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갈6:1 ~ 5)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1)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2)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3)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4)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5)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형재를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법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야심은 특벌히 다른 어느것보다도 더 파괴적인 악이다. 그래서 지나친 가혹(奇酷)으로, 또 뜻밖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런데 이같은 일은 이따금 열심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일어나고 있지만 실은 오만과 형제에 대한 경멸, 그리고 형제를 싫어하는 데서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저들의 형제가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이 마치 그 형제를 힐책할 재료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정 사정 없이 공격해 버린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저들이 형제애로써 사람을 감화시켜 잘못을 고쳐주려는 것보다 비난하는 데에 더 바쁘기 때문이다. 물론 죄를 범한 자들은 당연히 책망받아야 하며 또 이따금 준엄하게 책망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과자를 엄히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지만, 초에 기름을 치듯이 엄한 가운데서도 반드시 유화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온 여기서 형제들의 잘못을 고쳐주려 할 때 부드럽게 해야 할 것을 가르치면서, 질책(~責)에 유화(柔和)함을 가미할 때 비로소 그 질책이 경건하고 기독교적인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바울은 기독교적인 질책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 목적은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며 선 자를 또 똑바로 서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히 회복(回復)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난폭한 방법으로나, 비난하려는 생각으로나, 격분한표정이나 말로써는 결코 될 수 없다. 더우기 형제의 병든 심령을 고쳐주기 위해서는 고요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적인 친절, 즉 유화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데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그는 온유한 심령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다만 온유한 심령의 소유자만이 형제의 잘못을 교정시키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또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형제를 교정시킬 때 부드럽게 해야 할 또 다론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나, 만일 어떤 사람이 미처 생각을 못해서 과오를 범했다든가 혹은 기만을 당해 죄를 범했다고 하면, 그를 가혹하게 다룬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하며 인도(人道)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악마가 언제나 함정을 만들어 놓고 갖은 방법을 다하며 우리를 기습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므로 형제 중 누가 죄를 범한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사단의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며 될 수 있는 대로 그를 용서해 주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과실이나 경범죄를·고의적으로 완고하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중대한 죄와 엄격히 구별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처럼 사악하거나 악의에 찬 음모는 한층 더 준엄하게. 다 루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부드럽게 대해 준다고 해서 그것이 유익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이라는 말이 삽입된 것은 유혹받고 있는 약한 사람을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유혹에 넘어간 사람일지라도 용서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신령한 너희는" ; 이것은 비꼰 말이 아니다. 가령 저들이 완전히 영으로 채위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적인 사람의 임무는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저들이 남들보다 은혜를 받고 나온 목적은 형제들의 유익과 저들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무엇 이겠는가?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그 사람은 약한 형재들의 교화를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너무나 미흡하기 때문에 이옷에 대하여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결함이 많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죄를 범하고 있다. 그래시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네 자신을 들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 바울이 여기서 ‘너희t I 타고 복수형으로 말할 것을 ‘너'타는 단수형으로 바꾼 것은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훈계라는 것은 특별히 각 개인을 향하여 말하면서 I 각각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이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는 너는 누구냐, 너 자신의 일도 반성 해 보려무나'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의 약함을 인식하며 음미하기 위해 자신을 돌이키는 것 만큼 어려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의 결점을 찾아내는 데는 민감하면서도 우리 자산의 결점에 대해서는 마치 옛사람의 '동 뒤의 바랑'이라는 말과 같이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한층 더 강하게 자극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단수형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우리가려우리 자신도 자칫하면 최를 법할 수 있는 자임을 인식할 때; 우리 자신이 남에게 용서받 기 위해서라도 자전하여 남의 최를'용서하계 된다. !어떤 사람은 바울위 말을 다음과 갈아해석한다. 죽 ‘법죄한 너, 너야말로 형제들의 긍휼을 가장 팔요로 하는 자로서 남에게 대하여 찬인하게 그리고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 를 취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타t. 그러나 또 다론한가지 해석이 있든 레 나는 그것을 좋게 여건다. 말하자면 바울이 우리에게一-말할 때 그것은 우 리7} 남홀 바로잡아 준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이'최를f;법치 않도록 하타는 뜻으로 해석한다. 구래서· 여기에 신중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면 또 한 회피하기도 어려운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그 한계선을 넘기기 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현’이라는 말은 우선 여기에 언급된 일과 관 턴해서 해석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전나성애의 문제로 연장시켜 생각해도 무 방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남의 잘못을 고쳐주려고 할 때는 언재 나 우리 자신의약정을 칙시하고 남에게 대해서는 신중성과 부드럽게 하려 고 먼저 자신의 문재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 바울은 약함과 부덕을 우리가 져야 할 '짐'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인도적(人道的)인 권고로서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무거운 짐 아래 눌려 있는 자들을 끌어내 주어야 한다는 것온 우리의 인간성 자체가 명(命)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우리에게 형제들의 짐을 지라고 명한 것은 저들이 악을 범하는 대로 내버려 두거나 눈감아 주라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이 지고 있는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도록 해주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일은 온화하고 우정에 찬 교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포주와 갈은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간부둘이 많이 있으며, 그리스도를 장물 은닉자로 만들고자 하는도둑둘도 많으며, 그리스도를 두목처럼 만드는 가지가지 포악한 자들도 있는데, 저들은 모두 성도들에게 저들의 짐을 지우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행동거지를 회복과 교정, 다시 말해서 넘어진 자를 끌어 일으키고 또 그를 바로 세워주는 것과 관련시켰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태도는 분명하여 누가 보아도 확실해야 한다.
"그라스도의법을성취하라" ; 아’ ‘법'아라는 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는 논의(論議)의 정황과 관계 된다. 그리스도의법과 모세의 법 사이에는 대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너희가 만일 법을 지키기원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서로 사링하라는 법을 주셨는데, 이 법은 다른 어떤 법보다 월등하며 저희가 당연히 좋아하게 될 법이다. 그러나_이것이 없는 자는 이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울은 각사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도울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의미는 만일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은모두 무익하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여기 ‘성취'라는 말은 헬라어로 '절대적인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히 정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완전에 이르기에는 아직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보면 완전에 거의 가깝다고 볼수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눈에는:아직도 먼 거리에 딸어져 있는 것이다.
"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 ; 구문상으로는 표현이 애매한 점이 있지만 바울의 의도는 분명하다. 얼른 보아서는 ‘아무것 되지 못하고’라는 말의 뜻이 ,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는 아무것도 아닌데도 무엇인 것처럼 주장한다면이란 의미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기 자신은 이무것도 아닌데도 자신에 관해서 어리석은 자신감에 부풀어 있는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아주 일반적이며 따라서 다음과 갈이 ‘사람온 누구나 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인가 된 것처럼 나타내 보이고 싶어하거나 또 자신이 그럴듯한 존재인 것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라고 해석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첫째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며 선하다고 할 만한 것도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광은 그저 허영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는 두번째로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둘은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결론을 짓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에 의하여:기만을 당할 때 그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일처럼·: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타인에 대하여 부드럽게 보다 인간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득히 무례한 행동이 오만한 엄격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다만 자신을 높이며 남을 멸시하는 자둘에게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오만을 버리고 우리는 파차 극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 ; 바울은 강력한 일격으로.인간의 오만을 두들겨 치고 있다. 그런데 오만은 우리 자신이 타인과 비교하는 데서 자주 일어나며 그리고 타인을 얕잡아 형편없이 평해 놓고 거처에 자신에 대한 평가의 기초를 두는 데서 자주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이와 같은 비교는 무의미 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누구든지 타인의 표준에 의하여 자신을 재지 말아야 하며, 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생각한 것 보다 못하다고 해서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에 관해서는 상관하지 말고 자기 행위가 어떠한가 살펴보고 다만 자기 양심을 반성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타인의 명성을 떨어드리고 얻는: 그라한 영광도 말고 남과 비교하는· 일 없이 얻는 그러한 찬사만이 참된 찬사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비꼬는 말로 생각하는데, 마치 바울이 ‘너는 다른 사람의 결정 때문에 우쭐해지는구나, 그러나 만일 너는 네 자신이 어떠한 자인가 생각해 보면 너는 당연히 칭찬을 받으리라 생각할 것이지만 사실온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 것처럼 생각한다. 실로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온 다음에 이어지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는 말씀을 ‘그가 짐을 지는 것이 통상적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온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더욱 의미가· 통한다 . 왜냐하면 이말씀의 의미는 ‘너는 다만 너 자신에 관해서만 자랑할 것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저들이 왜 이 말씀을 풍자적인 뜻으로 이해하려는지 그 이유를 안다: 그것은 사도가 앞 문장에서 인간의 모든 영광은 전적 폐기하는 뜻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주님이 그의 백성에게 허용하사 양심상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자랑거리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데 바울 자신도 도처에서 자랑의 말을 하고 있는 것아다. 이것은 자랑이라기보다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말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사람은 자기를 칭찬하기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감동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건한 성도들이 자랑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에게서 칭찬할 거리를 발견할 때 그 근거를 자가들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으로 말한다. 바울은 말하기 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아니 하고 하나님의 은혜르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다"(고후 1 : 12)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 앞에 선을 행하라(駐 1)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 :6)고 말씀하셨다. 엄격히 말해서 이것은 바울 자신의 주장이 아니고 다만 그는 우리에게 만일 어떤 사람이 타인의 미천함을 인해 높이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의 자격으르 높이 평가된다고 하면 그 칭찬은 정당하고 실질적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조건적인 서술인데, 말하자면 만일 어떤 사람에게 영예를 주려할 때 그 사람 자신에 관해서 평가할 것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평가해서는 안된다. 혹은 단독으로 그 사람만 고찰하여 좋은 사람이 아니면 좋다고 평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말 한 것 처럼 생각된다.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 ~-우리의 오만과 나태를 분쇄하기 위해 그는 우리 앞에 하나님의 심판을 제시하고 있다. 각 사람은 이와 갈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다름 사람과 비교해서가 아니고 각각 자기 자신의 생애의 결산 보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우리는 이런 식으로 속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애꾸눈 사나이가 많은 소경들 가운데 살면서 자기는 아주 시력이 좋은 것 처럼 생각하며 또 회색 피부의 사람이 흑인들 속에 살면서 그들과 비교하여 자기는 백인인 것처럼 착각 하듯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온 이러한 공상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단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각자가 다 자기의 짐을 질 것이며 타인의 죄 때문에 자기가 용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절에서 말씀한 말씀의 근본적인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