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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3장

1. 성경 (갈3:1 ~ 29)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1)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2)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4)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5)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6)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7)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9)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0)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1)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4)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5)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6)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7)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8)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0)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1)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2)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3)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24)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6)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7)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8)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 ;바울은 꽤 신랄한 질책을 교훈에 섞어서, 아니 오히려 질책으로써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끝까지 그렇게 계속하지 않았는가 하고 어떤 사람은 이상히 여길지도 모론다.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자기가 진술해 온 아주 중요한 사실에 자기 스스로 감격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모든 은총과 함께 배척당했다든가 더우기 그의 죽음이 일고의 여지도 없이 일축당했다는 것을 들을 때, 경건한 마음을 가진 자라면 어찌 의분을 터뜨리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아노에토이';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며, 천박하며 오성(悟性)을 상실한 자라고 부론 것이다.  바울은 저들이 몹쓸 신성모독(神聖冒濱)에 싸여 심히 거만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저들은 말하자면 마법의 요술에 기만 당하고 매혹 되었기 때문에 꾸짖고 있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저들의 탈락(脫落)이 어리석고 경솔하다기보다는 광기적(狂氣的)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갈라디아인을 야만인 출신이기 때문에 다루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바울이 저들의 국민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것을 단순히 논의의 주제 및 사건의 상황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이런 위대한 빛 가운데서도 오히려 악마의 요술이 존재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마법에 걸려 올바론 정신을 잃었다고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단지 저들이 복음을 좇지 않았기 때문이 이니라, 저들이 그렇게 확실히, 분명히, 친철히, 다시 말하면 아주 효과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즉시 변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 고 번역한 말을 에라스무스(Erasmus)는 ‘믿지않는'이란 말로 바꾸어 즐겨 사용했는데, 나는 그것을 철처히 반대하지는 않지만 본문의 문맥을 보면 내가 번역한 편이 보다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저들을 비난한 것은 처음부터 저들이 복음을 저버렀기 때문이 아니고 끝까지 복음을 좇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이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저들의 과오를 확실히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더욱 더 좋게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리스도를 반역한 저들의 죄가 더욱 더 중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교훈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단순한 교훈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생하고 분명한 형상으로서 저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저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지식을 얻었다. 어거스탄의 해석은 약간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의 보좌에서 벌써 버림받기로 규정(pro-scribed)되었던 것처럼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프로스크라이브드(pro-scribed)로 읽고 있지만, 이 말을 ‘모든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선언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부적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를 따라서 헬라인 사이에서는 이 동사에서  '프로그람마타'; 기본적인 지식 이라는 명사가 생겼지만 이것은 재산을 팔기 위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광고로써붙여 놓은 공고판과 갈은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림을 그리다’ 라고 하는 편이 덜 애매하다. 그래서 나의 판단에는 이 번역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 선교의 효과가 얼마만큼 힘이 있었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우선 그것을 그리스도의 형상이 실물대로 그려진 그림에다가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다음 비유로써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것은 너희 눈 앞에다’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이 저들의 눈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 것처럼 바울의 설교에 감동 되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사람처럼  ‘갈라디아 사람들이 순수한 복음에서 이탈하고 또 적어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밖은 사기한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신뢰한다면 그것은 주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밖는 것이요 주를 희롱하는 것이다’ 라는 의미로 본다면 그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갈은 의미로 이해한다. '바울이 저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교훈 할 때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림 가운데 생생하게 나타나 처들에게 보여진 것처럼, 심지어 저들 가운데서 못 박히신 것처럼 그런 방법으로 가르쳤다' 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선명하게 묘사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언급한 바와 갈이 성령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어떠한 웅변을 쓴다해도, 수사가의 어떠한 문장력에 의해서도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을 맡은 자로서 거기에 합당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맡은 일을 하려면 단순히 말하는 것만 배울 뿐 아니라 사람의 양심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가 그 속에 흐르도록 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가 그러한 화가를 모셨다면, 교회는 벌써 석상(石像)이나 목상(木像), 즉 죽은 자의 화상이 팔요 없었을 것이며, 교회가 더 이상 어떤 그림들을 구하러 다니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성상(聖像)이나 성화(聖畵)들은 로마교에서 먼저 허용한 것인데,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목사들이 벙어리가 되고 사실 우상이 되었을 때 그렇게 된 것이며, 목사들이 강단에서 몇 마디 말하는 것조차 냉냉 해지고 천박해져 그들의 사역의 효과와 성과가 사라져 버렀을 때 그렇게 된 것이다.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 이제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새로운 논거로써 확실히 하고 있다. 그 첫째로 바울은 갈라디아인의 경험한 것을 거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 저들 가운데 복음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저들이·복음을 들을 때 곧 성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은총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나 온 것이다. 베드로도 무할례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에 관하여 형제들 앞에서 변명할 때 이것과 똑 같은 논법을 썼다(행 11 : 4). 바울과 바나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예루살렘에서 논쟁할 때도 같은 논법을 썼다(행15 : 12). 그러므로 갈라디아인들이 바울의 교훈에 의하여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교훈에 머물지 않는 것은 분명히 배은망덕이다. 바울이 저들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는 것은 의심의 표시라기 보다는 오히려 큰 확신의 표시이다. 왜냐하면 저들도 자기들의 경험을 살펴보면 바울이 말한 바가 진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른 데서는 복음을 ‘믿음의 법' (롬 3 : 27)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값 없는 은혜가 행위의 공덕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성령’이라는 말을 나는 여기서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중생의 은혜로 이해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때 주님이 복음 선교를 장식하신 특벌한 은사라는 의미로 이해하지만, 거기 대해서 나는 이의를 갖지 않는다. 그런데 성령이 그런 형태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울이 의도한 것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이 바울의 교훈에 함께 하여 갈라디아에 있는 주의 교회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믿는 자들이 다 함께 교화되기 위해 성령의 여러가지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인데 바울의 의도대로 저들이 그런 사실 을 밝히 알았다는 것으로써 충분하다고 대답한다.

 

여기에 대하여 그런 은혜들은 양자가 되었다는 확실한 표시라고 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이 은혜는 지금 논하고 있는 논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나는 주님이 바울의 교훈을 그의 성령의 명백한 은사로 말미암아 확증 하셨다고만 해도 족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것은 더욱 더 단순하다. 즉, 저들은 저 사기한들이 저들의 쓸데없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찾아오기 전에 양자가 될 공통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회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서술한 대로이다.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 이 귀절에 관해서도, ‘성령으로’라는 말과 ‘육체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의 의견이 여러가지로 갈라졌지만, 나는 바울이 성령에 관하여 앞에서 서술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가 말하려는 것은, ‘복음의 교훈은 너희에게 성령을 받도록 했기 때문에 너희의 시작은 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은 영에서 육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보다 악한 상태에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육체로라는 말은 의식(儀式)―특히 의식들이 그리스도와 분리 된 때에 있어서 一이나 혹은 죽고 약한 교훈처럼 외부적이고 사라져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인들이 올바로 시작했지만, 그 후 끝까지 계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 ; 이것은 또 다른 논법이다.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이제 저들이 단번에 그것을 잊어야 했는가? 오히려 바울은 저들에게 저들이 믿음을 위해 감행한 놀라운 전투의 수없는 혼적을 그렇게 잊고 싶었느냐고 꾸짖는 형식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바울이 참된 신앙을 저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된 주장을 계속 지키기 위해 견디고 참았다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이 실제로 체험한 것은 저들이 한창 핍박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저들을 도우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귀한 명예를 갈라디아인으로부터 탈취해 버린 거짓 사도를 책하고 이를 싫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논의의 엄중함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여기에 교도적(敎導的)인 말 한 마디를 첨가하며, ‘과연 헛되냐'하고 말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바울은, 저들이 바론 소망을 품고 회개를 간절히 하도록 하기 위해 저들을 격려하고 있다. 무릇 교도의 목적은 사람을 절망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가 아니고 보다 낫게 행동할 용기를 저들에게 주기 위함이다.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중생의 은혜에 관해서가 아니고, 성렬의 다른 여러가지 은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순서로 보아도 이것이 앞에서 논한 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른 논의에 관하여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저들이 받은 성령의 아름다운 은혜는 모두 복음의 열매, 곧 바울이 자기 입으로부터 저들에게 전파한 그 복음의 열매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복음을 버리고 다른 교훈을 따라갈 때 고것은 이와 같은 은사를 저들 스스로가 벗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중히 여기면 중히 여길수록 저들은 또한 확고히 서서 복음을 지키기 위해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온사와 은혜에다 사도는 능력을 덧붙이고 있는데 능력은 곧 기적이다.

 

바울은 저들 자신의 문제와 저들의 경험에 의하여 저들을 설득시킨 다음에, 이번에는 성경을 근거하여 논증하려고 한다. 우선 그는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예를 드는 논증은 반드시 결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경우는 예외로 주제나 인물에 어떤 격이 없기 때문에 논지(論 旨)가 가장 강하다. 왜냐하면 의로 나아가는 길이 많지 않으며, 더우기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의 수호자요, 모범이기 때문에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호칭(呼稱)되고 있으며 사실대로 말하면 의를 얻기 위한 보편적인 법칙이 우리를 위해 그의 몸에 규정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아브라함이" ;  ‘그러나 오히려'라는 접속사구가 보충되어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질문울 한 뒤 곧 주저없이 모든 의문의 일체를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으매' 혹은 ‘마침… ... 할때'라는 말은 가장 가까운 부분인 바로 앞절, 즉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과 그 능력의 사역을 저들이 받았다'라는 말만 관련된 말이다. 그래서 ‘저들이 받은 은혜 중에, 아브라함을 닮은 모습이 빛난다'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으메……이 인용문에 의하여 바울은 로마서 제4장에서와같이 여기서도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를 의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첫째 바울이 여기서 말한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간단히 말해야 하겠고?  둘째로 의란 무엇이며, 세째로 어째서 믿음이 칭의(稱義)의 원인으로 간주되는가 등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진리에 관하여 인간이 가지는 어떤 확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가인이 그에게 형벌을 통고한 하나님을 수백번 믿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가 의를 얻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의 약속을 받아 그것을 확실히 신봉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사람이 하나님께 몸을 맡겨서 거기서 휴식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며 그 말씀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의'라는 말에 관해서는 모세의 표현을 주목해야 하겠다.  모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할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는 의인(義人)’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속에 의가 없기 때문에, 의 대신에 저들이 믿는 믿음을 하나님이 수납하시는 중에 사람이 의를 얻는 것은 전가(轉隊)에 의하여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어떤 습성이나 양질(良質)을 불어넣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째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믿는 데 원인이라고 불릴 만한 놀라운 영예를 신앙에 돌리는가? 첫째로 신앙이란 기구적(器具的)인 원인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적절히 말하면, 우리의 의는 다만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시는 것 외에 이무 것도 없으며, 그리고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시는 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그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심으로써 내가 지금까지 말해 온 저 의를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원인을 신앙에 돌릴 때, 그것은 칭의의 주요 원인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이 참된 의에 이르기 위한 수단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의는 본래 사람 속에 타고난 양질(良質)이 아니므로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에 의해서만 소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정당한 보수(報iii)처럼 믿음의 공덕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이 값 없이 주시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갈은 각 표현, 즉 ‘우리가 하나님의 온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 의의 원인이다'' '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다'' '의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의를 얻는다'는 표현들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믿음과 행위 두 가지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명제에 동의하려는 자들이 얼마나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믿음에 의하여 의로워진 자는 자기 자신에 속한 의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무(無)로 여기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한다. 

 

그 래서 바울이 로마서 4장 2절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었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의의 일부로써 그에게 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적(端的)으로 의로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신앙이 온전히 그의 의가 된 것이다. 더우기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만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는 원인을 전적으로 믿음에 돌릴 때에 모든 행위의 공덕은 거기서 제외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값 없는 자비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 그리고 복음 안에서 입증된 우리의 양자 됨의 증거-이런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믿음은 보편적으로 율법과 행위의 공덕,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는 전적으로 대립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단지 의식(儀式)과 반대된다고 말하는 궤변가들의 생각은 뒤에 논쟁의 결과로써 간단하면서도 쉽게 논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자기 밖의 의,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로 인해서 또 바울을 멸시하여 ‘모세는 의를 성실이라고 하면서 그는 단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선한 사람으로 인정 받은 것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무리의 어리석은 퀘변도 물리칠 수 있다. 사탄은 지금도 이러한 경솔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위험한 중상으로써 성경의 확실함을 뒤엎고 왼전히 매장하려고 하고 있다. 모세가 아이들에게 문법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울은, 의라는 말을 신학적으로 아주 적철하게 이해했다. 우리가 하나님 잎에서 의로 간주되는 것은.인간에 대하여 그의 성실함을 상찬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에 왼전히 순종할 때이다. 왜나하면 의라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과 반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율법의 일점, 그것도 그 중의 가장 작은 것을 범해도 벌써 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측에서는 그러한 의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이것을 값 없이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나 유대인은 여기서 바울이 모세의 말을 자기 의도에 맞추려고 부당하게 남용한다고 바울을 공격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세라는 인물은 그리스도나 혹은 영생에 관련시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땅 위의 약속에 관련시켜 언급하고 있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유대인들은 말한다. 교황과의 무리도 유대인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비록 저들은 감히 바울을 비방하지는 않지만, 바울의 의도를 완전히 파괴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자명한 공리(公理)로 지키고 있는 것을 바울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약속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며, 너의 씨로 모든 국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첫째 약속에 다 종속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부터, 네 씨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들을 때 그는 단지 이 말씀에만 머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양자되는 은혜에까지 귀결시켜 마치 부분이 전체 속에 포함된 것처럼 그 은혜도 이 말씀 속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식으로, 다른 모든 약속도 그를 통하여 주어졌는데, 말하자면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은혜의 증거로써 주신 것이 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로부터 구원에 대한 신뢰심이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다르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자녀들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는 있지만, 저들은 짐승처럼 받아 먹기만 하고 보다 높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모든 은혜가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성별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은혜 속에서 하나님이 저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인정한다. 이렇게 하여 저들은 확실한 토대, 다시 말하면 양자가 된 확신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항상 영생의 소망으로 인도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도, 다만 그가 자손의 번영에 관하여 말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고, 약속된 중보자를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선언한 대로 그 중보자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 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둘리게 되느니라"(고후 I : 20).

 

"7.  그런측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  또는 ‘너희는 안다' 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읽 는 방법은 둘 다 헬라어 원문에 맞는댜 어느 쪽을 취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따른 옛 번역을 제외하고는 의미가 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따른 옛 번역이 훨씬 힘이 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 즉 행위에 대한 신뢰를 일체 단념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만 의지한다고 말한다. 누가 그렇게 해석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울 자신이라고 나는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4장 4절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삶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자기의 의와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의 자비 속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앞에서 전술한 결정으로부터 귀납하여 그러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결론 한다.  왜냐하면 만일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그의 자손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와 같이 믿음에 굳게 서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을이 한 가지 생략하고 있는데,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이들이 아니면 교회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충해도 좋을 것이다 ..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 ·바울이 앞에서 일반적으로 말해 온 것을 이번에는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이방인이 부름 받는 것은 새롭고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저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부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례 받는 일과 율법을 준수할 것이 요청되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계약에 동참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민음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이 부름의 은혜에 이르며,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영접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밝히 말하고 있다. 그가 어떻게 이것을 증명하고 있는가?  그것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확실히 아브라함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모범이요, 심지어 규칙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필경 아브라함과 갈은 복을 받을 것을 의미 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복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똑 갈은 방법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9. 그러므로……믿음이 있는" ;  이 말은 매우 강조적인 말이다. 왜냐하몀 바울이 말하려고 한 것은, 저들이 복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과 갈이 할례를 받았다든가 율법의 행위가 있다든가 해서가 아니고, 또 히브리인이기 때문이라든가 자기의 존엄성에 의해서도 아니라, 다만 아브라함과 갈이 믿음에 의해서만 이 복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개인의 자질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오직 믿음만이 인정된 것이다. '복'이라는 말은 성경에 여러가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생의 유업으로 택함 받은 것을 의미한다. 

 

"10. 무롯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니니(託 1)……" ;갈은 한 샘에서 더운 물과 찬 물을 낼 수 없는 것과 같이 율법에서 복 받고자 하는 것은 모순된 논법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모든 사람을 저주 아래 가두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부터 복 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구원의 신뢰를 두는 자들을 일컬어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법은 언제나 문제의 양상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논점은 분명히 의의 근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주를 면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율법의 선고는 율법의 어느 부분이든지 범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도록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을 만족하게 성취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어떤지 보기로 하자. 그러한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최후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모두 유죄를 선고 받고 있다. 이 논의에는 결론과 소명제(小命題)라고 할 수 있는 둘째 명제가 빠졌다. 왜냐하면 완전한 삼단 논법은 다음과 갈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어느 부분이라도 범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주를 받는다. 이 판결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유죄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저주 받는다. 더우기 만일 우리에게 율법을 성취할 충분한 힘이 있다면, 바울의 논거는 확실한 것이 뭇 될 것이다. 왜냐하떤 소명제에 관해서 곧 예외를 주장하계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의 두 가지에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 은 ‘바울이 불완전하고 부당한 이론을 제시했다'든가 혹은 ‘인간이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볼가능하다'하는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일 것이다. 곧 바로 ‘범법자는 누구나 저주 받는다는 것을 나도 승인한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단 말이냐?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선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기 때문에'라고 항변할 반대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오늘날 교황과의 무리가 진저리 나게 생각하는 교의 (敎義),즉 ‘사람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항의할 여지 없이 명확한 사실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하고서 그는 대담하게 결론 하기를 ‘모든 사람 에게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도록 명해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저주 받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생래적으로 부패하여 율법을 지킬 능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비록 영구적이며 동시에 불가분리의 성질이라고 하지만 율법이 저주하는 것은 우유성(偶有性)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좌우간 우리 본성의 부패에 의하여 율법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복이 방해를 받으며 거절당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저주뿐이다.

 

"11.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  그는 다시 상반(相反)되는 것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면,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도 인용했지만, 하박국의 성구에 의하여 이 명제를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대 명제는 칭의 방법의 차이에 의하여 증명한다. 칭의방법의 차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율법은 율법이 명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자를 의롭다 하며, 반면에 믿음은 행위의 모든 공덕은 벗어던지고 그리스도만 의존하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의 공덕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타인의 은혜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두 가지는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 한 가지는 반드시 다른 것에 의하여 전복 된다. 이것이 논의의 대체적인 요지이다. 이제 각 부분을 하나 하나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 이 성구는 이미 로마서에 해설했기 때문에 여기서 그 주석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줄안다. 선지자는 확실히 육에 대한 신뢰를 참된 신앙과 대조시키고 있다. 선지자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언했는데, 그가 의미한 것은 저들이 잠시동안 지탱해 나가다가 급박한 폭풍이라도 불어닥치면 넘어질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삶을 계속할 것과 심지어 죽음 속에서도 끊임없이 살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롱하는 자들이 선지자는 이 믿음이란 말을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리 비웃고 중상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요, 또 저들이 그럴만한 요지(要旨)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선지자가 말한 것은 믿음이란 단순히 하나님만 의뢰하는 고요한 양심의 확신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성경 귀절을 여기에 적철하게 인용해 쓴 것이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  그러나 율법이 믿음과 모순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답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항상 상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바울이 쓴 말은 현재의 주제, 다시 말하면 특별한 상황에 상응(相應)하는 말을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믿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칭의의 ~ 거에 관해서이다. 사실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믿는다는 것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불과 물을 결합시키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율법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과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 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를 행하는 자……" ; 그 차이는 사람이 율법을 완성할 때 법적 의에 의하여 의로 여김 받는다는 사실에 있다. 바울은 이것을 모세가 한 말을 인용하여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 믿음의 의란 무엇인가?  바울은 그것을 로마서 10장 9절에서 정의하기를  "네가 만일……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란 게으르거나 믿는사람들은 선한 행실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논하고 있는 것은 믿는 사람은 할 수 있는 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가, 어떤가 (그런 것은 의십할 여지가 없지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저들을· 행위에 의하여 의를 얻는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더우기 율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므로 그런 사람들이 의인인데 왜 바울은 그것을 부인하는가 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대하여 답하는 것은 쉽다. 즉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만일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의인이라는 것을 우리도 확실히 승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율법에 의하여 우리와 체결하신 언약은 조건부이기 때문에 요청되는 의를 완전히 성취한 사람이 없는 한, 모든 사람은 생명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미 앞에서 충고한 바대로, 율법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의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성취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이러한 완전함으로부터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

 

"13. 그리스도께서……우리를 속랑하셨으니" ;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저주에 복속시켰다. 이로 인해서 유대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심히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바울은 유일한 구제책을 제공하여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 주며,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주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 말로 인해 그의 의도는 더욱 확고해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 언은 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의는 틀림없이 율법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자유롭게 되었는가 하는 방법에 관한 말을 덧붙였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리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을 위하여 그런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공연히 십자가에 못 박히셨든지 또는 우리가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연히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가 그에게 부과되었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저주 받았다고 하지 않고 저주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저주가 그에게 놓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계 말하기는 어렵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치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광은 오로지 이 십자가를 고백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고 선포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떠한 죽음을 죽으실 것인가에 대하여 모르셨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아들을 그의 아버지가 저주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단 말인가 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두 가지 일, 즉 그리스도의 위격(the person o f Christ)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성에 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은혜로써 충만한 하나님의 홈 없는 어린 양이 되셨으므로 저주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인간의 형체를 취하사 죄인이 죄를 받으셔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이다. 실로 그가 그렇게 하심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벗어나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를 참고 견디어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적(敵)으로 여기고 또 아버지가 그를 미워했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를 아버지와 화해 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항상 그의 뜻을 그에게 위탁하사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로부터 자신에게로 옮기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그가 못 박히셨고 하나님의 준엄함을 성난 재판관으로부터 받은 것처럼 느끼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어리석음이요, 천사도 놀랄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지혜를 능가할 뿐만 아니라, 삼켜 버릴 수 있는 것이다•

 

"14. 이는 ..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 받았다고 앞에서 말한 그의 논의를 자기의 목적에 엄밀하게 적용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온 그리스도에게 근거하고 있으며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기 위하여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다면 이방인이 꼭 같은 은혜를 받는 것을 무엇으로 풀이하겠는가? 그리고 이 복이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고 하면, 우리가 이 복에 참여하려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  나는 성령의 약속이란 말을 히브리인의 관용을 따라 ‘영적 약속' 이라는 의미로 본다. 비록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욜 2 : 28)라는 약속이 신약 성경과 관계 되었자만, 바울이 이 귀절에서는 다른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여기서 말 하는 영은 의식(儀式)뿐만 아니라 육신의 혈통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부적인 것과 대조 되는 것을 말하며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약속의 성질에 의하여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약속이 영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받는 것도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이 표현으로써 바울은 저들을 부끄럽계 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권위가 죽을 사람이 가지는 권위보다 못하다는 것은 너무도 심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저들에게 대하여 사람이 상호간 체결하는 협약이나 계약에 보통 나타내는 정도의 권위로 하나님의 거룩한 계약을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수준에다 두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얼마 만큼의 큰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을 저들의 생각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 이것은 가장 작은 것에서 부터 가장 큰 것으로 나아가면서 논하는 논법이다. 인간이 저들 사이에서 체결하는 계약을 항의 할 여지 없는 확실하고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고 지킨다면, 하물며 하나님이 확증하신 계약이랴 ! 그런데 라틴역으로 "테 스타맨룹" 이라고 읽을 수 있는 말을, 바울은 헬라어로 "더아데-케-"라고 했는데 이것을 헬라어로는 자주 ‘유언'(testament)이란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 종류의 계약(contract)을 의미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 후자의 의미에서는 보통 복수형으로 쓰여지는 편이 많았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는 그것을 계약으로 번역하든지 유언으로 번역하든지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경우는 이것과는 다르다. 사도가 확실히 히브리서에서는 유언에 관하여 언급했다(히 9:16).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것을 단순히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란 의미로 보고 싶다. 왜나하면 사도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직유는 계약이란 의미로 보는 것이 유언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논법대로 인간의 약정으로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엄숙한 계약에로 나아가자. 다시 말하면,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전 계약이 거기에 더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한 것이라고 하면, 이 하나님의 계약에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는가?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  논의를 앞으로 더 계속 나아가기 전에, 바울은 계약의 본질에 관한 어떤 것을 삽입하고 있다. 즉, 계약은 그리스도에게만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 계약의 기초라고 하면, 계약은 응당 무상(無償)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약속이라는 말 속에 의미하고 있는 점이다. 결국 율법이 사람과 그의 행위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약속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이 여기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단수에 의하여 특정한 자손을 지적하면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 시키고 있다. 그런데 가끔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이 귀절을 가지고 제멋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왜곡시키는 그들의 무례함을 보고도 애초부터 그들의 무례함을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평화로운 영토를 통과하듯이 가볍게 지나쳐버리곤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론은 아주 도리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제라; 자손' 란 말은 집합명사로써 다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특정한 개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논의는 부당하게 여겨진다. 앞에서 인용한 귀절, 곧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라는 말씀 속에도 아브라함의 종족 전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의 실수가 증명이나 된 것처럼, 도도하게 우리를 조롱한다. 그런데 내가 더욱 더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우리가 저들의 그런 중상을 물리칠 확실한 방비를 갖추지 못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침묵만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은 아브라함 자신의 아들 가운데서도 다음과 같이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말씀 된 것 처럼 둘 중 하나는 가족으로부터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가족의 일원으로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인대들이 에서의 자손도 축복 받은 자손으로 인정하는가?  당치도 않는 소리이다. 저들의 아비가 비록 그들을 맞아들이지만, 축복 받은 가문으로부터 벌써 삭제되었다고 유대인들은 강경하게 논박할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줄기에서 났으나 이 부름에 참여하지 못하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열 두 족장들은 열 두 우두머리들이었으나 그것은 저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에 의하여 정해졌기 때문이다. 더우기 열 지파가 나간 후, 저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타락하여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되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유다 자손까지도 큰 시련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마침내 참된 축복의 계승자로 남아 있는 것은 그저 한 줌에 불과한 정도의 백성 뿐이다.  이렇게 된 것은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 하여 예언된 대로이다(사10 : 22). 나는 지금까지 유대인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저들이 나에게 열 두 족장에서 나온 십 삼 혈통이 이스마엘 사람, 혹은 에돔 사람보다도 오히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왜 오늘날 저들만이 이 이름을 참칭(借稱)하여 다른 사람들을 사생아처럼 몰아 세우는가에 대하여 대답해 주기를 바란다. 저들이 확실히 그것을 저들의 공덕에 의하여 얻었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과는 정반대로 이것은 무릇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 21 : 12)라고 한 이 전제적(前提的)인 선택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 선택으로부터 시발하여 연속되는 계승이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후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을 다윗이라는 인간에 와서 다시 반복하시고 확실히 나타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단수라는 문제에만 머물러서 이것이 단 한 사람에게 관하여 말씀된 것이라고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손'이라는 말이 육을 따라 난 아브라함의 자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정해진 사람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이것을 부인한다면, 저들은 그 강팍함으로 인해 자기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것 뿐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말들로부터 계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체결되었다고 결론하고 있기 때문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이 말에 대하여 궤변을 늘어놓기를, 이것은 비유를 의미하는데 ‘소돔과 이스라엘을 저주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저주하려 할 때에 소돔과 이스라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행복과 번영을 축복하려 할 때 모범적인 인물을 들고 그와 같이 될 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나도 때로는 그렇다는 것을 승인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하여 복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까지도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애매한 표현이어서 어떤 때는 원인을, 어떤 때는 비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성경 중에서 이러한 표현을 대할 때마다 그때 그때의 문맥에 맞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모두 날 때부터 저주 받은 자요, 은총은 아브라함의 손에 의하여 모든 백성에게 약속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이 은총에 이를 수 있는 가 하면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구세주를 향하여 모여드는 자들 만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구세주의 명령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의 통치 아래 한 몸으로 모일 때에 한 백성이 되기 때문이다. 러므로 논쟁에 열중한 나머지 곁 길로 나가지 않는 한, 진리를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고 원인이라는 것을 쉽게 인정할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바울은 계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에 관해서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합당한 근거를 얻게 되는 결론을 짓고 있다.

 

"17. 내가……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 ;만일 우리가 오리겐이나 제롬, 그리고 모든 교황과 사람들의 의견을 따른다면, 이 논거(論操)는 문제 없이 면박 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렇게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약속은 율법이 생기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온 율법이 약속을 폐지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 그는 의식은 팔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의식(儀式)은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주어진 예전(禮典)이다. 그런데 어째서 바울은 이것을 약속과 분리시키는가 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논하고 그 뜻을 밝히기 위해 고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바울은 의식이라는 문제를 놓고 의식 이상의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거짓 사도들이 칭의(稱義)의 효력의 원인을 의식에 돌리고 있는 것과 저들이 져야 할 양심의 부담이다. 실은 바울이 믿음과 행위 전반을 문제로 삼기 위한 기회로써 의식 문제를 다룬 것이다.

 

만일 의를 얻는 것이나 행위의 공덕이나 양심의 부담이 문제가 아니었다면, 의식과 약속은 충분히 조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약속에 관한 이 폐지라는 말이 전에는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것은 유혹자들이 구원은 인간에게 무상(無償)으로 약속되었으며, 그리고 그것이 믿음에 의하여 얻어진다는 것을 완전히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가 보는 대로 저들은 의식 (儀式)이 구원을 얻는데 팔요한 것처럼 주장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바울의 말을 상기하여 보자,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은 약속보다 뒤에 나타났다. 그러므로 율법은 약속을 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번 성립된 계약은 언제든지 침해당하지 않는 채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다시 한번 되풀이 하고자 한다. 즉, 만일 당신이 약속은 무상이라는 것을 이해 못한다면, 바울의 이 선언은 완전히 헛된 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과 복은 서로 맞서 대적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칭의의 원인에 있어서만 (율법이 행위의 공덕에 의하여) 사람은 의롭다고 하는 것에 반하여 , 약속은 무상(無償)으로 의를 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은 곧 바울이 그것을 일컬어 그리스도에게 근거한 ‘언약'이라고 한 데서 더욱 밝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교황과의 무리는 여기에 반대하여 일어선다. 그리고 저들은 이 논의에 대해서는 회피 하려고만 한다. 저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옛 의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왈가왈부 하지 않기로 하자. 그러나 사람은 도덕적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인간과 함께 체결한 것이지만, 도덕적 율법은 이 언약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바울의 이론은 보잘것 없거나, 그렇지 않으면 단지 의식 문제만 들고 논박한다고 떠들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저들에게 ‘바울은 이 사건을 깊이 고찰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 없이는 행위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것을 말 하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의롭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해도, 율법이 있기 전에 약정(언약)이 없는 한, 사람이 행위에 의하여 구원 얻을 만한 공덕을 이룰 수 없다. 

 

스콜라 신학자들도 여기에 동의할 뿐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왜냐하면 저들도 행함은 행함 자체의 내적 가치가 구원의 공적이 된다고는 가르치지 않으며, 저들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의 용납해 주심과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 하신 이유 때문에 구원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언약이 없으며 용납해 주시는 증거가 없는 한, 이 세상의 모든 행위는 의를 만족 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논의는 왼전히 논리적이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람과 더불어 두 가지 언약을 맺으셨다. 그 첫째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요, 둘째 것은 모세와 맺은 것이다. 첫째 것은 그리스도에게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상(無償)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온 율법은 은혜 없이는 사람에게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 없이도 율법이 사람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면, 약속이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의 설명은 다음에 계속되는 부분에 의하여서도 분명히 밝혀진다.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자기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폐하거나 무효로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핑계 하지 않도록 모든 것에 대비하여 바울은 저들의 모든 속임수를 예상하고, 율법에 의하여 구원 얻는다는 것과 약속에 의하여 구원 얻는다는 것一이 두 가지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단언하고 있다. 바울이 무상(無 償)의 약속과 대립되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상, 누가 감히 이것을 다만 의식(儀式)에 관해서만 해설하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의심 할 여지없이 바울은 어떠한 종류의 행함도 제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4장 14절에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 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고 서술하였다. 이와같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구원이 ‘만일 네가 율법을 완성하면' 이라는 조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곧 구원을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결론지었다.

 

그것은 약속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약속을 율법과 비교하는 경우, 왜 한편 것이 확증 됨으로 인해 다른 한편의 것은 전복 당하는지 그 이유를 주의 깊게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약속이 믿음을 중요시하는 데 대하여 율법은 행함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값 없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요, 보상은 행함에 대하여 지불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곧 이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신 것은 어떤 상대적인 보상 원칙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값 없이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조건부의 약속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신 것이라'는 말은 아주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부언 하였다.

 

[율법이 의를 주는 데 아무런 힘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 곧·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예를 들면 율법은 쓸모 없다든가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과 반대 된다든가 또는 그 외에 그와 비슷한 것들이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새로운 언약에 관하여 말한 것과 같이 어떤 이유에서 우리는 율법에 관하여 말 할 수 없는가 하는 그런 망상까지도 떠오른다. 예레미야가 31장 31절에서 말한 새로운 언약은 이미 교훈한 것의 약한 점을 교정하기 위하여 두 번째로 주신 것이라고 한다. 만일 바울이 갈리디아인들을 만족시키려고 했다면, 아무래도 이러한 이론(異論)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율법의 효용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율법은 약속보다 뒤에 왔기 때문에 그것은 약속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존재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것이 의문시 된 문제였는데, 약속은 율법의 도움 없이는 약속 자체만으로는 무력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바울이 도덕적 율법에 관해서만 말하지 아니하고, 모세의 직무 전체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벌히 모세의 고유한 직무는 생명의 법칙을 규정하며, 하나님을 예배 할 때 지켜야 할 의식을 가르치며 약속과 위협을 저들에게 첨가하고 있다. 오히려 믿음에 속한 것, 곧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긍휼과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약속들이 물론 거기에 포함되었지만, 그것온 모세의 직무상으로 볼 때 우연적인 것이요, 그리고 그것은 율법과 은혜 교리를 비교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결국 문제의 요점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약속이 이미 주어진 뒤에 다시 한번 모세가 “이스라엘과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가 임하리라"는 새로운 계약을 가지고 온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세가 보다 좋은, 보다 완전한 것을 제시하기 위해서인가? ]

 

"19. 그런즉••… .. 범법힘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율법은 여러가지 용도가 있지만,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현재 그가 의도하는 문제와 꼭 맞는 것에만 국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이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유익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이 점은 독자들도 주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독자들 중에는 바울의 말을 오용(誤用)하여 바울이 여기서 거론하지 않았다고 하여 율법의 그 이외의 효용을 인정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다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다른 곳에서 율법의 여러가지 훈계를 교훈에나 권면에 적용하고 있다(딤후 3 : 16).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서술하고 있는 율법의 효용에 대한 정의(定義)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 서술한 것 이외의 것은, 율법 중에 들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범법 함을 인하여'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지어 철학자들도 ‘법률은 행악자를 벌하며 제지하기 위하여 제정 되었다’ 고 말한다. 그리고 옛 속담에도 좋은 법률은 나쁜 품행에서 생긴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들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율법은 범법한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요, 또 이렇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범죄를 시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을 변명하기 좋아한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일깨워주지 않으면 저들의 양심은 마비되어 깊이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뱌울은 로마서 5장 13절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 것이다. 확실히 율법이 와서 잠자고 있는 인간을 일깨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진정한 준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로마서 7장 13절에서 그가 대답하기를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그러 므로 율법은 죄를 노출시키기 위하여 죄 때문에 추가된 것이다. 혹은 로마서 5장 20절에서 그가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귀절이 오리겐울 어리둥절하계 만들었지만, 그것은 이유없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심판의 보좌에 부르시사,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둔화시키는 우둔함을 깨뜨려 버리고 도적이 물건을 숨기 돗 위선의 굴 속에 감추어 두었던 죄를 밝은 빛 앞에 드러나게 해서 양심이 양심의 죄를 알고. 겸허하도록 하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죄악 중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좋아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무엇이 불합리한가? 만일 누가 항변하여 말하기를 율법은 거룩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하가 위한 법칙으로써 그것이 복종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위법(違法) 때문에 주어졌다고 언급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라고 한다면 나는 거기에 대하여 ‘과연 율법은 참된 의를 밝혀 주는 것이지만, 우리의 본성에 있는 부패 때문에 중생의 영이 나타나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기까지는 율법의 교훈은 단지 범과를 증가시킬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성령은 율법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믿음에 의하여 받는 것이다. 우리 독자는 바울의 이 판단이 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제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율법의 용법 한 가지를 명시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 율법이 천사들을 통하여 주어졌다는 것은 율법의 위임을 말하는 것인데, 스데반 역시 이렇게 말했다(행 7 : 38, 53). 어떤 사람 둘은 천사들을 모세와 아론, 그리고 제사장들이라고 해석하지만, 이것은 견실(堅實)하다기보다는 교묘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때도 천사를 통하여 주시기 때문에 그 천사들이 역시 율법이 공포될 때 중거자가 되도록 임명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증보의 손을 빌어" ; 대체로 ‘손'이란 말은 ‘직무'라는 뜻으로 쓰일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율법 주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역자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나는 여기 ‘중보의 손'을 이 직무의 최고 주권 또는 총 감독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중보자는 대사직의 머리인데 대하여 천사들은 그의 동반자로서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는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모세에 관하여 언급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것을 그리스도라고 보는 옛날 주석가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이런 의미로 보는 것이 곧 다음에 나오는 대로 본문의 문맥에도 보다 적합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중보’ 란 말의 의미에 관해서는 옛날 주석가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들은 여기서 중보란 것은 바울이 더모데전서 2장 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화평케 하는자, 혹은 화해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나는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율법을 공포하는 데 사역한 대사(大使)로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유사이래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즉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과 인간은 결코 사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거룩한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말했다(벨후 1 : 21)고 하며, 그리고 바울도 역시 그리스도를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한 자라고 했다(고전 10 : 4). 그리고 확실한 것은 모세에게 나타난 천사는 그리스도 밖의 다른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까지 결코 피조물에게 양도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고유하고 본질적인 이름을 하나님은 하나님께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화해의 중보자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영접을 받으며, 그는 중재(仲裁)의 중보자이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에 의하여 자신을 사람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는 또한 항상 모든 교훈의 중보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울은 무상(無償)의 계약의 기초인 중보자가 역시 율법을 공포할 때에도 지상권(至上權)을 잡았다는 것을 갈라디아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것을 명백히 진술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여기 언급된 자손은 하나님의 은총의 근거가 된다. 그 사실을 율법도 중요시하기 때문에 율법이 그 약속 성취를 약화시키거나 그 성취 과정을 빗나가게 할 수는 없다. 여기에 나온 ‘까지' 란 말은 그 자손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은 보좌역을 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율법은 최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대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곧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실 때까지만 지속되는가? 만일 그렇다떤 이제 율법은 페지됐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계 대답한다. 곧 율법을 옛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지배기간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서 율법의 전부가 폐지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바울도 역시 그렇게 말하지 않고 다만 약속과 그리스도 사이에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율법의 지배 양식은 그 약속의 완 성인 그리스도 안에서 종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뿐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에 충분히 언급하기로 하자.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양성 (兩性)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설명하기를, 마치 바울이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라고 한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대개 양식 (良識)을 갖춘 사람이라면 바울이 계약 당사자 중의 한쪽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당사자 중 한편이 다른 한편과 뭔가 거래할 사항이 없으면 중보자란 것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들은 바울이 어째서 이러한 진술을 여기에 삽입했는지에 관해서는 해결 못한 채 버려두고 있다. 하지만 이 귀절은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요하는 귀 절이다. 아마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중에도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좋지 않은 생각을 한 자가 있을 것을 바울이 예상하고 미리 그 기선을 꺾어 놓기 위해 한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스스로 이르기를 ‘사람이 어떤 계약을 맺어 놓고 거기에 대해 후회할 때는 보통 그것을 취소한다. 마치 그와 갈이 하나님의 계약에 관해서도 그럴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서술한 해석을 따르면, 바울은 앞부분에서 확실히 계약 당사자의 한편은 사람인데 인간은 변하기 쉽고 견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반면에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하시는 일과 일치하시며 따라서 인간의 불성실 때문에 하나님이 항상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인정 받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견고성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문을 더욱 자세히 살펴볼 때, 이것은 차라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한편만의 중보가 아니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약 체결에 들어가셨는데, 계약 상대자들의 조건은 외관상 분명히 다양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이 모순 된다거나 또는 사람의 다양성에 의하여 변화된 것처럼 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제 분명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원래 계약 체결로써 하나님과 유대인을 화해시켰는데, 그와같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의 중보도 되신다. 유대인과 이방인과는 할례와 의식 때문에 양자간에 장벽이 쌓였으므로 피차 이질적인 큰 차이가 있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떠나 멀리 있을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성취를 그만 두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계획은 그리스도께서 전에는 서로 멀리 있던 자들을 같은 한 하나님께로 데리고 와서 저들을 한 몸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실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항상 동일하시며 한 번 결정하신 것은 변함없이 확고부동하계 지켜나가시기 때문이다. 

 

"21. 그러면 율법이" ;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과 견고성을 인식시킨 후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당연히 내렸어야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외견상(外見上) 율법과 은총의 계약 사이에 있음직하게 생각되는 모순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도 절규라고 할지 모르겠다. 바울은 반박의 두려움은 전혀 떨쳐버리고 자기의 주장이 이미 승리한 것처럼, 그리고 앞에서 행한 여러가지 일들은 모두 확실한 것으로 결론한 끝에 ‘그래도 마치 율법과 약속 사이에 불일치가 있다고 항변할 자가 있느냐?'하고 부르짖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 때문에 바울은 여전히 야기될지도 모르는 난문제 (難問題)를 계속해서 해소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그는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주기 전에,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존엄을 해치려는 모욕적인 언행에 대하여 마땅히 혐오해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그가 늘 하는 식대로 그러한 심한 물상식을 단호히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논적(論敵)들이 하나님을 자가당착되게 하고 있는 사실을 비난하고 있다. 그것온 무엇 때문이냐 하면, 율법과 약속 두 가지가 다 갈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율법과 약속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의롭게 한다면, 율법과 약속은 모순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논적들이 중상하며 거짓으로 그를 항변해도 기선을 꺾고 교묘하게 물리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 이것은 간접적인 해답으로써, 율법과 약속 사이의 일치를 직접적이며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모순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얼른 보면 이 문장은 본문의 논제에 적합하지 않으며,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할지 모르나, 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율법이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면, 율법은 약속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되는 경우엔 인간을 의롭게 하는 데에 두 가지 상반된 방법이 있게되며, 의를 얻는 데 두 가지 수단으로서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힘이 율법에는 없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모순을 제거한 것이다. '만일 구원이 율법에 있다면, 의는 율법에 의하여 얻는다는 것을 나도 승인한다’고 바울이 말 했을 것이다.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 성경이란 말은 주로 율법 자체를 의미한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버렸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에게 의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의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호한 논거이다. '너는 율법에서 의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은 성경 전체와 함께 정죄 밖에 아무 것도 사람에게 남겨주지 않는다. 왜냐하떤 율법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람의 행위를 불의한 것으로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킬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죄로 말미암아 생명에서 내쫓김을 받았으니, 구원을 율법에서 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말한다. 여기 ‘모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사실 바울이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것도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뿐만 아니라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혹은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  이제 행위의 의는 빼앗겨 벌거숭이가 되었으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향하여 숨어 파할 곳을 찾는 것 밖에는 구원 얻는 길은 없다. 결론은 확실하다. 만일 행함으로만 심판대 앞에 나간다면, 우리는 모두 정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이 우리가 값 없이 의를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이 문장은 큰 위로로 가득차 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유죄선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볼 때마다, 우리가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좇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이 그리스도 안에 다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문장이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잠잠히 계신다고 할 지라도 우리 자신은 이미 상실된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우리가 상실 되었다는 사실을 자주 자주 선언하고 계실까?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멀망의 벌을 받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서운 선교에 놀라 우리의 마음이 깨우침을 받아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찾아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약속' 이란 말은 환유인데, 환유란 것은 왕(king) 을 왕관(crown)으로 나타내는 것과 갈은 비유이다. 그러므로 여기 약속이란 말은 유업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 이제 여기서 거론된 문제가 보다 충분히 정의 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의 용도와 율법이 어째서 일시적인 것인가 하는 이유, 이 두가지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유대인에게만 주어졌고 이방인은 율법으로부터 제외되었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부당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가 동일한 것이라면, 어째서 그 통치형태에 차이가 있는가 할 것이며, 유대인 선조들은 율법에 매여 있었는데 이 새로운 자유는 어디서부터 왔으며 무슨 권리에 의 하여 생겼는가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이런 구벌이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방해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말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이 다시 한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바울이 의식이나 혹은 도덕적 율법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옛 계약 아래 있던 그의 백성을 통치하여 온 모든 질서와 제도를 거기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모세에 의하여 시행된 통치 양식이 의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선 이 율법을 감옥 또는 유치장에 비유했고 그 다음에 몽학선생에 비유했다. 이 두 가지 비유에 의하여 율법의 성질은 어떤 일정한 기간 동안만 유효하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 민음은 여기서는, 당시 율법의 어두운 그늘 아래 감추인 것들을 충분히 계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율법 아래서 산 선조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서 벌써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하여 언급한 바 있다. 다론 선조들에 관해서도 히브리어 기자가 저들의 믿음의 모범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컨대 믿음에 관한 원리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이 보증한다. 그러나 당시엔 믿음의 빛이 그렇게 밝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신약의 때를 절대적인 의미로서가 아니고 상대적인 의미로 믿음의 때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가 의미하는 바를 바로 그 다음에 저들이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말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말들에 의하여 율법의 감시 아래 있던 사람들도 우리와 똑갈은 믿음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율법은 믿음의 길을 저들에게 닫아버린 것이 아니고 저들이 믿음의 한계 밖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저들을 머물게 한 것이다. 이 말은 역시 그가 이미 앞에서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라고 한 말에 대한 품위 있는 암시이기도 하다. 저들은 마치 저주가 사면에서 포위한 것처럼 에워싸였으나, 오히려 저들은 이 포위를 대항하여 저들을 저주에서 보호해 주는 보호벽(the prison· wall)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호위 (the prison of the law)를 설명하기를 성령 안에 있으면 오히려 율법의 호위가 참으로 자유로운 것이라고 했다. 믿음은 그 당시 아직 계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선조들에게는 완전한 빛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보다는 빛을 덜 받았다는 말이다.

 

결국 의식 (儀式)이란 것은 그리스도 없는 그림을 대략 윤곽만 그려 놓은 것에 볼과하다. 그런 사실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눈 앞에 직접 나타나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테면 저들은 거울에 비친 영상을 보았는데, 오늘날 우리는 저들이 영상으로 보던 바로 그분의 실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울법 아래서는 어둡고 애매하여 선조들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든다면, 새벽 빛은 한낮보다는 밝지 않아도, 여행하는 데는 충분하다. 그래서 나그네들은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선조들이 소유한 빛의 분량은 저들에게는 새벽빛 같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저들을 인도하여, 길 잃어바릴 위험없이 안전히 영원한 복락에 이르기에 족했던 것이다.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  이것은 두번째의 비유인데, 사도 바울의 의도를 한층 더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몽학선생이라는 것은 이 말의 어원으로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대로, 어떤 사람의 전 생애를 위해 임명된 자가 아니고 다만 유소년 시대만을 위해 정해진 자이다. 더우기 그는 어린이를 가르치되, 그 목적은 어린이가 알아야 할 초보적인 것을 가르쳐서 보다 중요한 것으로 향할 준비가·되도록 이것을 인도하는 자이다. 이 비유는 두가지 관점에서 율법에 아주 부합된다. 왜냐하면 율법의 권한도 일정한 시기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요, 그리고 율법의 목적도 율법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초보적인 것을 배운 후에 저들이 성인으로서 적합한 교육을 받는 데, 나아가도록 다만 일정한 단계 까지 저 들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에게로’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마치 문법 선생이 아이를 열심히 가르쳐서 그 아이를 더욱 높은 학문에 의하여 도야 및 수련 할 수 있는 다론 선생의 손에 양도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율법도 문법선생으로서 그 생도를 최초부터 시작하여 교육 시킨 후 저들을 완전한 자로 훈련 시키기 위해 믿음이라는 대 학문에 넘기는 것과 갈은 것이다. 이런 식으 로 바울은 유대인을 아이에다 비기고 우리는 청년으로 비기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몽학선생이 시킨 훈련 혹은 교육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우선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밝혀서 사람들에게 저들 자신의 불의함을 확신시켰다. 사람들이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듯이 하나님의 계명에서 자기들이 참된 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자세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저들은 의는 다른 데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율법의 여러가지 약속도 꼭 같은 임무를 띠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오로지 율법을 성취함으로, 즉, 행위에 의하여 생명을 얻을 수 없다면, 너는 무엇인가 새롭고, 다론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의 약한 점으로 보면, 너는 결코. 거기까지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그것을 원하며, 그것을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오히려 너는 항상 목표에 이르기에는 요원한 자리에 있을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다론 한편 저들은 위협을 받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서 피할 곳을 찾도록 재촉받고 있다. 실로 율법의 약속은 저들을 자극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찾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결코 저들을 쉬게 하지 않았다. 모든 의식(儀式)들도 역시 이와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희생이나 씻음갈은 의식은 사람을 훈련시켜 저들이 부정 (不淨)함과 유죄 선고를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하는 이유밖에 달리 무슨 목적으로 제정되었겠는가?  사람이 눈 앞에 비찬 자기의 부정(不淨)함을 보며, 죄 없는 짐승이 자기 죽음의 그림자로 잡혀 죽는 것을 보고서도 평안히 잠잘 수 있으며, 근심없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가 열렬한 욕망을 가지고 구원의 길을 구하도록 움직이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 그리고 확실히 의식은 양심에 경종을 울려 겸허하게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오실 속죄주를 믿는 신앙에까지 오르도록 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눈 앞에 공개된 장중한 모든 의식에는 그리스도의 인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율법전체는 예배자들의 손을 잡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훈련시키는 것들이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이 율법을 비유하여 몽학선생이라고 말할 때, 벌써 율법의 완전함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만일 율법이 인간에게 의를 줄 수 있었다면 율법은 인간을 완전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울법이 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믿음이 대신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떤 의를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없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주는 것이 바로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라고 한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눅 1 : 53).

 

"25. 믿음이 온 후로는 ......" ;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믿음이 온다는 것은一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후에 나타난 더 밝은 은혜의 계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인해 확실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는 마치 뭉학선생밑에서 간섭받던 어린 시절이 지난 것처럼 율법의 임무는 벌써 다 끝났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다. 이것은 또 한가지 다른 비유의 적용이다. 바울은 결국 율법은그리스도에게 이르는 준비라는 것과 그리고 율법은 일시적이라는 것이 두 가지를 증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자면  ‘율법은 벌써 우리와 이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완전히 페지되었는가’ 라고 질문 할지도 모론다. 나는 다음의 ”율법은 생의 규범이며, 주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우리를 잡아 끄는 고삐이며, 우리 육신의 나태함을 교정하기 위한 자극이 되는 한, 다시 말해서 모든 선한 행실을 하도록 인도하기에, 교훈과 바르게 함과 책망하기에 유익이 되는 한, 지난 날과 같이 오늘날도 유용한 것이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어째서 율법은 폐지됐다고 하는가?  바울은 율법이 그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우리가 언급했다.

 

그 능력이란 무엇이냐 하면, 율법은 행위에 대하여 보상과 형벌을 정하는데, 즉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생명을 약속하며, 모든 위반자들을 저주하는 것을 말한다. 다만 율법이 사람에게 요청하는 바는 더할나위없는 완전함, 그리고 절대의 복종이다.  울법은 아무것도 면제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고 지극히 적은 과실(過失)까지도 헤아린다. 율법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훤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고 다만 멀리서 그를 가리키며 또 마치 포장한 것처럼 의식(儀式) 속에 감추어 놓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의 능력이 페지된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므로 모세의 임무는 외면적으로 볼 때 은혜의 계약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제 끝난 것이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되었으니." ;  바울은 또 다론 이유를 들어서 다시 말하면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울 증명하면서 율법이 여전히 믿는 자를 속박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부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자라는 것을 선언하지 않는 한, 우리가 이제는 유아기 시절은 지나갔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건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노예의 경우에 있어서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나이 먹는 그것이 노예신분을 변화 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사실로 저들의 자유를 증명하고있다.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시에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아들이 되는 데에 이르기 때문이다.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자는……" ; 우리가 하나님의 이들이라는 것은 높고 탁월한 것만큼 그것은 또 우리의 판단력과는 멀다. 그래서 그것을 납득하기도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어떤 관계가 맺어졌으며 어떻게 연합되었는가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속한 것이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갈라디아인은 ‘그리스도로 옷입 었느니라’ 라고 한 것은 의복의 비유를쓴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이름과 인격을 힘 입고 저들 자신으로보다 오히려 그리스도로 보이도록 하여 저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복을 가지고 묘사한 이런 은유나 직유는 너무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도 취급한 바 있다.

 

그러나 저들이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고 하는 논거는 약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례가 아무에게나 효력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치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렇게 성령의 은혜를 외적인 표시로 고착시켜 버리고 마는 것은 터무니 없는 노릇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성경의 전체적인 원리와 .또 우리의 경험이 이 진술을 논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울이 성례에 관하여 두 가지 방법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다고 대답한다. 단순한 표시만 가지 고 스스로 자랑하며 그 내적 열매는 아무것도 없는 위선자들을 상대로 하여 논전을 벌일 때에 그는 외적인 표시가 얼마나 헛된 것이며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임을 선포하며 또 외적인 것을 신뢰하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바울은 하나님의 제정(制定)에 관하여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불경건한 자의 부패를 문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표시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신자들에게 말할 경우엔, 그는 표시와 표시가 상징하는 내용을 결부시켜 말했다.

 

왜 그것은 하나님이 성례에 있어서 어떤 헛된 가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고 외적 의식에 의하여 상징되는 것을 실제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내적 사실이 외적 표시와 결부되는 것이다. 인간의 허물이 성례가 상징하는 효과를 없앨 수 있는가 하는 그 가능 여부에 대하여 묻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 대한 해답은 어렵지 않다. 비록 악한 사람 자신은 성례에 있어서 어떠한 효력을 감독하지 못할지라도, 성례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못하며, 성례가 보유하고 있는 특성과 능력을 훼손시키지 못한다. 성례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재공하고 있다. 그래서 성례가 성령의 은혜를 약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다만 믿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제공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악한 사람들은 그것을 배척하고 자기에게 제공된 것을 효력없게 만드는 것 뿐이다.

 

그러나 저들도 하나님의 신실함과 성례의 참된 의미를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신자들에게 말할 때, 옷입었다고 말하는 저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마치 로마서 6장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그가 말한 것과 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 특유의 것이 표시로 옮겨지지기 때문에 단지 기분 전환을 위해 있는 헛된 구경거리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악용에 의하여  하나님의 구원 온사를 스스로 무익 하계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이것을 변하여 자기를해하고 밀하는 것으로 만든다' 고 생각할 때, 인간의 배은망덕이라는 것이 얼마나 악한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해 준다. 

 

"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 이것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따라서 누가 어느 민족이나 어느 사회 계급에 속했든지 그것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할례도 성별(性 別)이나 사회적 신분과 마찬가지로 특벌히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점이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로 결합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한분 만으로 만족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너희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제는 차벌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아들이 되는 은혜나 구원의 소망도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소망 모두이다. 여기 헬라인이란 말은 보통 이방인을 가리키며, 또 이방인이란 의미로 간주되는 것은 성경 중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법이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다.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 이렇게 말 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보다 더 낫 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마치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그 특권을 자랑하고 있던 유대인의 오만을 타도하기 위해서이다. 저들은 아브라함의 종족으로부터 나왔다는 것 이상으로 더 우월한 것은 없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우월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모두 공통적임을 말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서술하고 있는 결론의 근거가 된 논리는 그가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가 축복된 자손이다. 그리고 그 자손 안에서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이 하나로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상속인의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제공되었다는 사실로써 증명하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약속'은 저들을 자녀들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믿음은 항상 약속과 관련하여 결부되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