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갈3:23 ~ 29)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3)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24)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6)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7)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8)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23. 믿음이 오기 전에……" ; 이제 여기서 거론된 문제가 보다 충분히 정의 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의 용도와 율법이 어째서 일시적인 것인가 하는 이유, 이 두가지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유대인에게만 주어졌고 이방인은 율법으로부터 제외되었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부당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가 동일한 것이라면, 어째서 그 통치형태에 차이가 있는가 할 것이며, 유대인 선조들은 율법에 매여 있었는데 이 새로운 자유는 어디서부터 왔으며 무슨 권리에 의 하여 생겼는가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이런 구벌이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방해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말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이 다시 한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바울이 의식이나 혹은 도덕적 율법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옛 계약 아래 있던 그의 백성을 통치하여 온 모든 질서와 제도를 거기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모세에 의하여 시행된 통치 양식이 의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선 이 율법을 감옥 또는 유치장에 비유했고 그 다음에 몽학선생에 비유했다. 이 두 가지 비유에 의하여 율법의 성질은 어떤 일정한 기간 동안만 유효하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 민음은 여기서는, 당시 율법의 어두운 그늘 아래 감추인 것들을 충분히 계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율법 아래서 산 선조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서 벌써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하여 언급한 바 있다. 다론 선조들에 관해서도 히브리어 기자가 저들의 믿음의 모범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컨대 믿음에 관한 원리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이 보증한다. 그러나 당시엔 믿음의 빛이 그렇게 밝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신약의 때를 절대적인 의미로서가 아니고 상대적인 의미로 믿음의 때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가 의미하는 바를 바로 그 다음에 저들이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말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말들에 의하여 율법의 감시 아래 있던 사람들도 우리와 똑갈은 믿음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율법은 믿음의 길을 저들에게 닫아버린 것이 아니고 저들이 믿음의 한계 밖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저들을 머물게 한 것이다. 이 말은 역시 그가 이미 앞에서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라고 한 말에 대한 품위 있는 암시이기도 하다. 저들은 마치 저주가 사면에서 포위한 것처럼 에워싸였으나, 오히려 저들은 이 포위를 대항하여 저들을 저주에서 보호해 주는 보호벽(the prison· wall)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호위 (the prison of the law)를 설명하기를 성령 안에 있으면 오히려 율법의 호위가 참으로 자유로운 것이라고 했다. 믿음은 그 당시 아직 계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선조들에게는 완전한 빛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보다는 빛을 덜 받았다는 말이다.
결국 의식 (儀式)이란 것은 그리스도 없는 그림을 대략 윤곽만 그려 놓은 것에 볼과하다. 그런 사실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눈 앞에 직접 나타나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테면 저들은 거울에 비친 영상을 보았는데, 오늘날 우리는 저들이 영상으로 보던 바로 그분의 실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울법 아래서는 어둡고 애매하여 선조들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든다면, 새벽 빛은 한낮보다는 밝지 않아도, 여행하는 데는 충분하다. 그래서 나그네들은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선조들이 소유한 빛의 분량은 저들에게는 새벽빛 같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저들을 인도하여, 길 잃어바릴 위험없이 안전히 영원한 복락에 이르기에 족했던 것이다.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 이것은 두번째의 비유인데, 사도 바울의 의도를 한층 더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몽학선생이라는 것은 이 말의 어원으로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대로, 어떤 사람의 전 생애를 위해 임명된 자가 아니고 다만 유소년 시대만을 위해 정해진 자이다. 더우기 그는 어린이를 가르치되, 그 목적은 어린이가 알아야 할 초보적인 것을 가르쳐서 보다 중요한 것으로 향할 준비가·되도록 이것을 인도하는 자이다. 이 비유는 두가지 관점에서 율법에 아주 부합된다. 왜냐하면 율법의 권한도 일정한 시기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요, 그리고 율법의 목적도 율법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초보적인 것을 배운 후에 저들이 성인으로서 적합한 교육을 받는 데, 나아가도록 다만 일정한 단계 까지 저 들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에게로’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마치 문법 선생이 아이를 열심히 가르쳐서 그 아이를 더욱 높은 학문에 의하여 도야 및 수련 할 수 있는 다론 선생의 손에 양도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율법도 문법선생으로서 그 생도를 최초부터 시작하여 교육 시킨 후 저들을 완전한 자로 훈련 시키기 위해 믿음이라는 대 학문에 넘기는 것과 갈은 것이다. 이런 식으 로 바울은 유대인을 아이에다 비기고 우리는 청년으로 비기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몽학선생이 시킨 훈련 혹은 교육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우선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밝혀서 사람들에게 저들 자신의 불의함을 확신시켰다. 사람들이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듯이 하나님의 계명에서 자기들이 참된 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자세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저들은 의는 다른 데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율법의 여러가지 약속도 꼭 같은 임무를 띠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오로지 율법을 성취함으로, 즉, 행위에 의하여 생명을 얻을 수 없다면, 너는 무엇인가 새롭고, 다론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의 약한 점으로 보면, 너는 결코. 거기까지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그것을 원하며, 그것을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오히려 너는 항상 목표에 이르기에는 요원한 자리에 있을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다론 한편 저들은 위협을 받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서 피할 곳을 찾도록 재촉받고 있다. 실로 율법의 약속은 저들을 자극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찾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결코 저들을 쉬게 하지 않았다. 모든 의식(儀式)들도 역시 이와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희생이나 씻음갈은 의식은 사람을 훈련시켜 저들이 부정 (不淨)함과 유죄 선고를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하는 이유밖에 달리 무슨 목적으로 제정되었겠는가? 사람이 눈 앞에 비찬 자기의 부정(不淨)함을 보며, 죄 없는 짐승이 자기 죽음의 그림자로 잡혀 죽는 것을 보고서도 평안히 잠잘 수 있으며, 근심없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가 열렬한 욕망을 가지고 구원의 길을 구하도록 움직이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 그리고 확실히 의식은 양심에 경종을 울려 겸허하게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오실 속죄주를 믿는 신앙에까지 오르도록 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눈 앞에 공개된 장중한 모든 의식에는 그리스도의 인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율법전체는 예배자들의 손을 잡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훈련시키는 것들이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이 율법을 비유하여 몽학선생이라고 말할 때, 벌써 율법의 완전함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만일 율법이 인간에게 의를 줄 수 있었다면 율법은 인간을 완전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울법이 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믿음이 대신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떤 의를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없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주는 것이 바로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라고 한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눅 1 : 53).
"25. 믿음이 온 후로는 ......" ;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믿음이 온다는 것은一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후에 나타난 더 밝은 은혜의 계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인해 확실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는 마치 뭉학선생밑에서 간섭받던 어린 시절이 지난 것처럼 율법의 임무는 벌써 다 끝났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다. 이것은 또 한가지 다른 비유의 적용이다. 바울은 결국 율법은그리스도에게 이르는 준비라는 것과 그리고 율법은 일시적이라는 것이 두 가지를 증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자면 ‘율법은 벌써 우리와 이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완전히 페지되었는가’ 라고 질문 할지도 모론다. 나는 다음의 ”율법은 생의 규범이며, 주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우리를 잡아 끄는 고삐이며, 우리 육신의 나태함을 교정하기 위한 자극이 되는 한, 다시 말해서 모든 선한 행실을 하도록 인도하기에, 교훈과 바르게 함과 책망하기에 유익이 되는 한, 지난 날과 같이 오늘날도 유용한 것이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어째서 율법은 폐지됐다고 하는가? 바울은 율법이 그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우리가 언급했다.
그 능력이란 무엇이냐 하면, 율법은 행위에 대하여 보상과 형벌을 정하는데, 즉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생명을 약속하며, 모든 위반자들을 저주하는 것을 말한다. 다만 율법이 사람에게 요청하는 바는 더할나위없는 완전함, 그리고 절대의 복종이다. 울법은 아무것도 면제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고 지극히 적은 과실(過失)까지도 헤아린다. 율법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훤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고 다만 멀리서 그를 가리키며 또 마치 포장한 것처럼 의식(儀式) 속에 감추어 놓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의 능력이 페지된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므로 모세의 임무는 외면적으로 볼 때 은혜의 계약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제 끝난 것이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되었으니." ; 바울은 또 다론 이유를 들어서 다시 말하면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울 증명하면서 율법이 여전히 믿는 자를 속박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부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자라는 것을 선언하지 않는 한, 우리가 이제는 유아기 시절은 지나갔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건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노예의 경우에 있어서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나이 먹는 그것이 노예신분을 변화 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사실로 저들의 자유를 증명하고있다.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시에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아들이 되는 데에 이르기 때문이다.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자는……" ; 우리가 하나님의 이들이라는 것은 높고 탁월한 것만큼 그것은 또 우리의 판단력과는 멀다. 그래서 그것을 납득하기도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어떤 관계가 맺어졌으며 어떻게 연합되었는가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속한 것이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갈라디아인은 ‘그리스도로 옷입 었느니라’ 라고 한 것은 의복의 비유를쓴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이름과 인격을 힘 입고 저들 자신으로보다 오히려 그리스도로 보이도록 하여 저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복을 가지고 묘사한 이런 은유나 직유는 너무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도 취급한 바 있다.
그러나 저들이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고 하는 논거는 약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례가 아무에게나 효력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치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렇게 성령의 은혜를 외적인 표시로 고착시켜 버리고 마는 것은 터무니 없는 노릇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성경의 전체적인 원리와 .또 우리의 경험이 이 진술을 논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울이 성례에 관하여 두 가지 방법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다고 대답한다. 단순한 표시만 가지 고 스스로 자랑하며 그 내적 열매는 아무것도 없는 위선자들을 상대로 하여 논전을 벌일 때에 그는 외적인 표시가 얼마나 헛된 것이며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임을 선포하며 또 외적인 것을 신뢰하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바울은 하나님의 제정(制定)에 관하여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불경건한 자의 부패를 문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표시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신자들에게 말할 경우엔, 그는 표시와 표시가 상징하는 내용을 결부시켜 말했다.
왜 그것은 하나님이 성례에 있어서 어떤 헛된 가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고 외적 의식에 의하여 상징되는 것을 실제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내적 사실이 외적 표시와 결부되는 것이다. 인간의 허물이 성례가 상징하는 효과를 없앨 수 있는가 하는 그 가능 여부에 대하여 묻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 대한 해답은 어렵지 않다. 비록 악한 사람 자신은 성례에 있어서 어떠한 효력을 감독하지 못할지라도, 성례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못하며, 성례가 보유하고 있는 특성과 능력을 훼손시키지 못한다. 성례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재공하고 있다. 그래서 성례가 성령의 은혜를 약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다만 믿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제공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악한 사람들은 그것을 배척하고 자기에게 제공된 것을 효력없게 만드는 것 뿐이다.
그러나 저들도 하나님의 신실함과 성례의 참된 의미를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신자들에게 말할 때, 옷입었다고 말하는 저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마치 로마서 6장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그가 말한 것과 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 특유의 것이 표시로 옮겨지지기 때문에 단지 기분 전환을 위해 있는 헛된 구경거리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악용에 의하여 하나님의 구원 온사를 스스로 무익 하계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이것을 변하여 자기를해하고 밀하는 것으로 만든다' 고 생각할 때, 인간의 배은망덕이라는 것이 얼마나 악한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해 준다.
"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 이것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따라서 누가 어느 민족이나 어느 사회 계급에 속했든지 그것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할례도 성별(性 別)이나 사회적 신분과 마찬가지로 특벌히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점이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로 결합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한분 만으로 만족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너희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제는 차벌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아들이 되는 은혜나 구원의 소망도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소망 모두이다. 여기 헬라인이란 말은 보통 이방인을 가리키며, 또 이방인이란 의미로 간주되는 것은 성경 중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법이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다.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 이렇게 말 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보다 더 낫 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마치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그 특권을 자랑하고 있던 유대인의 오만을 타도하기 위해서이다. 저들은 아브라함의 종족으로부터 나왔다는 것 이상으로 더 우월한 것은 없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우월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모두 공통적임을 말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서술하고 있는 결론의 근거가 된 논리는 그가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가 축복된 자손이다. 그리고 그 자손 안에서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이 하나로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상속인의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제공되었다는 사실로써 증명하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약속'은 저들을 자녀들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믿음은 항상 약속과 관련하여 결부되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