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갈4:1 ~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1)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2)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3)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4)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5)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절 내가 또 밀하노니……" ; 장을 구분한 자가 누구든지 간에, 이 귀절을 앞의 귀절과 잘라서 떼어 놓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와 옛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바울이 설명하여 확실하게 하고 있는 한 가지 부연(証 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린 아이와 후견인(後見人)이라는 제삼의 비유를 들고 있다. 어린 아이는 비록 그가 자유인이라도, 심지어 그 아버지의 모든 재산의 주인일지라도 후견인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에 아직 그는 노예나 다름없는 자이다. 그러나 후견인에 대한 이 복종은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만 계속될 뿐이고 그 후에는 그의 자유를 누린다. 이런 점에서 옛 언약 아래 있던 선조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자유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후견인과 갈은 율법이 저들을 멍에 아래 매어 놓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자유를 완전히 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율법에 대한 굴종은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동안만 지속되며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하여 끝나는 것이다. 법률가들은 후견이 끝나는 여러가지 방법을 열거한 것이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모든 방법 중에 다만 이 비유에 맞는 것으로 아버지의 결정에 의해서 끝난다고 하는 방법이다.
이제 하나하나 부분적으로 음미해 나가기로 하자.
어떤 사람들은 이 비유를 어떤 특정 인물에다가 적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여기서 두 민족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저들이 하는 말 자체는 옳은 줄로 안다. 그러나 그 말이 본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저들은 말하기를 "선택된 자들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소유하기까지는 율법 아래서 노예와 같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저들이 일단 그리스도를 안 후에는, 더 이상 이러한 후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 한다. 나도 이런 말을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개개인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바울이 믿지 않는 때와 믿음으로 부름 받는 때와의 사이에 구별을 둔다고 하는 생각을 부인한다. 바울이 논하고 있는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밖에 없는 데 어떻게 우리의 상태와 이스라엘의 상태가 다르단 말인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는데, 우리와 일반으로 믿음을 소유한 지둘이 어째서 우리와 더불어 똑갈은 자유에 참여하지 못한단 말인가? 저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오늘날 우리는 면제된 멍에를 어째서 저둘온 메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조 당하고 있는가? 여기 논의와 논쟁이 바로 이런 문제에 관하여 관설된 것이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기 전에 율법이 우리 각 개인을 얼마만큼 지배했느냐 하는 그런 문제에 관해 관설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무엇보다도 여기서 확인해 두어야 할.사실은 바울이 옛 언약 아래 있던 이스라엘 교회와 기독교 교회를 비교하면서 우리 사이에 어떤 점이 유사하며 또 서로 다론 점은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이 비교는 가장 유익하며 극히 풍부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로 옛 언약 아래 있던 선조들도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속의 희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저들도 동일한 양자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강포한 무리 (이 들중에는 Servetus도 포합하여 )가 뭉상하는 것처럼, 저들이 하나님께 선택된 것은, 다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모습을 그려 보이기 위한 것에 블과하다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저들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온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영적인 복이 우리에게와 마찬가지로 저들에게도 속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한다.
둘째로 저들의 외적상태는 노예였지만 저둘의 양심은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율법을 지킬 의무가 모세와 다니엘, 모든 경건한 왕들과 예언자들, 제사장들과 믿는 사람 전체가 영적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저들은 저들의 어깨에 율법의 멍에를 매고 나가면서도 영적 자유로써 하나님을 경배했다. 더우기 특별히 저들을 값 없이 죄사함받는 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으며, 저들의 양심은 죄와 사망의 압재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저들은 우리와 동일한 교훈을 받았으며, 저들은 또한 우리와 더불어 믿음으로 진정한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저들은 우리와 함께 유일한 중보자를 신뢰하고 있으며, 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찰하면, 우리와 옛 선조들 사이의 차이는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연성에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이 모든 언약의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둥의하는 바이다. 우리와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인정되는 의식(儀式)이나 관리(管理)는 부속물과 같은 것이다. 더우기 그 당시는 교회의 유아기이며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이래, 교회는 성년에 이르기까지 성장했다는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의 말들은 명백하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 가지 곤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의 논의가 일관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그는 우리가 매일 성장하여 장년이 되도록 권면하고 있으며, 그가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는 저들이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젖으로 저들을 먹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조금 후에 갈라디아인들을 갓난아이에다가 비하고 있다(갈 4 : 19). 바울이 거기서는 특정 인물들과 저들 각 사람의 신앙에 관해 논하고 있지만, 여기서는개인을 고려에 넣지 않고 두가지 단체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이 대답은 지금의 문제보다도 훨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이 얼마나 비범했는가, 그리고 거룩한 예언자들에게는 얼마나 위대한 지혜가 있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 때, 우리가 어떻게 감히 저들보다 우월하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저들은 신앙의 영웅들이며, 거기에 비하여 우리는 어린아이들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은 말할 것 없고, 갈라디아인 전체 중에서 훌륭한 자를 특선한다고 해도 저분들 중 어느 한 분과도 비길 자가 있겠는가 !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여기서 바울은 특정인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두 민족의 전반적인 상태에 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곧 은사를 받고 있었는데, 물론 그것은 몇 사람의 소수였고 민족 전체는 아니었다. 더우기 가령 수가 많을지라도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저들의 내적인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사실이 아니고, 하나님이 저들을 다스리기 위해 취해진 수속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 교육을 위한 조직, 곧 훈련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그와 같온 쇠사슬을 끊어 버리신 후 그의 교회를 이전처럼 그런 엄격한 감시 하에 두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다스리시고 계신다.
그것은 저들이 받온 계시에 계속하여 검온 구름 갈은 것이 가리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갈이 말씀한 것은 바로 이런 것에서 온 것이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온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3~J24). 어떻게 우리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 이상으로 사랑 받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저들을 통치하기 위해 취해진 질서에 달렸기 때문이다. 이 귀절의 말씀은 교황제도의 유일한 영광인 저 화려한 의식을 모두 분쇄 할 수 있는 강력한 화포(火砲)이다. 저들이 교황의 왕국을 찬양하며 적어도 그것을 존경하도록 하기 위해 오늘날 순전한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는 데, 화려하고 장대한 의식, 관례, 제복(察服), 의젓한 몸짓, 그리고 여러가지 종류의 장치들은 순전히 무지한 사람을 놀라계 하려는 목적에서 고안된 것 밖에 달리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 귀절을 통해서 볼 때, 그것들이 교회를 변형(變形)시켜온 지분(脂粉)이요, 변장(變裝)이었다는 사실을 밝히 알 수 있다. 나는 지금 그러한 하찮은 것을 소중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숭배하는 길이라고 믿는 가장 가증스러운 악덕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것 뿐만 아니다. 심지어 저들온 그런 것들이 구원 얻는 공덕처럼 생각하며, 더우기 그것들을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준수하는 이상으로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다만 오늘날 노동자둘이 허다한 싫증을 나타내는 것을 빙자하여 마치 저들이 대용품(代用品)을 위장하기 위해 고운 물감을 칠하듯 하는 저들의 핑계에 대하여 언급할 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뜻은 저들이 저희 마음 내키는 대로 주장하기를 현대는 기왕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볼 수 없었던 무지(無知)가 훨씬 더 심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보조물(補助物)이 필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옛날 이스라엘 사람이 하던 것과 같은 교육이라고는 결코 입증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저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이의를 제시하는 바이다. 만일 저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유용(有用)한 방법이라고 항변한다면, 나는 저들이 하나님 자신보다도 무엇이 유용한가에 대하여 더 잘 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다만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굳게 믿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지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보조물이 요구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제 마음대로 당치도 않는 이론을 내세워서는 안되며, 다만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것이라야 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확실히 그의 백성의 약함을 돕기 위하여 꼭 알맞는 것은 하나도 빼놓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항변해 오리라고 예상되는 어떤 이의라도 물리치가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것의 근거를 하나님의 경문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 작정하신 것은 그것과는 다르다' 는 이 방패만으로써 족하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도움 이상의 좋은 것을 인간이 고안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도움도 벌써 무용하기 때문에 폐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이전에 유대인에게 부과된 멍에가 이제 우리에게서는 제지되었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의식 지키는 일을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하다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집행되기를 바라시는 통치권의 구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물론 오늘날 외적인 것은 모두 우리의 자유에 맡겨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가 기독교와 유대교가 혼합되기를 원치 않는 한, 이 자유가 계기가 되어 교회가 많은 의식의 짐을 부담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차후 언급해야 할 만한 적당한 곳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3. 이 세상 초등학문 아레… " ;. 여기 초등학문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외적이며 유형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은유적(隱哈的)으로는 보다 높은 것에 이르기 위한 기본 혹은 초보를 의미하는데 나는 오히려 은유적인 의미를 취한다. 그런데 이 말은 정신적인 의의(意義)를 지니고 있는데 어째서 바울이 ‘이 세상’ 이라고 말했을까? 그것은 우리가 노출된 전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지상적인 비유에 감싸여 있는 것과 같은 진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은 가령 그 속에 천적신비 (天的社秘)가 숨어 있다고 해도 이것을 이 세상의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4. 때가 차매" ; 바울은 앞에서 든 비유를 아버지의 정한 때라는 자기의 논의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정해진 때가 참으로 적절하고 합당한 때였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시기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관리된 최선의 활동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언제 나타나시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것을 판단하며 결정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의도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어째서 좀더 일찍 나타나지 않으셨는가 하고 감히 비판하려고 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나 이상의 논의에 의하여 그런 자가 없도록 모든 의혹심이 억제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로마서의 결론 부분을 보도록 하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바울은 여기서 불과 몇 단어 안에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보냄을 받은 이들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음에 틀림없다. 그로 인해 그의 영원한 신성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바로 하늘로부터 보냄 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바울은 이 분이 여자에게서 나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가 두 가지 성품을 가지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음 받은' 대신에 '태어난'으로 된 이본(異本)도 있지만, ‘지음 받은'이란 쪽이 훨씬 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나의 의견에도 그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남녀의 성교에 의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고, 그의 어머니의 씨(자손)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다른 인간과 명백히 구별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표현은 조잡하여 말하기가 쑥스러운 것이다. 여자란 말은 여기서는 여성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 문자적 으로 직역하면, ‘율법아래 지음 받은' 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서 표현하고자 한다. 결국 이치적으로 말하면, 모든 존속관계에서 완전히 해방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율법에 존속되었다는 말이다. 왜 ? 우리에게 자유를 얻게 하려고 그가 우리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자유로운 신분의 사람이 어떤 포로를 속량하려면 자기를 보증인으로 세우고 실제로 쇠사슬로 자기를 결박함으로써 타인을 결박에서 풀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해방울 주시려고 친히 율법 준수의 책임을 지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율법의 멍에에 순복한 것은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의 교훈을 더 이상 순종하지 않고 우리 마음에 좋게 여기는 대로 살아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하고 거룩한 생활을 이룩하는 영원한 규칙이기 때문이다. 다만 바울은 율법의 부속물과 함께 율법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이 과거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에 율법의 예속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휘장은 찢어지고 자유는 밝히 드러났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 논하고 있다.
"5.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옛 언약 아래 있던 선조들도 양자 의식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었다. 아들의 명분이라는 것은 로마서 8장 23절에 말씀된 대로 구속을 의미하는 것인데, 아들의 명분, 혹은 석방의 현실로서 말하자면 현재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 날에 구속의 열매를 받는 것처럼, 양자의 열매를 현재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룩한 선조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그것을 향유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지나치게 많은 의식의 짐을 지우는 사람들은 교회가 마땅히 받아야 할 아들로서의 권리를 교회로부터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 ;바울은 앞에서 서술한 아들의 명분이 바로 갈라디아인의 것임을 다음의 논의에 의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양자되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양자됨의 증거보다도 선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원인의 표시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감동받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을 바울이 말하고 있 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확실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자주 가르찬 대로 성령이 우리의 양자됨의 담보와 보증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또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부성적 애정(父性的愛情)을 확실히 믿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갈은 말로 반대할지도 모른다. '악한 사람들도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참칭(僧稱)할 만큼 지각없이 행동할 때도 있지 않는가? 그뿐인가! 저들은 종종 하나님이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의 참 아들들보다도 더 대담하게 거짓으로 자랑하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쓸데없이 자랑하는 것이나 혹은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주장할 수도 있는 그런 일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 중생한 경건한 신앙인의 양심의 증거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따라서 이 논의는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무게있게 거론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멸망할 자들에게는 이 확실함을 맛본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뭇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 17)고 선언한 바대로이다. 바울의 말에도 바로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 결국 바울이 교훈하고자 했던 것은 저들 자신이 어리석게 육신의 판단으로 감히 시험삼아 생각한 것을 발표한 그 일에 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저들의 마음에 선언한 바에 관해서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이라고 한 것은 바울이 지금까지 다른 경우에서 사용한 칭호에 비하면 한층 더 이 본문의 상황에 적합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와 갈은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널리 모든 기독교인 일반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이 없다면, 사실 신앙도 촌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파의 기독교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밝혀진다. 교황파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말하면 이것을 외람되다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영도 없으며, 어떤 확신도 없는 신앙을 공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견지하고 있는 이 유일한 교리야말로, 불신의 아비인 악마가 교황파 무리의 전 학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인간의 양삼은 끊임없이 의심하는 가운데 불안정 하다고 하며 또한 저들은 그것은 다만 본능적인 감정이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데 블과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가 아니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한 바울의 교의 (敎義)를 마음에 새겨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아바 아버지 " ;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모든 나라 말에 있어서 공통이라는 것을 이 말들이 나타내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이 히브리인 사이에서나 헬라인 사이에서나 마찬가지로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사 45 : 23)고 예언된 대로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도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되기 때문에 양자가 되는 것은 율법의 공덕에 의해서가 아니고 믿음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라는 것이 확실하다. ·
"부르게 하셨느니라." ; 그는 이 말을 아주 강한 확신을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의심할 때는자신있게 말할수가 없고 입 안에서 우물거리게 되며, 말더듬이처럼 더듬거리며 되지도 않는 말을 애써 겨우 입 밖에 내게 된다. 그와 반대로 ‘부른다'(crying)는 것은 단호한 태도와 확고한 신념의 표시인 것이다. 로마서 8장 15절에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무서위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충분한 확신을 품기 위해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즉 기독교 교회에서는 벌써 노예의 신분은 없어지고 다만 자유로운 자녀의 상태가 있을 뿐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옛 선조들이 어떤 의미에서 율법 아래 노예였 는가 하면, 그것은 저들의 자유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율법의 그늘과 멍에 아래 가리워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다시 한번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상이점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옛 선조들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이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상속인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또 상속인이라는 것은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재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그의 은혜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더 장황하게 언급하고 있다. 나도 여기에 대해서 이미 거기서 서술한 바 있기 때문에(誌 2) 본서에서 생략한 문제도 거기서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