서도 다음과 같이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말씀 된 것 처럼 둘 중 하나는 가족으로부터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가족의 일원으로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인대들이 에서의 자손도 축복 받은 자손으로 인정하는가? 당치도 않는 소리이다. 저들의 아비가 비록 그들을 맞아들이지만, 축복 받은 가문으로부터 벌써 삭제되었다고 유대인들은 강경하게 논박할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줄기에서 났으나 이 부름에 참여하지 못하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열 두 족장들은 열 두 우두머리들이었으나 그것은 처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에 의하여 정해졌기 때문이다. 더우기 열 지파가 나간 후, 저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타락하여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되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유다 자손까지도 큰 시련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계 되어 마침내 참된 축복의 계승자로 남아 있는 것은 그저 한줌에 불과한 정도의 백성뿐이다. 이렇게 된 것은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 하여 예언된 대로이다(사10 : 22). 나는 지금까지 유대인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저들이 나에게 열 두 족장에서 나온 십 삼 혈통이 이스마엘 사람, 혹은 에돔 사람보다도 오히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왜 오늘날 저들만이 이 이름을 참칭(借稱)하여 다론 사람들을 사생아처럼 몰아세우는가에 대하여 대답해 주기를 바란다. 저들이 확실히 그것을 저들의 공덕에 의하여 얻었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과는 정반대로 이것은 무릇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 21 : 12)라고 한 이 전제적(前提的)인 선택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 선택으로부터 시발하여 연속되는 계 승이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후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을 다윗 이 라는 인간에 와서 다시 반복하시고 확실히 나타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단수라는 문제에만 머물러서 이것이 단 한 사람에게 관하여 말씀된 것이라고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손'이라는 말이 육을 따라 난 아브라함의 자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정해진 사람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이것을 부인한다면, 저 들은 그 강팍함으로 인해 자기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것 분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말들로부터 계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체결되었다고 결론하고 있기 때문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이 말에 대하여 궤변을 늘어놓기를, 이것은 비유를 의미하는데 ‘소돔과 이스라엘을 저주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저주하려 할 때에 소돔과 이스라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갈은 의미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행복과 번영을 축복하려 할 때 모범적인 인물을 들고 그와 같이 될 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나도 때로는 그렇다는 것을 승인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하여 복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까지도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애매한 표현이어서 어떤 때는 원인을, 어떤 때는 비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성경 중에서 이러한 표현을 대할 때마다 그때 그때의 문맥에 맞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모두 날 때 부터 저주 받은 자요, 은총은 아브라함의 손에 의하여 모든 백성에게 약속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차별없이 이 은총에 이를 수 있는 가 하면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구세주를 향하여 모여드는 자들만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구세주의 명령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의 통치 아래 한 몸으로 모일 때에 한 백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쟁에 열중한 나머지 곁길로 나가지 않는 한, 진리를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고 원인이라는 것을 쉽게 인정할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바울은 계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에 관해서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합당한 근거를 얻게 되는 결론을 짓고 있다.
"17. 내가……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 ;만일 우리가 오리겐이나 제롬, 그리고 모든 교황과 사람들의 의견을 따른다면, 이 논거(論操)는 문제없이 면박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렇게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약속은 율법이 생기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온 율법이 약속을 폐지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 그는 의식은 팔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의식(儀式)은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주어진 예전(禮典)이다. 그런데 어째서 바울은 이것을 약속과 분리시키는가 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론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논하고 그 뜻을 밝히기 위해 고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바울은 의식이라는 문제를 놓고 의식 이상의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거짓 사도들이 칭의(稱義)의 효력의 원인을 의식에 돌리고 있는 것과 저들이 져야 할 양심의 부담이다. 실은 바울이 믿음과 행위 전반울 문제로 삼기 위한 기회로써 의식 문제를 다룬 것이다.
만일 의를 얻는 것이나 행위의 공덕이나 양심의 부담이 문제가 아니었다면, 의식과 약속은 충분히 조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약속에 관한 이 페지라는 말이 전에는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것은 유혹자들이 구원은 인간에게 무상(無償)으로 약속되었으며, 그리고 그것이 믿음에 의하여 얻어진다는 것을 완전히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가 보는 대로 저들은 의식 (儀式)이 구원을 얻는데 팔요한 것처럼 주장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바울의 말을 상기하여 보자,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은 약속보다 뒤에 나타났다. 그러므로 율법은 약속을 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번 성립된 계약은 언제든지 침해당하지 않는 채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다시 한번 되풀이 하고자 한다. 즉, 만일 당신이 약속은 무상이라는 것을 이해 못한다면, 바울의 이 선언은 완전히 헛된 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과 복은 서로 맞서 대적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칭의의 원인에 있어서만 (율법이 행위의 공덕에 의하여) 사람은 의롭다고 하는 것에 반하여 , 약속은 무상(無償)으로 의를 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은 곧 바울이 그것을 일컬어 그리스도에게 근거한 ‘언약'이라고 한 데서 더욱 밝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교황과의 무리는 여기에 반대하여 일어선다. 그리고 저들은 이 논의에 대해서는 회피 하려고만 한다. 저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옛 의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왈가왈부 하지 않기로 하자. 그러나 사람은 도덕적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인간과 함께 체결한 것이지만, 도덕적 율법은 이 언약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바울의 이론은 보잘것 없거나, 그렇지 않으면 단지 의식 문제만 들고 논박한다고 떠들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저들에게 ‘바울은 이 사건을 깊이 고찰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 없이는 행위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것을 말 하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의롭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해도, 율법이 있기 전에 약정(언약)이 없는 한, 사람이 행위에 의하여 구원 얻을 만한 공덕을 이룰 수 없다.
스콜라 신학자들도 여기에 동의할 뿐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왜냐하면 저들도 행함은 행함 자체의 내적 가치가 구원의 공적이 된다고는 가르치지 않으며, 저들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의 용납해 주심과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하신 이유 때문에 구원얻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언약이 없으며 용납해 주시는 증거가 없는 한, 이 세상의 모든 행위는 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논의는 왼전히 논리적이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람과 더불어 두 가지 언약을 맺으셨다. 그 첫째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요, 둘째 것은 모세와 맺은 것이다. 첫째 것은 그리스도에게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상(無償)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온 율법은 은혜 없이는 사람에게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 없이도 율법이 사람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면, 약속이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의 설명은 다음에 계속되는 부분에 의하여서도 분명히 밝혀진다.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자기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폐하거나 무효로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핑계하지 않도록 모든 것에 대비하여 바울은 저들의 모든 속임수를 예상하고, 율법에 의 하여 구원 얻는다는 것과 약속에 의하여 구원 얻는다는 것一이 두 가지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단언하고 있다. 바울이 무상(無 償)의 약속과 대립되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상, 누가 감히 이것을 다만 의식(儀式)에 관해서만 해설하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의심 할 여지없이 바울은 어떠한 종류의 행함도 제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4장 14절에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고 서술하였다. 이와갈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구원이 ‘만일 네가 율법을 완성하면' 이라는 조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곧 구원을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결론지었다.
그것은 약속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약속을 율법과 비교하는 경우, 왜 한편 것이 확증됨으로 인해 다른 한편의 것은 전복당하는지 그 이유를 주의깊게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약속이 믿음을 중요시하는 데 대하여 율법은 행함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값 없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요, 보상은 행함에 대하여 지불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곧 이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신 것은 어떤 상대적인 보상 원칙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값 없이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조건부의 약속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신 것이라'는 말은 아주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부언하였다.
[율법이 의를 주는 데 아무런 힘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 곧·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예를 들면 율법은 쓸모 없다든가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과 반대된다든가 또는 그외에 그와 비슷한 것들이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새로운 언약에 관하여 말한 것과 갈이 어떤 이유에서 우리는 율법에 관하여 말 할 수 없는가 하는 그런 망상까지도 떠오른다. 예레미야가 31장 31절에서 말한 새로운 언약은 이미 교훈한 것의 약한 점을 교정하기 위하여 두번째로 주신 것이라고 한다. 만일 바울이 갈리디아인들을 만족시키려고 했다면, 아무래도 이러한 이론(異論)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율법의 효용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율법은 약속보다 뒤에 왔기 때문에 그것은 약속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존재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것이 의문시된 문제였는데, 약속은 율법의 도움 없이는 약속 자체만으로는 무력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바울이 도덕적 율법에 관해서만 말하지 아니하고, 모세의 직무 전체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벌히 모세의 고유한 직무는 생명의 법칙을 규정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지켜야 할 의식을 가르치며 약속과 위협을 저들에게 첨가하고 있다. 오히려 믿음에 속한 것, 곧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긍휼과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약속들이 물론 거기에 포함되었지만, 그것온 모세의 직무상으로 볼 때 우연적인 것이요, 그리고 그것은 율법과 은혜 교리를 비교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기여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결국 문제의 요점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약속이 이미 주어진 뒤에 다시 한번 모세가 “이스라엘과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가 임하리라"는 새로운 계약을 가지고 온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세가 보다 좋은, 보다 완전한 것을 제시하기 위해서인가? ]
"19. 그런즉••… .. 범법힘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율법은 여러가지 용도가 있지만,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현재 그가 의도하는 문제와 꼭 맞는 것에만 국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이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유익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이 점은 독자들도 주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독자들 중에는 바울의 말을 오용(誤用)하여 바울이 여기서 거론하지 않았다고 하여 율법의 그 이외의 효용을 인정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다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다른 곳에서 율법의 여러가지 훈계를 교훈에나 권면에 적용하고 있다(딤후 3 : 16).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서술하고 있는 율법의 효용에 대한 정의(定義)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 서술한 것 이외의 것은, 율법 중에 들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범법함을 인하여'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지어 철학자들도 ‘법률은 행악자를 벌하며 제지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옛 속담에도 좋은 법률은 나쁜 품행에서 생긴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들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율법은 범법한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요, 또 이렇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범죄를 시인하도록 하려는 것이 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을 변명하기 좋아한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일깨워주지 않으면 저들의 양심은 마비되어 깊이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뱌울은 로마서 5장 13절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 것이다. 확실히 율법이 와서 잠자고 있는 인간을 일깨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전정한 준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로마서 7장 13절에서 그가 대답하기를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그러 므로 율법은 죄를 노출시키기 위하여 죄때문에 추가된 것이다. 혹은 로마서 5장 20절에서 그가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법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귀절이 오리겐울 어리둥절하계 만들었지만, 그것은 이유없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갈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심판의 보좌에 부르시사,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둔화시키는 우둔함을 깨뜨려 버리고 도적이 물건을 숨기돗 위선의 굴 속에 감추어 두었던 죄를 밝은 빛 앞에 드러나게 해서 양심이 양심의 죄를 알고. 겸허하도록 하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죄악 중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좋아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무엇이 불합리한가? 만일 누가 항변하여 말하기를 율법은 거룩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하가 위한 법칙으로써 그것이 복종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위법(違法) 때문에 주어졌다고 언급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라고 한다면 나는 거기에 대하여 ‘과연 율법은 참된 의를 밝혀 주는 것이지만, 우리의 본성에 있는 부패 때문에 중생의 영이 나타나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기까지는 율법의 교훈은 단지 범과를 증가시킬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성령은 율법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믿음에 의하여 받는 것이다. 우리 독자는 바울의 이 판단이 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제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율법의 용법 한 가지를 명시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 율법이 천사들을 통하여 주어졌다는 것은 율법의 위임을 말하는 것인데, 스데반 역시 이렇게 말했다(행 7 : 38, 53). 어떤 사람 둘은 천사들을 모세와 아론, 그리고 제사장들이라고 해석하지만, 이것은 견실(堅實)하다기보다는 교묘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때도 천사를 통하여 주시기 때문에 그 천사들이 역시 율법이 공포될 때 중거자가 되도록 임명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증보의 손을 빌어" ; 대체로 ‘손'이란 말은 ‘직무'라는 뜻으로 쓰일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율법 주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역자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나는 여기 ‘중보의 손'을 이 직무의 최고 주권 또는 총 감독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중보자는 대사직의 머리인데 대하여 천사들은 그의 동반자로서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는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모세에 관하여 언급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것을 그리스도라고 보는 옛날 주석가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이런 의미로 보는 것이 곧 다음에 나오는 대로 본문의 문맥에도 보다 적합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중보’ 란 말의 의미에 관해서는 옛날 주석가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들은 여기서 중보란 것은 바울이 더모데전서 2장 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화평케 하는자, 혹은 화해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나는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율법을 공포하는 데 사역한 대사(大使)로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유사이래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즉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과 인간은 결코 사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거룩한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말했다(벨후 1 : 21)고 하며, 그리고 바울도 역시 그리스도를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한 자라고 했다(고전 10 : 4). 그리고 확실한 것은 모세에게 나타난 천사는 그리스도 밖의 다른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까지 결코 피조물에게 양도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고유하고 본질적인 이름을 하나님은 하나님께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화해의 중보자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영접을 받으며, 그는 중재(仲裁)의 중보자이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에 의하여 자신을 사람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는 또한 항상 모든 교훈의 중보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울은 무상(無償)의 계약의 기초인 중보자가 역시 율법을 공포할 때에도 지상권(至上權)을 잡았다는 것을 갈라디아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것을 명백히 진술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여기 언급된 자손은 하나님의 은총의 근거가 된다. 그 사실을 율법도 중요시하기 때문에 율법이 그 약속 성취를 약화시키거나 그 성취 과정을 빗나가게 할 수는 없다. 여기에 나온 ‘까지' 란 말은 그 자손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은 보좌역을 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율법은 최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대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곧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실 때까지만 지속되는가? 만일 그렇다떤 이제 율법은 페지됐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계 대답한다. 곧 율법을 옛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지배기간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서 율법의 전부가 폐지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바울도 역시 그렇게 말하지 않고 다만 약속과 그리스도 사이에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율법의 지배 양식은 그 약속의 완 성인 그리스도 안에서 종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뿐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에 충분히 언급하기로 하자.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양성 (兩性)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설명하기를, 마치 바울이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라고 한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대개 양식 (良識)을 갖춘 사람이라면 바울이 계약 당사자 중의 한쪽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당사자 중 한편이 다른 한편과 뭔가 거래할 사항이 없으면 중보자란 것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들은 바울이 어째서 이러한 진술을 여기에 삽입했는지에 관해서는 해결 못한 채 버려두고 있다. 하지만 이 귀절은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요하는 귀 절이다. 아마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중에도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좋지 않은 생각을 한 자가 있을 것을 바울이 예상하고 미리 그 기선을 꺾어 놓기 위해 한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스스로 이르기를 ‘사람이 어떤 계약을 맺어 놓고 거기에 대해 후회할 때는 보통 그것을 취소한다. 마치 그와 갈이 하나님의 계약에 관해서도 그럴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서술한 해석을 따르면, 바울은 앞부분에서 확실히 계약 당사자의 한편은 사람인데 인간은 변하기 쉽고 견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반면에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하시는 일과 일치하시며 따라서 인간의 불성실 때문에 하나님이 항상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인정 받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견고성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문을 더욱 자세히 살펴볼 때, 이것은 차라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한편만의 중보가 아니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약 체결에 들어가셨는데, 계약 상대자들의 조건은 외관상 분명히 다양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이 모순 된다거나 또는 사람의 다양성에 의하여 변화된 것처럼 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제 분명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원래 계약 체결로써 하나님과 유대인을 화해시켰는데, 그와같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의 중보도 되신다. 유대인과 이방인과는 할례와 의식 때문에 양자간에 장벽이 쌓였으므로 피차 이질적인 큰 차이가 있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떠나 멀리 있을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성취를 그만 두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계획은 그리스도께서 전에는 서로 멀리 있던 자들을 같은 한 하나님께로 데리고 와서 저들을 한 몸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실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항상 동일하시며 한 번 결정하신 것은 변함없이 확고부동하계 지켜나가시기 때문이다.
"21. 그러면 율법이" ;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과 견고성을 인식시킨 후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당연히 내렸어야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외견상(外見上) 율법과 은총의 계약 사이에 있음직하게 생각되는 모순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도 절규라고 할지 모르겠다. 바울은 반박의 두려움은 전혀 떨쳐버리고 자기의 주장이 이미 승리한 것처럼, 그리고 앞에서 행한 여러가지 일들은 모두 확실한 것으로 결론한 끝에 ‘그래도 마치 율법과 약속 사이에 불일치가 있다고 항변할 자가 있느냐?'하고 부르짖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 때문에 바울은 여전히 야기될지도 모르는 난문제 (難問題)를 계속해서 해소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그는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주기 전에,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존엄을 해치려는 모욕적인 언행에 대하여 마땅히 혐오해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그가 늘 하는 식대로 그러한 심한 물상식을 단호히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논적(論敵)들이 하나님을 자가당착되게 하고 있는 사실을 비난하고 있다. 그것온 무엇 때문이냐 하면, 율법과 약속 두 가지가 다 갈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율법과 약속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의롭게 한다면, 율법과 약속은 모순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논적들이 중상하며 거짓으로 그를 항변해도 기선을 꺾고 교묘하게 물리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 이것은 간접적인 해답으로써, 율법과 약속 사이의 일치를 직접적이며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모순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얼른 보면 이 문장은 본문의 논제에 적합하지 않으며,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할지 모르나, 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율법이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면, 율법은 약속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되는 경우엔 인간을 의롭게 하는 데에 두 가지 상반된 방법이 있게되며, 의를 얻는 데 두 가지 수단으로서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힘이 율법에는 없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모순을 제거한 것이다. '만일 구원이 율법에 있다면, 의는 율법에 의하여 얻는다는 것을 나도 승인한다’고 바울이 말 했을 것이다.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 이 성경이란 말은 주로 율법 자체를 의미한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버렸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에게 의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의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호한 논거이다. '너는 율법에서 의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은 성경 전체와 함께 정죄 밖에 아무 것도 사람에게 남겨주지 않는다. 왜냐하떤 율법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람의 행위를 불의한 것으로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킬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죄로 말미암아 생명에서 내쫓김을 받았으니, 구원을 율법에서 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말한다. 여기 ‘모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사실 바울이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것도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뿐만 아니라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혹은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 이제 행위의 의는 빼앗겨 벌거숭이가 되었으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향하여 숨어 파할 곳을 찾는 것 밖에는 구원 얻는 길은 없다. 결론은 확실하다. 만일 행함으로만 심판대 앞에 나간다면, 우리는 모두 정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이 우리가 값 없이 의를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이 문장은 큰 위로로 가득차 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유죄선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볼 때마다, 우리가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좇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이 그리스도 안에 다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문장이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잠잠히 계신다고 할 지라도 우리 자신은 이미 상실된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우리가 상실 되었다는 사실을 자주 자주 선언하고 계실까?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멀망의 벌을 받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서운 선교에 놀라 우리의 마음이 깨우침을 받아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찾아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약속' 이란 말은 환유인데, 환유란 것은 왕(king) 을 왕관(crown)으로 나타내는 것과 갈은 비유이다. 그러므로 여기 약속이란 말은 유업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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