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엡1:6 ~ 14)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6)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7)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8)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9)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0)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1)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2)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3)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14)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이 귀절도 역시 질료인(質料因)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되었는가에 대한 사실, 다시 말하면,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요구를 만족시켜 드렸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은혜를 구한다면 항상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피로 향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속죄하여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납하도록 하며 악마와 죽음의 결박을풀어주는 의(義)가 바로 여기서 온다. 이렇게 우리의 구속의 방법을 정의하는 곁정적인 선언(宣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한, 우리는 무서운 속박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죄의 대가인 형벌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은 더 없이 귀중한 자유이다.
"그의 은혜의 풍성을 따라" ; 그는 여기서 다시 동력인(動力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풍성한 능동적 친절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속자로 보내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풍성’이란 말과 '넘치게 하사'란 말을 썼는데, 이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더욱 커보이게 하면서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깊이 감탄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컨대 사도 바울이 여기서 높이 찬양하고 있는 은혜의 풍성함은 사람들이 깊이 이해하고 거기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됨을 바랐던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 세상이 자기 힘으로 구속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하찮은 만족이나 그와 비슷한 모든 그릇된 사상이 일어나눈사례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가 무엇인가 외부적인 도움이 없으면 말라서 그 힘울 상실해 버리는 것처럼 여기는 사상이다.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 이제 바울은 형상인(形象因)의 복음전파에 관하여 서술하게 되었는데, 복음전파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애가 우리에게까지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움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되고,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양자의 은혜를 누리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에 "지혜와 총명"이라는 장엄한 칭호를 붙였는데, 이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이것과 상반된 모든 교훈을 멸시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전파한 기본 교리보다 더 숭고한 것을 가르치는 체하면서 교묘하게 에베소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마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능한 한 복음을 헐뜯으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대조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위안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복음의 권위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지혜'라는 것은 충분한 또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의 새로운 말에 놀라는 자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곤혹에 대하여 바로 기회를 잃지 않고 ‘그 뜻의 비밀'을 말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제라도 밝히 나타내려고 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앞서 선택의 이유를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함과 같이 여기서는 소명을 그 뜻의 비밀과 갈은 이유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알리어지고 또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된 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거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에베소 사람에게 인식시켜 주기 위해서이다.
"9. 그 뜻의……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 만사가 지혜롭게, 그리고 순서를 따라 적절하게 배열되었다. 실제 하나님만이 그 예정을 알고 계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그 예정을 온밀히 간직해 두시려고 하시는 동안 그 뜻이 사람에게는 숨기어 있다는 것, 나아가서 그 예정이 인간에게 알려져야 할 때를 결정하는 것온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있다는 것, 그 이상으로 도리에 합당한 일들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온 이것을 하나 하나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인방인들을 양자로 삼으시고자 하는 결정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감추어져 왔다. 다만 그것이 계시될 때까지 하나님께 유보(留保)되었던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어떤 사람이 불평하여 이르기를 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이방인이었던 자들이 교회에 용납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며 또 전례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만큼도 모른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리고 어째서 다른 때를 택하시지 않고 하필 이때를 택한셨느냐고 질문하는 자가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와 갈이 하냐님이 택하신 시기는 '때가 찬' 즉, 무르익고 적당한 시기라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의 호기심을 풀어주고 있다. 계속되는 사건을 판단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추측울 삼가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된 ‘경륜'이란 말도 같은 방향에 역점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만물의 관리와 실현이 하나님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10. 하늘에 있는~~~~~~~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라탄어역에는 '회복하다' 말로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거기다가 '요약하다' 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나는 '아나케판타이오 사스다이' 의 본래 의미를 그대로 두는 것이 본문의 문맥상 더 적합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모든 것이 흩어진 상태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질서있는 상태로 회복다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실로 그리스도 밖에서는 이 세상에 파멸밖에 남을것이 없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졌으니 어찌 방황하며 흩어지지 않겠는가? 피조물의 올바른 상태는 하나님께 밀착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질서 있는 정상 상태로 회복되도록 통일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되 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이요, 그리고 우리 서로가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없이는 온 세상은 무질서한 혼돈이요, 무서운 혼란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참된 통일로 인도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하늘에 있는 존재들을 여기에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을까? 천사들온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까지 분산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천사들이 흩어지지 않고 연합되었다는 것은 천사가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과 결합되고 또 이러한 은혜스러운 일치에 의해서 다같이 공통적인 복을 얻기 위하여 인간이 그들과 갈이 일체가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마치 한 건물 중에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든가 혹은 아주 무너졌다고 하면 비록 어단가 아직 완전한 모습으로 남은 곳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보통 건물 전체를 수리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갈다.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천사들은 흩어진 상태에서 연합된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께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접근해 나아가서는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연합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사이에 중보자가 없다면 어떻게 그 관계가 이루어지겠는가? 그들이 피조물인 한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하여 보호를 받지 않으면 변할 수 밖에 없고 또 타락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영원히 행복할 수도 없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천사도 그리스도의 은해에 의하여 견고한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인간은 상실된 상태에 있다. 그렇다고 천사는 그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둘을 천히 자기 몸 안으로 끌어들여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께 결합시켜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전정한 화합이 있도록 하신 것이다.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 ; 이 우화적인 표현은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 이 우화적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뜻대로 인간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이루신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공헌한 것처럼 그 자신을 어떤 모양으로도 찬양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에 의해서 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그 자신 이외의 어떠한 것에도 이끌리지 많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의 결정만이 본질적인 선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사역의 동기를 알지 못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계획을 공격하는 자들의 실수라기보다 오히려 광기는 변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 '바울은 여기서 비로소 구분을 짓기 시작했다. 이제까자 그는 일반적으로 선택된 자 전체에 관하여 언급해 왔지만 이번에는 그 자신과 유대인,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첫 열매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 관하여 말하고, 다음으로 에베소 사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그들이 교회에 있어서 소위 장자격이었던 바울이나 또 다론 신자들과 똑같이 간주한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의 상태가 그들의 상태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우리들도 그 예정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으로 말미암았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자면 처음부타 끝까지 모든 사람이 영원한 선택에 의하여 값 없이 양자의 신분을 얻었기 때문에 구원은 순수한 온혜로 말미암아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2.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그는 다시 한 번 그 목적올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다만 긍휼의 그릇이 될 때만 우리에게 비추어진다. 그리고 이 ‘영광’이라는 말은 특히 하나님의 자비로 비추시는 영광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써만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
"13. 그 안에서 너희도" ; 여기서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을 자기와 또 교회의 대표적인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다갈이 그리스도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전자나 후자나 다같은 믿음을 소유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 안에서’라는 말을 자주 반복하고 있다. 바울은 이어서 그들이 복음 설교에 의하여 그 소망으로 인도되 었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두 가지로 수식하고 있다. 즉 ‘진리의 말씀', 그리고 그것이 곧 에베소 사람의 ‘구원의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수식어에 대해서는 우리의 주의를 신중히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복음에 대한 의심과 경멸로써 물들도록 시도하고 있으므로 이 두 가지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두 가지 방패로서 바울이 우리에게 무장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의심을 품을 만한 경우에 있어서도 복음은 거짓 없는 확실한 전리일 뿐만 아니라, 엄격히 말해서 그밖에 다른 진리가 없기 때문에 복음만이 ‘전리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는 확신에 서야 한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멸시하거나 싫어하는 유혹을 받지 않으려면, 복음의 능력과 효과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말한 것과 갈이 다른데서도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남의 눙력이라고 했다. 바울은 그 사실울 여기서 더욱 밝혀 주며, 에베소 사람들온 구원에 참여한 자가 되었으니 이미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에베소 사람에게 가르치고 있다. 세상이 대체로 그렇듯이 복음을 무시하고 착란(鉛亂)된 인간의 허구를 즐기면서 많은 우회로를 지나 방황하는 데 지쳐 싫증 난 자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은 잠시동안은 배우기는 하지만 결코 진리를 인식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며, 생명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복음을 받아서 복음 안에서 굳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의심할 것 없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 이것은 그가 복음에 돌리는 확실한 증명이다. 복음을 보증함에 있어서 성령에 의한 것보다 더 나은 보증이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바울이 ‘내가 복음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한 것을 인간의 권위에 의하여 여러분에게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진리와 그 확실함을 여러분의 마음에 인치신 하나님 자신의 영을 보증으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함과 같다. 실로 이것은 인을 쳐서 보증하는 데서 취해진 적절한 비유이다. 인을 쳐서 보증함으로 사람들의 의심을 제거한다. 국왕의 서한이나 유언서에도 인을 쳐서 보증함으로써 비로소 전정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옛날 친구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을 때도 인봉하는 것을 주요한 표시로 삼았다. 요컨대 인을 쳐서 보증하는 것은 참것과 거짓 것을 분벌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4장 30절과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서도성령이 이와갈은 구실을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진리를 확신시켜 주기까지는 하나님의 전리가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마음을 강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자기의 구원이나, 그리고 모든 종교에 관해서 가지는.참 된 확신은 육감이나 인간적이며 철학적인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친 보증에 의한 것인데, 성령의 인친 보증만이 신자의 마음에 더욱 확신을 주며 모든 의심율 제거한다. 믿음의 기초를 인간의 지혜 위에 둔다면 위태롭고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믿음을 갖게 하는 수단이라면, 성령은 그 설교를 효과 있게 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성령의 인친 보증을 믿음에 종속시키려는 것처럼 생각된다.
만일 그렇다면 믿음이 성령의 보증보다 앞서는 것이다. 나는 성령은 민음에 대하여 ,두 가지로 사역(使役)한다고 대답한다. 그것은 믿음이 주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과 관련된다. 결국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조명(照明)함과 동시에 마음에 확신을 주는 것 이다. 믿음의 시작온 인식이다. 믿음의 완성은 확고부동(確固不動)한 확신, 그것은 어떠한 의심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각각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 사람은 믿음에 의하여 복음의 전리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친 보증에 의하여 믿음이 확고해진다는 바울의 진술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성령을 ‘약속의 성령’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성령이 맺는 열매 때문이다. 즉 성령은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헛되지 않도록 성취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증거를 주신다.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 바울은 이 술어를 고린도후서에서 두 번, 즉, 1장과 5장에서 각각 사용했다. 이 비유는 계약 원리에서 취해진 것인데, 계약은 보증을 함으로써 후회해도 소용없도록 확정된 증명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우리에게 확정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니, 그것이 취소될까 봐 염려할 것은 없다. 하나님의 약속 그 자체만으로는 약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령의 보증에 의하여 지원을 받지 않는 한 우리가 그 약속 안에 마음 편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야말로 우리의 기업, 즉 영생에 대한 보증이며 구속에 대한 표적인데, 구속은 완전한 구속의 날이 이를 때까지를 의미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한, 소망 가운데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으므로 누구나 이와 같은 보증을 필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을 완전히 받아 손에 쥐게 되면, 보증의 필요성도 사용도 끝나는 것 이 다.
보증의 표는 계약 당사자 쌍방의 약정이 완성 될 때까지 필요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뒷편에서 "구속의 날까지" (엡4 : 30)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날은 사실 심판의 날인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속함을 받았지만 그 구속의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멸망에서 구원 받기를 원하면서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구원 받을 것을 갈망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소망할 뿐 그 약속의 열매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러 나타나실 그때 우리는 실제로 그 열매를 즐기게 된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8장 23절에 구속'이라는 말을 쓸 때 그런 의미로 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눅21 ;28)고 하실 때도 역시 그런 뜻으로 말씀한 것이다. '페리포이에시스 ; 그 얻으신 것' 이라는 말은 천국이나 혹은 불멸울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자체를 의미한다. 이 말씀이 여기에 첨가된 것은 그들의 위안을 위해서 인데, 그들이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까지 희망을 품기가 어렵다든가 또는 자기둘에게 약속된 유업을 아직 받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이와갈은 사실은 전체 교회의 공통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 "‘찬미"라는 말은. 여기서는 앞에서와 갈이 ‘선언'-(proclamation)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때때로 은폐되어 밝히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이 찬양을 받으시며 밝히 알리어지도록 에베소사람에게 그의 자비의 보증을 보여주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에베소 사람들의 소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싫어하며 업신여기는 결과가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여러번 언급하고 있으나, 그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무한한 것에 관해서는 아무리 많이 말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댜. 특히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함에 있어서 그렇다. 실로 신실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비에 관해서 자기가 체감한 사실을 말로써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의 입은 하나님의 양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며, 그들의 귀는 찬양을 듣기 위해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과 모든 천사들이 이 주제에 관하여 그들의 최선의 웅변을 다 모은다고 해도 도저히 그 위대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악인의 입을 막는 데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울 주장하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흐려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보다 더 강력한 논박이 없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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