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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갈라디아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갈1:24)

1. 성경 (갈1: 1 ~24)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1)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2)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4)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5 )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6)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7)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8)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0)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1)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2)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3)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4)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5)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6)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7)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8)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0)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2)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3)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2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사람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와·…·하나님 아버지툴 말미암아" ;  바울 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를 자기의 사도칙의 창시자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에다 두었다. 그것은 사람을 보내는 것온 그리스도의 임무이먼,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절(使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더욱 완전히 부연(敷衍)하기 위하여, 그는 아버지를 부가하고 있다. 그것은 ‘만일 그리스도의 권위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온 나의 사도직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부여(武與)된 것을 알지어다' 하는 의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  바울이 여기서 부활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문맥 상 적절하다. 왜냐하면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 왕국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온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계시는 동안 바울이 그리스도와 교제한 일이 없었다는 이유로 바울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그의 교회를 통치하심에 있어서도 역시 부활료써 그의 능력을 행사하셨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소명이 그리스도께서 아직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살아 있을 때 그에게 그 직분을 맡겨주신 것보다는, 훨씬 더 권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온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나타난 하나님의 놀타운 능력에 대하여 악의를 품고 반항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울을 하나님의 능력의 사역을 전달하는 포고자(布告者)로 택정하신  것은 바로 그분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도된 바울은" ; . 다른 곳에서도 말했듯이 (駐1) 바울은 자기의 교훈에 권위를 가하기 위하여, 그의 인사에서 사도의 칭호를 주장하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도라는 권위는 사람들의 판단이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소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말을 들어주기를 요구한 것은 자기가 바로 사도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논 하나님께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스승으로 지정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귀를 기울일 것이요, 그외 어떤 사람의 소리도 듣고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항상 우리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스승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이 다론 사람 이상으로 바울의 소명에 대하여 의심하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다론 서신에서보다 더 강하게 자기의 소명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여기서 단순히 자기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것만을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는 것을 확실히 주장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목사직에 관해서가 아니고, 사도칙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도 그로부터 교역자로서의 명예나 칭호까지 감히 박탈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만 그들만이 그에게서 사도의 이름과 권위를 탈취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도 그 고유한 의미의 사도직에 관해서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두 가지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복음을 전하는 자 모두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히 교회에 있는 직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가장 존경할 지위를 뜻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베드로와 다른 열 두 사도들과도 동등한 자라는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이 첫째 사실온 바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참된 교역자 모두에게 공통적인 문제이다. 아무도 이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없으며, 그 영광을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도 역시 인간의 권한 안에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명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한 정통(正統)이 아니다. 그러나 때로논 어떤 사람이 교회의 규정대로 부름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은 그것이 올바론 양심으로 말미암온 것이 아니고, 어떤 부당한 목적에 의하여 그 성직(聖職)으로 인도를 받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소명에 관하여 그것이 조금도 손색없이 완전히 인정되었다는 뜻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도 같은 주장을 가끔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반발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것을 시인한다. 아니 그뿐 아니라, 저들은 오히려 주님의 종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아주 존대함과 위대한 권위를 가지고 스스로 오만하여 자기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바울이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었던 진리가 없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둘째 부분은 특히 사도들에 관해서만 언급된 문재이다. 왜냐하면 당시 일반 목사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았다고 해도 별로 찰못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이 바나바와 더불어 가는 곳마다 투표해서 장로들을 장립시켰고, 또 그는 디도와 디모데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행 14 : 23, 딛 1 : 5). 그것이 목사를 선택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의 이름을 하늘에서 계시하실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바울은 자기 자신의 경우에 있어서는 잘못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실상 칭찬 받을 일을 거절 했을까? 

 

앞에서도 이미 말했지만,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목사라든가 복음에 종사하는 일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제논 사도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선택되는 것은 일반 목사들과는 달리, 말하자면 칙접 주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이 열 두 사람을 부르실 것이다(마 10 : 1). 그리고 유다를 대신하여 그 후계자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교회는 감히 이것을 다수결에 의하여 선정하려 하지 않고 제비를 뽑았던 것이다(행 1 : 26). 목사를 선택 하기 위해서는 제비를 뽑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왜 맛디아를 선정할 때는 제비를 뽑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아 그 지위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서이다. 왜냐하면 사도직은 다른 칙분과는 구벌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와갈이 바울도 일반적인 교역자 대열에서 자기를 제외하기 위하여, 자기의 소명이 칙접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인간의 어떠한 수단으로써 된 것이 아님을 확언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의하여 부름받았다고 했는데, 어째서 바울 자신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가(행 13 : 2"-13)? 어떤 사람은 여기에 대하여 답하기를, 바울은 벌써  이전부터 사도의 직무를 행하고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말한 임명은 그의 사도직의 기초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이것이 이방인의 사도로 처음 택정된 것이며, 갈라디아인도 그 이방인임에는 틀림 없지 않는가라는 반론이 가능할 수 있다. 그래서 보다 정확하고 올바론 답변은, 바울이 여기서 교회의 소명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의 사도직이 보다 확실한 은혜와 선재적(先在的)인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확실히 안디욱 사람들은 자기들의 판단에 의해 바울에게 안수한 것이 아니다. 신탁(神託),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명령이 저들에게 주어진 것이고 거기에 순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들이 계시로 말미암아 인간을 초월한 방법으로 부름을 받아 그 후 성령에 의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택정합 을 입어 임명된 이상, 가령 그 다음에 교역자를 임명할 때 행하는 관습인 의식(儀式)을 취했다고 해도 역시 그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도직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바울과 거짓 사도둘과의 사이 의  완곡(腕曲)한 대비로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나도 거기에 이의(異議)는 없다. 왜냐하떤 거짓 사도들온 사실 사람으로 말미암은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 사도들은 자기가 이러 이러한 사람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임명되었기 때문에 단연 저들보다 더 우위에 있다.'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  바울이 다수(多數)의 이름을 공동으로 쓴 것은, 만약 갈라디아인이 한 사람 개인에 대해서는 중히 여기지 않고, 다수의 사람에게는 하여간 귀를 기울일지도 모르며, 그리고 전체 회중은 경시(輕視)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바울은 보통 본서에서와 같이 편지 서두에서 형제들을 소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편지 끝부분에 가서 저들의 문안 인사를 끼어 넣곤 했다. 더우기 두 사람 이상의 이름을 연명한 적은 결코 없었고, 그런 경우에는 잘 알려진 이름밖에 기록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서의 경우는 다르다.  모든 형제의 이름을 연명(連 名)했는데,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이유 없이 그렇게 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많은 성도들의 의견의 일치는 갈라디아인으로 하여금 가르침을 잘 받으며 다루기 쉬운 사람이 되게 하는 데 역점을 두었음에는 틀림 없다.

 

"같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  갈라디아는 꽤 넓은 지방이다. 따라서 거기는 많은 교회가 여기 저기 산재하였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신념을 거의 버린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 교회라는 칭호가 허용되어 왔으니 놀랄 일이 아닌가?  왜냐하면 교회가 있는 곳에는 응당 신앙의 일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이 고백되며, 유일 신 하나님께 경배드리며, 성례식을 거행하며, 어떤 성직자가 있는 곳에는 아직 교회의 표시가 있다고 대답한다. 교회가 언제든지 바라는 대로의 순수한 상태에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심지어 가장 순수한 교회일지라도 역시 어떤 결점이나 오점을 가지고 있으니, 하물며 일반 교회에 있어서는 결점이 있다고 할 정도가 아니다. 거의 차마 볼 수 없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집회에 무언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고 해서 금방 그 집회를 교회라고 부르기 싫어할 만큼 교훈이나 행위의 결함에 대하여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 은, 오히려 관대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의 결점이 있는 집회도 역시 그리스도의 교회로 인정 받기 때문이라고 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잘못을 비난하지 않아서도 안된다. 좌우간 교회라는것이 존재하게 되면 거기에 교회에 있어서 바람직한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은, 교황과의 무리는 이 ‘교회'라는 한 말을 방패로 삼고 자기들의 주장은 모두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일찌기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정도의 조건이나 형태보다는 훨씬 달랐다. 바울이 만약 오늘날 생존해 있다고 하면, 교회의 처절한 폐허와 무서운 남비(溫費)를 보았을 것이며,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얼마 정도라도 교회의 몫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는 비록 모든 것이 교회라는 이름이 뜻하는 곳에 모두가 일치하지 않았을지라도 오히려, 이를테면 제유법(提兪法)에 의하여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3. 은혜와 평강이 있기틀 원하노라." ;  이와 갈은 인사 형식에 관해서는 다른 서신에서 이미 서술한 바 있댜 모든 것의 좋은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에서 우리에게 임하는 고로, 바울은 우선 하나님이 갈라디아 인을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기원하며, 그 다음에 저들에게 주어전 것이 모두 번영하도록 기원하고 있다고 보는 나의 생각은 여기서도 변함없다. 그는 은혜도 평강도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주어질 것을 기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밖에는 무슨 은혜도 또 어떤 행동도 없기 때문이다.

 

"4.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  이것은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는 뜻과 같다. 바울은 은혜의 첫째 근원이 어떤 것임을 간단히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결의이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주실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 : 16).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결의와 인간의 보수(報洲)나 공력을 자주 대조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뜻' 이라는 것은 여기서는 보통 ‘매우 기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요, 또 우리 편에서 그의 긍휼의 원인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의도 하심이 그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악한" ; 바울은 이 형용사를 부언(附言)함으로써,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파조물이나 육체저인 삶에 관한 것이 아니고, 죄로 말미암은 부패 타락에 관해서란 뜻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마디로써 모든 인간의 교만을 벼락치듯이 쳐서 완전히 떨어뜨려 놓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길을 떠나서는, 우리에게는 철처한 악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기서 해방되기까지는 이 세상이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는 또 그 세상 안에 사는 것이다. 가령 우리 인간에게 어느 정도 훌륭한 점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사악할진대 도대체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인간 자신은 그런 악한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바울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악한 자라고 하는 선언을 달게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건지시려고" ;  바울은 또 우리의 구속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를 사서 당신의 후사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과 구별될 때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한, 결코 그리스도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대’라는 말은 여기서는 이 세상에 있는 부패를 의미한다. 요한 1서 5장19절에서는 "온세상은 악한 자안에 처한것이며"라고했는데, 다른 많은 곳에서도 갈은 모양으로 서술되었다. 그리고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께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회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 : 15)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경우의 ‘세상’은 그것과 다른 의미이다. 곧 이 세상의 삶을 뜻하고 있다. 그러면 이 귀절에서 세상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떠난 인간을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는 한 온전히 저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중생이란 것은, 마치 자연과 은총 혹은 육과 영처럼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태어난 자들은 죄와 악밖에 가진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의한 창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저들 자신의 타죄(壅罪)에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구하시려고 혹은 분리시키려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  여기서 바울은 제일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미하고 있다. 그것은 갈라디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들어가 거기에 머물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것은 만일 저들이 그리스도에게 있는 구속의 은혜를 올바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저렇게 이질적인 율법 준수에 결코 빠져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있는 자는 누구나 그를 굳게 잡아, 양팔로 안고 전적으로 그의 품안에 머물러 그 이상 어떤 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떠하신 분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가를 되새기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온갖 실수와 미신에서 씻어 깨끗하게 하기 위한 최선의 치료법이 되는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셨으니'라는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하다. 바울은 죄에 대한 구속(救讀)과 완전한 의는 아무데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충고해 주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회생의 제물로 아버지께 바치셨 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밖에 그 어떤 것과도 대치해서는 안 될 참된 제물이시다. 이 구속은 너무나도 영광스럽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황홀하게 하여 구속의 은총을 찬양하게 한다. 더우기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있는 것은 성경 다론 곳에서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법온 양편에 다같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한편 아버지께서는 그의 영원한 목적에 의하여 이 구속을 작정하시고 그 작정 속에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고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회생의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죄를 위한 구속으로써 만족한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  돌연히 그는 큰 감동을 받아 감사의 기도를 터뜨리고 있다. 그렇게 한 것은 저들을 자극시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생각하도록 하며, 따라서 앞으로 훨씬 더 겸허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일반적인 권면이다. 좌우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할 때마다,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릴 마음이 용솟음 치는 것이다.

"6. 그리스도의 .... 이같이 속히" ;  바울은 여기서 저들의 무절조(無節操)한 어리석음을 꼬집어 드러내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를 반역하는 데 적절한 시기(時機)따위의 말을 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인은 바울이 떠나자 마자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저들이 이러한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앞에서 저들이 값없이 부름받은 것과 대조하여 그 망은 (忘恩)을 밝혔는데,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저들이 떠난 시기를 지적함으로써 그 경박(輕薄)함을 눈에 띄게 하고 있다.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  바울은 비록 저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는 약간 부드러운 비난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뒤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거짓 사도들에 대해서만은 격(激)하계 대하려고 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인을 비난한 것은 자기의 교훈을 반역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율법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인정 함으로써 저들이 그리스도와만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 사도들이 의식도 역시 필요하다고 한 것은 그것과는 전혀 반대인 생각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이탈해 나갔는데 , 그것은 저들이 완전히 그리스도를 버렀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타락 속에서는 어떤 허구적(虛構的)인 그리스 밖에도 저들에게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황과의 일단도 그런 식으로 반동강이 그리스도, 찢겨진 그리스도를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상실은 전혀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했고 결국은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있다. 저들온 그리스도의 본성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미신으로 꽉차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 (仲保的事役)과 일치 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일 때는 사실상 그리스도 밖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빛과 어두움을 혼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바울은 다른 복음이라고 했는데 , 다시 말하면 참된 복음과는 다른 복음이란 말이다. 하지만 거짓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들은 저들의 조작(造作)과 복음을 혼합하였기 때문에 복음의 근본적 진리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말하는 복음이란 거짓되고 부패하고 위조(僞造)된 복음에 블과하다. 바울은 여기서 마치 저들의 타락이 극에 달하였다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그 도상에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동사의 현재 시상형을 쓰고 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나는 너희가 이미 완전히 떠나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너희가 올바론 길로 돌아서기란 한충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노정(路程)의 절반쯤 가서 있기 때문에, 그 가는 길을 그대로 계속 나아가는 것보다 지금 곧 돌아서라.'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르신 분' 이라고 읽으면서 이것을 아버지에 관하여 언급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가 읽는 법이 훨씬 단순하다. 바울은 저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부름 받았다고 한 것은, 저들의 망은(忘恩)을 책망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반역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염치없는 소행인데 하물며 값 없이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신 그 그리스도를 반역한다는 것은 더 말할나위 없는 무서운 악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망은적(忘恩的)일 때,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선의(善意)가 죄의 중대성(重大性)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비록 또 다론 복음이란 없지만'이라고 읽으면서 마치 여러가지 복음들이 달리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염려에서 나온 일종의 정정(訂正)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나는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단순히 해석하고 싶다. 바울온 거짓 사도들의 교훈에 관하여 모욕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 은 혼란과 파괴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원문의 뜻을 쉽게 다른 말로 말한다면, ‘도대체 저들이 무엇을 창안(創案)해 내려는가?  무슨 근거로 저들이 내가 전한 교의(敎義)를 공격하는가?  단순히 저들은 너희를 혼란케 하고 복음을 파괴하려는 것 뿐이다. 그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앞에서 다른 복음이라고 말한 것을 이런 설명으로 정정하고 있음을 나도 역시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것이 복음이 아니며 다만 혼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온 내 의견에 의하면 헬라어 ‘다론’ 이란 말은 ‘다른 것'이라는 의미를 취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 점을 주장 하고 있는 것이다. 혼히 우리가 말하는 대로 ‘이 말은 네가 속이려는 것밖에 없다’는 그런 표현과 같다.

 

"변하려 함이라." ;  저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파괴하려 하므로 결국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당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바울은 두번째의 비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무서운 죄이다. 왜냐하면 파괴하는 것은 썩게 하는 것보다 더 악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저들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의 비난은 그릇된 비난이 아니다. 상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성업 (聖業)의 영광이 그밖에 다른 것으로 돌아가며 , 양심이 올가미로 씌워진다면 그리스도는 벌써 온전히 사라져버리고 복음의 교훈도 땅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무엇이 복음의 중심 주제인가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중심적인 주제를 공격하는 자는 모두 복음을 파괴하는 자이다. 여기에 첨가된 ‘그리스도의’라는 말온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복음의 창시자요, 복음온 그로 말미암음' , 혹은 ‘복음은 순전히 그리스도를 제시함'이란 뜻이다. 바울은 틀림없이 이 수석어로써 참되고 유일한 복음, 그것만이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의도였다.

 

"8. 그러나 우리나……" ; ·바울은 여기서 그의 교훈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 하여 대담하게 섰다. 우선 자기의 권한 교의가 결코 오영되어서는 안될 유일한 복음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사도들이 여기에 대항하여 ‘우리도 역시 복음이 상하지 않게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복음을 중히 여기며 존경하고 있는 접에서는 우리가 너보다 뭇지않다’ 고 항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날 교황과의 무리가 입으로는 ‘복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신성합니까, 그래서 굉장한 존경심을 가지고 바로 그 복음이라는 이름에 입을 맞춥니다’ 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과 같다. 사실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저들은 참되고 수수한 복음의 교훈을 무섭게 핍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총괄적인 선언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복음이 무엇이며, 그 내용이 무엇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이것을 다론 데서 구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교훈이야말로 참된 복음이라는 것을 명백히 서술하고 있다.

 

'나는복음을 지키려 한다’고 입으로는 말할지라도 그 내용을 모른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소위 침묵의 신앙에 의하여 지배 당하고 있다는 교황과 무리 가운데서는 그렇게 하여도 상관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인식과 확실한 지식이 없는 한 신앙이 존재할수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인이 복음을 순종하려 하면서도 여기저기 방황한다면 설 자리를 찾지 못하여 허공에 뜰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 교훈에 확고히 머물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설교를 감히 반박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령, 그가 누구이든지 그에게 저주를 선언할 만큼 그의 설교를 확실히 믿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니 그뿐이랴, 그는 자기 편에서 공격을 개시하고 있으며, 또 그럴 필요가 있었냐 왜냐하면 바울은 이렇게 하여 자기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 자들이 제기하려는 중상, 다시 말하면 ‘네가 네 자신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모두 반대 받지 않고 수용(受容)되기를 원하는 것은 그것이 네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하는 말을 예방하기 위해 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일을 돌아보며.염려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 이 결코 아니라는 접을 밝히기 위해서, 우선 첫째로 자기 자신부터 그의 교 훈에 대하여 무엇인가 기대하고 있는 모든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렇 계 하여 그는 자신을 다론 사람들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다론 사람들을 포함하여 정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도록 했다. ' 그러나 더욱 져렬하계 거짓 사도들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그는 천사가 있 는 곳까지 도 올라간다. 그는 단순히 천사들이 어 떤 이 상한 말을 할지 라도 들어서는 안 된다고만 하지 않고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선언했다. 그가 천사를 자기 교훈에 반대하는 자처럼 말한 것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체를 자세히 고찰해 본 사람은 누구든지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이 하나님의 확실한 전리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에 관하 여 하나님이 계시한 교의의 확실함이 논쟁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이 교훈 이 모든 천사들까지라도 능가한다는 것을 동시에 확연(確言)하지 않으면, 그는 단지 인간의 판단 만을 거부하는 정도로서는 만족히 여길 수 없었다. 그래서 만약 천사들이라도 어떤 딴 것을 가르치면 저들도 저주해야 한다고 바울이 선언할 때, 그것은 물론 볼가능한 것울 상정(想定)한 이론(理論) 이지만, 결코 쓸데없는 구실은 아니다. 이렇게 극히 이상한 말을 가지고 말하계 된 것은, 바울이 그의 설교의 권위를 명시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와 자기의 설교를 공격하기 위해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나 자기 설교의 권위를 천사들까지도 압도할 수 없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천사들을 모욕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경건한 목적으로 천사들의 이름을 썼다면 그것은 결코 그 위업을 손상시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동해 하나님의 말씀의 존엄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전리를 배울 뿐만 아니라, 더우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설 때 감히 천사라도 저주할 만큼 우리의 신앙이 놀라운 확신을 얻는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한 말은 ‘너희들에 의하여'라는 말을 보충(補充)하여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저주라고 번역하는 '아나테마' 는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쓰여지고 있다. 여기서는 파문(破門)을 뜻하는 데, 히브리어'케렘'에 해당한 말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 " ;바울은 이제 자기와 천사에 관한 언급 을 그치고 자기가 전에 가르친 것 외에 다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누구에게 도 허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총괄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너희의 받은 것' 이라는 말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항상 주장하는 것은 복음이 라는 것은아직도 알려지지 않는어떤 것이나 마치 공중에 매달린 듯이 자기 공상세계(空想世界)에 불확실하계 달려있는 것처럽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자기들에게 전해지고 자기들이 받아 품고 있는 바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 의 상상이나 고안처럼 신앙과 무관한 것은 없다. 만일 사람이 복음이 무엇 인지를 모르거나 항상 의십하고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므 로 그는 자기 가 전한 복음과 다론 복음을 감히 제 안(提案)하는 자는 악마로 보도록 명했다. 여기서 그가 다론 복음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인간의 조작, 그밖에 자기가 전한 복음과는 동일하지 않는 이상한 사상이 섞였기 때문이 다. 그 이유는 거짓 사도들이 가르친 교훈이 바울의 교훈과는 하나에서 열까 지 전부 반대되거나 다른 것은 아니었으나 거짓이 첨가됨으로써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교황과의 무리는 바울의 이 말을 회피하기 위한 속임수로 농담이라도 하 고 있듯이, 첫째 우리는 바울의 설교 전체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들은 갈라디 아인이 증언하기 위 해 죽은 자 가운데 서 살아오지 않는 한,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 다음엔, 바울이 여기서 무엇인가를 첨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론 복음을 금하고 있을 분어다와 같은 말 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핑계는 다만 유치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바울의 교의(敎義)는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할 팔요가 있는 만큼, 그의 많은 서신 으로부터 아주 명확하계 배울 수 있다. 교황파의 교훈 전체가 이 복음과는 완전히 도착(倒鉛)되었다는 것은 극히 명백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타락한 교훈이 바울의 설교와는 판이하다는 것은 방금 위에서 예를 든 경우 를 보아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저들이 이러한궤변을시도(試圖) 해 보아도 전혀 무익할 뿐이다.

바울은 자신의 섣교를 매우 자신있게 절찬한 후, 이번에는 그것이 정당한 이유에서 그렇게 한 것이요, 결코 어리석은 고만(高漫)에서 한 것이 아님을 논증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논증하기 위해 두 가지 논법을 쓰고 있다. 첫째는 자기 마음의 갑정져 동기에 관한 것인데, 그는 야십 때문에, 혹은 아침하려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조화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보다 훨씬 강한 것인데, 그 자신이 그의 복음의 처술가가 아니며, 다만 하나님으 로부터 받은 바를 충실-히 사람들에게 전했을 분이라는 것이다. '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 이 귀철은 헬라어의 구문이 애매하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해석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제 사람을 권고하고 있읍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입니까?~타고 해석하며,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을 ‘신적 표준'과 ‘인간 의 표준'이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이 해석이 원문 말씀에서 너무 멀어지 지 않았다면 문맥상으로는 매우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자연 스러운 해석을 따르고 싶은데, 다시 말하면 헬라어에서는 '······에 의하여'에 해 당하는 전치 사 Ka,a(카타)를 보충하여 생 각하는 것 이 보통이 기 때 문이 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설교의 주제나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고, 지기 자신의 마음의 의도, 곧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 관해서이 다. 그리고 교훈 자체 역시 그것을 가르치는 스승의 갑정과 상관이 없는 것 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교훈이 야십이나 탐욕 기타 여러가지 악한 욕 정에서 생기는 것처럽, 올바론 양십은 순수한 전리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교훈은 사람의 환십을 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 기 때 문에 건전하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 ; 이 둘째 부분은 앞 부분과는 크계 다르지는 않지만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왜냐하떤 사람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따라서 말하계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마 음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말을 꾸미고자 하는 야십으로 지배되고 있을 때는, 순수하계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그러한 결 점으로 인해 더러워지지 않았다고 공언(公言)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더욱 대담하계 중상을 면하기 위해 질문 형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질문이란 것은 반대자들에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해 주는 것이요, 그런 경 우에 있어서 반대자에게 더욱 무게와 격렬을 더하게 하지만, 사실 저들은 아무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 선한 양십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입증하기 때문이며, 그는 어느 누구도 자기 를 힐책할 수 없도록 말은 임무를 다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사립들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 ;  기억할 만한 문귀이 다. 야십가들, 곧 사람의 호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그리스도를 섭길 수 없다 는 말씀이다. 바울은 그것을 특히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편에 서 기 위 하여 사람의 호의 를 자전하여 단념 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써 그는 자기의 과거 생활과 현재의 생활을 비교하고 있 는 것이다. 그는 과거에 크게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어디서나 기쁘게 환영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그가 사람의 환십을 얻고자만 했다면 그의 상 태를 바꿀 팔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에서 앞에서 말한 일반적 인 교훈, 다시 말하면 충실히 그-리 스도를 섭 기 려 고 하는 자는 인간의 모든 호의를 단호히 뿌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사람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어떤 제한된 특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일부러 사람을 불쾌하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 다. '사람’이란여러가지 형태가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께 서 기뻐하시는사람들을, 우리도 기뻐하려고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반대로 참된 교훈보다도 자기의 목적이나 감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에게논 어떠한 자 세로 있든지 따를 수 없다. 실제로 정말 충실한 목자라면 항상 모든 일에 있어서,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무리의 원망을 들을 것을 각오하고 두려워 말고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의 인 기를 구하는 사악한 위선자들이 참적(潛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 량한 사람들까지도 무지하기 때문에, 혹은 십약(心弱)하기 때문에 때때로 악마에게-미혹되어서 자기에게 구원의 도를 가르치는 목사의 신실한 경고에 대해 화를 넬 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한 사람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물론 어떠한 반대자의 악감정을 초래한 다 해도 무서워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귀철을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저들은 이것 을 일종의 양보처 럼 보고 ‘내 가 사람을 기 쁘게 한다면, 나는 그리 스도의 종 이 아니다. 나도 이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누가 나를 힐책하랴? 내가 사람 의 호의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알아주지 않으랴?'타는 의미로 생각 한다. 그러 나 나는 전자(前者)의 해 석 을 더 올바르다고 생 각한다. 다시 말 하면,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헌신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의· 애 고(愛顧)를 단념했는가를 말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 자기가 전하는 복음은 사 람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것이라는 것은 가장 유 력한 논거이며, 또 이 문제 전체의 주요점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부정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사건에 근거한 한 가지 해석적(解釋的)인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공언(公言)에 무게를 더하기 위하여 첫째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불확실한 것에 관해서 가 아니고 언제든지 보증할 수 있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 한 서문(序文)은 중요한 문제를 논하려 할 때에는 아주 적합하다. 그는 자 기의 소명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부름 받는 사연 속에 인간의 허구성은 전연 느낄 수 없으며 혹은 인간의 조작으로도 된 것이 아님을 확 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는 중에 계속하여 자기는 지상(地上) 의 어떤 스승으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덧붙여 말했다•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누가 어떤 사람의 사역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고 그리고 나서 그 자신이 교사가 되어 교회에서 가르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면, 말씀의 권위 가 그런 경우엔 비교적 낮다고 말하겠는가? 그런데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 떤 안 되는 것은, 거짓 사도들이 어떤 점에서 바울을 공격했는가 하는 사실 이다. 처들에 의하면 바울의 복음은 결합이 있고 걸치레분이며 가짜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은 어떤 교사로부터 받은 모양이고 더 구나 자신도 잘 알지 못한 것을 지금 제멋대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처들은 자기들이 가장 높은 사도들의 문하생이었다는 것을 자랑하며, 그 사 도들의 은밀한 생각까지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 세계 와 비교하여 자기 교훈을 하늘에서 재시된 것이며 어떤 인간의 학파에서 배 운 것도 아니라는 자기 입장을 주장할 팔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사도들의 중상을 결코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아나니아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았느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 대한 답변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 히 계시로써 바울을 가르치시며 동시에 그를 교육시켜 그 직무를 허락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수단으로 쓰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계시를 동하여 하나님이 직접 바울을 부르셨고, 사람 들의 의견과 업져한 공식적 찬동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상호간에 전혀 모순되 지 않는다. 5

  "13.  내가 .•••.• 너희 가 들었거니와······" ;  이 섣화(說話)는 모두 논증을 위해 여기 첨가되었다. 바울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복음을 십히 형오(嫌惡)했는데, 자기는기독교이름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적이요, 파괴자였다는것을말하 고 있다. 이 사실로부터 그의 회십(回心)은 굴 }나님으로 말미 압았다고 결론할 바가 반대되지 않고 수취(受取) 수 있다. 참으로 바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사건의 증인으로서 저 들을 부르고 있 다. 되기 위해, 한접 의십할 여지 없는 ‘내 동족’ 이 라고 불렀 다. 그것 은 선조(先 바울은 그의 같은 시 대 사람들을 祖)들과 비 교하는 것 은 적 당하지 않기 때 문이 다. '조상의 유전’ 이 란 것 은 하 나님의 율법울 타락시킨 부가물(#1Jll物)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어릴 때부터 교육 받았고 부모와 선조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 받은 하나님의 울 법 자체를 말한다. 바울은 전적으로 자기 나라의 의식(儀式)에 너무 열중했 기 때문에, 만일 주님이 기적으로써 그들 밑바닥으로부터 끌어내어 돌이키 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이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5.  그러나……나툴 택정하시고……" ; 이 택정은 하나님의 의도였고, 하나 님은 그로 말미암아 바울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託2) 사도직에 임명되었 다. 그 다음에 그의 인생에 있어서의 소명이 임했다. 주님은 그것이 그에게 향한 주님의 뜻임을 알려서 그가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명하셨다• 하나님이 세상 창조 이전부터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관하여 하나님이 하시려 는 뜻을 작정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한 지혜에 의하여 각 사람에게 그. 임무를 할당하셨다는 것은 결코 의십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때때로 다 음 삼 단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다음에 모 태(母胎)에 있을 때부터의 택정,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실현 및 완성키 위한 소명,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동이었다. 주님은 예레미야 제 1 장에서 바울 이 여기서 말한 것과는 약간 다르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결국 의미는 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 벌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 : 5).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성별함과 같이 바울도 역시 그가 출생하기 전에 사도로 성별하셨 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우리를 택정하셨다고 하신 것은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작정하신 바를 우리에게서 완성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 신 임무를 우리가 감당할 만큼 되는 때, 곧 그 적철한 시기까지 연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말을 다음과 갈이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동해 그의 아들을 나타내시기를 기쁘게 여기실 때, 하나님은、 이미 나를 택 정하신 대로 나를 부르셨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자기의 소명이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으로 말미압았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사도칙에 임명된 것은 자· 기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이런 중대한 책임을 갑당할 만큼 수양했기 때문이 라든가, 혹은 하나님이 자기를 이러한 칙을 맡을 만한 자로 보셨기 때문도 아니라, 다만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비밀스런 뜻으로 말미압아 그렇게 택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자기 소명의 근거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과 관련 시켜 말하기를 항상 즐겨하였다. 이것을 우리도 신중히 주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선택 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분 만 아니라, 만약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무익한 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우 리를 너무나 갑사하계도 하나님을 섭기도록 하셨으며, 그리고 우리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올바론 직업이 우리에게 배당된 것도, 무릇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출생 전의 바울에게 이렇게 큰 영예(榮署)를 받을 만한 무손 가치가 있었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도록 부름 받은 것은 전칙인 하나님의 순수한 온사 이며 우리 노력의 견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타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택정’이라는 말에 대하여 미묘한 이유를 붙이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서 논할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정하셨다든가 혹은 구별하셨다’고 말씀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론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어떤 특성을 우리에게 부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경문에 의하여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기 위해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울은 자기 의 소명이 자기가 모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선 뜻으로 값 없이 자기를 구벌하신 것부터 시작하여 자기의 소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압 았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지만 다시 한번 이것을 확실히 서술하고 있는 것 은,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며 자기가 허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가 하고 생각하는 의십을 밝히기 위해서이며, 다론 한 가지는 자기가 하나님 께 대하여 망은(忘恩)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이와 같이 자전 하여 소명에 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은 거짓 사도와의 논쟁 문제가 있기 전 에도 늘 그렇게 했던 것이다.

 

"16.  그 아들을… ..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틀" ; 이것을 ‘나에 의하여 나타 내시기를(계시하기를)’이라고 읽는다면, 그리스도를 알리는 사도칙의 목적 을 의미하게 된다. 어떻게 알릴 것인가? 그리스도를 이방인 가운데 전함으 로써이다. 거짓 사도가 바울을 비난한 것온 실온 그 점에 관해서이다. 그러 나 헬라어를칙역하면 ‘내 속에'타고되지만 내 생각으로는이것이 히브리어 ‘나에게'에 해당하는 말인데, 히브리어에서는 이 말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게는 주지(周知)한 대로 의미없이 너무 자주쓰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부 분의 의미는 결국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계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 혼자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향유하며 그의 마음 속에 은밀 히 간직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바울 자신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를 이방인 가운데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뻐하실 때에" ;  이것은 그의 기적적인 회십에 관한 설화의 둘째 부분이 다. 그런데 여기서는, 전부 한군데 종합하여 한 줄로 기록된 것을 부분으 로 나누어 보면-바울온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하나님의 은혜 에 의 하여 부름 받았다. 그리 고 소명 직 후 사도들과 상담하지 않고 하나님 의 경문과 뜻을 확신하고 망설이지 않고 부과된 사명을 다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구문에 있어서 에라스무스는 벌계이트(라탄어여 성경) 와는 다른데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 위한 목적으로 나를 부르 신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내가 이방인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전하 도록…···'이라고 연결시켰다. 그러나 나의 판단에는 옛 번역이 문맥상 적합다. 왜냐하면 제일 먼처 바울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셨고, 그 다음에 그 리스도를 전하타는 명령이 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나를 통하여…… 나타내 신다' 논 에 라스무스역 을 따라야 한다면, ‘전하기 위 하여 ' 란 문귀 는 그 계시의 양식을 묘사하기 위하여 부가된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바울이 전개하는 이론은 그령게 강하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 냐하면 그가 기 독교로 개 종하자마자 사도들과 의 논하지 않고 곧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그가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 여 가르침을 받아 그 직무에 임명되었다고 추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러나 우리는, 바울이 여러가지 근거를 들고 있는데, 그것들을 하나로 모으 떤 확실히 결정적인 논지(論旨)를 이물 수 있다논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름 받았다는 것을 논하고 있 다. 다음은 그의 사도칙이 다론 사도들에 의하여 인정되었다는 것, 그리고 나서 다른 논증들이 계속 뒤를 잇고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 설화 전체를 하나로 종합하여 이해할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또 각 부분에서가 아닌 전 체에서 결론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  혈육과 의논하는 것은 혈육과 상담하 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혈육이란 말의 의미는 그가 단순히 모든 인간의 의견 울 제외하고자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하 본문에서 밝혀지겠지만, 이것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과 아울러 저들의 상식과 지혜를 모두 다 포함하고 있 기 때 문이 다. 아니 그분만 아니 라 그는 분명 히 사도들까지 포함하여 언급 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소명이 칙접 하나님에 의하여 되어졌다는 사실을 더 한층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권위에만 의지했고 또 그것만이 만족히 여기고 선교 임무를 다했다.

 

"17.  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 ; 바울은 여기서 앞에서 서술한 선언 을 설명하고 더 자세히 부연(敷衍)하고 있다. 마치 그는 ‘나는 어떠한 인간 의 보증도 원치 않았다. 십지어 사도들자신의 권위마저도’라고말하려는 것 같다. 바울은 사도를 여기 마로 분리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혈육이란 말에는 사도들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확실히 잘못 알고 있 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 혹은 별다른 것을 첨가하려 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전에 막연하계 말한 것을 보다 명료하게 해설하고 있 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사도들을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 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역하게 된 동기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처 천한 무리들의 찰못된 오만 대문에, 바울은 사도들까지 도 하나님과 대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조물을 하나님 과 비교할 때는, 가령 피조물을 낮추는 어떤 경멸적인 이름을 붙인다고 해 도 결코 그를 모욕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 삼 년간에 관해서는, 다른 많은 것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말이 없다. 그 러므로 이 부분을 단서로 하여 모순을 지적하려는 사람들의 중상(中傷)은 하찰것없는 것이다. 경건한 독자들은 바울이 사역을 시작한 최초 순간부 터 어떠한 유혹과 더불어 싸웠으며 얼마만큼 져십한 환난이 그를 업습했는 가를 여기서 조금은 생각하기 바란다. 바로 엇그제만 하더라도 큰 명성을 떨치며 권세를 가지고 당당한 부하 일단을 거느리고 다메색으로 파견된 바 울이 갑자기 마치 국외로 추방당한 것처럼 낯선 땅을 여기저기로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18. 그후 삼 년 만에……" ; 바울은 사도칙을 수행하기 사작해서부터 처 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러므로 그의 사도칙은 인간의 소명에 의하 여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도들과는 다른 교훈, 다론 목적을 가전 것처럼 여기거나 또 그것 때문에 처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회피 한 것처럼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베드로를 방문하기 위해 예루살렘 으로 올라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사도칙을 시작하기 전에 다론 사도들의 권위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가 사도칙을 계속한 것은 다론 사도들의 뜻을 반대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저들의 동의와 찬성에 의한 것이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그가 다른 사도들과 불화한 적이 한 번도 없었 고 지금도 오히려 처들과 전적 의견을 갈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예루 살렘 체재의 기간이 극히 짧았던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지만, 그가 예 루살렘에 간 것은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고 다만 상호간의 교제를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다론 사도들을 보 지 못하였노라’고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도 역시 그것 때문이다. 다시 말하 면 그의 여행 목적은 오칙 한가지 분이었고 다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E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 이 야고보가 누구였는지를 확인하지 않으 연 안 된다• 옛날 사람들은 이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를 관장하고 있던 오브리아스 혹은 의인이란 별명으로 볼리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데 거의 다 의견이 일치했다. 더우기 어떤 사람들은 그를 요셉이 다른 여자와의 사 이에서 얻은 아들이타고 생각하며, 또 다론 사람들(이 의견이 가장 진실하 계 보이지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형제(從兄弟), 즉 어머니 마리아의 누이 동생의 아들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사도들 중의 한 사람 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에 대한 제 롬(Jerome)의 변해 (辯解)는 타당하다고 볼 수 없 다. 그는 사도의 이 름이 때 때로 열 두 제자분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사람에게도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최고 성직자(最高聖職者)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참 시 후에 접하계 될 것이지만, 야고보는 교회의 주요한 기둥의 하나로 간주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알패오의 아들이타고 보는 편이 훨씬 타당할 것 같다. 당시 다른 사도들은 여러 지방으로 홀어전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저 들이 할 일 없이 일정한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71는 바나바가 바울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간 것을 말하지만, 이 사도라는 것 은 열 두 사도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두세 사람 만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해야 한다.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 ; 이 확실한 주장 속에는 그가 말하는 것 전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바울 이 중대한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않는 맹세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가 이 문제를 어느 만큼 전지하계 논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 다. 그가 이 문제에 관하여 이처럼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 할 것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위에서 본 대로 이것은 선동자가 그에게 서 사도의 이름과 영예를 빼앗으려고 얼마나 음모를 꾸몄는지 모르기 때문 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성인(聖人)들은 어떤 형식으로 맹세했는가 하는 사실이며, 그리고 맹세한다는 것은 다만 우리의 말과 행위의 참되고. 신실함을 하나님의 십판대 앞에서라도 말할 수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태도 이 런 변론에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敬長)와 외포(長 怖)가 인간의 마음을 지 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1. 얼굴로 알지 못하고 .. …" ; ·이것은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십술궂고 해하고자 하는 마음울 특별히 드러내 보이기 위해 부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바울에 관해서 이야기만 들었을 분 얼굴을 보지 못한 유다의 모든 교 회가 하나님이 바울에게 이처럼 놀랍게 여사하셨다는 데 대하여 마음에 갑 동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면, 그 경단할 역사를 눈 앞에 실 제로 본 사람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그 얼마나 수치스럽고배은적(背恩的)인 행위인가! 유다에 있던사람들은 소문 만으로도 만족했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 생생한 사실을 목겨하고도 오 히려 만족하지 않았을까? '찬해하던 그 믿음’ 그가 믿음을 파괴(찬해)했다 고 말한 것은, 믿음 그 자체는 파괴되는 것이 아니지만, 약한 사람들 속에 있는 믿음을 파괴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 표현된 것 은 파괴된 결과보다도 파괴하려던 시도에 관한 언급이다.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들리니라." ;  이것은 그의 사역이 유 다의 전 교회로부터 인정 받게 되었고 또 저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바울에게 임했다는 것을 찬양과 감탄으로써 인정하는 명백한 표시이다• 그 태서 바울은 자기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저들의 야십과 중상을 통 해 얻은 것은 결국 사도들이 꽁적으로 승인한 바울의 사도직에서 빛나고 있 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고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님의 성자(聖者)들을 어떻게 촌경할 것인가 에 대한 다소의 원칙이 부수적으로 우리에게 내려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의 온사로 장식된 사람을 보면, 우리가 너무도 타락했고 은혜도 모르기 때 문에 처들이 어디서 저런 은사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논 잊어버리고 그 사람 자신을 마치 신처럼 숭배하려는 미신에 빠질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 부 분에서 우리를 권면하고 있는 말씀은 은혜 주시는 은혜의 창조자에게 보답 해드릴 것은, 은혜 받고 있는 사람보다도 그 근원이 되시는 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는 적이요, 반대자였던 바울이 변하여 교역자가 되었다는 사실온 하나님을 찬미할 내용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