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요일4:7 ~ 16)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7)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9)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0)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1)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2)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3)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4)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5)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6)
2. 묵상 (Calvin선생주석)
"7, 사랑하는 자들아~~~~~~~" ; 사도 요한은 그가 거의 전서신을 통하여 추구하고 있는 권면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가 믿음의 교훈과 사랑의 권면을 함께 혼합하여 말하였던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는 이 두가지 사실 곧 믿음과 사랑을 계속적으로 상호 연관시키면서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가 사랑을 우리들에게 요구할 때, 다른 사람이 우리를 사랑 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를 사랑하는 상대적인 사랑, 곧 의무적인 사랑을 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믿는 사람들을 모두 공동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뜻 이외의 다른 의미로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은 아무도 그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증거할 없으며,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지식은 필연적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참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이미 사도 요한이 그 이유를 앞에서 설명하였다.
사도 요한이 늘 쓰는 방법대로 그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있을 수 없다는 반대적인 귀절을 여기서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임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더 자세한 많은 이유를 알고 있으며, 특별히 고대인들은 이 귀절을 성령의 신성을 증명하는 데 잘못 곡해하였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여기서 단순히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시며, 이 사랑이 그에게서부터 흘러나와, 깨닫는 지식이 있는 곳마다 흘러 넘치게 된다고 하였다.------이것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빛이시며, 이 빛되신 하나님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고 그의 빛이 만물을 밝게 비추신다고 처음에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여 기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가를 우리가 경험한 사실에 대하여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의 말 속에서 두가지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은 우리를 중생하게 하고 새로운 사랑이 되게 함으로써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게 한다. 또한 '피데스 인 포르마타; 형성적 신앙' 의 어리석은 날조에서 떠나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랑에서 믿음을 분리시키려고 한다면, 그는 마치 태양에서 열을 제거하려는 사람과 같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 하나님의다. 사랑은 우리에게 그 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만일에 세상이 왜 창조되었으며,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왜 가지게 되었고, 또 빛과 이해력 등 무수한 축복을 인간이 왜 부여받고 있는지, 그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값 없는 그 사랑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고 밝히게 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여기서 여타의 모든 것을 능가하는 중요한 실예를 들고 있다. 그것은 그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시어 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 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일 뿐 아니라, 놀라움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그 굉장한 축복을 선택하여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빛나고 놀라우신 거룩한 사랑의 증거이며,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 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그리스도는 분명히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독생자라고 부가하여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유일하신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시는 유일무이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양자가 되게 하였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게 된 것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모두 죽은 자이다. 그러나 그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우리의 불신이 그 사실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은혜 를 우리 안에서 항상 깨닫게 될 것이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되었을 때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8절에서-밝히고 있는 것처럼다른 이유를 밝힘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즉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에 감동되어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의로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말 속에서 그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값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도록 하는 것이 사도 요한의 목적이지만,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국민음에 대 한 교훈도 우리가 간과하여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값없이 우리를 사랑하신 다음 왜 그 이유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 를 참되게 통신실한 마음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미리 아셨기 때문 에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가톨릭의 궤변을 ,용납한다면, 하 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이 교리는 설 곳이 기업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비록 시기적으로는 후가 되겠지만 서열적으로는 최초의 위치에 두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성경의 원리로 여겼다. .그러나 제세속적인 궤변가들은, 우리가 날 때부터 매우 타락하고 부패하여서 우리 인간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있으며, 그를 노엽게 하는 일 이외 에 다른 아무 욕구가 없고, 또 육신에 대한 사랑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 ()를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의 축복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선하심에서부터 오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깨달아야 하듯이 우리가 완전하고 확고한 하나님의 사랑을 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곳에서 그 사랑을 찾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 나님의 은밀하신 섭리를 따지는 자들은 스스로 파멸케 되는 미친 자들이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의 회복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과 그의 사명에 대하여 다시 말하고 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이 불화는 크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할 때까지 계속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둘째로; 우리 의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미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신 바로 그 때부터 시작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화해는'엄밀하게 말하 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제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죄를 속죄하시는 그 영예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적대 관계를 제거하실 영예는 오로지 그리스 도에게서만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마치 교리적인 모순이 있는 것같이 보인다. 즉 .만일 하나 님께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다른 화목제물이 필요한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마치 불필요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것은 우리의 감성에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항상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책을 제거하여 주시기 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무섭고 노하신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 문이다. 죄가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 대한 심 판을 제거하시기를 원하신다. 사실로부터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 으심으로 우리 조직를 사하시고 그의 보혈로 우리를 사망에서득구원하실 때' 가까 지는 우리가 현재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더구나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사랑을 받는다는 확증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오직 그 안에만 의가 있는 그 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사건들과 다른 여러 국면에 대한 표현들이]다양 하게 나타남을 보는데, 이런 것은 믿음에 대한 가장 적합하고 유용한) 것이 다. 히나님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시려고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원수였으며, 그의 진노를 일으키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나쁜 의식이 우리의 생에 대한 향기를를 박탈하고 있었다. 그러 므로 우리의 믿음에 대한 감성에 .관한 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시작하셨다. 사도 요한이 여기서 최초의 화해를 취급하고 있을 지라도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구속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영원한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가 를 화해하는 톨릭 결교도들도 이것을 부분적으로는 시인한다. '그러나 그들은그들의 허구 적인 만족을 부가함으로써 이 .은혜를 점진적으로 약화시키거나 거의 폐지시 키고 만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자신의 공적에 의하여 스스로 죄를 구속할 수 있다면 여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역처럼,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중보자가 될 수 없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조금전에서 가르친 것을 지금 그의 목적에 적응시키고 있으며, 또 하나님의 사랑을 모 범으로 우리가 서로 형제를 사랑하도록 우리를 권고하고 있다. 같은 방법으 로 사도 바울도 우리를 위한 향기로운 체물로 자신을 친히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우리도 이웃을 위하여 현신하라(입 5:2)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께서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이 상호 거래적인 성경이 정보에서는 안된다고 발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값없는 사랑을 반고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 여야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편익()을 좇아서 그리고 상대방이 우리에 게 베푸는 사랑의 정도 만큼만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이기적인 사랑이요,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이와 동일한 말씀이 복음 서 첫장에 1나타난다. 그러나 요한은 거기서 동일한 결론을 보이지 않고 있는 i 는 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함, 으로써만 하나님 자신을 알릴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도 요 한은 같은 진리를 서 하나님의의 '능력 더욱 확대시키고 있는데, 즉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통하여 을 깨닫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 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첫째로,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라고 말할 때 그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때에 비로 소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여지며 참으로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음이 나타나 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이 형제를 사랑하도록 하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 현실적으로 친히 나타나신다는 말과 같다. 같은 의미로 사도 요한은 그가 이미 말한 내용을 되풀이 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 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우리는 그가 베푸시는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된다'. 이것은 사랑이 성령의 결과라는 앞의 문장을 더욱 확신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체 내용은 사랑은 하나님의 고성령으로부터 오므로, 만일 성령이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지 않으시면, 우리가 참되고 신실 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는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사랑을 통하 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나타낸다.: 한편,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 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경제를 사랑하지 않는 그 사실로서 그 사랑의 무익함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그리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고 말할 때 그 접속사는 원인이 되는 불변사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랑이 두가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거나, 성령에 관한 것을 주셨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을 우리가 약간은 알기 때 문이다.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 이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취급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 곧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께 연합시켰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사실을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사실은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믿음과 사랑으로 우리에게 연합하심으로써 우리 안에 계시고,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수 없으므로 그의 능력의 결과로 자신을 나타내어 보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 것이다.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라고 사도 요한이 말할 다때,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함께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어떤 류의 시각적 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연합되는 것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세상의 구주로 보내심을 받은 것"과 이 지식이 성령의 조명으로 이루어진 사실로 계속 진행되기 때문이다.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연합되고 또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될 수 있다는 원리를 계속 되풀이 하고 있다. 믿음과 고백은 여기서 같은 의미로 공평하게 사용되고 있다. 아무리 위선자들이 거짓으로 믿음을 고백할지라도, 사도 요한은 참되고 신실하게 믿음을 고백하는 질서 속에서 그 진위를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도 요한이 말했을 때, 그는 믿음의 총체를 한두마디로 집약하고 있다. 왜냐하면,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인간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힘을 받았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하나님께 연합하셨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였을 때, 그는 일반적인 진술을 그의 독자들에게 적용시키는 그들이 보았다는 논법을 부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람들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권고를 곁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이야기 내용의 순서와 관계는 이렇게 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연합하시면 반드시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
"16.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알았다',는 그의 말 과 동일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런 지식은 오직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불확실하고 의심스런 생각이 얼마나 믿음과 거리가 먼 것인가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보았다. 더구나 이미 밝힌대로, 아무리 사도 요한이 여기서 그 마지막 문장을 수그의 독자들에게 적응시키고자 할지라도 그는 믿음의 본질을 다른 방법으로 밝히고 있다. 앞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밝힌 일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제 믿음으로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깨닫게 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깨닫는 사람 이외에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타난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날마다 그리스도를 우리 앞에 제시하여 주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 이것은 말하자면 삼단논법에 있어서 2차적인 제의이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부터 사랑을 이렇게 추론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그 어디나 사랑이 충만하게 된다. 이 사실에서 사랑은 믿음과 필연적으로 연합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