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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4:19)

1. 성경 (갈4:12 ~20)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2)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3)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4)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5)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7)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8)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19)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2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2.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틀 구하노라 " ; 바울은 이제 친철히 말하며, 지금까지의 엄격함을 부드럽게 하고 있다.  저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바울이 거기에 대하여 상당히 거칠게 노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좌우간 득실(得失)을 생각하여, 저들의 환심을 사려고 문제를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오를 범한 사람에게 어떠한 응분의 벌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는 것이 용의주도한 목사나 교사의 의무이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명한 대로(딤후 4 : 2) 적당한 때에 견책하되 온유와 인내로써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생각과 방법으로 일단 꾸짖고 침묵시킨 다음에 이번에는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갈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말하면서 저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가 결코 모욕하기 위해 꾸짖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와 갈이 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마음가짐에 대한 문제이다. 바울이 저들에게 적응하려고 노력한 것처럼 저들측에서도 똑같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너희와 갈이 되었은 즉, 다시 말하면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다정하게 대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너희도 마땅히 겸손하며 온화해야 할 것이며 나에게 대하여 순전하고 유 순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목사들의 의무를 충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목사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자기가 관계하는 사람들이 고분 고분히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들과 갈이 낮아져서 저들의 마음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을 받으려 면, 사랑받을 만한 자가 되라’는 말은 언제나 진리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바울은 자기가 앞에서 말한 비난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불쾌하계 만드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의혹을 제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가해진 모욕이나 혹 개인적인 불만을 복수하기 위해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그를 등지게 되고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나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보다 앞질러서 '특히 마음 번거롭게 여기고 있는 일에 관해서 너희에게 불평하려고 한 것은 전혀 아니다. 결국 내가 격분하고 있는 것은 나의 입장을 세우기 위함도 아니며 너희에게 대한 적개심에서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되어도 그것은 언제나 그런 것이니 미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분노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라고 미리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바울은 갈리디아 교인들이 자기를 얼마나 친철하게, 그리고 정중히 영접해 주었는가에 대하여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온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바울이 저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하여 바울이 말한 것은 모두 부드럽게 받아들여 바울을 좋은 분으로 이해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 째로 저들이 시작을 잘 한 것처럼 계속하여 잘참고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첫째 그의 호의에 관한 증언이며,

둘째는 저들이 처음에 행한 것처럼 행동하도록 권면하는 말이다.

 

바울은 다른 데서도 그러했듯이 여기서 그는 육체의 약점이라는 말로써 자신을 비열하고 멸시할 만한 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육체'라는 말은그의 ‘외관'(外觀)을 의미하지만, ‘약함'이라는 말은 ‘낮은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것도 없고 풍채도없고 세상의 명예나 지위도 없고 사람들 보기에 비열하고 아무 자격도 없는 모습, 바로 그것이 바울이 저들에게 갔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이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바울을 영접해 들이는 데 있어서 그런 것들이 방해되지는 않았다. 바로 그 사실이 현재 바울이 논하고 있는 이 문제에 큰도움을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 바울에게 있어서 귀중히 여길만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오직 성령의 능력 뿐이었다. 그런데 저들이 무슨 구실로 그 능력을 멸시하기 시작하는가? 사실상 그후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아무런 새로운 사실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저들이 이전만큼 바울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온 아무래도 저들이 절조(節操)없이 행동했다는 협의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저들이 생각하도록 맡겨버리고 다만 간접으로 그것을 생각할 기회를 주고 있을 분이다.

 

"14. 너희틀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  다시 말해서 ‘비록 너희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나같은 존재를 멸시해야 할 만큼 미천한 인간으로 볼 것이지만, 오히려 너희가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시험 ' (temptation), 혹은 ‘시련 (trial)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애매하여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고 또 바울 자신이 어떤 야심가가 자기의 낮아지고 작아짐을 부끄럽계 여기고 늘 하는 행동처럼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어떤 사람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또 그 사람의 내막의 빈곤함을 알이차리기 전에 어울리지 않게 그 사람을 추앙하여 호평하다가도 한 이틀 지나면 벌써 조롱하면서 그를 배척해버린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이것과 전혀 달랐다. 그는 갈라디아인을 기만하기 위하여 자기를 꾸미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고 다만 있는 모습 그대로 처신했다.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 실제로 참된 하나님의 사역자는 모두 이처럼 존경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처럼, 경건한 교사들도 영원한 구원의 교리와 가장 뛰어난 모든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러한 보배를 저들의 손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저들을 천사들에게 비간 것은 당연하다. 더우기 하나님은 저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다.  말라기는 그 사실을 2장 7절에서 논하고 있다. 오히려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자기를 섬기는 자들을 마치 예수님처럼 영접하라고 명하셨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 리는 자는 곧 나를 처버리는 것이요"(눅 10:16)라고 하셨다.

 

이것도 결코. 의외(意外)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그리스도의 대사(大使) 역할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저들은 예수님 자신을 대표하여 그의 대리자와 갈은 자들이지 때문이다(고후 5 : 20). 이상과 갈이 말하는 것, 그리고 칭송하는 것은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존엄성을 갖게 하는 것이며 복음의 임무를 호평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역자를 존경 하지 않으면 안 되 는 것이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면, 교역자를 멸시하는 자는 틀림없이 악마의 교사(敎~)를 받고 있 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있는 한 교역자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것이다. 그런데 교황파는 이 말씀을 빙자하여 자만하고 있지 만 그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적(敵)이면서도 버젓하게 그리스도의 종들로 행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부조리 한 일인가!  천사와 같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천사가 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처럼 순종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의 순수한 말씀을 우리에게 충실히 전해야 할 것이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  바울은 저들이 성스러운 감정으로 자기들의 축복의 수단을 받아들이고 있을 그때가 정말 행복했었다. 그러나 저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바 모든 것을 응당 바울의 사역의 결과로 돌려야 하는데 저들 자신이 바울에게서 그것을 빼앗기도록 허용하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저들은 비참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다음과 갈온 충고로써 저들에게 자극을 주려고 한 것이다. '뭐냐!  모든 것을 상실당해도 좋단 말인가? 너희가 한번 나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을 무익하게 만들어도 좋다는 말이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 세워진 것을 헛되게 할 것인가? 지금의 너희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너희 순종의 영예를 사라지게 해도 괜찮단 말인가?· 요컨대 저들은 전에 품고 있던 순수한 교훈을 멸시함으로써 저들이 모처럽 획득한 은총을 내어 던지고 스스로 파멸의 원인을 끌어들여 불행히도 그로 인해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목사나 교역자들을 존경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랑도 해야만 한다. 어째서 이 두 가지가 팔요한가 하면 만일 이 두가지가 없으면 교훈의 맛을 달계 생각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갈리디아인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저들이 존경하고 있는 사실에 관해서는 이미 서술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저들의 사랑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만일 필요했다면 언제든지 자기들의 눈이라도 뽑아 바울에게 주려고 한 것은 생애 전부를 바치겠다고 하는 것보다도 더 강하고 특이한 사랑의 증표이다.

 

"16. 그런측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  바울이 이번에는 자기의 문제로 들아가 저들이 변심(變心)한 것은 바울 자신의 실패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진리가 미움을 낳는다고는 혼히 말하지만, 진리가 미움을 받는 것은 다만 진리를 듣는 데 견뎌내지 못한 자들의 심술 궂음과 원한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이 바울로부터 멀어진 원인이 바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저들의 배은망덕을 꾸짖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충고는 여전히 우정적이어서 갈라디아인들이 저들의 사도인 그를 가볍게 이유없이 배척할 수 없었다. 저들은 이전에 끔찍이 그를 사랑해 왔었고, 또 바울이야말로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알았기 때문이다. 진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친구를 원수시 한다는 것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나쁜 일이 아닌가?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 하는 것은 저들을 꾸짖는다기보다 차라리 저들의 태도를 돌이켜 회게하도록 충고하기 위해서이다. 

 

"17.  저희가 너희틀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  마지막으로 바울은 거짖 사도들에 관하여 말하게 되었으나 저들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름을 언급하여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증오심을 내포하는 방법으로써 저들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기분에 거슬리며, 이름 부르기조차 불쾌한 사람의 일을 논할 경우 그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지 않는 버릇이 있다. 갈라디아인은 건성으로 내는 이 사람들의 열심에 의해 기만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부당한 야망에 대하여 갈리디아인들을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비열한 애정으로 처녀들을 노리고 향락을 위하여 어떻게 하면 처녀들을 능욕할 수 있을까 밖에 생각하지 않는 연인(戀人)의 비유를 들어서 ‘만일 저들이 너희 일에 열심이 있거든 혹은 갈망하거든 너희는'욕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저들이 올바른 열심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비판 받을 만한 나쁜 욕망에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나쁜 욕망은 바울이 고린도 후서 11장 2절에 언급한 거룩한 열심과는 반대이다.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 바울은 다시 한번 고쳐 말하면서 잘못된 계략과 간책을 강조하고 있다. 저들은 너희의 환심을 사려고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다른 수단으로는 너희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너희와 나 사이에 다툼을· 일오켜 너희가 마치 나에게서 외면이라도 당한 것처럼 하며 저들에게 접근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 경건한 화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 자기들이 침투해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것을 저들이 잘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갈이 목사를 미움의 존재인 것처럼 목사에 대한 애정을 끊도록 만들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유인하며 자기를 반대하여 정면으로 저항할 자들을 제거하며 안전한 지위를 독점하려는 것은 사단에게 봉사하는 자들과 공통한 간책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주의깊고 면밀한 조사에 의하여 저들은 언제나 이와 갈은 수법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 이것은 바울이 자신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지 혹은 갈라디아인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요컨대 신실한 사역자들은 경건한 열심으로 불타서 저들이 맡은 모든 교회를 그 남편과의 순결한 교제 속에 있도록 보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것을 바울에 관한 말로 이해한다면, 그 의미는 이렇다.  '나도 너희에 관하여 열심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저들과는 다른 목적과 다른 애정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언재나 똑갈이 행동하고 있다.'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것을 갈라디아인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 몇 가지 해석이 따른다.

 

말하자면 저들은 확실히 너희를 나로부터 이간시켜 너희가 자포자기되었을 때는 저들 쪽으로 들아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나를 사랑한 너희는 내가 지금 떠나 있을 때에도 내게 대한 사랑을 지속하고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올바론 생각은, 라탄어의 '아이무라리'와 갈이 헬라어에도 여러가지 다른 의미를 가진 이 말의 애매함을 바울이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앞에서 열심이라고 번역한 것을 여기서는 ‘추구한다’ 또는 ‘타인의 덕을 모법하여 노력한다'는 의미를 취하고 있다. 바울은 저속한 질투 곧 경쟁을 본 받지 말게하고 갈라디아인으로 하여금 그것과는 다른 경쟁 방법으로 자기가 없는 동안도 변함없이 수업(修業)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19. 나의 자녀들아" ;  바울은 여기서 한층 더 부드러운 호칭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녀라고 부르는 것은 형제라고 부르는 것보다도 훨씬 나은데, 자녀라고 부르는 것은 지소사(指小辭)로서 그것은 경밀히 여기는 뜻 에서가 아니라 저들에게 대한 다정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미 장성했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숙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흔히 격한 감정에서 말할 때 뒤어나오는 말처럼 앞뒤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감정이 격했을 때는 다음에 생각한 것을 충분히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초조한 나머지 절반 목이 메어 소리가 계속 잘 나오지 않게 된다.

 

"다시 너희틀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이것도 역시 그의 사랑의 뜨거움을 표현하는 말인데, 바울은 마치 아이를 낳는 어머니가 수고를 하는 것처럼 , 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겪은 것으로 더우기 또한 그것은 그가 품고 있는 고뇌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아이를 낳은 후에는 기뻐한다.  그러나 분만할 때는 심한 괴로움을 참아야 한다. 갈라디아인은 앞서 한번 잉태되고 분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저들이 타락한 후에는 다시 한번 더 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응당 미워해야 할 자들이지만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라는 말을 하면서 부드럽게 대하고 있다. 이렇게 말 하는 것은 바울이 저들의 첫번 출생을 전혀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저들이 아직도 완전한 형태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마치 제 시기가 차지 않는 태아처럼 다시금 태중에서 육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결국 갈은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요, 또 그리스도도 우리가 그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들 속에 태어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끌어들인 미신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형상이 잘못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순수하게 빛나도록 하여, 원상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사역자들이 때로는 젖을 주며 때로는 단단한 음식을 줌으로써 할 수 있다. 실로 복음의 사역자는 저들이 설교를 계속하는 동안 내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자기를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에게 비유하여 말했는데, 그것은 갈라디아인이 아직 완전히 태어나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 귀절은 교역자의 수고에 관하여 언급한 특이한 귀절이다.

 

물론 영적 자녀를 낳는 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위해 교역자와 설교를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께만 있는 고유한 사역을 그것들에게 맡기며 성령의 능력을 인간의 노력과 합력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러한, ‘교역자도 하나님과 대조될 때는 무(無)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일개 도구에 블과하다’는 한계를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성령이 교역자를 통하여 ·유효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행동에 관한 찬미와 명성은 역시 교역자에게도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 그것은 자기 스스로나 하나님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교역자들이 무엇이 되기를 원한다면 저들은 자신을 형성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려고 힘써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슬픔에 지쳐 거의 죽게된 것처럼 말을 중도에서 끊고 있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 이것은 바로 부친이 자기 자식의 나쁜 품행 때문에 너무나 당황하여 충고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탄식할 때에 하는 매우 강한 항의이다. 바울은 직접 대면하여 저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직접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는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을 얻으며 보다 나은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상대방의 마음이 감동되고 있는지, 유순하여 말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완고하여 저항하는지에 따라서 대화를 조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은 그 이상의 어떤 것율 표현하고자 한 것인데, 다시 말하면 그는 언제든지 그렇게 할 근거와 이유가 있다고 느낄 때는 다양한 형태로 심지어 새로운 언어까지도 구사할 용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목사들이 자기들의 일에만 몰두하거나 자기들의 의견에만 빠져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사람들의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자신들을 적응하도록 하기 위해 유의 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호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올바른 길에서 이탈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 양심을 거스리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경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