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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6:9~10)

1. 성경 (갈6:6 ~ 10)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6)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7)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8)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9)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10)
 
2. 묵상 (Calvin선생주석)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  아마 그 당시는 교사둘과 말씀의·사역자둘을 잘 돌보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아주 비열하고도 배은망덕한 짓이다. 우리의 영혼을 길러주는 분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거절하거나, 우리에게 하늘의 복을 축복해 주는 분들에게 자상적인-것으로 보수하기를 거절한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럽고 악의적인 일이냐,그런데 보는 바 대로 사단의 사역자들의 배는 항상 블러 있어서 이쉬운 것이 없는데, 반대로 겅건한 목회자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양식도 '마지뭇해  억지로 준다는 것은 그 당시부터 이 세상의 습성이 되어 온 것이다. 비록 우리가 지나치게 불평하거나 우리의 권리를 주장해서도 안 되기는 하지만, 바울은 갈라디아인에게 자기의 의무를 다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하지만 바을은 이것을·특벌히 자기· 입장에서 말하지 않고 또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배려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말할 수 았었던 것이다. 
 
 바울은 말씀의 사역자들이 푸대접 당하고 있는 사실을 보았는데 그것은 말씀 자체가 멸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말씀이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되면 말씀의 사역자둘도 역시 친절히 그리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충실한 말씀의 사역자들의 생활비를 빼앗는 것은 교회가 그와  갈이 성실한 사역자를 빼앗기도록 하기 위한 사단의 책략이다. 바울은 봉사의 직무를 보전하기 위한 진지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훌륭하고 성실한 목회자들을 돌볼 것을 권면하고 있다.  여기 말씀은 신앙적인 교훈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와같이 훌륭한 교훈의 말씀으로써 우리를 가르친 분들을 봉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교황과에 있어서 배만 위하는 나태한 벙어리들, 곰 기독교 교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미친 짐승둘의 집단은 도대체 무슨 명목으로 부양되고 있는가?
 
"모든 좋은 것을……" ; ·바울은 제한없이 지나치게 풍부한 소유를 원치 않았으나 단지 그것들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으로써 모자람이 없이 공급되기를 바랄 뿐이었다.i교역자들은 소박한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치와 호화로운 위험을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좋은 것을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경건하고 거룩한 교역지에게 분배할 수 있어야 한다. 저들에게 아무리 드린다고 해도 저들의 설교를 통하여 얻는 측량할 수 없는  영생의 보배에 대하여 충분한 보답이 되겠는가?
 
"7. 하나님은·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 그가 이 말씀을 부가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유로 내세우는 변명을 논박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자는 자기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주장하며, 그리고 어떤 자는 .자기에게는 다론 사람에게 주거나 지출할 만한 여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의무를 다하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들 역시 층분한 생활을 못하고 있다. 바울은 이 세상 사람은 미치 생각하지 못하나 이것은 하나님께 관한 일이므로 그러한 이유를 대는 것온 어리석은 짓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제의 요점은 단순한 사람의 부양이 아니고 얼마만큼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중요시 하느냐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귀절은 성실한 교역자를 멸시하는 버릇아 일어난 것은 오늘날 비로소 시각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자들의 이와갈은 멸시는 그냥 지나지 못할 것이며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우리가 구제하는 일에 주저하는 이유는 남의 손에 넘겨주는 것은 무엇이나 자기에게서는 상실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며 또 사람이 현세에서는·누구보다도 자신에 대하여 항성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과 반대로 구제하는일을 파종기(播種期)에 비유하여 우리가 이웃에 선을 행할 때 그것은 씨를 뿌리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9 : 6이하)에서도 이 원리에 대하여 말하면서 거기서도 꼭 같은 비유를 쓰고 있다. 원컨대 우리가 이 교훈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추수의 희망을 바라본다면 이웃을 돕기 위해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것을 유쾌한 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농부에게는 씨를 뿌리는 것 이상으로 줄거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둘은 썩을 것을 거두기 위해  9개월 동안 참고 견디며 기다린다. 그런데 우리는 지극히 복 되고 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을.위해 그 처럼 기다리지 뭇하고 있다.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  전반적인 사상에 대한 설명에 이어 ,이번에는 부분적으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육체를 위해 심는다는것은 내생(來生)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현생(現生)의 필요에 관해서만 급급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심은 씨와 같은 열매를 거둘 것인데, 아마도 저들은 장래 비참하게 멸망할 것을 자축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말을·육체의 정욕을 즐긴다는 의미로 해석하며 ‘썩어진 것'이란 말은 파멸이란 의미로 해석한다. 그라나 앞에서 설명한 전자의 해석이 본문의 문맥상 더 적합하다. 나는 라탄어역이나 에라스무스와는 다르게 번역하려고 했지만 이유없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각 단어를,하나 하나 그 어의에 따라 가장 충실히 번역하려고 하면 ‘육체를 향해 씨 뿌리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의 노력과 주의를 완전히 육체를 위해 집중시키며 육체의 쾌락만 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 나는 '.성령’을 '영적생활을의미 하는 것으로 보고, 아래로 땅의 것보다 위로 하늘의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동경하면서 자기의 인생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영적인 생활에 씨를 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자기들의 영적 결과로써 썩지 아니할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바울이 인것을 영적인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 행위의 목적을 고찰하고 하는 말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지금 논하고 있는 바대로 교역자를 받드는 행위로써 어떤 경우에서는 외적인 것, 곧 육체에 관한 행위도 있기 때문이다.  교황파의 무리가  저들의 상투적인 방법으로 이 말씀을 빙자하며 행위에 의한 의를 설명하려고 해도 저둘의 어리석은 주장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다른 데서도 서술한 바 있다. 
 
비록  영생이 일종의 보상이라고 해도, 우리가 행위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든가, 혹은 행위가 구원의 공력이 된다는 결론은 내릴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행위를 그토록 귀중히 여기신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행위의 보상으로는 도전히 어울리지 않는 놀라운 보상을 약속하시되 그것을 우리가 거저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더 완벽한 해답을 구한다면,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은 선행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주실 만한 선행이란 우리에게 하나도 없다. 둘째로, 성령의 인도와 도움을 받아 행한 선행은 값없이 허용된 양자의 열매이다. 세째로, 우리의 행위는 항상 많은 오염에 의하여 때 묻고 흠투성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상도 받을만한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하려 벌을 받기에 알맞고 하겠다. 
 
그런데 오염과 하나님의 임재와의 사이에 대체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네째로 행위에 대한 보상이 몇 천번이나 약속된었다고 해도 무장 그 약속의 조건에 의하면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지 않는 한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완전에 이르기에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파의 무리는 행위의 공력에 의하여 하늘의 문을 열어보겠다고 애쓰고 있으니 실컷 해보도록 내버려 두자 !.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성경 전체가 가르쳐 주는 교훈을 따라서,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보상이라는 이름 아래 행하는 것도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선’은 정직하게 행동한 것을 말하는 것이 어니고 친절을의미하고 있는데 결국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이웃을 도우며, 구재를 행하며, 그들에게 아량을 베푸는 데 싫증을 느끼지 말라는 취지이다.  이것은 우라에게 특별히 필요한 교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래적으로 사랑을 실천히는데 있어서 극히 나태하며 그 밖에도 우연히 나타나는 무수한 장애가 있어서 우라가 아주 훌륭한 일을 하려고 마음 먹고 있어도 그러한 장애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는 그것을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구제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나 또는 구제를해도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며 때로는 생활이 딱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의기소침 되어 이것 저것 다 생각하고 주다 보면 재산이 바닥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되며, 어떤 경우에는 남들이 냉담하기 때문에 우리의 열심이 식어지기도 하며, 끝으로 우리를 바른 길에자 이탈하게 하는 장애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우리가 낙심하며 선행을 그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바울이 우리를 더욱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  즉, 우리가 끝까지 찰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약속한 열매를 거둘 것이라는 말이나 끝까지 참고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만 하고 그 일을 끝 맺지 않은 채 그냥 버려두는 게으론 농부와 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사람들은 새가 씨를 먹지 않도록 하며, 햇볕에 타지 않도록 하며 그리고 추위에 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쇠스랑으로 땅을 긁어야 할 때도 충분히 돌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최후까치 도달하지 않으면 모처럼 훌륭하게 시작했어도 결국은 시간만 허비하게 된다. 
 
"때가 이르매~~~" ;  바울은 누구든자 현세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소원 때문에 영적 추수를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망이 소망과 인내에 의하여 보지(保持)되며 또 제어되지 않으면 안된다.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  바울은 계속하여 비유로 말하고 있다.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데 적당한 때가 언재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롭고 근면한 농부는 좋은 시기를 잘 포착할 것을 신중히 생각하여 게으름 피우는 사이에 좋은 시기가 그냥 지나가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현세의 인생 전부를 밭 갈고 씨뿌리는 시기로 정해 놓으신 줄 알고 우리에게 좋은 시기가 허락되고 있는 동안 나태함으로 인해 기회가 지나가지 않도록 기회를 선용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먼저 복음 사역에 수종들고 있는 교역자를 잘 대접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 교훈을 널리 확대시켜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장하되 특히 믿는 사람의 가정에 행하라고 명하고 있다. 그것은 저들이 우리와 갈은 권속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비유를 쓴 것은, 한 가족의 식구들 사이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불일돗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는 모든 인간에게 공동적으로 있는 인간성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지만, 특별히 믿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주님이 우리 사이에 정해주신 보다 간밀한 영적 혈연관계로 결속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