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2장

1. 성경 (갈2:1 ~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1)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3)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4)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5)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6)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7)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8)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9)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10)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1)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2)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3)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4)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5)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6)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7)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8)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1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0)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십 사 년 후에……" ; 누가가 사도행전 15장2철에서 언급한 여행에 대하여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지 거기에 대한 문제는 쉽게 알 수 없다. 그렇기는 커녕 이야기의 맥락(脈絡)으로 보면,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편을 생각하게 한 댜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녜 번이나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으로 기록했다. 최초의 상경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두번째는 그가 바나바를 데리고 헬라와 아시아 여러 교회에서 모은 연보를 가지고 온 때였다. 거기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2장25절에서 볼수 있다. 나는 여러가지 이유로 본절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때의 여행에 대한 일로 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바울이나 누가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은 사실과는 반대되는 것을 말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더우기 바울이 안디옥에 살고 있는 동안에 거기서 베드로를 책망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문제(儀式問題)로 기인(起因)한 논쟁의 결말을 짓기 위하여 여러 교회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파송한 그 이전의 일이었다. 만일 쟁론이 이미 해결되었고 사도들의 판결이 이미 공포되었다고 하면, 베드로가 그러한 의식으로써 체면을 차리려고 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갔었다는 것을 여기에 기록했고 다만 그 후에 자기가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했다는 것을 덧붙였는데, 베드로가 그러한 실수를 행한 것은 그 문제가 아직 의문시되어 확실한 해결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밖에, 바울은 신도(信徒) 일동의 동의에 의하여 착수한 그 여행에 관해서 다시 말하면 여행의 원인과 기여할 만한 여행의 결과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서신이 언제 기록되었는지도 사실 분명치 않다. 헬라인은 이것이 로마에서 보낸 것이라고 추정하며, 라탄 사람은 에베소에서라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본서가 기록된 것은 바울이 로마를 보기 전일 뿐만 아니라 저 의회가 개최되기 전, 곧 사도들이 의식을 어떻게 행할 것안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저들의 태도를 결정하기 이전의 일이라고 생각 한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을 애먹이며 괴롭히기 위하여 거짓으로 사도들의 이름을 빙자하여 저들의 최대한도의 것을 다하고 있는 때에, 한편 바울은 가는 데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포된 저 결의를 무시하고 지나갔다면 이 얼마나 소홀한 일인가!

 

분명히 저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한마디 말로써 충분했다. '너희는 나를 대항하기 위하여 사도들을 내세우고 있 다. 그러나 사도들의 결정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냐?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파렴치한 허망에 마음 빼앗기고 있다고 본다. 너희는 마치 사도들로부터 그런 명령을 받은 것처럼 사도들의 이름으로 이방인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서면에 의한 사도들의 해답은 양심을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더우기 바울은 본서 서두에서 갈라디아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을 그렇게도 속히 떠났다고 저들을 책망했다. 그래서 갈라디아인이 복음으로 나오게 된 후 의식에 관한 이 논쟁이 일어날 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경과했다는 걸론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십사년이라는 것은 바울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때부터 다음 상경한 때까지에 관한 것이 아니고 바울이 회심한 때부터 시작하여 계산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렇게 할 때 결국 두 번의 여행 사이의 기간은 십일년이 된다•

 

"2. 계시를 인하여 율라가" ;  바울은 그의 사도직과 교훈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하여 그의 행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호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교훈을 확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여행을 기도하고 인도한 분이 하나님이시었다면, 당연히 그의 교훈도 인간의 동의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도 확증된다는 것을 말해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도들의 이름과 권위를 내세우고 바울을 난처하게 만들며 공격하던 무리들의 완고함을 정복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지금까지 보아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선고(宣告)를 내리심으로 모든 논쟁은 종결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희에게 제출하되" ;  첫째 이 ‘제출’ 이라는 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바울에게 그가 가르쳐야 할 것을 지시한 것이 아니고, 바울이 사도들에게 그가 지금까지 가르쳐 온 것을 보고한 것이고, 그것을 사도둘이 손수 서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승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은 사도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여러가지를 속이고 있다는 등으로 그를 중상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명확하게 자기는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한 복음을 사도들에게 제출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에 의하여 그가 위장하고 있다든가 속이고 있다는 등으로 억측할 여지는 없어지고 말았다. 이 일이 최후에 어떤 결론을 낳을지는 결국 밝혀질 것이다. 사도들은 바울이 저들의 명령없이 시작했다고 비난하지 않고 바울이 행한 일에 대하여 아무 문제없이 그리고 불만도 없이 시인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 역시 바울을 인도하여 사도들에게로 오게 한 갈온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도들에 의하여 사도로 임명된 것이 아니고, 다만 저들로부터 사도라는 것을 승인 받은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말하게 될 것이다. -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할이라." ;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인간의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가 보존될 수 없단 말인가? 당치도 않은 소리 !  온 세상이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확고히 언제까지나 본래대로 손상당하지 않은 채 존재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은 가령, 사역한 결과 아무 열매가 맺지 않았다고 해도 결코 시간 허비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뜻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의 사역을 의심하고 주저하는 마음으로 하는 자에게는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달음질한 것이 헛되다’는 것은 여기서는 노력해도 신앙, 건설에 있어서 거기에 합당한 덕성이 따르지 않으면 그의 사역은 아무 효용도 없다는 의미이다. 선동자들이 기만하여 바울이 말한 교훈온 사도들의 교훈과는 반대된다고 주장할 때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유혹에 넘어가게 했고 온통 그 생각을 바꿀만큼 마음이 약한 자들을 흔들어 놓은 격렬한 타격이었다. 그러므로 실재 많은 사람이 변절했다. 참으로 확실한 신앙온 사람의 동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로지 순수한 하나님의 진리에만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말겨야하며 또 그렇게 할 때 어떠한 사람들이나 천사둘이라도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이나, 건전한 교훈을 겨우 맛 볼 정도의 사람, 그리고 뼈와 골수 속으로 건전한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교회의 저명한 지도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을 때 이만저만한 시련이 아닐 수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단은 때때로 갈은마음, 갈은말소리로써 하나가 되어야 할 사람들의 다름과 불화를 보여주면서 심지어 믿음이 강한 사람들까지도 혼란하게 하여 뒤집어 엎기까지 한다. 말하거는 어렵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저 불행한 논쟁이 얼마나 많온 사람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신앙을 요동시켰 는가 !  그것은 가장 권위있는 사람들이 서로 중요한 문제를 두고 격렬하게 논란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들 모두가 의견을 갈이 한다면, 이것은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단이 아주 교활하게 복음의 진전을 방해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기선(機 先)을 꺾으려고 결심했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사도들과 온전히 의견을 갈이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지기만 하면, 모든 장애는 곧 없어질 것이며, 약한 사람들온 누구를 좇을 것인가에 대하여 더 이상 의심할 팔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고 있는 뜻은 다음과 갈다. '내가 지난날 수고해 온 것이 헛수고가 되지 않고 또 이후부터 달리는 것도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많은 사람을 번거롭게 한 문제, 다시 말하면 나 바울을 신임 할 것인가 아니면 베드로를 신임할 것인가 하는 의심을 제거해 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둘 다 내가 지금까지 가르쳐 온 모든 것을 만족한 의견의 일치로 승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도 과거의 바울처럼 교회의 품성을 더 높이기를 전심으로 바란다면, 자신들 안에서 서로 의견을 갈이 하려고 훨씬 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 바울은 또 다른 논거에 의하여 사도들이 자기가 한 일을 신임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사도들이 자기와 의견을 갈이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바울이 사도들에게 할례를 받지 아 니한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왔지만, 사도들이 그 사람을 주저없이 형재로 인정하면서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바울온 그가 할례 받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는데, 할례라는 것은 어떻게 하든간에 좋은 것이기 때문에 건설적인 필요에 따라 시행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허락되었지만, 건덕(建德)을 위해서는 무엇이 유익한가 하는 것을 분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법칙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그의 무할례가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당시 바울은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며, 바울은 그 사람들을 친절히 돌봐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팔요했다면 디도에게도 기꺼이 할례를 행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남몰래 지치게 할 수 없어서 그들을 돕는 일이라면 온갖 성의를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거짓 형제들은 바울의 교훈을 중상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무엇인가 있는 듯하면 곧 소문을 퍼뜨렸다. '보라 이 영웅적인 자유의 옹호자가 무지한 자들 가운데서 쓰고 있던 대담하고 흉포한 모습을 사도들 앞에 나올 때는 어떻게 벗어놓는가라고 ! 이제 우리는 한편 신앙이 약한 사람들과 화합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또 동시에 악의를 품고 우리의 자유를 신중히 노리고 있는 도배(徒輩)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대한 사랑 때문에 신앙이 침해 당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우리를 가장 좋온 길로 인도하지만, 양쪽 다 좋은 경우라면, 무엇보다 첫째로 중요시해야 될 것은 언제나 신앙이다. 

 

"4. 이는……·거짓 형제 까닭이라." ;  이것은다음과 갈온 두 가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거짓 형제들이 끈질기게 할례를 요구하며 강요했지만, 그는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 혹은 "바울이 단호히 그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은, 거짓 형제들이 곧 바로 그것을 가지고 그를 중상 할 이유로 삼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저들은 우정의 가면을 쓰고 바울의 동료 중에 재빨리 들어와 박히어 두 가지 중 어느 쪽을 택해도 그것으로써 그를 두들겨 잡으려 했다. 즉 바울이 의식의 관습을 공공연히 무시하면 유대인을 선동하여 바울에 대하여 악감정을 일으키게 하며, 반대로 그가 삼가 자유를 쓰지 않으면 저들은 들고 일어나 바울을 이방인들 가운데서 바울이 마치 당황하여 자기의 교훈을 취소라도 한 사람처럼 만들어 놓고 의기양양하려는 것이다.

 

나는 두번째 해석을 취하는데, 바울이 저들의 책략을 알았기 때문에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여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럼으로써 독자들이 할례라는 것은 마치 그 자체가 나쁜 것처럼 비난할 것이 아니라 문제는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하는 그 필요성과 관련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말하려는 것은 "여기에 할례 이상으로 중대한 문제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할례받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들이 할례를 율법화하려고 했지만, 그것온 그처럼 강요할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  이 확고 부동함은 바울의 교훈을 보증하는 인장이었다. 그를 비난하며 중상할 기회만을 찾고 있는 거짓 형제들에게 압박당하면서도 바울은 항상 확신에 넘쳐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그가 사도들을 기만한다는 등의 혐의를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시라도 비굴하게 거짓 형제들에게 굴복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자유가 분쇄된 것을 입증하는 것처럼 당황한 행동으로 저들에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언제나 온화하고 참을성 있게 모든 사람에 대하여 자신을 기꺼이 낮추어 화합하려는 태도를 일생동안 변치 않게 하였다.

 

"복음의 진리로…" ; 바울이 만약 다론 사람들에게 굴복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그의 자유를 상실 할 그런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굴복하면 그것은 다론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범례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유익한가 하는 문제를 신중히 고려했다. 이와 갈이 실족을 피하는 것이 문제인 경우는 어디까지 나아가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며,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일에 관해서는 건덕이라는 점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부분의 요지는, “우리는 형제들을 섬기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주님을 섬겨야 하며, 그리고 우리 양심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 형제들은 성도들을 멍에 아래 얽어 매려 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절대로 순복해서 안 되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라는 것은 복음 특유의 순수함, 혹은 같은 의미이지만 순수하고 건전한 교훈이란 뜻으로 해석 된다.

 

거짓 사도들이라고 해서 복음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고 복음에다 저들의 생각을 혼합하여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복음은 이미 거짓 되고 겉모양만 꾸미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태는 우리가 아무리 사소한 정도라도 그리스도의 순수성에서부터 이탈해 나가면 언젠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다. 교황과의 무리는 자기들이 참된 복음을 소유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벌였는데 얼마나 뻔뻔스러운 일인가 !  왜냐하면 저들의 복음은 많은 몽상에 의하여 부패했을 뿐만 아 니라, 사곡한 교훈에 의하여 혼합되어 복음의 품질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복음의 특유한 순수성을 때 묻지 않고 완전히 보존하고 있지 않으면 다만 복음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 혹은 복음의 요지를 막연하게 지킨다는 것만(託 1)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한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온건한 것처럼 겉모양만 꾸며 가지고 우리를 교황과와  화해시키려던 무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마치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돈이나 소유지나 재산을 약간 버리거나 양보라도 하는 것처럼, 종교의 교의(敎義)를 버리거나 양보하는 것이 허용된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만일 복음이 순수하지 않으면 그것은 벌써 참된 복음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을 보면, 바울이 이러한 화해 방법을 얼마나 싫어했는가를 알 수 있다.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  바울은 자기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운 바가 없다는 것을 갈라디아인이 완전히 파악하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았다. 폴퍼리우스(Porphyry)와 쥬리아누스(Julian)는 이 부분을 해석하기를 이 사람은 거룩한 오만자라고 비난했는데, 이유인 즉 그는 많은 것을 스스로 자칭해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그는 어떤 스승이나 돕는 자 없이도 선생이 되었다고 자랑하며, 또 그는 남보다 열등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팔요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자랑하는 방법이 오히려 성스럽고 칭찬할 만하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사도들 밑에서 배웠다고 그의 대적자들이 인정하도록 했다면, 그는 두 가지 중상(中傷)거리를 그의 대적자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지체없이 결국 너는 어떤 것을 발전시켜 왔고, 너의 지난날의 과오를 정정하면서 지난날에 하던 무모한 짓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 뿐이지 않는가’ 라고 말할 것이었다.

 

이렇게 할 때, 첫째 그의 모든 과거의 교훈은 블량한 것처럼 의심을 받게 되고 그가 쌓아 올린 덕은 완전히 분쇄될 것이었다. 둘째 앞으로 오랫동안 그는 보통 다론 일반 제자나 다름없는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의 권위는 형편없이 저하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경건한 자랑을 한 것이, 자기 자신의 무엇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그 의 교훈을 견지(堅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야심에서 난 투쟁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어떤 인간과 관계된 문제가 아니고 그의 교훈의 권위와 때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그의 사도직이 가령 어떤 인간의 위대함에 의하여 어두워지게 될 것을 바울이 결코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상대하고 있던 이 번견(番犬)들을 가령 이것으로써 제압하고 침묵시킬 수 없다고 해도 저들이 짖는 것을 논박하기에는 충분하다.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  이것은 메어서 읽어야 한다. 그가 이 괄호의 부분을 삽입한 것은 그가 인간의 판단을 중요시 않는 것을 반대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 귀절은 여러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Ambros)는 바울을 곤궁으로 몰아넣기 위해 사도들을 끌어들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곁들여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바울이 말 하려는 것은 "실로 저들은 고기 잡는 것밖에 모르는 가련한 불학 무식자들이라는 것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런 사실에서 본다면 나야말로 어릴 때부터 가말리엘(Gamaliel) 문하에서 훌륭한 교훈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은 모두 무시해 버린다. 왜냐하면 이러한 외부적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줄을 알기 때 문이다”라는 뜻으로 해석 한다.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제롬(Jer ome)은 더 날카롭게 해석했는데, 마치 바울이 최초의 사도들을 간접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보고 ‘가령 저들이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기들의 의무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의 직무의 존엄함도 저들의 명성도 저들을 심판에서 면하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라는의미라고 한다. 나에게는 다음 해석이 더 단순하게 보이며  바울이 뜻하는 바에 더욱 합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바울은 시간적 순서로 보면 저들이 먼저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지금 바울이 저둘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현재 저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정신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말하려는 것은 과거의 시간에 관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저들이 이미 사도였을 때 바울 자신은 이직 그리스도의 신앙과는 인연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과거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먼저 온 자가 우선권이 있다는 잠언을 이 경우에 적용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사립의 외모를 취하지 이니하시나니" ;  내가 앞에서 언급한 모든 해석 외에 다음과 갈이 제삼의 해석에도 약간 주목할 만한 특색이 있다. 즉 이 세상의 통치 형태에서는 사람을 차별 대우하는 수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아주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을 지 모르겠으나 주님이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라"(신 1 : 17)고 말씀 하신 것은 현세적 질서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논거에는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귀절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뜻하는 바는 다만 사도들이 차지한 존귀한 지위도 바울이 하나님께 부름받은 것을 방해하지 못했다는 것과 그가 무(無)와 같은 존재로부터 갑자기 저들과 동등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저들 사이에서는 차이가 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면전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며, 또 하나님의 소명은 어떠한 편견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더욱 신중히 간수해야 할 진리) 이라는 것을 승인하지만, 이것이 대체 베드로와 그의 동료 사도들, 즉 저들 자신 뿐만 아니라 저들의 성결함과 영적 은사에 있어서도 존경 받을 만한 분들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모를 의미하는 이 'Person'이란 말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선한 양심과의 대조를 보이고 있으며 성경은 이것을 자주 그런 의미로 쓰고 있다(행 10:34, 벧전 1:17).

 

그러나 경건, 올바론 열심, 성결, 그 밖에 이것과 유사한 은사들온 사도들에게 있어서 특이한 은혜요, 저들을 존경 하도록 인정받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기서 사도들에게 있던 은사들이 마치 외면적인 것에 불과한 것처럼 이것들을 경멸하고 있는 것갈이 보인 다.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바울이 여기서 사도들을 평하고 있는 것은 저들의 가치에 관해서가 아니고,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의 어리석고 무익한 자랑 때문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저들은 말하자면, 자기들의 무가치한 상품을 팔기 위한 목적으로 이것을 잘 보이도록 선전하기 위해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의 이름을 끌어다 붙이고는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을 경멸하기 위해 교회가 사도들에게 나타내고 있는 존경심을 자기들의 야심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사도란 무엇인가, 저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거짓 형제들을 상대한 논전(論戰)과 분리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고 거짓 형제들이 쓰고 있는 가면을 논파(論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후에 할례를 논할 경우에 그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유혹한 자들이 할례에 관하여 생각한 거짓되고 사악한 사상에 관하여 논하게 된 것처럼, 여기서도 사도들에 관하여 저들이 이 세상에서 빛을 낸 가면처럼 외적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무(無)라는 점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말에 의하여 분명히 밝혀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저들이 바울보다도 사도들을 택 하느냐 하면, 저들이 바울보다도 먼저 사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순전히 하나의 가면에 불과했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그 문제와는 관계없이 바울을 볼 때 바울은 충심으로 사도들을 존경했고 또 사도들에게 부여된 각양 온사를 찬미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그의 특별한 겸손인 것이다. 바울은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자기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라고, 그리고 이처럼 존귀한 지위를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  이 말은 ‘저들이 아무 일에 관해서 나에게 지시한 바가 없다’라고도 읽을 수 있다. 바울이 앞에서 두 번이나 갈은 말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의미는 명백하다. 사도들이 바울의 복음을 들을 때, 거기에 반대되는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보다 완전하고 더욱 좋은 것으로 간주될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히려 바울의 설명에 반대했고 그의 교훈을 그대로 곧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경우처럼, 저들 사이에서 단 한 말도 정정한 바가 없다. 다만 그것은 바울이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이것을 통제하려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자기가 가장 훌륭한 어론인 체하고 우선 자기가 말하려고 민첩하게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그전부터 그릇되게 소문난 자기의 신앙을 저들에게 밝히 말하고 저들 측에서는 여기에 동의하고 승인한 것을 말한다.

 

"7. 내가 무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한 것을 보고" ;  바울은 사도들이 잘 돌봐 주어서 저들의 의지와 호의에 의하여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미 자기에게 부여하신 것을 그에게서 빼앗기지 않 도록 하기 위해 처들이 사도칙의 영예를 자기에게 인정했다고 주장하고 있 다. 바울은 항상 자기가 하나님의 은사와 임명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 는 것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기에 첨가하여 사도들 자선이 :::L 를 그렇게 승인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을 동해서 사도들도 하나 님의 선택에 관해서는 반대하기를 두려워하며 감히 할 수 없었던 것을 처 무례한 자들은 시도하려 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논 할례의 사도칙이타는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자기에 게 있는 고유하고 록수한 문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 바는 이방인에게 전도하기 위해 사도로 임명되었다는 데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요, 사도들도 이 것 을 수동적 으로 받아들일 분만 아니 라, 여 기 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불신앙적이기 때문에 처들은 그것을 비준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그태서 우리는 처들이 이미 부여된 계시에 얼마나 순응하며 자기들 사이에서 책임을 분담했는가를 볼 수 있다. 즉 바울과 바나바논 이 방인의 사도가 되고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열 두 제자에게 온 세계로 나가도록 분부하 신 :::L 명령과 상충된 것갈이 보인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이령계 답한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재자 각 개인에게 대하여 말씀한 것이 아니고, 저들의 임무의 목표가 일반적으로 말씀된 것이다. 즉 구원이 복음의 교훈에 의하여 모든 나라, 모든 사람에 계 선포되 어 야 한다는 것 이 다. 왜 냐하면 사도들이 전 세계에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열 두 사람 중 유럽까지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에 관 하여 믿고 있는 것은 다만 전설에 블과한 것으로 나는 생각하며, 어떻든 그 것은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처들 한사람 한사람의 임무가 이방인을 대해서나 유대인을 대해서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하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인정한다. 말하자면 결국 각 사도가 유대인 가운데 서만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밝힐 책임을 지고 있다 고 나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과거에 왕국이나 공국(公國), 그리고 주(州)를 나눈 것처럼, 이 경계선을 넘으면 위법이 되도록 분할을 실시하기 위해 자기들 사이를 구분한 것같이 생각할 것온 없다. 바울은 어디에 가든 지 먼처 유대인을 위해 항상 수고했다는 사실온 우리도 알고 있는 바이다. 그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자기를 유대인에게 보낸 사도나 교사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론 사도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누구든지 인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는 자유가 역시 허락되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밖의 사람들에 대하여 이 권리를 행사할 것 이다. 다만, 다른 사도들이 주민의 대부분이 유대인인 지역에서 생활한 테 대하여 바울은 아시아, 헬라, 그리고 그밖에 먼 지역을 순회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된 것이다.

 

그분만 아니라, 주 님이 태초부터 바울이 성별될 것을 명할 때, 바울이 안디옥과 시리아를 뒤 로 하고 이방인둘에게 봉사하기 위해 해외의 먼 나라로 파송될 것을 주님이 바라셨다는것이다. 그러므로그의 사도칙온통상적으로는이방인에대한것 이고,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는 유대인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다 론 사도둘은 특별히 유대인을 처희들에게 부담시키기 위해 선택한 것이다. 다만 그것도 필요한 경우에는 처들의 칙무도 이방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라는 조건하에서였다. 그러나 이 두번째 것은 저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것으 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베드로의 사도칙이 특히 유대인을 위한 것이라면 로마 교도들은 도대체 무손 권리로써 이 베드로로부터 교회의 수위 계승권(首位繼承權)을 자기들에게로 끌어 불이는지 알 수 없다 .. 만일 로마의 교황이 베드로의 후 계자로서 수위성(首位性)을 횡령한다면 당연히 그는 그 수위성을 유대인 가 운데서 행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의 첫째 서도로노 밝혀졌지 만, 처들은 바울이 로마의 사교(司敎)였던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므로 교황 이 수위성을 유지하려면, 유대인 가운데서 유대인으로 구성된 몇 개의 교회 를 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뜻에 의하여 그리고 전 사도단 의 동의에 의하여 우리에제 할당된 분을 우리의 사도로 인정해야만· 한다. 이 권리를 베드로에게 전임(轉任)시키는 자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명과 인간의 임명을 찰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할례와 무할례라는· 두 낱말은 은유(隱"lftr)라는 표상(表象)으로써 유대 인과 이 방인을 의 미 하는데 이 용법은 성경 중에서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알려졌기 때문에 설명할 팔요 가 없다•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삼으신 이가……" ; 바울은자기에게 위임된 칙 (職)은 당연한 권리에 의하여 자기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주 님이 능력을 자기의 사역 속에 나타내시기 때문이타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보아온 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이처럼 나타났다고 하는사실온 그의 교 훈의 확실함을 보증하며 그 가르치는 직을 인정하고 비준하기 위한 인감(印 鑑)과같은 것이다. 그리고하나님의 효과적인 역사란 바울의 설교의 결과와 관련된 말씀인지 혹은 당시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혜와 관련된 말씀인지 분명 치 않다. 나는 이 말씀을 단순히 진보(進步)라는 의 미 로 생 각 하지 않고 바울이 다른 곳(고전 2:4)에서 언급한 대로 성령의 능력과 효력 이라는 의미로 생각한다• 요컨대, 사도들 사이의 일치, 다시 말하면 분담은 무익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봉인(封印)한 선고(宣告)였다는 것을 그는 말 하고 싶었다.

 

"9.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  이 말씀들을 가지고, 바울은 수위 사도 (首位使徒)들까지도 칭송하며 촌경할 만큼 저들의 마음을 갑동시킨 하나님 의 은혜를 전혀 중요시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오만한 멸시를 간접으로 비 난하며 그 본색을 폭로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처음부터 분명히 인 정해 온 것을 처 무리들이 몰랐다든가 인정하지 않았다든가 하면서 무지를 가리우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사가 살아 약동하지 않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과 겨 루기를 원치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곳은 어디서든지 그 역사하십 을 막지 말고 그 은혜의 여사를 돕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서 가르 치고 있다. 그래서 사도들까지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했고, 그 은혜가 사도들을 갑동하여 소위 사역의 협정을 맺도록 한 것 이다.

 

"야고보와 게바" ;  내가 벌써 말했지만, 이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이었다. 그가 요한의 형재라고 할 수 없다·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헤못이 좀 더 일찌기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에는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사 도들 중에서도특벌히 훌륭한사도였다는 것은 아무태도어이없게 여겨진다. 그런데 본문의 이 야고보가 사도둘 중 재 일인자였다는 것을 누가도 분명히 서술하고 있는 바이다.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교회 희의의 논쟁접에 대하여 최종적인 결론과 결정을한자가 이 야고보였다고 말하며(행 15:6), 그리고 사도행전 21장 18철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장로둘이 야고보의 집에 모였었다고 말한다. '기둥갈이 여기는'이라고 그가 말한 것온 경멸히 여기고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세상사람들이 통용하고 있던 생각을말한 것 이며, 이 사실로부터 처들의 행동은 그리 쉽게 거철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 증하고 있다.

 

여기서는 권위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데, 야고보가 오히려 베드로보다 더 중요시되었다는 사실온 놀랄 일이다. 아마 그것은 야고보가 예루 살렘 교회를 갑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둥'이라는 말에 관해서는, 다론 사람보다 뛰어난 재능을소유하고, 보다깊은 지혜가풍부하며, 다론 사람보 다 큰 온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권위에 있어서도 역시 상위(上位)에 오르 는 것이 당연한 줄로 우리가 알거니와,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무엇인가 뛰어난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온 응당 . 그만한 촌경과 영예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의 온사와 은혜를 통하여 나타나는 곳온 어디든지 간에 그것을 촌경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망은(忘恩)이며 불경건(不敬虎)이라고 할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이 목사 없이는 살 수 없음갈이, 감독이나 지도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목사들의 회합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모든 사 람 중에 머리가 되는 사람은 섭기는 자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전리가 따라 야 한다.

 

"교제의 악수틀 하였으니……" ; 이러한 겨식을 따라 확실히 저들은 바울의 교훈을 승인했다. 그것도 아무 반대 없이 했다. 결국 처들이 무엇인가 의견을 달리했다면 보통 하는 식대로 그에게 대하여 항변했을텐데 그런 것은 전혀 없고, 자기들이 바울과 갈은 복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밝히고 바울이 그의 직무에 있어서 완전히 자기들의 동료인 것을 인정하기까지 한 것이다. 오 히려 그러한 교재의 조건을 바울은 이방인에게, 저들은 유대인에제 전도 하도록 책임을 피차 분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동등하며, 바울 의 편이 저열(低劣)하다 하는 것은 전혀 없다. 교제의 악수(오른손)를 했 다는 것은, 여기서는 공동으로 인정하는 동료라는 것을, 약속한다는 의미이다.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 ; . 유대에 있던 형제들이 극단적인 빈핍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이 말씀을 보아서도 확 실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저들이 다론 모든 교회에다가 침을 지우지 않았 을 것이다. 이 궁핍은 어느 정도는 유대 나타 전체를 업습한 여러가지 재액 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특히 처들의 재산이 동국인(同國 人)의 무자비한 소행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빼앗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길 데없이 풍성한 은총인 복음을 이미 주었기 때문에 자기들과 연결된 이방인 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히 도리에 맞는 일이다• 바울은 사도 들이 자기에게 요구한 것을 자기는 충실히 다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반대자들에게 중상할 름을 주지 않았다.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 바라건대, 모든 상황을 주의깊게 고 찰하는 사람은 아마 누구든지 나와 의견을 갈이 하게 될 것이다. 나의 의 견이라는 것은 이 사건은 사도들이 이방인에게 의식(儀式)의 침을 지우지 않도록 하자는 결의를 하기 이전에 일어 났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 대한 문제가 벌써 결정된 후였다면, 무엇 때문에 야고보나, 혹 야고보가 보 낸 사람들과 의견상 충돌이 되지 않을까하고겁넬 팔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베드로의 그런 의식을 떤박하면서라도 더욱 계속하여 자기의 복음을 확고히 지켜 나가야만했다. 첫째로 바울은 자기 복음의 확실성이 베드로나 그의 사도들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들이 자기들 마 음대로 바울의 복음에 권위를 더하거나 아니면 모욕을 주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둘째로 그는 아무 예외나 반대도 없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고 있는데, 그것도 모든 사람의 동의에 의하여 최대의 권위를 언은 사람들로부터 특별히 인정 받고 있음을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이미 서술한 대로 바울이 한걸음 더 나아가 베드로가 반대측으로 기울어쳤기 때 문에 내가 그를 꾸짖었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하여 본 문제 로 들어 가 모든 사항이 관련된 교의 문제 (敎義問題)를 논하기 시 작한다. 그 태서 이로 말미암아 그의 교훈이 얼마나 확고했는가를 알게 된다. 그는 그 교훈에 대한 사도들의 자발적인 찬성을 받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 대해서 도 끊임없이 자기의 교훈을 유지하도록 했고 또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교훈을 확실하고 불변불패(不變不敗)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할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인가 ! 동시에 바울은 한갓 작은 제자에 불과하며, 사도라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에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등의 중상도 물리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이처럼 베드로를 꾸짖었다는 것은 바울과 베드로가 동등하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작은 자에게 지극히 큰 자를 비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므로 누가 어떤 사람을 비난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 비 난한 사람은 비난 받을 사람과 반드시 동등하다고논 할 수 없는 것이다. 왜 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도 지극히 큰 자에 대한 이런 자유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비난의 성질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기독자가 다론한 기독자를 비난한 것처럼 단순하계 베드로 를 비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도로서의 자기 직무의 의무를 좇아 사도의 권한을 가지고 비난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기서 또 한번 로마 교황 제도가 전뢰(電雷)의 일져에 의 하여 타파(打破)당한 것처럼 얻어맞고 있다. 특히 로마의 적그리스도가 자 기에게는 자기 행동에 대하여 사람에게 변명해야 할 의무가 없다고 참칭(潛 稱)하며, 전 교회의 재판에서 자신을 면제시킴으로써 그의 뻔뻔스러움이 오 히려 유죄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단 한 사람의 인간이 전 교회 앞에서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지만, 그것은 무모하거나 불법적인 대담함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능력을 좇아서 한 것이다. 그 래서 베드로도 자신을 이 훈계에 겸손히 굴복시켰다. 앞에서 말한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이 두 장에서 포함된 모든 내용은 로마 교도들이신권(神權)에 근거했다고의람되게 말하고 있는처 전체적인 수위성(首位性) 을 속시원히 뒤집어 엎고 있댜 하나님은 처들이 주장하는 수위성의 창시자 로 삼으려면, 처들은 또 다른 성경을 하나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 들이 하나님을 공적(公敵)으로 대하고싶지 않으려면성경에서 이 두 장(章) 을 말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책망할 일이 있기로" ; 헬라어를 칙역하면 ‘책망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말은 명사의 위치에 있어서 응당 책망받을 사람이란 의미로 쓰여 진 것이 들림없다. 크리소스톰처럼 다른 사람들이 이전부터 베드로를 비난 하고 불평해 온 것이타는 뜻으로 생각하는 해석은 매우 약하다. 그리고 재 몸이나 크리소스톰이 생각한 것처럼, 사도들이 모든 사람 앞에서 이러한 연 극을 미리 계획하고 연출했지만 그것은 처들이 인수한 것이고 실재로는 바 울이 베드로의 행위를 악하계 본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은 위의 사실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해석들은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원문에 의해서도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원어의 의미는 저들이 말하는 대로 얼굴을 향하여' 혹은 ‘면전에서'인데, 베드로는 면박 을 받으면서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만일 바울 과 베드로 사이에 어떤 의견 차이가 있었다면 창피를 주지 않기 위해서 사· 적으로 가만히 말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경박한 여측 인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분열된다든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위태하다 든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매장된다는 등의 최악의 사건 앞에서는 그밖의 다몬 그리 중요하지 않는 스캔들(scandal)은 응당 경시되어야 하되, 일반에 계 알려진 이런 죄는 모든사람의 면전에서 시정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제 롬이 논거 한 주요한 논지 는 아주 약하다. 제 롬은 다음과 갈이 말한다. 어째서 바울이 남을 책망하고서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이 칭찬 받고자 했을 까? 도처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노릇을 했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있지 않는가(고전 9 : 20) ? 여 기 에 대 하여 나는 베 드로의 행위는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바울아 유대 인과 적응한 것은 자유의 교훈에 모순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만이 그렇게 했 을 분이기 때문이다. 그태서 디도에게 할례를 행치 않는 것도 복음의 전리 가 손상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굴종을 강조하 는 것 갈은 형태로 처둘을 유대화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렇게 함으로써 그 는 바울의 교훈을 오해하도록, 말하자면 편견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베드로는 지켜야 할 한계선 안에서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교훈을 주기 위한 행동보다도 인기를 얻기 위한 욕망이 더 강했고, 무 엇이 교회의 몸 전체에 있어서 유익한가 하는 문제보다도 유대인이 무엇을 기뻐할 것인가 하는 쪽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서 어거스탄 의 판단이 훨씬 더 적철하다. 어거스탄은 사도들 가운데서 이것이 미리 기 획되었었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열십 에 감동되어 죄적이며 허위적·0,1 베드로의 연극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 것이 교회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타고 했다.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 이 사건의 배경이 여기 기록되었다. 즉 베드로는 유대인 때문에 이방인들에게서 물러났고 그 결과 베드로는 이방인이 복음의 자유를 단념하고 율법의 멍에에 복종하지 않는 한 저들을 교회의 공동체에서 몰아내는 샘이 되었다. 만일 바울이 여기서 침묵을 지켰다면 그의 교훈은 온전히 땅에 떨어지고, 그의 사역에 의하여 지 금까지 이 루어 놓은 모든 덕 화(德化)는 완전히 엉 망이 될 뻔했 다. 그러 므로 그는 남자답게 일어나 단호히 싸워야 했던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 려고 화합하는 문제는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지 나치게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나 않는가, 혹은 사람의 비위를 상하계 하지 않았나 걱정하면서 올바론 길에서 벗어나는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십 지어 베드로가 이런 처지에 빠졌다고 하면 하물며 우리갈은 사람이 조십하 지 않으면 틀림없이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틀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  어 떤 사람들은 이 것 을 이 방인들에 게 관한 언급으로 보고, 이 방인들은 베드로가 보여준 모본때문에 미혹되었고 마침내 후되하고 마음이 변하기 시 작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와 바나바 그리고 저들의 추종자 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적합한 줄로 안다. 복음의 전리에 올바로 접근하 는 것이 참된 교훈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방인을 유대인 과 연합시키고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치를 얻기 위해 율법의 의식을 지키도록 강조함으로 경건한 양십을 구속하거나 침묵함으로 자유의 교훈을 매장해야 한다는 것은 업청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여기서 ‘복음의 진리'타는 말을 앞에서 말한 것과 갈은 의미로 사 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과 대조적으로 베드로와 그밖의 사람들은 복음을 변장하여 오히려 볼품없게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싸워야 한다는 것은 바 울에게 있어서 십각한 문재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바울과 베드로는 교 의(敎義)에 관해서는 완전히 일치했다. 다만 베드로가 교의에 관해서는 생 각하지 않고 유대인의 환십을 사기 위해 너무 비굴하계 처신했기 때문에 일 울 원만하계 처리하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비난 받을 것이타고 한다.

 

그밖 에도, 베드로논 할례의 사도였기 때문에 이방인의 구원보다도 유대인의 구 원에 한층 더 관십을 가져야만 했었다는 또 다론 구실을 가지고 베드로를 변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사람들은 바울도 역시 이방인 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훌륭화계 행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이 바울의 입을 동하여 비난한 것을변호하는 것은어리석은 것이다. 여기서 문재가 된 것은 인간에 관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누록에 의하여 오영될 위험에 놓인 복음의 순수성이었다.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  이 실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에게 그릇된 생각을 갖도록 하는 과오를 법한 자들은 그것 이 교회의 이이에 관계되는한, 공적으로정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이다. 그 목적은, 범한 죄가언제까지나처벌되지 않고 있음으로써 사람들이 그 그 룻된 모본을 따라서 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다른 곳(딤 전 5 : 20)에서 장로들은 그 말은 직무 때문에 장로 아닌 다론 사람들보다도 더욱 그들의 행위와 모본이 되어 남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많다고 말하면 서, 그렇기 때문에 장로들에게는 이 원칙이 더 업겨히 지켜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빛을 피하지 않았다는 것을 찰 이해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의 이익에 관한 올바론 주장을 모든 사람 앞에서 솔직이 변 호했지만 이것은 극히 유익한 행위였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 …" 베드로에게 대한 바울의 충고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 쳤다. 첫째로 바울이 베드로를 꾸짖은 것은 베드로 자신은 율법 준수를 면하 려 하면서도 이방인에게는 율법 준수를 강요한다는 것은 이방인에 대하여 올 바른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온 타인에게 부과한법에 동일 한 법을 자기도 마땅히 지켜야 한다는 것인데,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유대인 처럼 생활할것을 강요하면서 유대인인 그자신은자유롭계 행동하려고 했던 중대한 최를 법한 것이다. 율법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요, 이방인에게 주어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은 견국 가장 작은 명제로부터 시작하여 가 장 큰 명재에 이르는 논법을 취했다. 건덕(建德)을 위해서 의식을 지킨다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고 또 이것을 무리하게 강요 당하지 않는 한 지켜도 좋고 지키지 않아도 좋홍 문제이다• 더우기저 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15. 우리는 븐래 유대인이요……" ;어떤 사람들이 바울은 여기서 반대자들 이CE: 2) 주장하는 것, 즉 유대인은 소위 많은 특전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철하기 위해 반대자의 입장을 선취(先取)하려고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도 찰 알고 있다. 유대인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처들 자신이 주장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율법 을 받은 자가 그렇 게 주장한다면 이 것은 분명히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들은 이방인과 처들 사이에 일정한 특칭이나 표시에 의하여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 는 이 주장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참시 후에 접하계 되겠 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전적 동의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것을 바울 자신의 입장에 관한 전술로 보고 ‘만일 네가 율법의 무거운 짐을 유대인에게 지운다면, 그것은 사리에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있 어서 율법은 자손대대로 세습된 고유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로 생각 한다. 그러 나 이 해석도 타당하지 않다.

 

그러 므로 우리 는 예 상으로써 시 작하는 바울의 논의 의 둘~~ 부분으로 나야 가자 왜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다시 말하면 이방인은 세속적이 며 불순했고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댁되었으므로 거룩한 자들이라 는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인은 이 린 우월한 특권을 위해 싸 위야 했다. 그러나 바울은 교묘하계 앞질러서 그것을 공격의 재료로 사용한 것이다. 결국 그만큼 우월한 특권을 가지 신앙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대인도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한 고 하면, 이방인이야말로 믿음으로 말 미 암아 구원 얻는다는 것이 바는 다음과 갈다. 즉 ‘ 얼마나 팔요한가? 그러므로 바울이 의미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보이 는 우리 가, 말하자면 계약에 의하여 항상 하나님과 믿는 것 외에 달리 구원 가까운 관계에 있는 우리까지도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찾을 수 없다. 들에게 구원 얻는 다른 길을 어찌 요구하겠는가? 그렇다면 하물며 이방인 하는 자들에게 구원 얻게하는 더 만일 율법이 그것을 추구 받은 우리들에게 구원 얻게 하'-l 팔요하고 유익 하다면, 율법 은 특히 그것 을 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C" 데 더욱 유익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 돌아간다면 하물며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복종하라고 어떻게 강요할 수 있으랴!,

 

‘죄인’이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도자주 그렇게 쓰여졌지만, 여기서도세속 직 인 사람, 혹은 하나님 으로부터 버 림 받은 자, 그리 고 하나님 을 온전히 반여 하는 인간이란 의미이다. 하나님과 사김이 없는 이방인이 바로 그런 인간이 었다. 거기에 반해서 유대인은 양자로 택정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 한 자로 구벌되었다. '본태'타고 하는 말뜻은처들이 태어날 때부터 인류의 타락에서 면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인 다윗도 죄 중에 출생했다고 고백했기(시 51 : 5)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가 저들을 속박하고 있던 본성적인 부패를 치료하므로 저들이 성화(聖 化)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이 은총을 대대로 건하게 했기 때문에 이 은총을 ‘본래’라고부른다. 이런의미로 그는로마서 11장 16철에 서 저들이 거룩한 뿌리에서 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타고 말할 때, 다음 말과 갈 온 의미이다 ‘우리논 거룩한 자로 태어났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공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래 유대인인 우리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우리는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묵적은 무엇인가? :i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이다.

 

무슨 이유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압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 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질과 효과로부터 결론하 여 유대인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 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처럼, 반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자기가 최인인 것을 고백하며, 행위로 말미 앙는 의를 단념한다. 여기에 벌써 주요한 문재가 배포되었다. 그래서 이 논 쟁의、 거의 모든 결론이 이 한 명제에 집결되었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이 귀철을 더욱 주의깊게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우리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문재는 ‘율법의 행위'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 는 것이다· 교황파의 무리는 오리겐과 제릅에 의해 찰못 지도되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의 외형과 그림자에 블과하다고 생각하며 또 마치 그런 것처럼 정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항상 율법의 행위라는 말을 보면 그것을 의식(儀式)으로 해석한다.

 

마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 없이 받은 의에 관해서는 바울이 논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처들은 ‘율법의 행위로써는의롭다함을 얻을자가 아무도 없지만, 행위의 공 덕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로 간주된다’는 생각을 모순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처들은 이것이 도덕적 행위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 아니 타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들 속에 도덕적 율법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 을 본문의 문맥이 밝히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청가한 거의 모두 가 의식적 율법보다도 오히려 도덕적 율법에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더우기 바울은 계속하여 율법의 의와 하나님이 우리를 값 없이 용납해 주시는 은혜 를 대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반대자들은, 바울이 만일 이 ‘행위'타는 말을 어떤 특정한 종류의 행위로 한정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부가어 (付加語)를 쓰지 않고 다만 ‘행위'라고만 했을 것이라고 항변한다. 나는 바 울이 이런 논법으로 표현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가령 사람이 성성(聖性)에 있어서 모든 천사를 능가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없 논 한 행위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은 의이며 거기에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접에 대해서는 다음에 해당 성구를 다를 때 충분히 논할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율법에 관 해서 유대인을 적으로생각하고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울은마치 자기 의 주장에 대하여 확신이 없기 때문에 도피하려는 자처럼 여기저기를 약탈 하는 것보다 오히려 접근하며 백병전을 벌이고 저들의 전중(陣中) 깊숙이 공져해 들어가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율법에 관하여 단호히 싸우려고 걷십 했다. 둘째로 처둘은, 문제는 오칙 의식에 관해서만이 논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도 인정한다. 그래서 저들은 어째서 바울은 특정 문제를 주장하 다가 일반 문재로 옮기고 있는가하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 관해서 오 리겐과 제롬이 실수를 법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저들은 거짓 사도들은 의 식에 관해서만을 논하고 있는 반면에, 바울은 전 분야를 망라하여 논한 것은 타당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이 일이야말로 바로 바울이 저렇 게 져렬하게 논쟁하기에 이론 원인이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 교훈 온 처음에 얼른 예상한 것 이상으로 길게 꼬리를 끌었다. 결국 바울이 애를 태운 것은 사람이 의식을 준수해 왔기 때문이 아니타, 구원에 대한 확신과 영광을 떠나서 인간의 행위를 신뢰하게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 떤 어떤 날들을 정하여 고기 먹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 경우,

우리는 육식을 금하는 그 자체보다도 오히려 양십을 얽어매는 올가미 때문 에 괴로와할 것에 대하여 중요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거짓 사도들이 의식에 관해서만 논하는 데 반해서 바울은 율법 전체를 논했다고 해서 논제를 벗어 났다고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저들이 의식을 지키려고 한 목적은 사람들 이 율법을 준수하는가운데서 구원을추구했는데, 그것이 곧 보상 받을 만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의식을 도덕적 율법과 대조 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대조했다. 그러나 그는 본서 전반에 걸쳐서 이러한 전반적인 문제에 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는 특정적인 의식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주요점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자기 행위에 의해서이냐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이냐 하는 것인데, 그는 이것을 첫째로 취급했다. 오늘날 교황파의 무리는, 사람 이 믿음에 의해서만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문제에 칙면하계 되면 몹시 당 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이 율법의 행위라는 말씀에는 도덕적 행위도 포함되었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러나 저들 중의 다수는 제롬의 주 석을 내세우면서 스스로 훌륭한 방어선을 설치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 러나 본문의 문맥에서 볼 때 이 말씀온 도덕적 율법과도 관련된 것을 볼 수 있다.

 

"16. 사람이……오직 예수 그리스도틀 믿음으로" ;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단 지 믿음의 도움 없이는 어떤 의식이나 율법의 행위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 분만아니라, 그는부정(否定)의 명재에 대하여 배타적(排他的)인 명제를 내 어 걸고있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써만'이타고 한 말씀과 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선언은 천박하고 당치도 않는말이 되고 말것이었다. 왜냐하면 거짓 사도들도 그리스도나 신앙을 저 버린 것이 아니고 다만 의식을 그것과 결합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러한걷합을인정했다면, 처들은완전히 의견이 일치했을것이니, 그렇다면 바울이 그런 불쾌한 논쟁으로 인해 교회를 괴롭힐 팔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합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길 외에 다른 길 온 없다는 것이 배타적인 명제이며 그것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다 만 믿음에 의해서만이라는 것과 갈은 것임을 명십해야 한다•

 

오늘날 교황파의 무리는 ‘오직’이라는 말을 마치 우리가 마음대로 갖다 붙인 양 그 말에 대하여 우리와 싸우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어리석은 짓 인가를 여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바울온 교황과의 신학에는 생소했다. 처들은 확실히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하기는 한다. 그러나 저들은 의의 한 부분을 행위에다 둔다. 바 울은 그러한 반의(半義)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우 리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언을 수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다는 것을 가르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를 빼앗기고 완전히 의가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결정적인 전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에든지, 혹은 행함에든지 모든 것을 돌리든가 전혀 돌리지 않든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 다 음에 ‘칭의(稱義)'란 말에 대하여 그리고 어째서 믿음이 칭의의 원인이 되 는가에 대하여 보게 될 것이다•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바울은 이미 베드로와 그밖의 사람들 의 양십에 호소한 바 있거니와, 이번에는 그것을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아무도 의를 연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한충 더 확고히 하고 있다. 값 없이 받는 의의 기초는 우리 자신의 의를 완전히 벗어버릴 때이다. 더우 기 바울은 모든 사람 가운데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은 율법의 의를 연을 수 없고, 또 스스로 의에 도달한다는 것도 결코 볼가능하다는 주장이다.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인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말씀을 앞서 그 가 베드로에게 대하여 서술한 논의의 일부처럼 생각하고 앞의 문장과 이 문 장을 연결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이것을 말 할 팔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본제(本題)와 전혀, 혹은 거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따라서 각 사람은 두 가지 견해 중 하나를 택해도 좋다. 크리 소스톰과 그 의 사람들은 이 것 을 단언적 으로 읽 으며 다음과 갈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구하지만 아칙 우리가 완전히 의돕지도 않은여전히 더러운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만으로 논 우리의 의를 위해서 불충분하다고 하면, 그리스도는 단연 인간을 최 가 운데 머물게 하는 교훈의 명수가 된다.' 이 해석은 마치 바울이 이 런 터무니 없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의의 일부를 율법에 문리는 사람들을 신에 대한 모 독이라는 협의로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곧 뒤 이 어 싫은 소리 (The cry of horror)를 했는데 그런 말은 바울의 뭔가 질 문이 있은 다음에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그런 말을 한 것 은 옹당 결과적으로 나타날 부조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했다고 생각한다. 그. 러므로 그는 언제나 하던 방법으로, 말하자면 적의 입장에서 발언하면서 질 문으로써 선수(先手)를 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신앙적 의의 결과가 모태 에서부터 벌써 성별된 우리 유대인까지도 죄인으로 보며 또 더러운 자로 간 주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 중에서 최의 세력을 강하게 만드~ 죄의 조작자(造作者)라고 말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이 의문은 그가 앞에 서 유대인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율법의 의와 관계를 끊었다고 말하 는 데서 생겼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별문재로 하고서도 유대인들은 이방 인에게 있는 상례적인 오영으로부터 져리되었다는 데서, 결국 어떤 접에서 는 수 많은 최인 찬구들로부터 제외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유대인을 이방인과 갈은 수준에 둔다. 그리고 양자(兩者)에게 공통적인 치료법을 쓰는 것은 양자가다 갈은 질병을지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 함이 다. 이 것 이 헬라어 원문에 서 불변화사(不變化詞) Kai(카이 ; …도 또한) 라는 말의 뜻이 다. '우리 자신들도 또한' 이 라고 그는 말하고 있 는데 , 그것 을 차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 유대 인들에 관하여 한 말이 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그가 그런 사상을 거철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왜 냐하면 그리스도가 숨간 최를 노출시켰다고 해서, 마치 그가 우리에게서 의 를 빼앗고 최의 문이라도 연 것처럼, 십지어 최의 왕국이타도 세운 것처럼, 죄에 이바지하는 자타고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 도를 무시하고 저들 스스로 뭔가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오류에 빠진 것 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없이 의롭다 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유대 인과 갈은 그런 생각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율법의 의를 제거해버리기 위해, 또 성인(聖人)둘을 최인되게, 그리고 우리를최와 최의식에 속박하 도록 하기 위해 왔는가?' 하는 불평이 나오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부인 하며 그러한 모독을 증오로써 반박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는 최를 끌어들 이지 않았고, 그 정체를 드러낸 것 분이다. 그리스도는 의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부터 소위 의롭다고 하는 처들의 거짓된 가면을 벗겨버 린 것이다.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 ; . 여기에 대한 대답온 두 가 지 이다. 그 첫째는 간접적인 것인데, 앞에서 언급한 사고방식은 바울이 가르 친 모든 교훈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그리 스도를 믿는 신앙을 최의 파멸과 관련시켜서 설교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그리스도는 죄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타, 마귀의 일 율 멸하기 위하여 왔다(요일 3 : 8)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단언하기를 자기는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최논 멸하고 의는 회복했다고 ~ 다. 그러므로 최를 멸한 바로 그 갈은 사람이 의를 회복한다는 것은 전혀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부조리를 설명하면서 그는 중상자를 ~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19. 내가 율법으르 말미암아" ;  이것이 둘째 대답인데, 이것은 직접적인 것이댜 말하자면 마땅히 율법의 일로 돌려야 할 것을 그리스도에게서 기인 한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돌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의를 폐기해야 할 팔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 자체가 율법의 제자들을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너희는 가련한 사람을 거짓된 허구(虛構)로 속이고 처들이 율법에 의하여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 하며, 그런 구실을 빙자하여 저들을 율법 아태 가두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반면에 너희는 복음이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를 무(無)로 돌리 고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복음을 미워하도록 선동하고 있다. 그러나 실온 율법을 향하여 죽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율법 자체인 것이다. 율법은 영 원한 멀망으로써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귀철온 로마서 제 7장과 비교함으로써 더 찰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거기서 율법이 자기에게 대하여 죽어버린 자, 즉 율법이 무력하여 아무 협 도 나타넬 수 없게 된 자가 아니떤 아무도 율법을 향하여 살아갈 자 없다는 취지를 아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율법이 우리 안에 살기 시작하자 마자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우리를 멸하며 그와 동시에 건에는 죽 어 있던 최를 재활(再活)시킨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리어 율법을 향하여 살아가는 자는 율법의 세력을 이겼다는 느낌을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하고 율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겨우 맛보는 정도에 불과하다• 왜 냐하면 율법을 전정으로 이해했을 때는,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향하 여 죽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는 율법에서 생기는 것이지 그리스 도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향하여 축었나니" ;  율법을 향하여 죽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울 법과의 관계를 끊는 것, 그리고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 태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리고 율법도 우리를 노예의 멍에 아래 가둬 놓지 못한다. 혹은 율법을 향하여 죽는다는 것은 율법이 우 리에게 유죄를 선언하여 멸망하도록 하기 때문에 율법 안에서는 생명을 찾 을 수 없다는 의미도 된다. 이 둘째번의 견해가 더 적철하다. 왜냐하면 바 울은 그리 스도가 악의 조작자(造作者)라는 것 을 부인하며 , 율법 이 우리 를 이롭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해롭게 하므로, 우리를 죽이는 처주를 율법 자· 체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태서 율법으로 말미암은 죽음은 참으로 치명적이타고 말하게 된다. 바울은 그것과 대조해서 다론 종류의 죽· 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생명을 주는 죽음을 말한 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살기 위해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 이 귀철을 읽는 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구두접 찍는 방법 온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사람들온 ‘내가 율법으로 말 미암아 울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합이니라’고 읽 는다. 그러나 이것과는 다르게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 었다’는 다음에 구두점을 찍고 귀철을 바꾸어서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 기 위해 그리스도와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타고 읽는 것이 말씀의 문맥 이 훨씬 잘 통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  거짓 사도들은 이 죽음을 가지고 바울의 교훈을 싫어하고 논쟁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바람직한 죽음이 타고 바울이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의 말하는 바는 우리가 최 가운 데 살기 위한 어떤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 율법을 향해서는 죽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는 것 은, 우리가 전 생애(全生珪)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힘쓰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인생을 산다는 의미로 가끔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이런 대구적인 식으 로 좌우간 우리7} 최에 대하여 죽은 것과 갈이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는 의 미이다. 요컨대, 바울은 이 죽음이 치명적인 것이 아니고, 보다 나온 생명 의 원천이 라고 말한다. 왜 냐하면 하나님 께 서 우리 를 율법 의 파선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사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생명으로 회복 시키시기 때문이다.

 

이밖의 여러가지 해석은 생략하기로 한다. 나는 위에 서 말한 해석이야말로 바울이 본태 의도했던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바울이 말할 때, 우리 가 어떻게 율법을 향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가 하는 방법을 밝히 섣 명하고 있다. 마치 접목(接木)이 그접붙여전 뿌리로부터 생명을끌어올리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접붙여져서 거기로부터 비밀의 생명을 받는 것 이 다. 그리 고 그리 스도는 우리 를 반증(反證)하는 율법 의 책 무(責務) 를 그의 십자가에 뭇 박았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뭇 박혔으므로, 우리는 율법의 처주와 정죄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무릇 이 해방을 무익하게 만들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 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여해야 할 것온 마치 접목이 뿌리와 동일한 성질로 합체(合體)될 때만이 뿌리로부터 수액(樹液)을 빨아올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만이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 실이다.

 

"20.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  죽음이란 말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에 달갑지 않는 말이 다. 그러 므로 우리 가 그리 스도와 함께 십 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언명(言明)함으로써,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갖 계 한다는 뜻을 바울은 부연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하나님을 향하 여 산다'고 앞에서 말한 바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바울에 관하여 말 하면, 그는 벌써 자기 자신의 생명으로 살아가기를 그치고 그리스도가 그의 속에 살아서 생명을 가진다고 말할 만큼 그리스도의 감추인 능력으로부터 생 명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영혼이 육체에 힘과 생명을 주는 것과 갈이 그리스도도 그모든 지체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믿는 사람은 자기 밖에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실로 아름답고 놀라운 겨언 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참되고 실체적인 교체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 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서 거하시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의 모든 행동을 인도하실 때이다. 둘째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 게 해드릴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와 갈은 자 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이냐 첫째 것은 중 생과 관계되며, 둘째 것은 값 없이 받는 의의 전가(轉隊)에 관계된다. 그리 고 이 귀철은 바로 둘째 의미에 해당한다. 양편의 의미에 다 해당한다고 하 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아무태도 둘째 의미를 더 좋게 생각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여기 이 문장은 여러가지의 다른 해석 으로 인해 갈기 갈기 찢어져 있는 상태이다. 어떤 사람은 여기 ‘육체’를 우 리의 악하고 부괘한 본성으로 본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활이 란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면, ‘너는 육체 적인 생활을 하지 않느냐? 그리고 이 썩은 몸이 그 본태의 기능을 발휘하 며,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공급받고 있는 한, 어찌 이것을 그리스도의 천적 생활(天的生活)이타고 할 수 있느냐, 너는 누가 보아도 를림없이 다른 사람과 똑 갈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어째서 너는 네 자신 본래의 생명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등으로 말하는 것은 불합리한 역설이요, 도저히 맞지 않 는 이야기다'타는 반발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답하기를 그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그것이 인간의 갑각에는 갑추인 비 밀이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에 의하여 얻는 생명은 육안 으로는 볼 수 없으며 결국 성령의 능력과 역사로 말미암아 양십 속에 갑득 (感得)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생명도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얻는 하늘의 생명을 소유하는 데 결코 방해하지 않는다. "~도 함께 일으키사 그리 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 : 6)라고 했으며, 또 “이제부 터 너희가 의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 님의 권속이라,,(웹 2: 1~)고 했다. 그리고 "오직 우리의 시민권온하늘에 있 논지타"(빌 3 : 20)고 했다. 요컨대 바울의 모든 서신온 이와 갈은 증언으로 곽 차 있다. 이와 갈은 증언에 의하여 그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오히려 하늘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다. 그것은 다만 우리의 머리 가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분만 아니타, 머리가 그 각 지체와 일 체라는 원리에서 우리가 그와 공통적인 생명을 가졌기 때문이다(요 14 : 19 "'20).

 

"나톨 사랑하사 " ; 이것은 믿음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첨가된 말이다• 왜 냐하면 ‘믿음이 언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하도록 이 런 능력을 일으키는가'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앙이 의지하고 실‘본질' 혹은 ‘기초'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죽음이라는 것을 선언 하고 있다• 왜냐하면신앙의 역사는거기서부터라고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동기 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가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위하여 친히 자기 몸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야말로 우 리를포용하시고 그 자신을 우리와 하나가되게 하신 것이타고나는 말한다 ..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죽음으로써 성취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께서 친히 몸을 버리십으로써,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고난을 받으 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인 모든 것에 우리로 하 여 금 참여 하게 한다.

 

그러 므로 바울이 언급한 요한이 말한 “사랑은 여 기 있 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칙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 : 10)고 말한 것과 똑 같은 의미의 사랑이다• 만일 우리의 공덕에 예수그리스도가 감동되 어 우리를 구속했다고 하면, 공덕이 원인이 되었다고 서술되었을 것이다. 그 러나 바울은 모든 것을 사랑에 돌리고 있다. 그러므로 구속은 값 없이 받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 기록된 말씀의 순서, 즉 ‘그가우리를 사랑하사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이것은 로마서 5장 10철에서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대로 만일 그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죽으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십지어 우리가 그의 원수로 있을 때 죽 으셨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 몸을 버리신……" ; 이 사실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이것 이상으로 충분히 표현할 적철한 말이 없다. 아무리 능변이고, 아무리 교묘한 말을 한다고 하 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의 탁월함을 도대체 누가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륜 구속하시 려 고 대 가를 천히 몸으로써 갚아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 시 다. '자 기 몸을 버리셨다’는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모 돈 열매가 다 포함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정결케 하는 희생의 제 물이요, 씻음이요, 만족이 다. ‘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매우 강조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세 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하는 데서 끝나버리고, 만일 다시 그 은혜를 누리며 역사하도록 각 사람이, 특히 자기 자신에게 이것을 적용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만족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  이 말씀도 역시 대단히 의 미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렇게도 놀라운 대가를 지불하여 얻은 가히 측 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한다는 것은 크나큰 배은망덕이며 또 황 송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그밖의 다른 수단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거 짓 사도 들을 비난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모든 것과 관계를 끊고 단념하고 그. 리스도만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철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에 합당치 않는 자로 만들어버리면 그 사람에게 남을 것은 무엇이겠는가?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측으셨 느니라" ;  여 기 헬라어 owpfaJJ(도레 안)은 owpea(도레 아)의 목적 격 으로서 칙 역 하면 ‘무료로, 혹은 꽁짜로'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헛되이'타고 번역했다. 이 구1절에서는 그러한 의미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 음에는 아무 가치도 없다'든가 혹은 그리스도가 헛된 것을 위해 이무 보상 도 없는 죽음을 죽었다'논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의 유익과 열매 는그가 우리의 최를 위해 죄값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를그의 아버지와 화해 시 켜 주신 것 이 다. 그리 고 그로 인해 서 우리 가 그의 은혜 로 말미 암아 의 롭게 되었고, 행함에 의해서 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결론을 짓게 되었다. 교황과 의 무리높 이것을의식적 율법이라고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의 모든 율법 전 체를 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온 어떤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확실하다. 바울 이 말하려고 한 것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공덕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 는다고 하면 그리스도는 무익하계 헛되이 고난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느 냐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구태여 남 에게서 얻을 필요가 없는 것이요, 그런데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쓸 필요도 없는데 죽으셨다고 하니 그 죽음은 헛된 죽음이 라는 말이 다.

 

그러 나 만일 그리 스도의 죽음이 우리 의 구속을 위 함이 었다면 분명히 우리는 노예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대가를 지불하시는 것이었다면, 필경 우리가 빛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 그 의 죽음이 속죄였다면 우리가유최 판결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죽 음이 성결케 하는것이었다면틀림없이 우리가 더러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정결, 용서, 대속, 의, 및·해방을 행위에 돌리는 자는 모두 ~'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와를 결합시키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이러한 논거가 아무 힘이 없다고 반론을 시도하려는 자들 이 이마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짓 사도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십할 사람은 이무도 없을 것이다. 이는 율법에 의해서라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구속되었다는 이 두 가지 교의(敎義)는 사실 동시에 촌 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의의 일부는 행함으로 얻고 다론 일부는 은혜에 서 온다는 생각을 인정한다면 나는 거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여기서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신학이 바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의 논적(論敵)에 대하여 논한 것은 그 반대자를 보기 좋게 논박했 든지, 또 어리석계 그릇된 결론을 내렸든지 둘 중 어느 하나이다.

 

만일 바 울을 감히 비난하려고 생각했던 모독자가 있었다면 강한 변증이 곧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의는 인간이 상상하는 그런 것이 이니고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성령에 대하여 갑히 언급하려 하는 모독자들을 대하 여 바울의 주장을 지지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교 황과의 무리에 대하여 방어전을 벌이려고 한다. 처들은 우리가 바울을 모방 하여 ‘만일 의가 행위에 의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되다’라고 하면 우 리를 비웃는다. 처들은 처들의 괴변자들이 고안해 낸 것을 주장하면서, 반론 에 대한 답으로써는 훌륭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갈 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최초의 은혜를 얻게 했다. 그것이 곧 꽁덕을 쌓 는 계기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죄의 용서를 위해서는 그의 죽음의 공덕과 우리 행위의 의무 이행이 협동으로 사여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저들로 하 여금 바울을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낫겠다. 우리는 바울의 교훈을 따 르고 있기 때문에 저들이 우리를 논박하기 전에 바울을 논박한 것이다. 바 울이 상대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적 부인한 자들이 아니고 구원의 철반을 행위에 돌리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한 자들에 대 하여 그는 ‘만일 의가 행함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되다' 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로써 그가 단 한 점의 의도 행함 가 운데 두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교황파의 무리는 이런 무리와 다 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교황파를 논박하기 위해 바울의 논거(論振)를 우리 가 채용하는 것은 결코 부당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