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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1. 성경 (갈5:19 ~ 26)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19)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0)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2)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3)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4)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5)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2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 바울은 기독신자들 앞에 저들이 항상 바라보고 주의해야 할 목표를 간결하게 제시했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서 성령에 대해서는 순종하고 육체에 대해서는 배격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성령과 육체 이 두가지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을 안다면, 인간은 다만 육체뿐이요, 육체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구태여 서술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의 타고난 위선이 있기 때문에, 마치 나무가 그 열매에 의하여 밝히 알려지기까지는 그 나무를 알 수 없음 갈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결함을 결코 인식하지 뭇한다. 그래서 사도는 이제 우리가 육체를 따라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어떠한 죄와 싸워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물론 그는 끝에서 또 언급한 대 로 모든 죄를 일일이 다 열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열거한 것들을 통해서 그밖에 다론 것들은 쉽게 알아낼 수가 있다.

 

그는 제일 먼저 음행과 간음을 앞에다 놓았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더러운 것, 그런데 이 더러운 것은 각종 야비하고 상스럽고 천한 행실을 가리킨다. 호색온 말하자면 그 그릇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쓰여진.헬라어 '아셀게이아'는 바람 피우며 방종한 생활을 하는 자들을 부를 때·사용되기 때문이다. 이상 네 가지 가 부정(不貞)이라는 머리에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또 바울은 ‘우상숭배'를 첨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당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지던 각종 추잡한 미신 행위를 의미한다. 곧 이어서 열거된 일곱가지 항목온 서로 친근성이 있으며, 그리고 나서 다른 두 가지가 첨가 되었다. 그는 ‘분냄'과 ‘분쟁’을 말하고 있는데 이 두가지의 주된 상이점을 말하면, 분냄은 일시적인데 반해서 분쟁은 오래 지속된다는 점이다.  시기와 투기는 원수 맺는 원인이 된다.  아라스토틀은 그의 수사학 제 2권에 보면 이 두가지를 구별하고 있다.  타인이 자기보다 우세하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시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해치는 것은 타인의 힘이나 혹은 우월성 때문이 아니고 자신이 타인보다 위에 올라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기하는 사람은 어떠냐하면 그는 남보다 월동 해 보려는 욕망은 없고 타인의 우월성을 보고서는 안달나게 구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투기는 낮고 천한 사람들의 악덕이라고 말하고, 시기는 거만하고· 영웅심 않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이 시기와 투기 이 두 가지는 일종의 육체적인 병폐로 보고 있다. 분냄과 분쟁에서는 언쟁과 소란이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그는 살인과 술수에 대하여 논하게 되었다.  '술 취함'이라는 것은 청결치 뭇한 생활과 각종 식욕에 대한 과음 과식을 뜻한다. 바울이 육체의 일에 대하여·논하면서 이단을 거론하고 있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 육체라는 말이 궤변자들이 뭉상하는 것처럼 단순히 육욕만을 뜻하지 않고 그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암시하 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단을 생산하는가? 그것은 야심이다.

 

이 야심은 낮고 천한 감각적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의 최고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감정이다. 바을은 말하기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다 고 했다. 그것은 누구든지 아예 그것을 다 부정하거나 핑계 할 여지나 근거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함이다; 만약 열매가 다 그 나무의 정체를 드러낸다고 하면, 우리 속에 육체가 지배하고 있는 사실도  어찌 부인 하겠는가?

 

"21.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 바울이 이처럼 격식을 차려 준엄하게 말하는 이유는 갈라디아인을 각정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의식(儀式)에 관해서 논쟁을 벌이면서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교훈으로부터는 벌어진 거짓 사도들을 간접적으로  꾸짖기 위해서아다;  그러면서 동시에 바울은 이사야가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그 죄를 고하라"(사58:1) 고 한 말씀을 따라 이와 갈은 권면과 위협을 하면서 차근 차근 타이르기 위해 우리에게도 그 본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선고보다 더 무서운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누가 감히 그토록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들을 경시(輕視)하겠는가?  그러나 한편 그렇다고 하면 구원 얻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구원의 소망은 모든 사람에게서 빼앗긴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아와 갈은 죄들 중 어느 하나라도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답한다.  바울이 범죄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에서 반드시 추방당한다고 위협한 것이 아니고 다만 범죄하고도 그 죄를 회개하자 앓고 그와 같은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자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성도들도 때로는 증대한 죄를 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저들은 본 길로 돌아서 간다. 왜냐하면 저들은 자진하여 혹은 습관적으로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위협은 우리를 회개로 부르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회개에 대한 용서(容叔)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치 않고 완고히 고집하면 하나님의 심판에 위협은 우리에 대하여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클레 로노메 인' 은 상속을 의미 한다.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대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은 오직 양자가 된 권리에 의해서이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 바울은 앞에서 모든 인간성은 부패 타락하여 나쁜 열매밖에 맺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덕, 모든 정숙하고 절재있는 감정은 성령,.즉·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받는 성품으로부터 발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 바울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다. 성령으로 말 미암지 않으면 어떠한 선도 있을 수 없다’ 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온화하고 성실하며 절제하고 관대한 성품을 지닌 훌륭한 사람의 실례를 자주 볼 수 있지만, 실로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가면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그것은 덕의 그림자와 갈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큐리우스와 훼브리시우스, 그리고 카토(Curius, Fabricius, Cato) 등온 절제를, 스키피오(Scipio)는 친절과 관대, 그리고 훼비우스(Fabius)는 인내를 각각 저들의 미덕으로 여겼던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보는 기준에서 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러했던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에서는 모든 순수성의 근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 한 순수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의 희락을 로마서 14장 17절에 있는 회락과·갈은의미로 보지 않고, 유쾌한 테도, 혹은 이옷에 대한 쾌횔함, 다시 말해서 침울한 것과 반대되는 의미로 생각한다. 그리고 '충성'도 교활, 기만, 그리고 거것과 반대되는 ‘진실'이란 뜻으로 이해한다. ' 화평온;말 다틈과 불화의 반대의미로  본다.  인내는 마음의 유화함인데 우리는 이 유화함으로 밀마암아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며 얼른 성내거나 쉽게격분하지 않는다.  나머'지 것은 명료(明眼)하다. 바울은 각 사람의 정신상태가 어떠한 가를 나타내는 열매를,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훌륭한 덕을 갖춘 불신자나 우상숭배자를 우리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저들의 행위로 보면 저들이 영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한다. 육의 사람이라도 그 육체의 행위가 전부 다 눈에 띌리는 없으나; 한두 가지 악덕에 의하여 냐타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 처럼 어떤 사람의 단 한가지 덕행을 보고서 그 사람이 영적이라고는 생각할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의 :다른·악행을 보아서 역시 그 사람에게도 욱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것은 내가 앞에서 언급 한 모든 사람에게도.그러한 사실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

 

"23. 이 같은 것을 금지 할 법이 없느니라 " ; •.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단순하게 ‘선한법들이 다 나쁜버릇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선행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바울은 보다 심원한 의미로 그리고 은밀한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이 통치하는 곳에는 율법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의를 닳게 의의 틀에 넣어 주형 하셨으므로 우리를 율법의 엄격함에서 건져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의 조항을 따라 취급당하지 않게 하시며 또 우리의 양심이 율법의 정죄야래 속박 당하지도 않게 하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르치며 귄면하는.율법의 임무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 임무는 계속 수행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만 양자의 영이 우리를 율법에 약속되는 데서 벗어나게 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간접져으로 거짓 사도들을 또 한번 비옷고 있는 것이다. 거짓 사도들은 율법에 대한 복종과 예속을 강조하면서 율법의 멍에에서 자신들을 자유케 하는데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게 될 때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사실을 통해 보아도 저둘이 영적인 의에 관해서는 무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할께 그 정파 욕십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 바울이 이 말씀을 덧붙인 것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육체를 단념했기 때문에 자유는 모든 기독교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나아가서 바울온 갈라디아인에게 저들이 자칭 기독교인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거짓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실제 생활에 관하여 무엇이 참된 기독교 신앙인가를 깨우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는 말을 쓴 것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은 육체의 죽음에서라는 뜻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으로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게 한 것온 인간측에 속한 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롬6 : 5).

 

우리가 참으로 자신을 부인하며 또 옛 사람을 깨뜨려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가 완전히 깨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육체는 이제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성령께 복종하게 된다. ‘정과 욕심'이라는 것은 뿌리와  열매와 같은 관계이다. 육체 자체가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비행이다. 부패한 본성에서 모든 악이 발생한다. 이제 그리스도의 지체, 즉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여전히 율법의 굴레에 매여 있다고 하면 저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자유를 침해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이미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  이제 바울은 그의 습관을 좇아 교리적인 귄면을 하게 되었다. 육체의 죽음은 성령의 삶이다. 만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시면, 그 영이 또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신다. 스스로 파렴치하게도 성령으로 산다고 외람되게 말하는 자들이 어느 시대에도 많이 존재하지만, 바울은 저들이 말로써만 주장하게 말고 증거와 실적으로써 보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 우리 몸 안에 거할 때 태만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의 각 지체와 각 부분에 운동을 일으키며 생기를 띠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도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거 하실 때 반드시 자신을 ,외적인 실적으로싸 나타내신다.  그래서 '산다'는 말은 여기서는 내적인 능력을 의미하며,, ‘행한다’는 말은 외적인 행동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는 행위는 영적인 생활의 증거라는 것이다. "행한다"는 말은 은유적인 비유로 자주 사용된다.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 말지니라." ;  이것은 물론 갈라디아인에게 특별히 팔요한 권면이지만,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적절한 말씀이다. 야심이라는 것은 모든 사회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특별히 교회에 있어서 많온 악을 조작해내는 모체(母體)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을 경계 하도록 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케 노독시아' 는 헛된 영광을 의미하지만 실상 바울이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남의 명예와 자랑에 대한 질투률 의미하는 '필로티미아' 로서 명성을 떨치며 남보다 높아지려는 명예욕을 말하고 있다. 이교 철학자들은 영광을 구하는 욕망은 모두 다 나쁘다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독신자 사이에서는 영광을 구하는 자는 누구나 당연히 헛되고 어리석은 야심가라고 비난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참된 영광을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만 하나님 안에서 만이 영광을 누릴 수 있으나 하나님 밖에서는 허영이 되는 것이다. 격동과 투기는 야심의 딸들이다. 아무래도 최고의 지위를 노리는 자는 모든 다른 사람들을 잘투하기 마련인 것이다;거기서부터 증상이 나오고 적의와 공격이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