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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1. 성경 ((갈 6:11 ~ 18)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1)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2)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3)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4)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5)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6)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7)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8)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1.  내 손으로~~~~~보라" ; 이 말의 헬라어는 애매한 점이 있다. 그것은 그 어형이 명령법도 되고 직설법도 될 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의미는 분명하다. 바울은 본 갈라다아안에게 대하여 품고 있는 자산의 배려를 더욱 충분히 밝히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이 편지를 보다 주의깊게 읽어 주기 바라는 심정에서 이렇게 긴 편지를 자기가 친필로 기록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인을 위하여 들인 노고가 크면 클수록 갈라디아인 편에서도 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바울의 편지를 읽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도록 더욱  강하게 유인할 수 있었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 첫째 육체의 모양을 나타내려는 것은 야심적인 마음으로 사람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것이요, 건전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여기 사용된 동사는 아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서 호감을 사기 위해 꾸며진 상냥한 표정이나 매력저인 말을 의미한다. 바울은 야심직인·거짓 사도들을 힐난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려는 의도는 "너희에게 할례를 받도록 강조하고있는 저 무리가 어떠한 인간이며 저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는가? 만일 너희가 생각하기를 저들이 경건한 열심에 대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것처럽 여간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저들은 단지 이런 것을 미끼로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서 인기를 유지하려 는 것 뿐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동국인(同國人)의. 호의를 이어나가며, 적어도 저들의 분노를 기피하려고 한 것이다.  야심가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행동해 왔지만 저들은 비굴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아첨하며, 그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이 위대해지려고,한다. 그라고.자기들보다 훌륭한 사람들을 떨어뜨리며 자기들만 지배권을 잡고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무리의 사특한 의도를 갈라디아인에게 알려서 저 들을 경계하도록 한 것이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틀 인하여 필박을 면하려할 뿐이라." ;  그는 순수한 복음ㅍ전파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전하려 하는 저 무리들의 나약함을 암시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하여 저토록 격노하고 있는 이유는 저들의 의식(儀式)을 버리는 데 대해 참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팝박을 피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아첨했다. 만일 저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면 더욱 관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자기들의 편리를 위해서 온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고 자기들이 육체적인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들의 양심에 무거운 멍에를 씌웠다. 그리하여 저들은 자기들이 십자가 질 것을 두려워하여 십자가를 전하는 전정한 복음전파의 품위를 추락시켰다.

 

"13. 할례 받은저희라도(駐 2)……" ; 라탄어역이나 에라스무스는 ‘할례 받은 자’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일반적으로널리 모든 사람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교사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애매함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라탄어역이나 에라스무스처럼 번역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미는 이렇다. '저들이 너희를 의식 (儀式)의 멍에 아래 가뒤 놓는 것은 율법에 대한 열심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들 자신은 할례를 받고 있었지만 율법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율법을 구실삼아 너희에게 할례 받도록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은 할례를 받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명하고 있는 바는 실행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저들이 율법은 지키지 아니한다고 바울이 말할 때, 그것이 율법 전체를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의식(儀式)만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 지 않다. 

 

왜냐하면 다음과 갈이  즉  ‘저들이 율법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은 율법이 능히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보다도 오히려 저들의 배신적 행위를 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만한 아무런 위험이 없을 때는 율법을 멸시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와 갈은 질병은 오늘날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도록 만연되고 있다.  왜냐하면 양심에서라기보다는 야심에 의하여 교황파의 전제정치를 지지 하는 사람들을 현재에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부엌 냄새에 관심이 깊은 아첨하는 사도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거룩한 로마교회의 모든 명령은 두려운 마음으로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고 엄숙히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그동안은 내내 무엇을 했는가? 사실 저들이 로마 교황청의 모든 교령 (敎令)을 당나귀 울음소리 만큼도 주의 하여 듣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라도 하려는 의욕이 없는 것이다. 요컨대, 바울은 복음을 따르는 척 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황을 혼합한 일종의 괴물을 만들고 있는 무리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과 갈은 싸움을 저 기만자들을 상대하여 싸운 것이다. 그래서 바울온 그 기만자들의 가면을 벗기고 저들이 순수하고 정직하게 행동하지 않고 유대인의 호위를 얻기 위하여 새로 개종한 자들에게 강제로 할례 발도록 하고 있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란 이것이다. '저희는 율법에 대한 그릇된 열광자에게 저들 사이의 평화와 화친을 굳게 하자는 표시로 너희의 할례받아 상처 인기를 얻기 위하여 너희 몸을 악용하여 덕 보고자 하는 것이라' 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

"14. 그러나 내게는" ;  이번에는 그가 거짓 사도들의 음모와 자기 자신의 신실함을 대조하고 있다. 그가 말하려는 뜻은 저들은 삽자가 지기를 싫어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고-있다. 그리고 저들은 인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너희 몸을 ,소위 상품화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저들은 너희로 인해 승리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승리와 나의 자랑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 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갈라디아인들이 상식을 전혀 상실하지 않았다면, 자기들을 희생시키고 놀아나는 자들올 보고서 혐오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망할 것이 없으니 " ;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비록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굴욕적이고 치욕에 차 있으며, 그 위에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와 같은 십자가의 죽음을 싫어하고 부끄러워 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자랑하는 것은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 십자가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소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에게 무상의 행복을 주는 것에 영광을 둘리며 그것을 자랑한다. 그러면 다른 데는 행복이나 자랑할 것이 없단 말인가? 사실 구원은 그라스도의 십자가에서,나타났다고 하지만, 그의 부활에 관해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나는 이것을 십자가 안에 구속과 구속에 관한 부분적인 것 모두가 다 포합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벗어나게는 못한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바울이 그밖에 다른 모든 영광을 무서운 죄나 다름없이 몹시 싫어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자주 사용한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는 말은 ‘하나님이여 부디 이갈이 지독한 역병(度病)에서 우리를 막아주소서’ 라는 말과 갈은 의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여기 사용된 '스타우로스' 는 관계대명사 남성으로서 둘다 남성인 십자가라는 말과 그리스도라는 말 어느것에나 다 관계 된다. 그러나 나의 판단으로는 이것이 십자가와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은 특히 십자가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곧 .다음 절에 나오는 ‘새로 지으심'이란 말과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과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나 옛 사람에게 속했기 때문에 그것을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혹은 바꾸어 말해서 세상이란 그것이 옛 사람의 대상이요 목표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 아렇게 말하고 있는 바울은 이것과 갈은 의미로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 고 선언하고 있다(빌3 : 8).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세상을 멸시하고 작게 본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이 세상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또는 완전히 업신여김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런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은 자기가 죽어있기 때문에·그것으로 인해 괴로움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여간 그는 옛 사람을 죽음으로써 세상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이 세상이 나를 저주받아 추방 당한 자처럼 여건다면, 나도 세상을 저주 받을 곳으로 여기겠노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내 생각에는 이 해석이 바울의 의도와는 약간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 에게 말간다.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 그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며 또 세상이 그에게 대하며 역시 그렇게 된 까닭은, 그가 접붙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로지 새로 새로 지음 받는 것 밖에 달리 소중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밖의 모든 것은 버려야하며, 아니 완전히 소멸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란 성령에 의하여 새로 나는데 방해되는 것들을 말한다. 이것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수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게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 : 17)" 라고 말한 대로이다.  즉, 누子든지 그리스도의 나라에 예속되면, 하나 님의 영으로 말미압아 개혁되어 더 이상 자기나 세상을 향하여 살지 아니하고 새 생명을 향해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가 할례나 무할례가 그리 중요치 않다는 이유를 이미 언급한 바도 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모든 율법의 그림자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16. 무릇 이 규례틀 행하는자에게와" ; '이 규례를 지키는 자에게 번영과 행복이 있을지어다"하고 그는 말한다. 갈라디아 사람에게 행복이 있기를 비는 이와같은 기도는 저들을 칭찬하는 표시도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사랑과 호의를 받을·가치가 있지만, 반대로 이러한 교리와 거리가 먼 사람들의 말은 경청할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경건한 복음의 사역자들이 반드시 따라가야 할 확실하고 불변의 과정율 표현하기 위해  ‘규례'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 하면 도편수가 새로 세우고자 하는 건물의 모든 부분이 올바른 균형과 배치에 의하여 서로 잘 연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준기(水準器)를 가지고 건축물을 재는 것처럽 바울은 말씀에 수종 드는 자들이 훌륭한 질서를 좇아 교회를 건설하도록 하기 위해 저들에게 규구(規短)를 .위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은 충성스럽고 진실한 교역자들에게와 이 규례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틀림없이 대단한 열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귀절에서 바울의 입을 통하여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도록 빈 기도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평강과 긍홀을 약속하고 있는 한, 우리는 교황의 우뢰같온 목소리를  두려워 할 필l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 행하는 자라고 할 때 행한다는 말은 주로 교역자에게 관련된 말이지만, 교역자 뿐만 아니라 일반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동사의 미래형이 사용된 것은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의미를 냐타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이스라델에게……" ; 이것은  육신을 좇아 아브라함의 자손된 것을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의 헛된 자만을 간접적 으로 조롱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두가지 이스라엘을 묘사하고 있는데 하나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가면적 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이스라엘이다. 할례라는 것은 세상 사람 앞에 보이는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지만,  중생은 하나님 앞에 진리인 것이다.  요컨대, 그는 앞서 믿음으르 말미암아 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이름한 저들을 이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한 교회에 연합된 모든 신자들은 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속에 포함된다. 반면에 육신의 이스라엘은 ,종족과 혈통을 자랑하는 데 볼과하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 9장 6절에 언급하고 있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  바울은 이제 그의 반대자들을 제지하기 위해 권위있는 어조로 말하고 있다. 사실 바울은 그의 탁월한 능력과 권위로써  ‘내가 선교하는 것을 이 이상 방해하지 말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온 교회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참아나갈 용의가 되어있지만, 반대자들의 항변에 의해 설교하는 데 방해 받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괴롭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의 전진을 방해하기 위해 반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밖의 것에.관해서는  (한굴개역 성경---'이 후로는') 이것은 새로 지음을 받은 것 이의의 것들을 .말한다. 바울은 ‘나에게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 그밖에 다른 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중요점도 홍미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것들로 인해 아무라도 나에게 논쟁을 걸지 말아다오' 하는 뜻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사람 위에 올려놓고 그 누구도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문자대로 직역하면  ‘나머지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시간과 관련시켜 ‘이 후로'라고 번역했는데 내 생각에는 에라스무스의 번역이 잘못 된 것으로 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그는 어떠한 보증,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갈은 권리를 자기에게 돌리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혼적을 자기 몸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흔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옥에 갇힘'과 ‘쇠사슬에 묶임'과 ‘채찍에 맞음’과 ‘주며질을 당합'과 ‘돌에 맞는 일’ 등 그가 복음울 증거하기 위해 받은 가지 가지 악형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이 세상 전쟁에서도 대장들이 병사의 무용(武勇)을 칭찬하여 그를 명예롭게 하기 위해 훈장을 달아주는것처럽 우리의 대장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추종자들의 탁월한 업적을 위해 친히 자기의 흔적으로써 장식하여 저들이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훌륭하게 보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혼적들은 다른 표시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흔적에는 십자가의 성질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굴욕적인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스티그 마' 도 그런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을 직역하면 낙인(格印)을 찍은 흔적을 말하거니와, 옛날 야만인, 노예, 또는 도망한 노예, 혹은 법죄자에게 찍은 낙인의 흔적도 역시 갈은 말로 불렀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그의 군사를 자주 영예롭게 해주셨는데, 지금 바울 자신에게는 그런 영예의 흔적으로 빛난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그런데 이 혼적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수치스럽고 명예롭지 못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명예보다도 더욱 훌륭한 것이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저들 위에 풍성히 임할 뿐만 아니라 저들이 이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마음가짐을 저들 마음 속에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심령에 와 닿을 때 비로소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좌소(座所)까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서야만 되겠읍니다’라고 구해야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