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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4:31)

1. 성경 (갈4:21 ~3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1)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2)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3)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4)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5)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6)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7)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8)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29)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0)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3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1. 내게 말하라 " ; 바울은 저들을 감동 시키기 위해 약간의 격려를 한 다음에 좋은 예증으로 그가 앞에서 말한 교훈을 더 다짐하고 있다. 증명이라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론적인 충분한 논란이 있은 다음에 첨가한 바울의 단언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율법 아래~~~~" ; 여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포함된 언약에 따라 "너를 다루신다"는 조건에서, 더우기 "너는 너의 편에서 율법을 지킬 의무를 져야 한다"는 조건으로 "율법의 멍에를 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신자가 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미 서술한 대로 율법을 취급하되 율법의 부속물과 함께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 선택하여 얻는 일이라면, 아무나 자유를 버리고 노예를 선택할 만큼 정신 나간 짓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율법아래 있는사람은모두종이라고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케 하려고 하시는데도, 자진하여 그런 상태를 택하는 사람들은 정말 비참한 자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바울은 여기에 대한 관념 다시 말해서 상징적인 예로써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들고 있다. 하나는 종의 여인에게서 종으로 태어나 어미와 같이 종의 신분을 이어갔다. 반대로 다론 한 사람은 자유하는 여인에게서 자유 신분의 아이로 태어나 상속을 받았다. 이어서 바울은 이 이야기 전체를 자기 이론에다가 적용하여 묘하게 이것을 설명하면서 결론지었다.

 

첫째로 바울은 대항자들이 율법의 권위로써 신분을 굳히며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다론 측면에서 율법을 인증하고있다. '율법’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예증한 이야기가 지금 거론하고 있는 문제와는 아무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 비유적인 설명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알레고루메나; 비유' 라고 했다.  그래서 오리겐과 그밖에 많온 사람들이 성경을 순전히 비유적인 방법으로만 해석함으로써 성경의 순수한 본 뜻과는 거리가 멀게 해석했다.  저들은 문자대로의 의미는 너무 무미 건조하다고 생각하면서, 문자의 꺼풀 속에 캐낼 수 없는 보다 깊은 비밀이 숨겨졌는데 그 비밀은 다만 비유적인 방법에 의해서만이 인출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저들은 어렵지 않게 이 방법대로 해석하곤 했다.  인간 세상에서는 언제나 딱딱한 교리보다는 착상이 기발한듯 보이는 사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식을 좋아할 것이다.  한번 이런 식의 성경해석을 허용하계 되면 그 다음엔 자꾸 그런 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어 , 마침내 성경을 비유적으론만 해석하는 데 명수가 된자는 사실온 성경을 기롱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대하여 아무 제약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크게 상찬을 받기까지 한다. 실로 범해서는 안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교묘히 변형시켜 온 것이 벌써 오렌 전부터인데, 그렇게 하기를 싫어하지 않을 때는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것온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며, 성경을 읽어서 얻는 유익을 빼앗으려는 사단의 속임수이다. 한나님은 성경의 순수한 의미가 거짓된 주석으로 말미암아 매장 될 때는 이러한 (신성)모독에 대하여 정당한 심판으로써 복수하셨다.  저들은 말하기를 성경은 비옥하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나는 성경이 모든 지혜의 근원이며, 지국히 풍성하여 다함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의 풍부함이 아무나 제 마음대로 염출해 내도 괜찮은 해석상 다양함을 허용하는 것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의 참 뜻은 단순 소박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단순 소박한 의미를 받아들여 그것을 굳게 지키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문자대로의 의미에서 멀어지게 하는 그런 허구적인 해석같은 것은 다만 의심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위험한 퇴폐물이기 때문에 대담하게 배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한 비유라는 말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바울은 확실히 모세가 그 이야기를 기록할 때 그것이 비유로 전환 되리라는 의도에서 기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어떤 면에 있어서 그 이야기가 현재의 문제에 적용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볼때, 거기에 교회상이 비유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족을 비유로 들어서 교회를 설명하는 이런 논법은 문자적 의미에서나 그 본 뜻과는 배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아브라함의 집이 전정한 교회였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 집에서 일어났던 주요하고 기여해야 할 만한 일들이 우리에게도 표본이 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논 할례나 희생의 제물에나 레위의 제사 직분 전체에서나,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는 성례에도 마찬가지로 우의(萬意)가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 집에도 역시 우의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문자대로의 의미는 살펴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치 바울이 말한 것처럼 두 언약의 모습이  아브라함의 두 아내에서 그리고 두 백성의 모습이 두 아들에서 .그림처럼 묘사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크리소스톰은 이 비유라는 말에 '카타크레시스; 誌3'가 있는 줄로 알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23.계집 종에게서는……" ; 육으로 말하면 둘 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러나 이삭온 은혜의 약속을 따라 났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스마엘의 경우는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으나 이삭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다. 바로 그의 출생 자체가 그것을 암시해 준다. 말하자면 그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출생한 것이 아니고 기적적으로 출생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온 이방인의 소명과 유대인의 버림 받은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타고난 혈통을 자랑하는 데 반해서 이방인은 어떤 인간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 나는 미(美)적인 비유가 상실될까 두려워서 이렇게 번역하고 싶다. 바울은 두 '디아데-카이 ; 언약' 을 두 어머니와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성약(聖約 : testamentum) 이라는 말은 중성이기 때문에 어머니라고 칭하기에는 적당치 않다.  오히려 언약(pactio; 託4)이라는 말이 여성이기 때문에 더욱 적절하다. 그래서 나는 우아한 것보다는 명석한 편을 더 중요시한다. 이제 여기서 정식으로 비유가 소개된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집에 두 어머니가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훈(Doctrine)은 어머니이다. 하나님은 이것에 의하여 우리를 낳으신다. 그러나 교훈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율법적 교훈이고 다론 한 가지는 복음적 교훈이다. 율법의 교훈은 종의 신분의 자녀를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갈과 닮은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후자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유하는 신분의 자녀를 낳는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그래서 실제로 바울은 보다 먼데서 시작하여 , 시내를 첫째 어머니로 하고 예루살렘을 둘째 어머니로 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내용을 더 자세히 음미하여 보면 율법은 시내의 자녀를 낳는 씨가 되었고 복음은 예루살렘의 자녀를 낳는 씨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의 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다만 우리는 율법의 언약은 아이를 종이 되게 하며 복음의 언약은 아이를 자유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때문에 이 두 언약은 서로 닮지 않은 아이들을 낳는 두 어머니와 갈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을 얼론 보면 우습게 여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유로 태어나지 않는 자란 하나도 없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그 비유는 적당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나는 바울이 말한 것을 두 가지 면에서 옳다고 대답한다. 이전의 율법은 그 제자들 (즉 거룩한 예언자들과 기타 모든 믿는 자들)을 종이 되게 했지만 영원한 종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울 얼마동안 몽학선생 아래 두셨기 때문이다. 저둘의 자유는 의식(儀式)과 당시 저들을 지배하고 있던 전체적인 조직의 막 아래 가리워져 겉으로 보기에는 종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위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었고"라고 이것과 유사한 사상을 서술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와갈이 옛적 경건한 선조둘은 하나님 보시기에 내적으로는 자유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종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신분과 서로 관련성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의 교훈은 태어날 때 동시에 완전한 자유를 그 자녀들에게 주며 그리고 저들을 자유 안에서 자유의 신분으로 자라게 한다. 그런데 전후 문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대로, 바울은 그런 종류의 아이들에 관해서 여기에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뒤에 밝혀지겠지만, 시내의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최후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추방되고 상속을 받지 못할 위선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 그가 논하고 있는 종의 아이들이란 대체 어떤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율법을 부당하게 오용하여 율법으로부터는 종이 되는 것외에 달리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경건한 선조들은 구약시대에 살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히떤 저들은 율법에 예속한시대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을 저들의 영적 어머니로 모시는 데 방해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율법에만 집착되어 있으면서도 율법이 저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몽학선생인 것을 알지 못하고 우히려 율법 때문에 방해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곧·종의 신분으로 태어난 이스마엘인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항변하여, 어째서 바울은 이러한 무리들도 하나님의 언약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며, 교회의 자식으로 생각하는가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저들은 타락한 씨에서 난 사생아의 씨이며, 엄격한 의미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 저들은 타락하여 변질된 자들이다. 말하자면 사생아이다.  그리고 저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도 거짓의 표시에 블과하다. 그런데 저들이 바로 그런 것 때문에 교회에 속한 자들처럼 간주되는데 그것은 실제로 저들이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얼마 동안 교회에서 지위를 횡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저들은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여기서 오늘날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교회를 생각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후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 ;  나는 다른 사람의 해석을 논박하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예를 들면 시내산은 두 가지 이름을 가졌다고 하는 제롬(Jerome)의 추측도 경박(輕博)하며, 명칭들에 관한 크리소스톰의 철학적 설명도 유치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유월절이 그리스도라고 말씀 된 것처럼 (고전5 : 7), 하갈이 시내산으로 불리는 것은 표본 또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아가서 그 산의 위치까지도 모욕적으로 아라비아에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아라비아에 있다는 것은 영원한 유업의 상징인 성지(聖地)의 경계 밖이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솔직한 적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본 뜻과는 먼 거리로 벗어난다고 하면 그야말로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  내가 '일치하다’ 또는 ‘부합하다’고 번역한 곳을 옛날 라탄어 번역자는 ‘결합되다’로번역했고, 에라스무스는 ‘인접하다’로 번역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식으로 번역함으로 애매하게 될 것을 피하고자 힌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여기서 장소나 위치의 가까움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지닌 표상의 근사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도가 여기에 사용한 헬라어 '스토이카'는 서로 마주 바라 볼 수 있도록 배열된 사물에 관해서 말할 경우에 즐겨 사용했는데, '쉬스토이키아' 는 예를 들면, 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질서 있게 심어진 가로수에 관해서 말할 경우 등이다. 그와 같이 본문에 시내산이  '쉬스토이케인;에 상응하는 것' 으로 되었는데, 시내산이 현재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아리스토를 이 서정시에서 인용한 어떤 은유에서 수사학은 & '안티스트로포스; 역용논법', 혹은 변증법에 대한 부본이라고 한 것과 같다. 서정시는 보통 두 부분으로 가지런히 배열하여 서로 조화있게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요컨대 부합 혹은 상응한다(fJU(JT:OlXE&IJ) 는 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대등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어째서 그가 현재의 예루살렘을 시내산과 비교하고 있는지 ?  나는 한때 반대 의견을 가졌지만, 지금은 크리소스톰이나 암부로스와 의견을 갈이 한다.  그들은 이것을 지상 예루살렘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실제로 현재의 예루살렘은 노예적인 교훈과 예배로 타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한 이유이다.  예루살렘은 생생한 천상 예루살렘의 이미지와 그 특징을 나타내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루살램은 오히려 시내산과 가깝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두 지역 사이가 거리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아주 닮아서 완전히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저들의 실제 어머니는 사라가 아니고 하갈과 꼭 닮은 쌍동이 자매인 서출(庶出)의 예루살렘이다. 그래서 비록 저들이·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오만하게 자랑하려 해도 처들은 여종에게서 난 종인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질책이다.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 그가 ‘하늘의’라고 말한 것은 하늘에 밀폐된 것도 아니며 또 이 세상 밖에서 구해야 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온 세계에 퍼져 있으며 지상에서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하늘에서’라고 말했는가? 그것은 교회가 그 근원을 하늘의 은총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혈육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에 거할 하늘의예루살렘이야말로 믿는 자들의 모체인 것이다. 이 예루살렘은 썩지 않는 생명의 씨를 지니고 있으며, 이 씨로 말미암아 우리의 형태를 조성하고 그 태 안에 우리를 잉태하여 우리를 낳는다. 그리고 젖과 단단한 음식으로써 계속하여 그 자녀를 양육신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믿는 자들의 어머니로 블리는 이유이다. 그래서 교회의 아들임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그 아버지로 모시고자 하는 소원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소용 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의 사역을 통하지 않고는 자녀를 낳지 않으시며, 또 그가 자라서 어른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양육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믿는 자들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 부여된 아름답고 심히 영광스러운 이름이다. 그런데 교황파의  우리는 지겹도록 이 명칭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매우 어리석고 유치하다. 왜냐하면 저들의 어미는 음녀이며 영원한 죽음에 처할 악마의 자식들을 낳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를 잔인하게 쳐죽이기 위해 처들에게 무릎을 꿇도록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 당시 사단의 회당이 오늘날의 로마 교회에 비하면, 훨씬 더 훌륭한 구실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어떻게 저들에게서 저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명예를 완전히 벗겨 버리고 저들을 하가(Hagar)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는가 하는 사실을 볼 수 있다.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 바울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교회의 적출자(摘出子)는 약속을 따라서 태어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가 인용한 귀절은 이사야 54장 1절이다. 그 귀절에서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이방인의 소명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잉태치 못한 여인에게와 과부에게 수많은 자손이 태어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교회로 하여금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도는 이사야가 예언한 영적 예루살렘을 유대인으로부터 삭탈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예언자가 선언하기를 예루살렘의 자녀들이 모든 열방으로부터 모여들 것인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미리 준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상의 은총에 의해서라고 한 그대로이다.

 

바울은 그 다음에 이어 결론 짓기를 우리가 이삭의 예를 따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밖의 다른 방법으로는 이 영광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결론은 성경을 잘 모르거나 성경에 익숙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근거가 희박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메시아에게 근거를 둔 모든 약속은 값 없이 은혜로 받는다는 진리는 너무도 확실하지만 저들이 그러한 성경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이것을 결정적인 격언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는 대담하게 약속을 율법과 대립시키고 있다.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 ;  바울은 여기서 전적으로 그리 스도만을 신뢰 하는 경건한 신자들을 몹시 비방하고 괴롭히는 거짓 사도들의 오만함을 억제하고 있다. 이와 갈은 오만이 경건한 신앙인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또한 저들은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무리의 '심한 비방 ’이 역시 유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오늘날 율법의 자녀가 저들의 아비 이스마엘이 처음에 행한 것처럼 행동해도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외람되게도 자기가 먼저 났다는 것만 생각하고 장자 상속권을 가전 자처럼 진정한 상속자인 이삭을 박해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스마엘의 후계자들도 그와갈이 교만하여 외적인 의식(儀式)이나 할례, 그리고 율법의 장대함을 방패로 삼고 하나님의 적출자들을 대항하여 괴롭히면서 이스마엘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성령을 따라 난 자" ;  바울은 또 여기서 성령과 육을 대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소명과 인간적인 외모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추종하며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자들에게 복면(覆面)을 주는 한편, 하나님의 소명에만 의존하며 하나님의 은해만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실재성을 주장하고 있다.

 

"핍박한 것같이……" ; 팝박했다고 하지만 핍박에 관한 언급은 아무데도 없다. 다만 모세가 이스마엘에 관하여 그가 동생 이삭을. '메차헤크; 희롱' 했다는 사실 의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창 21 : 9). 어떤 유대인들은 이것을 단순한 조소에 불과했다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당치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단순한 조소였다면, 그 조소를 그처럼 엄하게 벌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심한 질책으로 어린 이삭을 화나게 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핍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과 핍박과는 크계 다르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론다. 하지만 바울이 그것을 크게 본 것을 쓸모없이, 혹은 경솔히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볼 때는 악한 사람들이 조롱하면서 우리의 소명을 아무것도 아닌 양으로 뒤엎어 버리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것처럼 어려운 핍박이 없기 때문이다.  뺨을 치는 것이나 책찍질하는 것이나 못박는 것이나 가시가 찌르는 것, 이런 것들이 아무리 괴로움을 준다고 해도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 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27 : 43)라고 모독하는 것 만큼 예수님을 괴롭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 한 모독 속에는 모든 팝박 속에 든 악독 이상의 악의와 독기가 서려있는 것 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가 취소되는 것보다 차라리 덧없는 이 육신의 생명을 빼앗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결국 이스마엘은 칼을 가지고 그의 동생을 팝박한 일은 없다. 그러나 더욱 심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짓밟아 버리고 오만하게 동생을 대적한 일이다. 확실히 따지고 보면 선택받은 자를 핍박하고 멸시하는 것은 그들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히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또 우리에게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일임을 다음과 같은 사실로써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인 대적자들이 불과 칼로써 우리를 살해하며, 우리를 옥에 던져 넣으며 채찍으로 치며 고문하는 외적 박해 뿐만 아니라, 저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을 모독으로써 뒤흔들어 엎으려 할 때와 우리의 구원을 비웃으며, 무엄하게 복음 전체를 조롱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조롱하는 것처럽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없으며, 영혼의 구원을 맹렬히 공격할 때 만큼 치명적인 핍박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악인들의 칼이 아무리 예리하여도 교황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된 우리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도 저들의 칼의 위협을 당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가정으로라도 저들이 모든 수단을 부려 우리가 생명의 호흡을 할 수 있도록 받은 교훈을 제거하려고 하며, 모독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공격하며 잘 모르는 약한 자들의 신앙을 혼들어 놓고자 할 때, 이러한 정신적인 핍박으로 인해 우리가 동요된다면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이겠는가!  내 자신의 경우를 말한다면, 나는 교황파에 관해서 보다도 에피큐리안의 열광 때문에 훨씬 더 슬퍼한다. 물론 저들은 완력이나 무기를 가지고 공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의 생명 이상으로 존귀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배하는 일을 소멸시키며 그리스도에 관한 기억을 뿌리 뽑으며 하나님의 이름이 야비한 자들 중에서 조롱 받게 하는 이와 같은 악마적인 음모를 볼 때 몹시 괴로와하며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온 나라에 불이 붙어 온동 불바다가 된다 해도 그것만큼 불행하거나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바울이 제시한 우리 조상 이삭의 실례(實例)에서 어떤 위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갈은 설명을 더 첨가한다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말하자면 위선자들이 제아무리 거만을 피워도 그것 가지고 얻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고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의 영적 가족에서 추방당하는 경우가 될 것 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저들이 잠간동안은 득세하여 거만하게 우리를 궁지에 몰아 넣을지는 몰라도 오히려 상속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고,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이스마엘의 폭정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자신들을 위로로써 안심시킬 것이다.   얼핏 보면 저들이 수위(首位)를 차지한 듯이 보이며 저들이 장자인 것처럼 여기고 자랑하면서 우리를 멸시한다. 그러나 최후에는 저들이 여종의 몸에서 난, 다시 말하면 상속 받을 수 없는 하갈의 사람인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 부분의 말씀은 우리가 위선 자들의 교만과 교회 안에서 저들이 차지한 일시적인 거주와 지위 같은 저들의 상태를 부러워 함으로 인해 혼란하지도 않도록 막아주는 아름다운 구절이다. 우리는 저들의 일시적인 지위나 상태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들을 기다리고 있는 최후를 인내로서 지켜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지위를 빼앗는 사생아라든가 신원불명의 인간들이 수없이 많지만, 저들은 종래 믿음에 속하지 않으며 영속적으로 영구히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이스마엘과 그의 후예들이 처음에는 연장자로 여겨 군림하지만 다음에는 신원불명의 사람처럽 추방당한 것과 같다. 사람을 조롱하기 잘하는 어떤 무리가 바울의 단순함을 비웃으면서 그는 하찮은 말다툼에서 난 여자의 앙심을 하나님의 심판에다가 비기고 있다고 말 한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하여 모든 것이 통치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의 비위를 맞추도록 명령 되었 다는 것은 이상하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그 약속을 굳히며 또 세우기 위해 사라를 쓰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요컨대 이스마엘이 추방된 것은 다만 "이스마엘에게서 난 자가 아니고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는 그 언약의 결과요 성취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령 이것이 여자의 분쟁의 복수였다고 해도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뜻을 교회의 상징인 여자의 입을 통하여 나타내신 것이다.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 의 자녀니라." ;  이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하갈의 자녀되기보다는 사라의 자녀되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저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벌써 자유한 자로 태어났음을 깨닫게 하면서 그 상태를 계속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교황파의 무리를 하갈인이라든가 이스마엘인이라고 부르며 우리야말로 적출자(摘出子)라고 자랑한다면 저들은 우리를 보고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처지를 공정하게 비교해 보면, 얼마나 우매한 자인지 바로 우리가 말하는 대로라고 주저없이 속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