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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4장

1. 성경 (갈4:1 ~3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1)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2)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3)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4)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5)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7)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8)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9)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0)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2)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3)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4)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5)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7)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8)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19)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20)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1)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2)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3)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4)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5)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6)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7)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8)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29)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0)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3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절 내가 또 밀하노니……" ; 장을 구분한 자가 누구든지 간에, 이 귀절을 앞의 귀절과 잘라서 떼어 놓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와 옛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바울이 설명하여 확실하게 하고 있는 한 가지 부연(証 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린 아이와 후견인(後見人)이라는 제삼의 비유를 들고 있다. 어린 아이는 비록 그가 자유인이라도, 심지어 그 아버지의 모든 재산의 주인일지라도 후견인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에 아직 그는 노예나 다름없는 자이다. 그러나 후견인에 대한 이 복종은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만 계속될 뿐이고 그 후에는 그의 자유를 누린다.  이런 점에서 옛 언약 아래 있던 선조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자유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후견인과 갈은 율법이 저들을 멍에 아래 매어 놓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자유를 완전히 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율법에 대한 굴종은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동안만 지속되며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하여 끝나는 것이다. 법률가들은 후견이 끝나는 여러가지 방법을 열거한 것이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모든 방법 중에 다만 이 비유에 맞는 것으로 아버지의 결정에 의해서 끝난다고 하는 방법이다.

 

이제 하나하나 부분적으로 음미해 나가기로 하자.

 

어떤 사람들은 이 비유를 어떤 특정 인물에다가 적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여기서 두 민족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저들이 하는 말 자체는 옳은 줄로 안다. 그러나 그 말이 본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저들은 말하기를 "선택된 자들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소유하기까지는 율법 아래서 노예와 같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저들이 일단 그리스도를 안 후에는, 더 이상 이러한 후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 한다. 나도 이런 말을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개개인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바울이 믿지 않는 때와 믿음으로 부름 받는 때와의 사이에 구별을 둔다고 하는 생각을 부인한다. 바울이 논하고 있는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밖에 없는 데 어떻게 우리의 상태와 이스라엘의 상태가 다르단 말인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는데, 우리와 일반으로 믿음을 소유한 지둘이 어째서 우리와 더불어 똑갈은 자유에 참여하지 못한단 말인가? 저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오늘날 우리는 면제된 멍에를 어째서 저둘온 메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조 당하고 있는가? 여기 논의와 논쟁이 바로 이런 문제에 관하여 관설된 것이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기 전에 율법이 우리 각 개인을 얼마만큼 지배했느냐 하는 그런 문제에 관해 관설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무엇보다도 여기서 확인해 두어야 할.사실은 바울이 옛 언약 아래 있던 이스라엘 교회와 기독교 교회를 비교하면서 우리 사이에 어떤 점이 유사하며 또 서로 다론 점은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이 비교는 가장 유익하며 극히 풍부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로 옛 언약 아래 있던 선조들도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속의 희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저들도 동일한 양자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강포한 무리 (이 들중에는 Servetus도 포합하여 )가 뭉상하는 것처럼, 저들이 하나님께 선택된 것은, 다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모습을 그려 보이기 위한 것에 블과하다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저들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온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영적인 복이 우리에게와 마찬가지로 저들에게도 속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한다.

 

둘째로 저들의 외적상태는 노예였지만 저둘의 양심은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율법을 지킬 의무가 모세와 다니엘, 모든 경건한 왕들과 예언자들, 제사장들과 믿는 사람 전체가 영적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저들은 저들의 어깨에 율법의 멍에를 매고 나가면서도 영적 자유로써 하나님을 경배했다. 더우기 특별히 저들을 값 없이 죄사함받는 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으며, 저들의 양심은 죄와 사망의 압재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저들은 우리와 동일한 교훈을 받았으며, 저들은 또한 우리와 더불어 믿음으로 진정한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저들은 우리와 함께 유일한 중보자를 신뢰하고 있으며, 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찰하면, 우리와 옛 선조들 사이의 차이는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연성에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이 모든 언약의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둥의하는 바이다. 우리와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인정되는 의식(儀式)이나 관리(管理)는 부속물과 같은 것이다. 더우기 그 당시는 교회의 유아기이며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이래, 교회는 성년에 이르기까지 성장했다는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의 말들은 명백하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 가지 곤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의 논의가 일관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그는 우리가 매일 성장하여 장년이 되도록 권면하고 있으며, 그가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는 저들이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젖으로 저들을 먹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조금 후에 갈라디아인들을 갓난아이에다가 비하고 있다(갈 4 : 19). 바울이 거기서는 특정 인물들과 저들 각 사람의 신앙에 관해 논하고 있지만, 여기서는개인을 고려에 넣지 않고 두가지 단체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이 대답은 지금의 문제보다도 훨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이 얼마나 비범했는가, 그리고 거룩한 예언자들에게는 얼마나 위대한 지혜가 있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 때, 우리가 어떻게 감히 저들보다 우월하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저들은 신앙의 영웅들이며, 거기에 비하여 우리는 어린아이들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은 말할 것 없고, 갈라디아인 전체 중에서 훌륭한 자를 특선한다고 해도 저분들 중 어느 한 분과도 비길 자가 있겠는가 !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여기서 바울은 특정인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두 민족의 전반적인 상태에 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곧 은사를 받고 있었는데, 물론 그것은 몇 사람의 소수였고 민족 전체는 아니었다. 더우기 가령 수가 많을지라도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저들의 내적인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사실이 아니고, 하나님이 저들을 다스리기 위해 취해진 수속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 교육을 위한 조직, 곧 훈련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그와 같온 쇠사슬을 끊어 버리신 후 그의 교회를 이전처럼 그런 엄격한 감시 하에 두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다스리시고 계신다.

 

그것은 저들이 받온 계시에 계속하여 검온 구름 갈은 것이 가리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갈이 말씀한 것은 바로 이런 것에서 온 것이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온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3~J24). 어떻게 우리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 이상으로 사랑 받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저들을 통치하기 위해 취해진 질서에 달렸기 때문이다. 이 귀절의 말씀은 교황제도의 유일한 영광인 저 화려한 의식을 모두 분쇄 할 수 있는 강력한 화포(火砲)이다.  저들이 교황의 왕국을 찬양하며 적어도 그것을 존경하도록 하기 위해 오늘날 순전한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는 데, 화려하고 장대한 의식, 관례, 제복(察服), 의젓한 몸짓, 그리고 여러가지 종류의 장치들은 순전히 무지한 사람을 놀라계 하려는 목적에서 고안된 것 밖에 달리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 귀절을 통해서 볼 때, 그것들이 교회를 변형(變形)시켜온 지분(脂粉)이요, 변장(變裝)이었다는 사실을 밝히 알 수 있다. 나는 지금 그러한 하찮은 것을 소중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숭배하는 길이라고 믿는 가장 가증스러운 악덕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것 뿐만 아니다. 심지어 저들온 그런 것들이 구원 얻는 공덕처럼 생각하며, 더우기 그것들을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준수하는 이상으로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다만 오늘날 노동자둘이 허다한 싫증을 나타내는 것을 빙자하여 마치 저들이 대용품(代用品)을 위장하기 위해 고운 물감을 칠하듯 하는 저들의 핑계에 대하여 언급할 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뜻은 저들이 저희 마음 내키는 대로 주장하기를 현대는 기왕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볼 수 없었던 무지(無知)가 훨씬 더 심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보조물(補助物)이 필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옛날 이스라엘 사람이 하던 것과 같은 교육이라고는 결코 입증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저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이의를 제시하는 바이다. 만일 저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유용(有用)한 방법이라고 항변한다면, 나는 저들이 하나님 자신보다도 무엇이 유용한가에 대하여 더 잘 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다만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굳게 믿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지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보조물이 요구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제 마음대로 당치도 않는 이론을 내세워서는 안되며, 다만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것이라야 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확실히 그의 백성의 약함을 돕기 위하여 꼭 알맞는 것은 하나도 빼놓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항변해 오리라고 예상되는 어떤 이의라도 물리치가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것의 근거를 하나님의 경문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 작정하신 것은 그것과는 다르다' 는 이 방패만으로써 족하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도움 이상의 좋은 것을 인간이 고안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도움도 벌써 무용하기 때문에 폐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이전에 유대인에게 부과된 멍에가 이제 우리에게서는 제지되었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의식 지키는 일을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하다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집행되기를 바라시는 통치권의 구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물론 오늘날 외적인 것은 모두 우리의 자유에 맡겨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가 기독교와 유대교가 혼합되기를 원치 않는 한, 이 자유가 계기가 되어 교회가 많은 의식의 짐을 부담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차후 언급해야 할 만한 적당한 곳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3. 이 세상 초등학문 아레… " ;. 여기 초등학문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외적이며 유형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은유적(隱哈的)으로는 보다 높은 것에 이르기 위한 기본 혹은 초보를 의미하는데 나는 오히려 은유적인 의미를 취한다. 그런데 이 말은 정신적인 의의(意義)를 지니고 있는데 어째서 바울이 ‘이 세상’ 이라고 말했을까? 그것은 우리가 노출된 전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지상적인 비유에 감싸여 있는 것과 같은 진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은 가령 그 속에 천적신비 (天的社秘)가 숨어 있다고 해도 이것을 이 세상의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4. 때가 차매" ;  바울은 앞에서 든 비유를 아버지의 정한 때라는 자기의 논의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정해진 때가 참으로 적절하고 합당한 때였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시기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관리된 최선의 활동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언제 나타나시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것을 판단하며 결정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의도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어째서 좀더 일찍 나타나지 않으셨는가 하고 감히 비판하려고 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나 이상의 논의에 의하여 그런 자가 없도록 모든 의혹심이 억제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로마서의 결론 부분을 보도록 하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바울은 여기서 불과 몇 단어 안에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보냄을 받은 이들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음에 틀림없다. 그로 인해 그의 영원한 신성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바로 하늘로부터 보냄 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바울은 이 분이 여자에게서 나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가 두 가지 성품을 가지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음 받은' 대신에 '태어난'으로 된 이본(異本)도 있지만, ‘지음 받은'이란 쪽이 훨씬 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나의 의견에도 그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남녀의 성교에 의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고, 그의 어머니의 씨(자손)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다른 인간과 명백히 구별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표현은 조잡하여 말하기가 쑥스러운 것이다. 여자란 말은 여기서는 여성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  문자적 으로 직역하면, ‘율법아래 지음 받은' 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서 표현하고자 한다. 결국 이치적으로 말하면, 모든 존속관계에서 완전히 해방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율법에 존속되었다는 말이다. 왜 ? 우리에게 자유를 얻게 하려고 그가 우리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자유로운 신분의 사람이 어떤 포로를 속량하려면 자기를 보증인으로 세우고 실제로 쇠사슬로 자기를 결박함으로써 타인을 결박에서 풀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해방울 주시려고 친히 율법 준수의 책임을 지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율법의 멍에에 순복한 것은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의 교훈을 더 이상 순종하지 않고 우리 마음에 좋게 여기는 대로 살아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하고 거룩한 생활을 이룩하는 영원한 규칙이기 때문이다. 다만 바울은 율법의 부속물과 함께 율법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이 과거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에 율법의 예속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휘장은 찢어지고 자유는 밝히 드러났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 논하고 있다.

 

"5.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옛 언약 아래 있던 선조들도 양자 의식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었다. 아들의 명분이라는 것은 로마서 8장 23절에 말씀된 대로 구속을 의미하는 것인데, 아들의 명분, 혹은 석방의 현실로서 말하자면 현재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 날에 구속의 열매를 받는 것처럼, 양자의 열매를 현재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룩한 선조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그것을 향유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지나치게 많은 의식의 짐을 지우는 사람들은 교회가 마땅히 받아야 할 아들로서의 권리를 교회로부터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 ;바울은 앞에서 서술한 아들의 명분이 바로 갈라디아인의 것임을 다음의 논의에 의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양자되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양자됨의 증거보다도 선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원인의 표시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감동받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을 바울이 말하고 있 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확실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자주 가르찬 대로 성령이 우리의 양자됨의 담보와 보증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또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부성적 애정(父性的愛情)을 확실히 믿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갈은 말로 반대할지도 모른다. '악한 사람들도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참칭(僧稱)할 만큼 지각없이 행동할 때도 있지 않는가? 그뿐인가!  저들은 종종 하나님이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의 참 아들들보다도 더 대담하게 거짓으로 자랑하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쓸데없이 자랑하는 것이나 혹은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주장할 수도 있는 그런 일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 중생한 경건한 신앙인의 양심의 증거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따라서 이 논의는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무게있게 거론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멸망할 자들에게는 이 확실함을 맛본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뭇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 17)고 선언한 바대로이다. 바울의 말에도 바로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  결국 바울이 교훈하고자 했던 것은 저들 자신이 어리석게 육신의 판단으로 감히 시험삼아 생각한 것을 발표한 그 일에 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저들의 마음에 선언한 바에 관해서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이라고 한 것은 바울이 지금까지 다른 경우에서 사용한 칭호에 비하면 한층 더 이 본문의 상황에 적합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와 갈은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널리 모든 기독교인 일반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이 없다면, 사실 신앙도 촌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파의 기독교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밝혀진다. 교황파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말하면 이것을 외람되다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영도 없으며, 어떤 확신도 없는 신앙을 공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견지하고 있는 이 유일한 교리야말로, 불신의 아비인 악마가 교황파 무리의 전 학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인간의 양삼은 끊임없이 의심하는 가운데 불안정 하다고 하며 또한 저들은 그것은 다만 본능적인 감정이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데 블과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가 아니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한 바울의 교의 (敎義)를 마음에 새겨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아바 아버지 " ;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모든 나라 말에 있어서 공통이라는 것을 이 말들이 나타내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이 히브리인 사이에서나 헬라인 사이에서나 마찬가지로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사 45 : 23)고 예언된 대로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도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되기 때문에 양자가 되는 것은 율법의 공덕에 의해서가 아니고 믿음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라는 것이 확실하다. ·

 

"부르게 하셨느니라." ;  그는 이 말을 아주 강한 확신을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의심할 때는자신있게 말할수가 없고 입 안에서 우물거리게 되며, 말더듬이처럼 더듬거리며 되지도 않는 말을 애써 겨우 입 밖에 내게 된다. 그와 반대로 ‘부른다'(crying)는 것은 단호한 태도와 확고한 신념의 표시인 것이다.  로마서 8장 15절에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무서위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충분한 확신을 품기 위해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즉 기독교 교회에서는 벌써 노예의 신분은 없어지고 다만 자유로운 자녀의 상태가 있을 뿐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옛 선조들이 어떤 의미에서 율법 아래 노예였 는가 하면, 그것은 저들의 자유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율법의 그늘과 멍에 아래 가리워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다시 한번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상이점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옛 선조들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이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상속인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또 상속인이라는 것은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재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그의 은혜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더 장황하게 언급하고 있다. 나도 여기에 대해서 이미 거기서 서술한 바 있기 때문에(誌 2) 본서에서 생략한 문제도 거기서 찾아볼 수 있다.

 

"8.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 여기서 그는 가르치기보다는 오히려 책망하고 있다. 그는 이미 자기의 주장을 충분히 증명하였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고 그리고 그의 책망을 저들이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목적은 과거와 비교하면서 저들의 현재의 변절을 역설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전에 너희가 신 아닌 것들을 신들처럼 섬겼다는 것은 가히 놀랄 일이 아니라고 하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곳은 어디든지 무서운 소경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너희가 그때는 암혹 속을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빛 가운데 있으면서 그처럼 꼴사납게 옆길로 빗나가고 있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갈라디아인이 복음을 타락시키고 있는 것온 저들이 전에 우상숭배를 하고 있던 때보다도 변명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유일신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으로 비침을 받기 전에는 가령 어떠한 도료(塗料)로써 자기의 거짓 종교를 변장하여 감추려고 해도 언제나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통(正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이전에, 이무래도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인식(認識)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여기서 본성을 본질, 혹온 실질이란 의미로 쓰고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것은 몽상이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에는 모든 우상이 신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실질에 있어서는 그것둘은 아무 것도 아니다.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 ; 한번 하나님을 안 후에 하나님을 등진다는 것이 얼마나 배은망덕인가 하는 것은 필설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레미야를 통해 인식하신 말씀(렘 2 : 13)대로 빛과 생명, 그리고 모든 은총의 근원을 제 마음대로 저버린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자기들의 과실에 대한 책 임을 더욱 무겁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고 고쳐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그 은혜를 저버리는 죄책이야말로 더욱 무겁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인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는 것을 상기시 키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기들의 노력에 의하여 얻은 것도 아니고 저들의 정신적 명민(明敏)이나 근면에 의하여 얻은 것도 아니고 다만 저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실을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이 그의 자비와 궁휼로써 저들을 이끌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서술하고 있다.갈라디아인에게 관하여 언급된 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 말로 생각할 수 있다. 왜 냐하면 이사야 65장 1절에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올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라는 말씀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명의 시작이 하나님 의 무상(無償)의 선택이며, 우리는 그 선택에 의하여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영생 얻기로 예정된 것이다. 우리의 소명도, 우리의 믿음도, 우리 구원의 성취도 다 여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침한 초등 학문으로 들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  저들이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의식(儀式)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을 사용 할 때 정확히 돌이간다는 말로 쓰지 않고, 단지 그가 말하려는 것은 마치 저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진리를 받지 않는 자처럼, 나쁜 미신적 관습으로 다시 빠져 들어가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바울이 의식을 천한 초등 학문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의식을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으로 또는 그리스도와 반대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의식도 과거 선조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건전한 행사였으며 또 경건생활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효한 은혜의 기관(器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의식의 힘은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와 하나님의 제정(制定)과 명령 안에서만이 그 효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사도들은 마치 그리스도만으로는 충족하지 않는 것처럼 약속은 무시해 버리고 의식들을 그리스도와 대치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것을 무가치하게 취급했다고 해서 별로 놀랄 것은 없다. 여기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언급하여 왔다. 종 노릇 하느냐는 말로써 바울은 저둘의 결여된 상태를 꾸짖고 있다.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  바울은 한 가지 예로써 날들을 지킨다는 초보적인 것을 예증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온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지키고 있는 계절에 대하여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연의 질서는 고정적이며 영원한 것이다. 태양이나 달의 운행이 없다면 어떻게 연월(年月)의 계산이 나오겠는가? 하나님의 정하심이 없다면 어떻게 여름과 겨울을, 봄과 가을을 구별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계절에 대한 작정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8 : 22). 이와갈이 관습적으로 지키는 절기는 농경(農耕)에나 공적인 사무에만 유익할 뿐 아니라 심지어 교회를 다스리는 데에도 그 영향이 미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대체 어떤 관습에 대하여 나무라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팔수적인 종교행사인 것처럼 양심을 억압하며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 4장 5절에서 말 한 대로 이날과 저날을 구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어느 일정한 날들에만 특별히 성성(聖性)을 부여하며, 이날과 저날을 종교적인 근거에 의하여 구별하며, 그리고 그러한 거룩한 날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의 일부로 간주된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행사이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은 안식일이나 월삭이나 다른 축제들은 법적 행사이기 때문에 어쨌든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가령 날들을 구별한다 해도 그것으로써 양심을 억압하는 강제적인 올가미를 치거나 마치 어느 날이 다른 날보다 거륙한 것처럼 날과 날 사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일들로 말미암아 종교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조작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다만 질서와 전체적인 조화에 주의를 기울일 따름이다. 우리 가운데 지켜야 할 행사는 자유이며 모든 미신적인 행위를 배제한다.

 

"11. 내가 너희틀 위하여 수고합 것이 헛뢸까 두려워하노라." ; 표현이 엄격하여 틀림없이 갈라디아인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바울의 수고를 헛되게 했다면 저들에게 무슨 여망이 있었겠는가? 날을 지키는 것은 복음의 거의 전부를 뒤엎온 것이라고 할 만큼 날을 지키는 문제로 바울의 마음이 심히 상했다는 데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상히 여긴다. 그러나 전체를 올바로 주의 깊게 고찰해 보면 그것도 당연했다는 것이 이해된다. 왜냐하면 거짓 사도들이 교회의 목에다가 유대적인 멍에를 메우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사악한 미신으로 채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을 강제로 유대교에 예속시키려고 한 그 자체만 해도 적지않은 악행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시하고 그리스도의 온혜 대신에 공덕의 행위인 것처럼 여러가지 성일(聖日)들을 설정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처럼 몽상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위험한 해악인 것이다. 이러한 여견(鹿見)이 일단 용납되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는 붕괴되며, 그리스도의 은혜는 헛되게 되며 양심의 자유는 억압되고 말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상히 여기겠는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복음이 무슨 유익이 되며, 복음의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교황파에서는 이러한 불경건한 교리가 지배적이니 저들에게 어떠한 그리스도가 있겠으며 어떠한 복음이 있겠는가? 양심을 속박하는 한 저들은 모세 이상으로 엄격히 날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저들은 거짓 사도들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일(聖日)들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부분으로 생각하며, 더우기 그것을 공덕처럼 여기는 나쁜 생각까지 하고 있다. 어떤 점으로 보아서는 거짓 사도들보다 오히려 처들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쁘다. 왜냐하면 거짓 사도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정해진 날들을 지키도록 하지만, 교황파의 무리는 자기들은자신이 아무런 이유없이 단지 자기들의 환상에 의하여 정해진 날들을 신성시(神聖 視)하여 지키도록 명령하기 때문이다

 

."12.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틀 구하노라 " ; 바울은 이제 친철히 말하며, 지금까지의 엄격함을 부드럽게 하고 있다.  저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바울이 거기에 대하여 상당히 거칠게 노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좌우간 득실(得失)을 생각하여, 저들의 환심을 사려고 문제를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오를 범한 사람에게 어떠한 응분의 벌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는 것이 용의주도한 목사나 교사의 의무이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명한 대로(딤후 4 : 2) 적당한 때에 견책하되 온유와 인내로써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생각과 방법으로 일단 꾸짖고 침묵시킨 다음에 이번에는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갈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말하면서 저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가 결코 모욕하기 위해 꾸짖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와 갈이 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마음가짐에 대한 문제이다. 바울이 저들에게 적응하려고 노력한 것처럼 저들측에서도 똑같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너희와 갈이 되었은 즉, 다시 말하면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다정하게 대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너희도 마땅히 겸손하며 온화해야 할 것이며 나에게 대하여 순전하고 유 순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목사들의 의무를 충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목사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자기가 관계하는 사람들이 고분 고분히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들과 갈이 낮아져서 저들의 마음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을 받으려 면, 사랑받을 만한 자가 되라’는 말은 언제나 진리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바울은 자기가 앞에서 말한 비난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불쾌하계 만드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의혹을 제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가해진 모욕이나 혹 개인적인 불만을 복수하기 위해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그를 등지게 되고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나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보다 앞질러서 '특히 마음 번거롭게 여기고 있는 일에 관해서 너희에게 불평하려고 한 것은 전혀 아니다. 결국 내가 격분하고 있는 것은 나의 입장을 세우기 위함도 아니며 너희에게 대한 적개심에서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되어도 그것은 언제나 그런 것이니 미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분노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라고 미리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바울은 갈리디아 교인들이 자기를 얼마나 친철하게, 그리고 정중히 영접해 주었는가에 대하여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온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바울이 저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하여 바울이 말한 것은 모두 부드럽게 받아들여 바울을 좋은 분으로 이해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 째로 저들이 시작을 잘 한 것처럼 계속하여 잘참고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첫째 그의 호의에 관한 증언이며,

둘째는 저들이 처음에 행한 것처럼 행동하도록 권면하는 말이다.

 

바울은 다른 데서도 그러했듯이 여기서 그는 육체의 약점이라는 말로써 자신을 비열하고 멸시할 만한 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육체'라는 말은그의 ‘외관'(外觀)을 의미하지만, ‘약함'이라는 말은 ‘낮은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것도 없고 풍채도없고 세상의 명예나 지위도 없고 사람들 보기에 비열하고 아무 자격도 없는 모습, 바로 그것이 바울이 저들에게 갔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이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바울을 영접해 들이는 데 있어서 그런 것들이 방해되지는 않았다. 바로 그 사실이 현재 바울이 논하고 있는 이 문제에 큰도움을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 바울에게 있어서 귀중히 여길만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오직 성령의 능력 뿐이었다. 그런데 저들이 무슨 구실로 그 능력을 멸시하기 시작하는가? 사실상 그후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아무런 새로운 사실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저들이 이전만큼 바울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온 아무래도 저들이 절조(節操)없이 행동했다는 협의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저들이 생각하도록 맡겨버리고 다만 간접으로 그것을 생각할 기회를 주고 있을 분이다.

 

"14. 너희틀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  다시 말해서 ‘비록 너희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나같은 존재를 멸시해야 할 만큼 미천한 인간으로 볼 것이지만, 오히려 너희가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시험 ' (temptation), 혹은 ‘시련 (trial)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애매하여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고 또 바울 자신이 어떤 야심가가 자기의 낮아지고 작아짐을 부끄럽계 여기고 늘 하는 행동처럼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어떤 사람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또 그 사람의 내막의 빈곤함을 알이차리기 전에 어울리지 않게 그 사람을 추앙하여 호평하다가도 한 이틀 지나면 벌써 조롱하면서 그를 배척해버린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이것과 전혀 달랐다. 그는 갈라디아인을 기만하기 위하여 자기를 꾸미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고 다만 있는 모습 그대로 처신했다.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 실제로 참된 하나님의 사역자는 모두 이처럼 존경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처럼, 경건한 교사들도 영원한 구원의 교리와 가장 뛰어난 모든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러한 보배를 저들의 손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저들을 천사들에게 비간 것은 당연하다. 더우기 하나님은 저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다.  말라기는 그 사실을 2장 7절에서 논하고 있다. 오히려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자기를 섬기는 자들을 마치 예수님처럼 영접하라고 명하셨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 리는 자는 곧 나를 처버리는 것이요"(눅 10:16)라고 하셨다.

 

이것도 결코. 의외(意外)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그리스도의 대사(大使) 역할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저들은 예수님 자신을 대표하여 그의 대리자와 갈은 자들이지 때문이다(고후 5 : 20). 이상과 갈이 말하는 것, 그리고 칭송하는 것은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존엄성을 갖게 하는 것이며 복음의 임무를 호평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역자를 존경 하지 않으면 안 되 는 것이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면, 교역자를 멸시하는 자는 틀림없이 악마의 교사(敎~)를 받고 있 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있는 한 교역자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것이다. 그런데 교황파는 이 말씀을 빙자하여 자만하고 있지 만 그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적(敵)이면서도 버젓하게 그리스도의 종들로 행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부조리 한 일인가!  천사와 같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천사가 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처럼 순종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의 순수한 말씀을 우리에게 충실히 전해야 할 것이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  바울은 저들이 성스러운 감정으로 자기들의 축복의 수단을 받아들이고 있을 그때가 정말 행복했었다. 그러나 저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바 모든 것을 응당 바울의 사역의 결과로 돌려야 하는데 저들 자신이 바울에게서 그것을 빼앗기도록 허용하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저들은 비참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다음과 갈온 충고로써 저들에게 자극을 주려고 한 것이다. '뭐냐!  모든 것을 상실당해도 좋단 말인가? 너희가 한번 나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을 무익하게 만들어도 좋다는 말이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 세워진 것을 헛되게 할 것인가? 지금의 너희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너희 순종의 영예를 사라지게 해도 괜찮단 말인가?· 요컨대 저들은 전에 품고 있던 순수한 교훈을 멸시함으로써 저들이 모처럽 획득한 은총을 내어 던지고 스스로 파멸의 원인을 끌어들여 불행히도 그로 인해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  목사나 교역자들을 존경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랑도 해야만 한다. 어째서 이 두 가지가 팔요한가 하면 만일 이 두가지가 없으면 교훈의 맛을 달계 생각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갈리디아인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저들이 존경하고 있는 사실에 관해서는 이미 서술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저들의 사랑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만일 필요했다면 언제든지 자기들의 눈이라도 뽑아 바울에게 주려고 한 것은 생애 전부를 바치겠다고 하는 것보다도 더 강하고 특이한 사랑의 증표이다.

 

"16. 그런측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  바울이 이번에는 자기의 문제로 들아가 저들이 변심(變心)한 것은 바울 자신의 실패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진리가 미움을 낳는다고는 혼히 말하지만, 진리가 미움을 받는 것은 다만 진리를 듣는 데 견뎌내지 못한 자들의 심술 궂음과 원한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이 바울로부터 멀어진 원인이 바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저들의 배은망덕을 꾸짖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충고는 여전히 우정적이어서 갈라디아인들이 저들의 사도인 그를 가볍게 이유없이 배척할 수 없었다. 저들은 이전에 끔찍이 그를 사랑해 왔었고, 또 바울이야말로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알았기 때문이다. 진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친구를 원수시 한다는 것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나쁜 일이 아닌가?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 하는 것은 저들을 꾸짖는다기보다 차라리 저들의 태도를 돌이켜 회게하도록 충고하기 위해서이다. 

 

"17.  저희가 너희틀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  마지막으로 바울은 거짖 사도들에 관하여 말하게 되었으나 저들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름을 언급하여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증오심을 내포하는 방법으로써 저들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기분에 거슬리며, 이름 부르기조차 불쾌한 사람의 일을 논할 경우 그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지 않는 버릇이 있다. 갈라디아인은 건성으로 내는 이 사람들의 열심에 의해 기만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부당한 야망에 대하여 갈리디아인들을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비열한 애정으로 처녀들을 노리고 향락을 위하여 어떻게 하면 처녀들을 능욕할 수 있을까 밖에 생각하지 않는 연인(戀人)의 비유를 들어서 ‘만일 저들이 너희 일에 열심이 있거든 혹은 갈망하거든 너희는'욕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저들이 올바른 열심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비판 받을 만한 나쁜 욕망에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나쁜 욕망은 바울이 고린도 후서 11장 2절에 언급한 거룩한 열심과는 반대이다.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 바울은 다시 한번 고쳐 말하면서 잘못된 계략과 간책을 강조하고 있다. 저들은 너희의 환심을 사려고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다른 수단으로는 너희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너희와 나 사이에 다툼을· 일오켜 너희가 마치 나에게서 외면이라도 당한 것처럼 하며 저들에게 접근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 경건한 화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 자기들이 침투해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것을 저들이 잘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갈이 목사를 미움의 존재인 것처럼 목사에 대한 애정을 끊도록 만들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유인하며 자기를 반대하여 정면으로 저항할 자들을 제거하며 안전한 지위를 독점하려는 것은 사단에게 봉사하는 자들과 공통한 간책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주의깊고 면밀한 조사에 의하여 저들은 언제나 이와 갈은 수법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 이것은 바울이 자신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지 혹은 갈라디아인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요컨대 신실한 사역자들은 경건한 열심으로 불타서 저들이 맡은 모든 교회를 그 남편과의 순결한 교제 속에 있도록 보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것을 바울에 관한 말로 이해한다면, 그 의미는 이렇다.  '나도 너희에 관하여 열심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저들과는 다른 목적과 다른 애정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언재나 똑갈이 행동하고 있다.'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것을 갈라디아인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 몇 가지 해석이 따른다.

 

말하자면 저들은 확실히 너희를 나로부터 이간시켜 너희가 자포자기되었을 때는 저들 쪽으로 들아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나를 사랑한 너희는 내가 지금 떠나 있을 때에도 내게 대한 사랑을 지속하고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올바론 생각은, 라탄어의 '아이무라리'와 갈이 헬라어에도 여러가지 다른 의미를 가진 이 말의 애매함을 바울이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앞에서 열심이라고 번역한 것을 여기서는 ‘추구한다’ 또는 ‘타인의 덕을 모법하여 노력한다'는 의미를 취하고 있다. 바울은 저속한 질투 곧 경쟁을 본 받지 말게하고 갈라디아인으로 하여금 그것과는 다른 경쟁 방법으로 자기가 없는 동안도 변함없이 수업(修業)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19. 나의 자녀들아" ;  바울은 여기서 한층 더 부드러운 호칭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녀라고 부르는 것은 형제라고 부르는 것보다도 훨씬 나은데, 자녀라고 부르는 것은 지소사(指小辭)로서 그것은 경밀히 여기는 뜻 에서가 아니라 저들에게 대한 다정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미 장성했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숙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흔히 격한 감정에서 말할 때 뒤어나오는 말처럼 앞뒤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감정이 격했을 때는 다음에 생각한 것을 충분히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초조한 나머지 절반 목이 메어 소리가 계속 잘 나오지 않게 된다.

 

"다시 너희틀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이것도 역시 그의 사랑의 뜨거움을 표현하는 말인데, 바울은 마치 아이를 낳는 어머니가 수고를 하는 것처럼 , 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겪은 것으로 더우기 또한 그것은 그가 품고 있는 고뇌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아이를 낳은 후에는 기뻐한다.  그러나 분만할 때는 심한 괴로움을 참아야 한다. 갈라디아인은 앞서 한번 잉태되고 분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저들이 타락한 후에는 다시 한번 더 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응당 미워해야 할 자들이지만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라는 말을 하면서 부드럽게 대하고 있다. 이렇게 말 하는 것은 바울이 저들의 첫번 출생을 전혀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저들이 아직도 완전한 형태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마치 제 시기가 차지 않는 태아처럼 다시금 태중에서 육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결국 갈은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요, 또 그리스도도 우리가 그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들 속에 태어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끌어들인 미신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형상이 잘못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순수하게 빛나도록 하여, 원상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사역자들이 때로는 젖을 주며 때로는 단단한 음식을 줌으로써 할 수 있다. 실로 복음의 사역자는 저들이 설교를 계속하는 동안 내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자기를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에게 비유하여 말했는데, 그것은 갈라디아인이 아직 완전히 태어나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 귀절은 교역자의 수고에 관하여 언급한 특이한 귀절이다.

 

물론 영적 자녀를 낳는 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위해 교역자와 설교를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께만 있는 고유한 사역을 그것들에게 맡기며 성령의 능력을 인간의 노력과 합력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러한, ‘교역자도 하나님과 대조될 때는 무(無)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일개 도구에 블과하다’는 한계를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성령이 교역자를 통하여 ·유효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행동에 관한 찬미와 명성은 역시 교역자에게도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 그것은 자기 스스로나 하나님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교역자들이 무엇이 되기를 원한다면 저들은 자신을 형성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려고 힘써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슬픔에 지쳐 거의 죽게된 것처럼 말을 중도에서 끊고 있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 이것은 바로 부친이 자기 자식의 나쁜 품행 때문에 너무나 당황하여 충고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탄식할 때에 하는 매우 강한 항의이다. 바울은 직접 대면하여 저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직접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는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을 얻으며 보다 나은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상대방의 마음이 감동되고 있는지, 유순하여 말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완고하여 저항하는지에 따라서 대화를 조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은 그 이상의 어떤 것율 표현하고자 한 것인데, 다시 말하면 그는 언제든지 그렇게 할 근거와 이유가 있다고 느낄 때는 다양한 형태로 심지어 새로운 언어까지도 구사할 용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목사들이 자기들의 일에만 몰두하거나 자기들의 의견에만 빠져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사람들의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자신들을 적응하도록 하기 위해 유의 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호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올바른 길에서 이탈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 양심을 거스리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경계 해야 한다.

 

"21. 내게 말하라 " ; 바울은 저들을 감동 시키기 위해 약간의 격려를 한 다음에 좋은 예증으로 그가 앞에서 말한 교훈을 더 다짐하고 있다. 증명이라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론적인 충분한 논란이 있은 다음에 첨가한 바울의 단언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율법 아래~~~~" ; 여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포함된 언약에 따라 "너를 다루신다"는 조건에서, 더우기 "너는 너의 편에서 율법을 지킬 의무를 져야 한다"는 조건으로 "율법의 멍에를 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신자가 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미 서술한 대로 율법을 취급하되 율법의 부속물과 함께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 선택하여 얻는 일이라면, 아무나 자유를 버리고 노예를 선택할 만큼 정신 나간 짓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율법아래 있는사람은모두종이라고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케 하려고 하시는데도, 자진하여 그런 상태를 택하는 사람들은 정말 비참한 자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바울은 여기에 대한 관념 다시 말해서 상징적인 예로써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들고 있다. 하나는 종의 여인에게서 종으로 태어나 어미와 같이 종의 신분을 이어갔다. 반대로 다론 한 사람은 자유하는 여인에게서 자유 신분의 아이로 태어나 상속을 받았다. 이어서 바울은 이 이야기 전체를 자기 이론에다가 적용하여 묘하게 이것을 설명하면서 결론지었다.

 

첫째로 바울은 대항자들이 율법의 권위로써 신분을 굳히며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다론 측면에서 율법을 인증하고있다. '율법’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예증한 이야기가 지금 거론하고 있는 문제와는 아무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 비유적인 설명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알레고루메나; 비유' 라고 했다.  그래서 오리겐과 그밖에 많온 사람들이 성경을 순전히 비유적인 방법으로만 해석함으로써 성경의 순수한 본 뜻과는 거리가 멀게 해석했다.  저들은 문자대로의 의미는 너무 무미 건조하다고 생각하면서, 문자의 꺼풀 속에 캐낼 수 없는 보다 깊은 비밀이 숨겨졌는데 그 비밀은 다만 비유적인 방법에 의해서만이 인출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저들은 어렵지 않게 이 방법대로 해석하곤 했다.  인간 세상에서는 언제나 딱딱한 교리보다는 착상이 기발한듯 보이는 사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식을 좋아할 것이다.  한번 이런 식의 성경해석을 허용하계 되면 그 다음엔 자꾸 그런 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어 , 마침내 성경을 비유적으론만 해석하는 데 명수가 된자는 사실온 성경을 기롱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대하여 아무 제약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크게 상찬을 받기까지 한다. 실로 범해서는 안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교묘히 변형시켜 온 것이 벌써 오렌 전부터인데, 그렇게 하기를 싫어하지 않을 때는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것온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며, 성경을 읽어서 얻는 유익을 빼앗으려는 사단의 속임수이다. 한나님은 성경의 순수한 의미가 거짓된 주석으로 말미암아 매장 될 때는 이러한 (신성)모독에 대하여 정당한 심판으로써 복수하셨다.  저들은 말하기를 성경은 비옥하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나는 성경이 모든 지혜의 근원이며, 지국히 풍성하여 다함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의 풍부함이 아무나 제 마음대로 염출해 내도 괜찮은 해석상 다양함을 허용하는 것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의 참 뜻은 단순 소박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단순 소박한 의미를 받아들여 그것을 굳게 지키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문자대로의 의미에서 멀어지게 하는 그런 허구적인 해석같은 것은 다만 의심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위험한 퇴폐물이기 때문에 대담하게 배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한 비유라는 말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바울은 확실히 모세가 그 이야기를 기록할 때 그것이 비유로 전환 되리라는 의도에서 기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어떤 면에 있어서 그 이야기가 현재의 문제에 적용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볼때, 거기에 교회상이 비유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족을 비유로 들어서 교회를 설명하는 이런 논법은 문자적 의미에서나 그 본 뜻과는 배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아브라함의 집이 전정한 교회였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 집에서 일어났던 주요하고 기여해야 할 만한 일들이 우리에게도 표본이 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논 할례나 희생의 제물에나 레위의 제사 직분 전체에서나,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는 성례에도 마찬가지로 우의(萬意)가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 집에도 역시 우의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문자대로의 의미는 살펴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치 바울이 말한 것처럼 두 언약의 모습이  아브라함의 두 아내에서 그리고 두 백성의 모습이 두 아들에서 .그림처럼 묘사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크리소스톰은 이 비유라는 말에 '카타크레시스; 誌3'가 있는 줄로 알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23.계집 종에게서는……" ; 육으로 말하면 둘 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러나 이삭온 은혜의 약속을 따라 났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스마엘의 경우는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으나 이삭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다. 바로 그의 출생 자체가 그것을 암시해 준다. 말하자면 그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출생한 것이 아니고 기적적으로 출생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온 이방인의 소명과 유대인의 버림 받은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타고난 혈통을 자랑하는 데 반해서 이방인은 어떤 인간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 나는 미(美)적인 비유가 상실될까 두려워서 이렇게 번역하고 싶다. 바울은 두 '디아데-카이 ; 언약' 을 두 어머니와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성약(聖約 : testamentum) 이라는 말은 중성이기 때문에 어머니라고 칭하기에는 적당치 않다.  오히려 언약(pactio; 託4)이라는 말이 여성이기 때문에 더욱 적절하다. 그래서 나는 우아한 것보다는 명석한 편을 더 중요시한다. 이제 여기서 정식으로 비유가 소개된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집에 두 어머니가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훈(Doctrine)은 어머니이다. 하나님은 이것에 의하여 우리를 낳으신다. 그러나 교훈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율법적 교훈이고 다론 한 가지는 복음적 교훈이다. 율법의 교훈은 종의 신분의 자녀를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갈과 닮은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후자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유하는 신분의 자녀를 낳는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그래서 실제로 바울은 보다 먼데서 시작하여 , 시내를 첫째 어머니로 하고 예루살렘을 둘째 어머니로 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내용을 더 자세히 음미하여 보면 율법은 시내의 자녀를 낳는 씨가 되었고 복음은 예루살렘의 자녀를 낳는 씨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의 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다만 우리는 율법의 언약은 아이를 종이 되게 하며 복음의 언약은 아이를 자유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때문에 이 두 언약은 서로 닮지 않은 아이들을 낳는 두 어머니와 갈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을 얼론 보면 우습게 여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유로 태어나지 않는 자란 하나도 없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그 비유는 적당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나는 바울이 말한 것을 두 가지 면에서 옳다고 대답한다. 이전의 율법은 그 제자들 (즉 거룩한 예언자들과 기타 모든 믿는 자들)을 종이 되게 했지만 영원한 종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울 얼마동안 몽학선생 아래 두셨기 때문이다. 저둘의 자유는 의식(儀式)과 당시 저들을 지배하고 있던 전체적인 조직의 막 아래 가리워져 겉으로 보기에는 종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위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었고"라고 이것과 유사한 사상을 서술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와갈이 옛적 경건한 선조둘은 하나님 보시기에 내적으로는 자유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종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신분과 서로 관련성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의 교훈은 태어날 때 동시에 완전한 자유를 그 자녀들에게 주며 그리고 저들을 자유 안에서 자유의 신분으로 자라게 한다. 그런데 전후 문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대로, 바울은 그런 종류의 아이들에 관해서 여기에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뒤에 밝혀지겠지만, 시내의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최후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추방되고 상속을 받지 못할 위선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 그가 논하고 있는 종의 아이들이란 대체 어떤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율법을 부당하게 오용하여 율법으로부터는 종이 되는 것외에 달리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경건한 선조들은 구약시대에 살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히떤 저들은 율법에 예속한시대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을 저들의 영적 어머니로 모시는 데 방해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율법에만 집착되어 있으면서도 율법이 저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몽학선생인 것을 알지 못하고 우히려 율법 때문에 방해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곧·종의 신분으로 태어난 이스마엘인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항변하여, 어째서 바울은 이러한 무리들도 하나님의 언약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며, 교회의 자식으로 생각하는가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저들은 타락한 씨에서 난 사생아의 씨이며, 엄격한 의미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 저들은 타락하여 변질된 자들이다. 말하자면 사생아이다.  그리고 저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도 거짓의 표시에 블과하다. 그런데 저들이 바로 그런 것 때문에 교회에 속한 자들처럼 간주되는데 그것은 실제로 저들이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얼마 동안 교회에서 지위를 횡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저들은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여기서 오늘날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교회를 생각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후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 ;  나는 다른 사람의 해석을 논박하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예를 들면 시내산은 두 가지 이름을 가졌다고 하는 제롬(Jerome)의 추측도 경박(輕博)하며, 명칭들에 관한 크리소스톰의 철학적 설명도 유치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유월절이 그리스도라고 말씀 된 것처럼 (고전5 : 7), 하갈이 시내산으로 불리는 것은 표본 또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아가서 그 산의 위치까지도 모욕적으로 아라비아에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아라비아에 있다는 것은 영원한 유업의 상징인 성지(聖地)의 경계 밖이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솔직한 적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본 뜻과는 먼 거리로 벗어난다고 하면 그야말로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  내가 '일치하다’ 또는 ‘부합하다’고 번역한 곳을 옛날 라탄어 번역자는 ‘결합되다’로번역했고, 에라스무스는 ‘인접하다’로 번역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식으로 번역함으로 애매하게 될 것을 피하고자 힌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여기서 장소나 위치의 가까움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지닌 표상의 근사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도가 여기에 사용한 헬라어 '스토이카'는 서로 마주 바라 볼 수 있도록 배열된 사물에 관해서 말할 경우에 즐겨 사용했는데, '쉬스토이키아' 는 예를 들면, 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질서 있게 심어진 가로수에 관해서 말할 경우 등이다. 그와 같이 본문에 시내산이  '쉬스토이케인;에 상응하는 것' 으로 되었는데, 시내산이 현재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아리스토를 이 서정시에서 인용한 어떤 은유에서 수사학은 & '안티스트로포스; 역용논법', 혹은 변증법에 대한 부본이라고 한 것과 같다. 서정시는 보통 두 부분으로 가지런히 배열하여 서로 조화있게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요컨대 부합 혹은 상응한다(fJU(JT:OlXE&IJ) 는 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대등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어째서 그가 현재의 예루살렘을 시내산과 비교하고 있는지 ?  나는 한때 반대 의견을 가졌지만, 지금은 크리소스톰이나 암부로스와 의견을 갈이 한다.  그들은 이것을 지상 예루살렘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실제로 현재의 예루살렘은 노예적인 교훈과 예배로 타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한 이유이다.  예루살렘은 생생한 천상 예루살렘의 이미지와 그 특징을 나타내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루살램은 오히려 시내산과 가깝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두 지역 사이가 거리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아주 닮아서 완전히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저들의 실제 어머니는 사라가 아니고 하갈과 꼭 닮은 쌍동이 자매인 서출(庶出)의 예루살렘이다. 그래서 비록 저들이·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오만하게 자랑하려 해도 처들은 여종에게서 난 종인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질책이다.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 그가 ‘하늘의’라고 말한 것은 하늘에 밀폐된 것도 아니며 또 이 세상 밖에서 구해야 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온 세계에 퍼져 있으며 지상에서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하늘에서’라고 말했는가? 그것은 교회가 그 근원을 하늘의 은총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혈육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에 거할 하늘의예루살렘이야말로 믿는 자들의 모체인 것이다. 이 예루살렘은 썩지 않는 생명의 씨를 지니고 있으며, 이 씨로 말미암아 우리의 형태를 조성하고 그 태 안에 우리를 잉태하여 우리를 낳는다. 그리고 젖과 단단한 음식으로써 계속하여 그 자녀를 양육신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믿는 자들의 어머니로 블리는 이유이다. 그래서 교회의 아들임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그 아버지로 모시고자 하는 소원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소용 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의 사역을 통하지 않고는 자녀를 낳지 않으시며, 또 그가 자라서 어른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양육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믿는 자들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 부여된 아름답고 심히 영광스러운 이름이다. 그런데 교황파의  우리는 지겹도록 이 명칭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매우 어리석고 유치하다. 왜냐하면 저들의 어미는 음녀이며 영원한 죽음에 처할 악마의 자식들을 낳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를 잔인하게 쳐죽이기 위해 처들에게 무릎을 꿇도록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 당시 사단의 회당이 오늘날의 로마 교회에 비하면, 훨씬 더 훌륭한 구실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어떻게 저들에게서 저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명예를 완전히 벗겨 버리고 저들을 하가(Hagar)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는가 하는 사실을 볼 수 있다.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 바울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교회의 적출자(摘出子)는 약속을 따라서 태어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가 인용한 귀절은 이사야 54장 1절이다. 그 귀절에서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이방인의 소명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잉태치 못한 여인에게와 과부에게 수많은 자손이 태어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교회로 하여금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도는 이사야가 예언한 영적 예루살렘을 유대인으로부터 삭탈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예언자가 선언하기를 예루살렘의 자녀들이 모든 열방으로부터 모여들 것인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미리 준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상의 은총에 의해서라고 한 그대로이다.

 

바울은 그 다음에 이어 결론 짓기를 우리가 이삭의 예를 따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밖의 다른 방법으로는 이 영광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결론은 성경을 잘 모르거나 성경에 익숙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근거가 희박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메시아에게 근거를 둔 모든 약속은 값 없이 은혜로 받는다는 진리는 너무도 확실하지만 저들이 그러한 성경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이것을 결정적인 격언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는 대담하게 약속을 율법과 대립시키고 있다.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 ;  바울은 여기서 전적으로 그리 스도만을 신뢰 하는 경건한 신자들을 몹시 비방하고 괴롭히는 거짓 사도들의 오만함을 억제하고 있다. 이와 갈은 오만이 경건한 신앙인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또한 저들은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무리의 '심한 비방 ’이 역시 유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오늘날 율법의 자녀가 저들의 아비 이스마엘이 처음에 행한 것처럼 행동해도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외람되게도 자기가 먼저 났다는 것만 생각하고 장자 상속권을 가전 자처럼 진정한 상속자인 이삭을 박해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스마엘의 후계자들도 그와갈이 교만하여 외적인 의식(儀式)이나 할례, 그리고 율법의 장대함을 방패로 삼고 하나님의 적출자들을 대항하여 괴롭히면서 이스마엘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성령을 따라 난 자" ;  바울은 또 여기서 성령과 육을 대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소명과 인간적인 외모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추종하며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자들에게 복면(覆面)을 주는 한편, 하나님의 소명에만 의존하며 하나님의 은해만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실재성을 주장하고 있다.

 

"핍박한 것같이……" ; 팝박했다고 하지만 핍박에 관한 언급은 아무데도 없다. 다만 모세가 이스마엘에 관하여 그가 동생 이삭을. '메차헤크; 희롱' 했다는 사실 의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창 21 : 9). 어떤 유대인들은 이것을 단순한 조소에 불과했다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당치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단순한 조소였다면, 그 조소를 그처럼 엄하게 벌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심한 질책으로 어린 이삭을 화나게 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핍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과 핍박과는 크계 다르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론다. 하지만 바울이 그것을 크게 본 것을 쓸모없이, 혹은 경솔히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볼 때는 악한 사람들이 조롱하면서 우리의 소명을 아무것도 아닌 양으로 뒤엎어 버리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것처럼 어려운 핍박이 없기 때문이다.  뺨을 치는 것이나 책찍질하는 것이나 못박는 것이나 가시가 찌르는 것, 이런 것들이 아무리 괴로움을 준다고 해도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 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27 : 43)라고 모독하는 것 만큼 예수님을 괴롭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 한 모독 속에는 모든 팝박 속에 든 악독 이상의 악의와 독기가 서려있는 것 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가 취소되는 것보다 차라리 덧없는 이 육신의 생명을 빼앗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결국 이스마엘은 칼을 가지고 그의 동생을 팝박한 일은 없다. 그러나 더욱 심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짓밟아 버리고 오만하게 동생을 대적한 일이다. 확실히 따지고 보면 선택받은 자를 핍박하고 멸시하는 것은 그들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히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또 우리에게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일임을 다음과 같은 사실로써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인 대적자들이 불과 칼로써 우리를 살해하며, 우리를 옥에 던져 넣으며 채찍으로 치며 고문하는 외적 박해 뿐만 아니라, 저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을 모독으로써 뒤흔들어 엎으려 할 때와 우리의 구원을 비웃으며, 무엄하게 복음 전체를 조롱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조롱하는 것처럽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없으며, 영혼의 구원을 맹렬히 공격할 때 만큼 치명적인 핍박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악인들의 칼이 아무리 예리하여도 교황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된 우리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도 저들의 칼의 위협을 당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가정으로라도 저들이 모든 수단을 부려 우리가 생명의 호흡을 할 수 있도록 받은 교훈을 제거하려고 하며, 모독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공격하며 잘 모르는 약한 자들의 신앙을 혼들어 놓고자 할 때, 이러한 정신적인 핍박으로 인해 우리가 동요된다면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이겠는가!  내 자신의 경우를 말한다면, 나는 교황파에 관해서 보다도 에피큐리안의 열광 때문에 훨씬 더 슬퍼한다. 물론 저들은 완력이나 무기를 가지고 공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의 생명 이상으로 존귀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배하는 일을 소멸시키며 그리스도에 관한 기억을 뿌리 뽑으며 하나님의 이름이 야비한 자들 중에서 조롱 받게 하는 이와 같은 악마적인 음모를 볼 때 몹시 괴로와하며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온 나라에 불이 붙어 온동 불바다가 된다 해도 그것만큼 불행하거나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바울이 제시한 우리 조상 이삭의 실례(實例)에서 어떤 위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갈은 설명을 더 첨가한다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말하자면 위선자들이 제아무리 거만을 피워도 그것 가지고 얻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고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의 영적 가족에서 추방당하는 경우가 될 것 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저들이 잠간동안은 득세하여 거만하게 우리를 궁지에 몰아 넣을지는 몰라도 오히려 상속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고,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이스마엘의 폭정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자신들을 위로로써 안심시킬 것이다.   얼핏 보면 저들이 수위(首位)를 차지한 듯이 보이며 저들이 장자인 것처럼 여기고 자랑하면서 우리를 멸시한다. 그러나 최후에는 저들이 여종의 몸에서 난, 다시 말하면 상속 받을 수 없는 하갈의 사람인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 부분의 말씀은 우리가 위선 자들의 교만과 교회 안에서 저들이 차지한 일시적인 거주와 지위 같은 저들의 상태를 부러워 함으로 인해 혼란하지도 않도록 막아주는 아름다운 구절이다. 우리는 저들의 일시적인 지위나 상태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들을 기다리고 있는 최후를 인내로서 지켜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지위를 빼앗는 사생아라든가 신원불명의 인간들이 수없이 많지만, 저들은 종래 믿음에 속하지 않으며 영속적으로 영구히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이스마엘과 그의 후예들이 처음에는 연장자로 여겨 군림하지만 다음에는 신원불명의 사람처럽 추방당한 것과 같다. 사람을 조롱하기 잘하는 어떤 무리가 바울의 단순함을 비웃으면서 그는 하찮은 말다툼에서 난 여자의 앙심을 하나님의 심판에다가 비기고 있다고 말 한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하여 모든 것이 통치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의 비위를 맞추도록 명령 되었 다는 것은 이상하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그 약속을 굳히며 또 세우기 위해 사라를 쓰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요컨대 이스마엘이 추방된 것은 다만 "이스마엘에게서 난 자가 아니고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는 그 언약의 결과요 성취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령 이것이 여자의 분쟁의 복수였다고 해도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뜻을 교회의 상징인 여자의 입을 통하여 나타내신 것이다.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 의 자녀니라." ;  이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하갈의 자녀되기보다는 사라의 자녀되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저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벌써 자유한 자로 태어났음을 깨닫게 하면서 그 상태를 계속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교황파의 무리를 하갈인이라든가 이스마엘인이라고 부르며 우리야말로 적출자(摘出子)라고 자랑한다면 저들은 우리를 보고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처지를 공정하게 비교해 보면, 얼마나 우매한 자인지 바로 우리가 말하는 대로라고 주저없이 속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