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요일4:17~21)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7)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8)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19)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0)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21)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 이 문장 안에는 두 귀절이 있다. 즉 자녀들이 자기들의 아버지를 닮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닮을 때, 우리는 거룩한 양자가 된다는 그것과, 둘째로, 이 확신은 참으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축복인데 왜냐하면 이것 없이는 우리가 가장 비참한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사도 요한이 그의 사 랑 안에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과 그리스도 안에서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은혜를 우리가 어떻게 누릴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여기서 깨닫게 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다' 고 표현하였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면에서 충만하게 우리에게 부어 주시고 또 참으로 완전하게 우리에게 수여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는 자들만이 이 축복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는 확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서로 관련된 논증이다.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 사도. 요한은 뒷부분에서 대조를 통하여 더 분명하게 밝히겠지만, 여기서 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심판주요, 우리의 죄를 정죄하시는 분이심으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죽음과 지옥이 항상 우리 뇌리에서 떠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내가 이미 진술한 공포가 나오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은 가능한한 하나님을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믿는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확신을 가지고 기쁘게 나아가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날을 맞이 할 준비를 갖추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 이미 밝힌 것처럼,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도 요한은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것처럼, 우리가 땅 위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때,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된 표식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마치 사도 요한은 우리가 행함으로써 우리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말한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톨릭교도들은 여기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고 구원을 위한 상호협력 없이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기서 사도 요한이 원인에서부터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연합되어 있는가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그리스
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없으며, 이 두요소를 절대로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이 은혜의 확신에서 분명히 제외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하나님의 성령과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적합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론 확신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결과로서의 새로운 생명을 부인하지않는다. 그러나 은혜가 그 일차적인 주요 요소인데 비하여 그것은 2차적인 보조 요소로 받아들인다.
다른 식으로 생각하면 사도 요한의 가르침은 참으로 통일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경험이 그렇고 심지어는 행위에 관한 한 항상 동요하고 있다는 가톨릭 교도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값 없는 사랑을 받았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평안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들이 불쌍한 철면피들, 그들이 알고 있는 믿음이란 의심으로 뒤얽혀져 버린 것 밖에는 없는 가톨릭 교도들은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하여 조금도 놀랄 필요는 없다. 더구나 위선의 흑암으로 가득차버린 그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인정하지 않을 때 그들이 받을 심판이 얼마나 무섭다는 사실을 그들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는 자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쁨과 감사로 만나 뵙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의 은혜만을 굳게 믿는 확고한 믿음을 지켜야 한다.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사도 요한은 이 축복을 그 반대되는 상황고하 대조시킴으로써 이 축복의 탁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 황과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심으로 그 비참한 고통에서 자유하게 하실 때까지 우리는 항상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전체적인 내용은 세상에는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시달리는 것 이상 더 비참한 것이 없다는 것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달음으로써 공포가 없는 평온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탁월하신 사랑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뻐하여야 한다. 교 훈으로부터 사도 요한은 곧 한 권면을 '끌어벌 것인데, 그러나 우리의 의무 에 대하여 권고하기 전에 그는 믿음으로 우리의공포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그 선물을 칭찬하고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시귀절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러내나 나는 사도 요한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 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구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자의()로 사랑할 때 그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억지로나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도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 의하면, 도예의 두려움은 여기서 자발적인 경외와는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노예와 자녀의 두려움 사이의 구별이 크게 생기게 된다. 그녀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거리낌없이 사랑 하게 될 때, 우리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더 이상 갖지 .않게운된다는[2사실 을 참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청경 귀절과는 관계가 없다.사도 요 한이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알게 될 때, 평화가 우리 마음에 .찾아와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괴롭힐 수 없다 는 것이다.
러나, 언제 완전한 사랑이 우리의 공포를 제거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사랑의_맛을 깨닫게 된 었으므로, 두려움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비록 공포가[우리에게서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고요한 항구 되시는 하나님께로 피하여 왔으므로, 학파선과 폭풍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 어나 안정과 자유를 얻고, 공포가 다 물러갔으며,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은 답하겠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공격하지 않고는 쉽게, 물러가 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물러갈 것이므로, 우리를 방해하거나 믿음 으로 얻은 평화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사도 요한은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은혜를 찬 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계속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은 최대의 비극 이므로, [고요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뵈옵는 것 이상 더 큰 소원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것처럼, 증들은 그들 앞에 형벌과 징계가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그들이 하여야 하기 때문 에 그들의 일을 할뿐, 우리가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도 요한이 의 미하는 뜻은 조금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다음 구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을, 기쁨으로 순종하지 보않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다고 설명할 때, 차라리 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전후 문맥과 일치하지가 않 는다. 그와 반대로, 사도 요한은 어떤 사랑이 두려워 할 때므말하자면; 마음 이 혼란할 때 그것은 불신앙 때문이라고 '우리에게 _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깨닫게 되면, 마음이 평안해지기 때문이다.
"19. 우리가 사랑함은~~~~~~" ; '아가포덴 ;'사랑하다' 이란 동동사는 직 설법이나 명령법 '두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보여기서는 그 의미상 전자 ()가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내 선생각에는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서 의 값없으신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신 것같이, 우리도 그에게마땅히 드려야 할 경외를 드려야 한다고 계속되는 문장에서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마치 그가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거나 혹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증거되어야 한다고 덧붙인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명령법을 취한다면, 그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께 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가운데 형제 사랑으로 그것이 나타나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만일 어떤 사람들이 그의 이웃을 사 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랑하면 그들은 거짓말장이라고 말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2차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사이의 비교에 있어서 충분히 확정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도 요한은 만 일 우리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보이 지 않는 하나님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여기 서 두가지 모순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은 베드로전서 1장 8절에 나타난 것처럼 믿음과 보지 못하는 데서 흘러나온 다. 둘째로, 하나님께 관한 기본은 인간에 대한 그것과 매우 다르다. 하나 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에 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강권하
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때때로 하나님의 증오를 받을 짓을 한다. 나는 사 도 요한이 우리 가운데 틀림없이 무엇이 있어야 할 것으로 의당히 생각하였 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고, 또 우리가 사람들에게 마땅히 행할 의무-이것은 물론 하나님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지만 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시편 16편 2절에서 보는 것처럼,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구원이 없다 하였나이다"
그리고 동일 본질에 있어서의 교교제는 많은 사물과 상호 교통으로 인하여, 만일 .우리가 무쇠가 아니라면,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어떤 사람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눈 :앞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 자만이라고 말하고 있다.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위와 교 훈으로부터 온 강력한 논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가식없는 사랑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우리 이웃을 사랑할 것을 또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0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사 랑이 동시에 사람들에게까지 이르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