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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5:4)

1. 성경 (갈5:1 ~ 1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2)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3)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4)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6)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7)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8)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9)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0)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1)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1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그리스도께서……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바울은 저들이 자유신분의 여인의.,자녀임을 말한 후 이번에는 이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말하면서 자유를 얕잡아 가법게 여기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실로이것은 .측량할 수없는 은총이며, 우리는 자유를 위해 죽기까지 투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 있는 자유는 단순히 이세상 일이나 인생의 안락을.맡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거룩한 일들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외적인 문제로 교황의 폭정에 반대하여.신앙의 자유를 격렬히 주장 하는 것을 보고 우리를 무자비하다고 비난들을 한다?  우리를 대적한는 적대자들도 이 기회를 타서 우리가 마치 질서나 신앙 훈련을 완전히 포기하려고 느슨하게 방종만을 구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무지한 사람들이 괜히 우리를 싫어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롭고 경험이 있는 사람들온 이것이 구원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이 음식을 먹을 것인가 저 음식을 먹올 것인가; 또는 어떤 특정한 날을 지킬 것인가, 혹은 그냥 내버려 들 것인가 (많온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런. 것을 생각하며 어떤 사람둘온 그것으로 우리를 중상 하고 있다)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허락되는 것인가, 무엇이 구원에 필요한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여기서 논쟁의 핵심은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의 양심상태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유를 말할 때 율법의식 (律法儀式)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 있는데 거짓 사도들은 율법의식을 반드시 준수해야 될 것처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독자들이 기억할 것은 이러한 자유는 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중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단지 의식(儀式)에서만 자유를 얻게 해 주셨다면, 그것은 지극히 작은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이 자유의 흐름은 한충 높은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케 하려고 친히 저주가 되셨기 때문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사망의 고통 아래 놓이게 하는 율법의 권세를 그리스도께서 폐하셨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단과 그리고 사망의 폭군으로부터 건져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치 한 알의 씨앗을 통해 그 씨앗의 전체적인 종류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 고귀한 자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골로새서에서 더 자세히 말하기로 하자.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이 자유를 십자가 상에서 성취해' 주셨다. 그러나 그 열매와 그것을 소유하는·과정은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인에게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양심을 얽어맬 올무를 허용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사람들이 우리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참고 나가야 하겠지만, 만일 저들이 우리의 양심을 노예로 삼고자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때는 죽기까지 용감히 그것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결박하도록 사람들에게 허용한다면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은총을 빼앗기게 되며 또 동시에 그로 인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자유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심한 모욕을 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이 지금까지 율법 아래서 살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 ‘다시 ’ 라는 말을 쓴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저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않는 자처럼' 이라는 단순히 ‘마치…처럼'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록 율법이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요, 이방인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 밖에서는 자유함이 없고 다만 노예에 불과한 것이다.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  바울은 저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완전히 배제하는그 이상으로 더 심각한 위협을·선언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할례받은 모든 자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러면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도 아무 유익을 주지 못했는가? 실로 유익을 주었다. 아브라함이 할례 받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말한다면, 디모데의 경우에 관해서는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사도 바을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외적으로 피부를 잘라내는일, 즉, 의식에 관해서만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는 오히려 이 의식은 햐나님을 섬기가 위해서 필요한 행위하고 공상하며 동시에 그것을 공덕있는 행위로 여기고 거기에 신뢰의 근거를 두는 거짓 사도들의 사악한 교리를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마적인 책략은 그리스도를 무용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거짓 사도들도 그뢰스도를 부인하거나 또는 그리스도가 전적으로 배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율법의 행위를 갈라 놓고 그리스도는 다만, 구원의 절반 밖에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처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구별은 있을 수도없고; 우리가  그라스도를  구원의 전부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만이 우리에제 유익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 하지만 오늘날 교황파 무리들은 할례 대신에 저들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을 우리에케 강요하고 있지.·않는가?  저들이 가르치고 있는  교리 전체가 그리 스도의 은혜와 행위의 공덕을 혼잡시키는 경향을 취하고 있다. 그라나 그것온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절반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라스도를· 통째로 다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황파의 무리가 자기들이 아주 엄격하기 때문에 자기들온 그라스도의 중보적인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 만  갈라디아인들의 잘못과 무엇이 다른가?  결국 저들도 자기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었다든지 또는 그의 은혜 를 저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주요한 복음의 진리가 잘뭇 되어 있는 한 결과적으로 보아 저들은그리스도를 상실한 자들이다. '보라 나 바울은' 이것은 매우 강조적인 표현아다. 바울이 이렇게 자산을, 심지어 이름까지 밝히면서 저를 앞에 내놓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이 주장하는 바가 의심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인에게 한뱌울 자신의 권위가  이미 떨어져 간다 해도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을 충분히 제지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3. 내가 할례틀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 바울은 여기서 다음 문장 중의 서로 모순된 사항에서 인출되는  결론으로써 증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고있는 자는 항상 유죄선고 아래 있기 때문에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전히 만족시킬 인간은 한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율법적 의무는 예외 없이 인간을 지옥에 멸하는 정죄를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혜에 참여하는 자인 동시에 온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하는 두 가지 모순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결국 조상둘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디모데는 길을 잃은 미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그에게 할례를 베풀었다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할례가 있는 곳은 속박이 있기 때문에  실로 우리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우러에게 저주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답변하기 위해서 바울은 항상 할례에 관하여 말할 때  두가지 면으로 말하곤 했다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것은 바울이 기록한 서신을 읽는데 어느 정도 숙달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문제이다. 로마서 4장 11절에 보면 그는 할례에 관하여 말하면서 할례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편  바울은 그리스도와 값없이 주시는구원의 약속을 할례 아래 포함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할례를 그리스도,복음,믿음, ;그리고 은혜와 대조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할례를 '단순히 행위의 공덕에 근거를 두고 보는 율법적 견지에서 그렇다는 것을 나타내고 았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도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바울이 언제나 할례에 관하여·말할 때 한가지 의미로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 알 수 있다.

 

그러면 어째서 한 가지로만 말할 수 없었는가 하는 그 이유를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다음과 갈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 다.  바울이 할례를 그 본연의 의미로 고찰할 때는 웅당 할례는 은혜의 상징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제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할례를 악용하여 복음을 파괴하려는 거짓 사도들에 관하여 할례를 제정하셨는가하는 점을 살파는 것보다도 인간이 도입(導入)한 부패에 대하여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거가에 대한 아주 신랄한 실례를 들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와 값없이 받는 의, 그라고. .영원한 구원에 관한 약속을 받을 때 그 약속을 확증하기 위한것으로써 동시에 할례가 거기에 첨가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재정하신 점으로 말하면 할례는 신앙을 돕는 하나의 성례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이 나타나서는 할례를 공덕적(功德的)인 행위로 이해시키고 율법 준수를 권장하면서 마치 할례를 율법 준수에 대한 입교 서약식처럼 만들어버린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는 하나남이 할례를 제정하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거짓 사도들의 허무맹랑한 날조를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이 무엇을 악용하든지 처들의 악용이 하나님의 성례둘 의 효력을 손상시카지는못할 것이 아나겠는가하고여반대할 사람이;~을지도 모론댜: 나는이렇게 답한다 .. 할례는 ·하나님께서、임시로 제정하신 성례에 불과하며,니뇨리스도가 오신 후부터는 세례가 그 위치를 계속하기 때문에 할 례가 성례로서는 끝나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디모데가 할례를 받았는가? 그것은 실로 디모데 자신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약한 형제들을 위해서였는데 바울이 이 점에 있어서는 저들의 약함에 순응한 것이 다. 이제 교황파의 교리와 바울이 여기서 반대하고 있는 잘못된 교훈이 얼마나 밀접한가를 더 한층 밝히키 위해서  말한다면  성례라는 것은 순수하게 해석한다명, 엄격히 말해서 인간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세례에 았어서나 성찬에 있어서나 우리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나온 것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 보면 세례는 수동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거기에 가지고 나아갈 것은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그리스도에게 말기는 것이다. 그런데 교황파의 무리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저둘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효능 있는 행위를 고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례가 지닌 진리를 철저히  제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례와 성찬이 영구히 지켜지기를 원하고 계신 한 이 두가지를 언제나 실행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악한 몽상을 심히 협오하는 바이지만, 실 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4. 율법안에서 의톨다 함을 얻으려하는나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지고~~~~" ; 의미는 이렇다. ,"만일'너희가 율법의 행위에서 어느.정도라도 의를 얻고자 한다면, 그리스도는 결코 너희를 유익하게 할수 없고 너희는 은혜 에서 떠나있다•“ 그런데 저들도 율법만 지켜서 의롭다합을 받는다고 믿는 크계 찰못된 사상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 그러나 처들은 그리스도와 율법을 혼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낳았다면 바울이 -~들을냐가음과 갈이 위협해 온 것은 아무: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너희가 무엇을 하고 있느뇨? 너희는 그리스도를 무용자(無用者)로 만들고그오위 온혜를 무로 돌리고 있도 다" 그래서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의라도 율법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곧'그 리스도와 그의 은혜를·부인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 ; 이것은 처들의 마음에 쉽게 일어날 법한 반론에 대한 예방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곧 ‘그러면 할례는 아무 쓸모도 없단 말인가?하고 마음속에 생각하기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이, 대답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의는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며, 그리고 그 의는 의식(儀式)에 의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의 신뢰를 이 것이나 혹온 저것에다 두는 것, 또는 어디에사 의를 기대할 것인가를 결정짓 는 것을 말한다. 그러 나 또 그 말이 인내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 고 생각할 수있다. 다서 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의의 소망 중에 변함없이 계속한다'논 의미이다. 믿음으로말미암아 의를 얻는다는 점에,있 어서는 신약시대의 우리나, 구약시대의 족장들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바울 이 말하고 있냐 저들도 모두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계 했다는 것은 성 경이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저들의 신앙은 다만 의식(儀式)이타는 보 자기에 싸여. !있는 것분이다. 그태서 바울은 우리와 저들 ~l-~이를 성령이라 는 말로써 구별하고 있는데 이것을 의부적인 그림자와 대조시키고 있다. 이 렇게 하여 그는 이재 의를 얻기 위하여 팔요한 것은, 꾸밉없는 순수한 신앙 이요, 또 신앙이라는 것은 이재 의식의 포장에 싸인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 님께 대한 영적 예배로써 족하다는 것울 말하고 있다. ' t' '~ () . .: l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  이제 저들 이 성령 안에서 의를 소망하는 이유는 할례가 그 모든 부속물과 함께 그리 스도 01에서 혹온 그라스도 교회 안에서 페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제유적 (提兪的)으로 헌에''라는 말이 모든J의식(儀式)을 대표하고 있 기 때 문이 다. 이 렇 게 하여 바울은. Pl ,~이 상 의 식 이 행 해 질 이 유가 없 다는 것 을 선언하는 반면에 그는 의식이라는 것은 그 어느 때에 있어서나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그런 것둘이었다고는1' 생각하자 않았다., 왜냐하면, .. 의식온 다만.;,그 리스도가 계시된 후 비로소 페지뒤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가!때문이다.t다동시 에이것은 어째서 그가 이 부분에서: 마치 할례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럽 가볍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또하나위 문제률 풀서주고 있는것까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는 할례7L과거 한때 성례였다는_l사실을'문재의 촛접으로 삽 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 할례가 페지되기 전에 무슨 가치가 있었는가 하는 그런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바울은할례가 그리스도의 통치 아태서는· 무할 례나 다름없이 동동하게 된 것은-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율법의 모든 의식 이 종식되었기 때문이타는 것을 전술하고 있는 것이다. . . !..:.'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나라." ;  '바울은 의식(儀式)과-.대조하여 사랑 의 실천을 설명하고`있는데, ,이것은러유대인둘이 마치 자기들은.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뛰어난 첫처럼 너무 자신들을-·과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본서 마지막.부분16장 15절에서-<?l 철을· 대신하여 "···새로 지으십을 받은 자분이니타,,고 저1-.말씀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요컨대, 바울이-'하나 님은 오늘날 우리가 의식에 구애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우리가 사랑을 실 천하는 것으로써 족하다’고 말한 대로이다. 그러나이것이 신앙에 도움을 주 는 우리의 성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전에 논한 바 있는 하 나님께 관한 영쳐 ;~예배가 무엇이라는 것을 확중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 귀절은 교황과의 무리가 행위의 의를 주장할 목적으로 고의로 중상하여 어것을.,.곡해하려고 하지 않는 한 별 어려움이 없을것이다.'~그런 데 처들은 믿음에위해서만이 우리가 의돕다합을 -~는다는 우리의 콕·리를 논박하려고 할 때는 이 무처를 잡아들 것이다. 즉 믿음이 '사랑에r.-의하여 역 사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이’ 믿음만으로는 의롭게-할 수 없 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나는"저들온자기들이 무엇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며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밀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우리논 의돕게 하는'신앙은:신앙 에서만 머문다고 가트치지않기 때문이다. 분만 아니라 신앙이라는 것은 항 상 선행과 결합된다고 주장하며, 다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믿음만으로 족 하다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살인자둘처럽 불행히도 신앙을 천 갈래 만 갈태로조각조각 찢어놓는 것이 다론 사람들이 아니고 교황파 무리 자신 둘이다. 처들은 때로는니사랑이i전혀 결여된중.불완전한신앙을 공상하는가 하 떤, 어떤 때는 신앙을 따딱하계 형식화하는데만 그찬다. 한핀 우리논 참된 신앙은 중생의 성령과 분리될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다만 칭의(稱義)의 원인을 문제로 삼을 때만이 모든행위를배제한다; <>f,,-:.'-『' 본점에서는바울이 칭의에 있어서 사랑이 산앙과 협력하는지에,_관해서 논 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그러나바울이 기독자로하여금나태하게 마치 통나 무처럼 이무것도.하지 않는·자로 만드는 자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1. 는 믿는 사람들의 참된 실천이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r그러므로 칭의에 관한_¾겨lzl-토의될 때는 사랑이라든가 혹은 행위에 관한 언급은 혼 합시키지 않도록경계하면서 배제하는부사, 죽 ‘분·이라는1말을;계속유지 해야 한다. '~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칭의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닐나본 아니라 칭의에 관한 신망의 일부를 사람에다가 할당해 주고 있는 것도-~아닌 사실을쉽게 증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논법으로 계속 나간다단할례나 의심도 한예 의롭게 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버리게 되기기 때문이다. 그것온 바울이 고리스또 예수 안에서 사랑을 겸한 신앙을 권면하고 있는 것처럽 그 리스도가 오시기-~~에는 의식들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식이라는 것이 의를 얻는 데는 무익하다 하는 사실을 교황과에서도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칭위에 있어서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컬론을, 내리계 한다.

 

"7.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바울은처들이 깊은수치갑을갖고보 다 신속히 바론 길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하여 현재의 반여에 대한 질책과 이전에 잘 달린 데 대한 칭찬을 섞어서 말하고 있다. 바울의 칭찬과 아울러 놀란 표정으로써 누가 저들을 바론 길에서 이탈하도록 매혹시켰느냐고 묻고 있는 것은 그만큼 저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 헬라어 동사 '페 이 데 스다이' 를 ‘믿 는다’ 로 번 역 하기 보다는 ‘순종하다’ 로 보는 것 이 오히려 찰 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들이 일단 순수한 복음을 밭 아들였으나 그후 그것을·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8.  그 권면이~~~~·아니라." ;  지금까지는그 바울이 교리적으로 논박했지만 이제는 권위률가지고그러한 권떤은,.하냐남제로사온 것Pl 아니라고선언 하고 있다•I 이러한 훈계는 사람~->-..권위에 의최석 뒷받침되지 않으떤 그다 지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아다. 그런데 접H울은_..,갈라다아인의 신적 소 명(神的召命)을 ~J.언한 사자(使者)이기 ·대문에 처들에게,~대하여 당연히 그 렇게 대담하게 말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칙접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않았지만, 완곡(腕曲)한 표현으로써 언급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 님은 결코 하나님 자신과 모순되지 않으시며 나의 절'교를 롱하여 너희를 구 원으로 부르신 이는 바로 하나남아시다. 그러므로 새로운 권면온 아무래도 하나님 이의 어디에선가 온 것임에 룰림없다는섭취지키다~ 만일그 나희가1더희의 소명이 하나님께로부바은 것을.확실히 해두기를국원한다면 어J.:J로 너희에게 자기들의재로운 몽상을 주입시키려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 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산·된다~,,,나기록 헬라어  '칼문토스' 가 분사 로서 물론 현재시상이、치만 희미가애매하기 때문에 냐는 차라리'그것을 부 정적(不定的)으눅로 취하여' '너희를 우르신 이'로~ ;번혀눙H는1것을 좋게 .여건다.

 

"9. 적은 누룩이……" ; 나는 이것을'사람에게 대하여 말한 것으로 보지 않 고 교의(敎義)에 대하여 말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교의걱 타락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처들에개 경고하면서 저들이 이 문재를아무위험도없고별 문재 가 이닌 것처럼 가법게 (혼하그러했던 것처럼) 보야 넘기지 않도록 하기 위 해서이다, ,사단온 교활하여 은밀히 파고 들어와역사하기닙때문에 눈에 퍼게 복음 전체를파괴하러 들지는 않는다el그러나 사단은?거짓으로 위장하고 부 패한 사상을 가지고 복음의 순수성을 오영시킨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해악(害惡)의 중대합을 눈치채지 않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하여 맹렬히 항의할 생각을 않는다. 그태서 사도는 한번.하나님의 전리가 타락하게'괴 면 벌써 건전한 상태로 존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항의하고 있는 것이 다. 그가누륙의어유를 들고 있지만 사실 누록온 양으로 말하면 아주 처 온 것이다·1-+7-러나욕그 산미(酸味)는 온 덩이에 퍼전다• 마찬가지로· 순수한 복음적 고교의에다가 무엇인가를 첨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도록 신중히 정계 하지 않으면 안된다.

 

"10. 나는 너희가~~~~~아니할 즐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  바울은 다시 거짓 사도둘을향하여 분노를 터뜨린다• 처들이야말로 화의 원인이라고 하면서 형벌이 임하티라고 위협하고 있다. 한편 바울은 갈라디야인~에 관해서 는 갈라디아인들이 조속한지일에一돌아와 천리로:1일치하게 될;것을 충십으 로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거는·쿈4기대란 처들에 계 천철과 우정으로 찰 해주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온 부끄러운행위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아는 것도〈또한용기를 주는 일이 된다. 그런데 처들이 갈라디아인을 찰뭇나간'제서 본테위 순줍 한신앙적 교의로 들아서게하는것은 하나님께서 하실일이기 때문에-브l-울 온 저들의 일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다.r:-이로 인해y바울은 회개 가 하늘의 선물이라는 것과 나아가서 처둘도회개의 .. '선물을 하나님게 구하 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깨우치고 있다. ' ' _' 、,.~

 

"너희를·요둥케 하는 자……" ; 이것은 앞의 문장례 관한 확인아다? 왜 냐하면보l울은 간접으로 과실의대부분의 책임을갈라디아인을속인 기만자들에게'..½ 리면서 갈라다아인위1전책임을 어느"정도 떤제시키고.'있기 때문이다 •. ;,.,대개 교 회에 분쟁의 씨를 무리며터' 쯔u_;oJ의 일차를해치며 화목을 깨뜨리는_자는 모 두 이것에 귀를 키윷여주기를 바란다. 저둘에게 다소간-oJ=~(良識)o.1:있단 떤 이 말을 듣고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의 입을 통하여 선 언하시기를 이러한추·문을 일으킨·자로서 벌받지 않고피할.자는 한 챤람도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구 도 나 -..... . '누구든지’라는 말은 메우 강조적이다. 왜냐하면 거짓 사도들은인상적인 말을 가지고 순수한 무리를 놀타계 했으므로 바울도 여기에: 맞서 그와 갑동 적인 교의를 선언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감히 여기에 :대항하여 입 을 여는 자가 있으면 가령 그가 아무리 탁월한 촌재라 할지타도:,그를 용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I지:-s;. C ,' • ,. 令l

 

"11. 형제들아…" ; 이것은 종국적인 원인에서 도입한논법이다. ""내가 의 식을 그리스도와 혼합하거만 했다면 모든 사람들의 미움과 위험과 핍박을 능히 피할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이 문제에'관해서 이처럼 반대하떤서 논쟁하는것온 나 자신을,위해서가 아니며 또A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아니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기르치는 것은 모두 전리라고 하겠는가? 나는 ‘가르치는~~~ 올바론 자세 와 순수한 양십온 찬동을 얻는 데 크게 여할을 한다’고 답한다. 그런데 그 밖에, 자진하여‘자신에게'r 불행을 초태할·만큼 앞 뒤 헤아리지 떻않는:사람 온 도저히 믿을 수없는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와 대작들은 할례를 말하면 그리스도를 ,충성스럽재섭기는 것보다도 자기C들의 안일에머 관십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무리를,혀기십스럽계 여겼다• 요컬대, 바울은 야 l 십이나 람욱,` 혹은개인격인유~~울두회하듬 에서는 완절하 ,초절해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인갑들의 안면이나 찬사건동을 싫어했고-또 복음의.순수성 I 에저 조금이타도 이탈하는 것보다도 차라리 팝박과 많은-사람들의 분노속어J 자신을,드러내 놓았기 때문이다. ... ,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  바울은. 북읍의 낮고 단 순함을 인간의」지혜와 의의 ,오만함과 대조하여 말하고자 할 때, 그는 웃음 을 ‘십자가', 혹은내자가의 말씀''이라고 훑렀다. 자신들의 의어J 대하여 곡 해된 신되십에'부풀어 있는 유대인둘과 자기둘의 지혜를어리석계도 믿혼밌 논 헬라인들은다갈이 복음의 단순합을 멸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1 ~ 이제 할례위설교에 찬동한다면 심자가의,장애물이 없어질'.것이라고 말하는 뺄_ 뜻은.그렇게 하면, 유대인도자기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기꺼이 그가 가르치듬 것휼 공안했을 것~l라는 말이다. 에냐하면 무제와 그리스도 의 교훈을〉 반반으로치키면서 볶음을 그턴 식으로 분장해서 타락시킨다면 . ! . I l ...! 아미 자들을:::괴롭히는것이없』기 때문이다 .. 윤흡을 이런 식으로 뮈법버이 되도록한다면 저틀무부드민워질 것이.다. 왜냐하덜 그렇게 할 때에 처둘의 옛 권위가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다

 

"12. 너희틀 어지럽게하는 자들이 스스로베어버리기틀 원하노라" ;  그의 의분이 져화하여 그는 이제 갈라디아인을 속안 처 키만자들이 파멸되기를 원하고 있다. '베어버리기를'이란 말은 처둘이 계속 실행하고자 논쟁의 문 제로 삼고 온 할례를 암시하고 있는 것처럽 생각된다. 크리소스롭갈온 이는 이런 견해를 가졌다; 죽 ‘저들은 할례 E때문에 교회를걷키갈기 찢아놓았다. 나는 처들이환첩하늄석처』기를바란다;' 그러나\ 이와 갈은 처주는 사도가 지며야 할 은후한 성품에 져합하지 않다고생각된다. 왜냐하면 사도라면 마 땅히 한 사람~ol라도 덜망당하는 일이 없이 다 구원받기를 원해야만 하기 때문이단· 난는 다읍과같이 대답한다. 과연 인간을 중요시하는 처지`에서 말한다면:구렇게 해야 한다. ' 구티스도가 온 세상의 최 때문에 수난당하신 것처럽 하나님도 우리에케 모든 사람이 예의없이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셨 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건한 신자들의 마음온 가끔 보는 사람의 생각을 넘 어사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는 경지에 이를 때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민간~9.:텨!'.보다士훨씬 !탁월하기대문에 우리의 리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황홀케 하여 그 영광만을 사랑하며 거기에만이 온갖 열정을 쏟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만을 전지하게 바라는 신자들 온 이 세상과 인간의 문제를 잊어버리고 무엇을 하든지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보다 차타리 온 세계가 멸망당하는 편이 낫다 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러한 기원은 인간을 떠나 완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데서 생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이것은 사랑과는 모순된 것처럼 자비하다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 만일 교회를 일개인이나 몇 사람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교회 편을 더 중요시해야 되지 않겠는가 !

 

그러나 교회 전체보다도 일개인 을 더 좋아한다면 그것은 무자비한 자비라고 할 것이다. 가령 내가 하나님 의 양무리가 위험에 직면한 것을 보며 또 다론 한편으로는 이리가 사단에게 선동되어 이 양무리를 삼키려고이리저리 배회하고 있는 것을 본다떤 웅당 교회에 대한 애착이 나의 생각을 완전히 삼켜 이리가 망함으로써 교회가 구 원되는 것을 원치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이 이처럼 멀망될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십이 나를 어떤 황 홀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나는 교회 구원 이외는 아무 영려도 없 계 된다. 교회의 참된 목회자라면 누구나 이와 갈은 열정으로 블·타고 있는 것이다. 너희를 어지럽계 하는 이 말의 헬라어는 어떤 사람의 확고한 지위 나 상태를 혼들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 •.. 도 또한'이타는 말을 삽입하고 있는데, 처들이 타락될 분만 아니타 완전히 져 리되거나 멸철되기를 바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