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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5:13)

1. 성경 (갈5:13 ~ 18)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3)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4)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5)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6)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7)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  그가 이번에는 자유를이떻게 쓸것인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자유와 -자유행사 두 가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밝혔다.  자유는 앙심에 있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인데, 자유의 행사는 외부적인 것으로  하나님 뿐만 아니라 사람과도 관계된다; 그러므로  그는 갈라디아인에게 저들의 자유가 훼손 당하지 않도록 권면한 후에 이번엔 그 행사에 신중을 기해야 될 것을 명하고 있다· 더우기 저들이 이 자유를 올바로 행사할 규칙으로서 자유행사를 방종의 구실이나 또는 기회로  삼지 않도록 규정학고 있다. 왜냐하면 자유가 멍에 아래서 속박을 받아야 할 육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경건한 신자의 양심만이 누릴 영적 선물이기 때문이다. 

 

"오직 사탕으로 서 로 종 노롯하라." ;  바울은 여기서 자유가 방종이나 분수를 넘는 남용으로.바뀌지 않도록 자재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바울이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올바른 양심은 어떠한 데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외적인 행사에 관해서는 가령 예속이나 제약이 있어도 아무 위험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섬기면 우라는 항상 건덕 (建德)을 중히 여기게 된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결코 도를 넘는 상해에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쓰게 된다.

 

"14. 은 율법은……" ; 이 귀절에서는 바울의 권면과 거짓사도들의 교훈 사이에 대조법이 "보충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거짓 사도들이 의식만을 주장하는 반면에 바울은 신자의 참된 의무와 훈련을 계속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랑을 찬양함으로 말미암아 사랑이야말로 신자적 완성의 주요 부분이 성취된다는 것을 갈라디아인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모든 교훈이 왜 사랑 아래서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율법은 두 판(板)으로 되었는데 첫째 판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경건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으며, 둘째 판에서는 사랑에 관해 서 가르치고 있다. 한 부분(部分)을 전체화(全體化)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첫째 판에서도 다만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리라는 것만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이옷에 대한·사랑이다. 그러므로 더욱 확고한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도 하나님께 대한 경건이 형제들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된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둘째 판은 지키는것보다 첫째 판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경건도 인간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儀式)이 비록 경건을 증명하도록 제정되었지만 그것들만으로는 확실한 경건의 증거가 되지 못한 때가 종종 있다. 왜냐하면 위선자들이 오히려 의식을 지키는 데 있어서 더 열심이 있고 더 규칙적으로 지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시고 서로  사랑하는 그 형 제 사랑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부를 확인하사기를 원하신다.

 

여기 뿐만 아니라 로마서 13장 8, 10절에서도 사랑이 율법의 성취라고 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사랑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월동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것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냐님은 형재들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사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바를 형재들 안에서 요구하신다. 사실 사람에게 대한 사랑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데서만이 솟아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는 원인의 표시가 되기 때문에 결과 아래 원인을 포합시켜도 별로 이상 할 것은 없다. 이것은 환유(換lflf)라고 하는 비유에  의한 것 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을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 각자에게 속한 권리를 그들 각자가 누리도록 하며, 사람을 해치거나 부정하지 않으며 모든사람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선을 행한다. 그밖에 둘째 판 전체에서 다루어진 것이 무엇인가?  바울이 로마서에서 쓴 논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웃이라는 말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네 골육을 파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7) 라고 경계한 것 갈이 우리는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성에 의하여 한 가지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다도 하나님의 형상이야말로 특별히 우리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신비로운 끈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여기서는 친구와 원수 사이에 하등의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사악함이 자연의 권리를 소멸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네 몸 같이'라는 말은·각 사람의 육신의 충동으로 말미암아 나 자산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에 의하여 권면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르본 신학자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바로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순차적으로 자기 자신에 관한 사랑이 언제나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다스리는 자보다 열등하가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보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사랑의 '사'자도,'모르는 당나귀와 갈은 존제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이 기준이라면 웅당 그 사랑은 의롭고 거룩하며 하나남에 의하여 인정 받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온'우리가 자기에 대한 사랑을 교정(蹟正)할 때까지는,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의 요구 하시는 대로 이웃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사랑은 타인을 경멸히 여기며,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으며 잔인성을 나타내며 식욕과 강탈, 기만, 그 밖에 모든 해악의 근원이며 우리를 단기적인 인간이 되게하며 .복수욕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이러한 자기 자랑과 이웃 사랑과는 서로 맞지 않으므로 서로가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이 자기 사랑이 진정한 사랑으로 변하기를 요구 하고 있는 것이다.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  갈라디아인은 교리에 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저둘 사이에 피차 논쟁이 있었면 사실을 말씀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제의 섬격으로부터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문제가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 얼마나 치명적인 화를 초래하는가 하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저둘의 야심과 교만, 그리고 그밖에 여러 지 죄들을 벌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아마 신명기 13장 3절에  모세에 의하여 선포된 것과 마찬가지로 관례에 따라 추리되었는지도 모른다. 내생각에는 바울이 말한 ‘물고 먹는다’ 는 것은 적의심에서 나오는 증상과 고발,비난과 기타 모든 언쟁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기만과 폭력에서 야기되는 모든 불의한 행동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갈은 행동은 결국 어떠한 걸과를 가져 올 것인가? 피차 멸망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사랑의 본성은 서로가 보호해 주며, 서로 친절을 베풀어 주는 것이다.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말 다툼 하도록 유혹할 때마다 우리는 항상 한 몸된 교회안에 있는 여러 지체가 서로 불화하면, 몸 전체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 같은 몸에 붙어 있는 지체인 우리가 스스로 우리 다 갈이 피차 망하자고 공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비참한 일이며, 또한 얼마나 미침 짓이겠는가!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성령을 좇아, 행하라~~~" ; 여기 해결책이 있다. 교회의 파멸은 결코 적은 악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그런 위험성을 눈치 챌 때는 신속히 예방해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육이 우리 안에서 주권을· 행사하지 않고,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면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인이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욕적이며 더우기 저들은 기독신자로서 합당치 않는 삶을:영위하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만일 저들이 육욕에 이끌리지 않았다고 하면, 서로 대적하는 그런 사태가 어디서 발생했겠는가?  바울은 이렇게 된 것은 저들이 성령을 좇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말에 표시를 해두고 주의해야·한다. 그가 의마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의 짐을 무겁게 지고 서 있는 한, 오히려 많은 죄에 순복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죄의노예가 되거나 거기에 빠져버리지 않고 그것을 배격하려고 노혁한다는 것이디. 병적인 사람도 육신의 정욕과 그 자극으로부터 완전하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고 다만 육신의 정욕이 그를 지배하면서 그 욕심을 완전히 이루도록 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로마서 8장을 참조하라. J.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  투쟁하지 않고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갈라다아인이 알도록 바울은 저들에게 미리 어려운 문제를 경고하고 있다. 그 어려운 문제라는 것은 성령과 반대되는 인간의 본성에서 발생한다.  육체라는 말은 로마서에서 이미 서술한 대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괴변가들에 의하면 그것을 소위 열동감에다가 국한시껴 말한다. 하지만 여러 성경 귀절둘이 그것을 논파하고 있다. 그것은 욱과 대조되는 것이 영이라는 점에서 보아도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영은 갱신된 성질 혹은 중생의 은혜를 의미하가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이라는 것은 다만 옛 사람을가리키는것이다. 인간성 전체가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완고하게 반역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 순종하려면 분투노력하며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본성을 얼마나 우대하여 주시는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의 본성과 의 (義)는 물과 볼이 화합하지 않i는 것 같이 더 일치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靈)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나 선이라고 할 수 없는 한, 자유의지 안에서는 선이라는 것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 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언급된 대로이다.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것은 확실히 중생한 자에 대하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에 속한·사람은 부패한 정욕과 투쟁하려고도 않을 뿐만 아나라 하나님의 의를 열망하는 전지한.소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것을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원하는 것' 이란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신 거룩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지  본성의 경향(傾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저둘이·완전히 하나님께· 봉사 헌신하기까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것을 선언하고 있다. 저들이 선을 이루고자 원하고 바라지만 결국 저들이 바라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로마저 7장 15절에서 충분히 거론하고 있다. ¢ ’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바가 되면~~~" ; 비록 신자들이 넘어지기는 하자만 주의 길을 겉으면서 넘어지기 때문에 율법을 성취하지 못했다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저들은 여기 있는 대로 ‘너희는 율법 아래 있자 않다'고...,바울이 말한 이러한 위로가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6 장 14절에서도 이런 위로의 말을 했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부족한 점이 있어도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마치 저들의 임무가 모든 면에 있어서  완전하고 만족하게 성취된 것 처럼 하나님께 가납(嘉納)된다는 결과가 된다. 바울은 앞에서 논한 자유론을 여기서 또 계속하고 있다.  결국 그가 앞에서 '양자의 영'이라고 한 그 영이 인간을 자유케 할 때 율법의 멍에에서도 해방시키신다.  그러므로 본문은 ‘너희가 원하는 것온 이처럼 너희를 괴롭히고 있는 논쟁을 일단 끝내버리려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러면 너희가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율법은 단순히 너희를 경고하기 위해 있는 관대(寬大)한 교훈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더 이상, 너희 양심을 얽어매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그밖에 율법의 유죄선고가 제거되면 당연히 모든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의식은 노예 상태의 표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