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요한일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5:12)

1. 성경 (요일 5:1 ~1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3)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4)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5)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6)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7)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8)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라 (9)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0)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 (11)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2)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사도 요한은 다른 이유로서 믿음과 형제 사랑의 연합을 확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중 생시키셨으므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 인간의 사랑을 당연히 받으셔야 일할분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모든 그의 자녀들을 포용하신다. 그러므로 믿 음은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없다..

 

최초의 언급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모두가 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여러분은 그리스도만이 오로지 믿음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제시되었음을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만 의와 생명과 모든 갈망하는 축복과 온전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이르는 유일한 참 길은 우리가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곧 바르게 향하게 할 때이다. 더우기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메시아에 대하여 약속되어진 모든 것을 그에게서 얻을 것으로 소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에게 돌려진 것은 그리스도의 공허한 칭호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그리스도의 임무를 지적하고 있다. 율법에 나타난 것처럼, 의와 행복 등 모든 축복의 충만한 회복이 이 메시아를 통하여 약속되었으며, 그러므로 오늘날 이것이 복음서에서 더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그에게서 찾는다면, 예수님만을 그리스도로 맞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에게 매일 구세주로 영접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 요한은 참으로 신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라고 정당하게 선포하고 있다. 믿음은 우리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며,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리스도께 이를 수 없으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신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사람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사도 요한이 .복음서(요 1 13)에서 밝힌 이유이다. 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 : 12) 고 말하고 있다.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 못하며 마음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축적하여 두기 위함이다. 오직 성령만이 이 신비를 깨닫게 하여 주신다. 다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별하시고 우리에게 ,중생의 성령을 주셨으며,  간단하게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이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가 된다.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어거스틴과 다른 고대 저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는데 그러나 이것은 틀린 것이다. 사도 요한은 단수를 사용하였으면서도 그 단수가 모든 믿는 사람을 나타내며 이 문맥은 원천으로서의 믿음으로부터 서로간의 사랑을 이끌어내는 것이 그의 움직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일반적인 질서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 그의 움직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일반적인 질서로부터 이끌어낸 논증이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 양도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마치 믿는 자들만이 사랑을 받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생각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처럼,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으면서도 구원 밖에 있는 자들을 생략하고 있지 않다는 데 대해 주의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교훈을 통하여 그는 우리가 신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을 예외없이 다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2.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  이 말 속에서 그는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간단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관계된다. 이제까지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 대한 참 사랑은 오로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먼저 확립될 때에 비로소 인간을 바르고 정당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정의는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을 사랑하는데, 이것은 부정하고 육적인 교우 관계가 개인적인 이익이나 혹은 어떤 다른 소멸되고 말 대상만을 생각할 때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먼저 그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지금은 그 결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상호간의 사랑이 우리 사이에 서로 계발되어서 하나님 제일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율법의 준수를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와 주로 사랑할 때 그 사랑에 경외가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더우기 하나님은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의와 공평이 근원이 되시므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을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순종시켜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게으른 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 이 귀절에서 우리는 율법의 참 순종이 무엇인가를 추론하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움 때문에만 지키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참 순종과는 먼 거리에 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할 일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헌신하고, 다음에 우리의 생활을 율법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율법을 요약하여 설명할 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그를 사랑하고 그를 순종하는 아니냐?" (신10:12)라고 말한 것과 같다.

 

"3.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요한은 가끔 일어나는 것처럼, 어려움이 우리의 열정을 깨뜨려버리거나 축소시켜버리지 않을까 하여 이 말을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쁜 마음과 큰 열정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던 어떤 사람들이 나중에는 점점 약화되어 그들의 힘이 사라져가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수고를 격려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들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율법의 멍에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겁다(행 (15 : 10) 고 말한 성경 말씀과 또 앞의 내용과 뭔가 상당히 다른 점을 우리가 체험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시 분명하다. 왜냐하면, 자기 부인은 율법을 지키는 일종의 서곡인데, ¡인간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쉽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14절에서 밝힌 것처럼, 율법은 영적인 것이고, 우리는 육에 속한 사람이므로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율법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어려움이 율법의 본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육신의 악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즉 율법으로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후에, 그는 곧 그 이유를 육신에게 돌렸다.

 

이 설명은 아주 모순되는 것 같은 바울과 다윗의 진술을 아주 잘 조화시키 고 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죽음의 사자로 보고,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며 죄를 증가시키고 우리를 죽게 하는 것(고후33 롬 4 15)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은 꿀보다 더 달고,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마음을 즐겁게 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게 하며 생명을 주는 것" 이라고 모든 찬사를 쏟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을 인간의 타락한 본질과 비교하면, 또 이것은 갈등이 일어나는 곳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나게하신 자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신선함과 기쁨은 결코 육신으로서는 체험할 수 없는 격조높은 생명의 향기이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 차이점을 인정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이 말들을 제한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그것들을 일반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율법이란 하나님을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무거운 짐이나 부담스런 고통이 아니라고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도 육신과의 격렬한 투쟁을 계속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들이 격렬한 투쟁을 할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의무의 절반도 수행하기가 어렵다. 아니 우리가 속담에서 듣는 것처럼, 그들은 모루 (대장간에서 쓰는 받침 쇠덩이)와 쇠망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처럼, 그들의 멍에 아래서 거의 실패하고 만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신, 하나님을 마음대로 섬길 수 없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괴로와 하고, 자신의 비참함에 얼마나 몸부림하였던가를 깨닫게 된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으면 율법은 쉬운 것이며, 육체의 정욕을 이긴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육체가 아무리 방종할지라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함을 떠나서는 아무 기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이 명령만을 포함한 적나라한 울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그 율법에 연합함으로 율법의 준엄성이 부드럽게 유화됨을 말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용서하여 주시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만일 우리의 행위가 율법을 만족시켜 드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더욱 복종하게 만든다. 즉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고 시편 130편,4절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용서를 받을 수 있으므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지키기가 어렵지 않다. 그들이 비록 율법 준수에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한편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우리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곳에 우리가 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므로 용감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만이 세상을 이겨낼 수 있다.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 은 이것이니~~~" ;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였고, 지금은 또 그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역시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 승리가 어디서 오는지 계속 질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모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비결을 믿음에 두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귀절이다.  아무리 사단이 그의 격렬하고 무서운 공격으로 끊임없이 믿는 사람들에게 덤벼들지라도,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위험선 밖에 있다고 선포하시며, 또 우리의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용감히 싸우도록 격려하고 있다. 과거 시제는 현재나 미래 시제보다 그 의미가 더 강하다. 사도 요한은 이긴 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원수가 이미 패주한 것과 같아서 우리에게 확신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투쟁은 우리의 생명이 있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며, 우리의 갈등은 매일 계속되고, 또 사방에서 원수들이 순간마다 우리를 대적하여 올 것이 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직 오늘 하루만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며, 믿음이 단 하루만의 지속력을 가진 것이 아니고, 이 모든 것들은 성령의 영 원한 사역이므로, 마치 우리가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우리는 전승자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확신은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항상 세상과의 싸움에 대한 건전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확신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염려없다고 방심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가 확실하므로, 그들이 더욱 더 용기와 힘을 내서 싸우기를 권고하고 있다.

 

'세상'이란 말은 여기서 광범위한 뜻으로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성령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다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인간의 본성의 타락도 세상의 일부가 된다. 즉 모든 번뇌와 사단의 술책 등, 한마디로 말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세상이다. 세상 사람들의 많은 세력으로 둘러싸여 살고 있는 우리 앞에는 무섭고 격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하여 주시지 한 싸움이 놓여 있으며, 만일 않는다면 우리는 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이 약속은 우리에게 언제나 하 섬멸하시 나님의 절대적으로 승리하는 능력과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의 힘을 는 두가지 면으로 항상 우리를 무장시켜 주신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적을 대항할 수 있을 만큼만 하나님의 도 것은 아니다. 그는 승리는 오로 움을 우리에게 빌려주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지 믿음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은 그것이 압도하는 다른 것으 로부터 얻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힘의 승리가 되는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얻는다.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 누구뇨" ;  이것이 앞에 문장에서부터 추리되는 이유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빌려오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한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 13)".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능력만을 의지하는사람만이 오로지 사단과 세상을 이기고, 육신의 길을 좇지 않게 된다.  믿음이라는 말르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고 있다.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이며, 사도 요한은 율법의 그림자의 구체적인 본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고 말한다. 나는 물과 피라는 말로서 사도 요한이 율법의 옛 의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더구나, 비교의 목적은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 로 폐하여진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과거에 형상화되었던 의식이 성취되었음을 우리가 알게 하는 데 있다. 구약시대의 의식은 다양하였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이 두가지(물과 피-역자주)를 통하여 거룩함과 의가 모두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부정한 것을 깨끗이 씻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순결하게 깨끗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를 얻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보증을 얻게 된다. 그러나 율법은 실질적으로 있어야 할 외적인 상징만을 나타내고, 참으로 메시아를 통하여 서만 그 참된 본질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참 그리스도이신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성화시킬 분으로 그리스도를 보냈기 때문이라고 잘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께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데는 모호한 점이 없으나, 어떻게 물로 임하셨는가에 대하여서는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그것을 세례로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나는 사도 요한이 여기서 복음사(Gospel thistory)에서 그가 설명한 열매와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복음사에서 물과 피가 그리스도의 옆구 리에서 흘러 나왔다고 말하였을 때, 그것은 틀림없이 기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일들이 죽은 자의 경우에 보통 발생하지 않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피와 물의 근원이 되어서 모든 믿는 사람들이 참 청결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옛날의 세례는 상징이 었다.-는 것을 알며, 그전에 약속되었던 피뿌림이 그 때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분명하신 목적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간단한 구분은, 그것이 고대 의식이 첫째로 지시하여 준 방향을 요약하여 보여주기 때문에 가장 최상의 것이다. 즉, 인간은 그들의 더러움으로부터 정결케함을 받아야 하며, 모든 희생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에게 헌신하여야 한다. 또 율법은 눈에 보이는 상징일 뿐이므로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9장과 10장에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 이 귀절에서 사도 요한은 믿는 사람. 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능력을 함께닫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믿> 음은 결코 요동하지 않으며, 또 성령의 증거가 충만하고 참된 확신을 그들 에게 「심어주고 있다고 사도 요한은 덧붙이고 있다. 그는 성령을 '진리'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성령의 권위가 확실하며, 우리에게 아주 충만함으 로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땅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라. 이 셋이 합하 여 하나이니라(한글 개역 성경에는 빠졌음-역자 주)" ;  어떤 사람들은 이 귀에 절을 완전히 생략한다. 제롬은 오류보다는 악 때문에 그것이 일어난다고 생 각하며, 라틴어 역본 속에만 이것이 들어 있다. 그러나 헬라어 사본들이 이것을 찬성하지 않으므로, '나는 감히 어느 것을 단정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귀절을 첨가하는 것이 문장상 더 나올 것 같고 또 사본들 (copies)에 가장 잘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되어, .나는 이 귀절을 첨가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3가지 방법으로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한 거룩한 본체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것을 , 알고 있듯이 이 동일한 삼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부름을 받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고 말하였을 때, 그는 본체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부와 그의 영원한 말씀과 성령이 잘 조화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과 같다. 어떤 사본들은 els (에이스 힌 : 하나가 정되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른 사본에서처럼σι(헨 에이신; 하나이다)이라고 읽을지라도, 성부와 말씀과 성령이 뒤에 나오는 피와 물과 성령이라는 동일한 의미로서 한 가지로 불리운다:

 

그러나 한 증거가 두번씩 언급되고 있는 성령은 불필요한 반복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한다. 곧 성령께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각각 다른 방법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이 이중적인 증거는 그에게 아주 적절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한 지혜와 성령으 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하늘에서 놀라운 권위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위엄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성실하시고 그 교리를 우리에게 확증하여 주는 보증과 상징이시다. 그는 그의 은혜로 다시 이 땅위에 말씀하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사도 요한이 땅위의 증거만을 나타내는 데에 무엇이 따르는가를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8.  증거하는이가 셋이니~~~~~~" ;사도 요한은 물과, 피에 대한 그의 언급을 그의 목적을 위하여 적용시키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다. 구약시대부터 약속된 분이심을 아주 강력히 그리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과 피는 그가 주신 구원의 보증과 결과이며, 이 두 요소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참되게 증거하고 있다. .그는 세번째 증거를 덧붙이고 있는데 즉 사실은 성령께서 제요소가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물과 피는 헛되이 흘러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물과 피로 보증하여 주시는 분은 성령이다. 또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그의 보혈을 홀리신 그리스도의 죽 음의 열매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도 바로 성령의 능력이시다. 한 마디로 간단히 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 치는 분이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의 능력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할 때에, 그는 곧 성결의 영'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아무리 거룩한 그리. 스도의 영광이 밝게 빛날지라도, 만일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발생 믿음의 주시지 않는다면, 그 영광이 우리 눈에 띄지 않아 우리가 깨달을 수 없을 것 이다.

 

독자들은 이제 사도 요한이 성령을 물과 피와 함께 증거로 내세운 이유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 성령의 타내기 때문이다. 이 임무이며, 그의 정결케 .하심이 우리에게 그 능력을 나 주제에 대한 약간위 언급이 앞의 베드로 서신에서 나 타났는데 베드로 사도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성령께서 우 리를 정결하게 ,하였다고 거의 동일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서 믿음은 텅빈, 공허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 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생명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며, 또 그의 정결케 하시는 사명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이유가 아니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오셨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이 구별은 필요없는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동일한 내용을 두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다. 나는 그 정결이 그리스도의 속죄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바로 내가 물과 피를 구별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연약함을 생각하게 되면, 그는 피가 물로부터 구별된다는 것이 쏠데 없는 헛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더구나 사도 요한-----우리가 이 말한 대로------은 율법의  의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정결함과 희생 제물을 과거에 지정하셨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두 가지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분명히 설명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이 오로지 물로만이 아닌'이라고 그가 이전에 말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일부 뿐만 아니라 전체가 모두 발견되므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어디서도 우리는 구원을 발견할 수 없다.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  사도 요한이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거룩하게 인정받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배은 망덕한 사람들인가를 이차적인 데서 일차적인 데로 추리를 하고 있다. 즉, 세속적인 일에서도 우리는 거짓말하고 속이는 사람들의 말도 믿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높은 하늘 보좌 위에 앉아 계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도리일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타락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그의 순수한 증거를 통하여 권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증거를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선포하시는 것으로 나타낼 뿐 아니라, 또 우리는 물과 피로부터 그것을 얻게 된다고도 선포하고 있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속죄하시는 능력은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은 일반적인 인간의 방법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 보혈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9절하.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 δτс(호티: 이것이니)라는 불변사는 여기서 원인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서 인간보다 더한 신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을 때,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만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가 참 생명을 얻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정되고 조용한 마음으로 믿게 되는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을 선포 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외적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하 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의 저자이시라는 사실을 내적으로 은밀하게 깨닫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믿음아닌 그 어떤 것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무상한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10: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 이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 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잘못될 위험성에서 그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은혜를 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은, 불경건한 자들이 모든 잘못을 하나님에게 전가시키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극단적인 죄인들로 정죄하고, 있다. 최상의 진리가 하나님께 있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이 명예를 탈취하는 것 이상 더 극악한 손상은 없다. 다음에 믿음을 격려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은 그 반대적인 상황에서 논증을 이끌어 내고 있다.  만일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지 못하는 괴이한 일이기 때문에 무섭고 저주스러운 불신앙이 아닐 수 없는데, 인간들이 하나님만을 참되시고 신실 하신 분으로 경외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믿는 복음에서 떠나고도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그 누구이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믿음을 원하시며, 또 불신앙이 왜 그렇게 신랄한 정죄를 받아야 하는지 의문를 갖는다. 하나님의 최대의 영광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특별한 모본을 보여주기를 원하시는데, 그들에게 제시하여 주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아무 것도 위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가 어떤 사람을 그의 생활 면에서 천사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한, 그의 거룩함은 사단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톨릭 교도 중의 일부가 비록 복음을 완고하게 배척하면서도 어떠한 신성의 가면을 즐기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증거를 통하여 매우 진지하게 확립되고 있는 이 교훈을 겸손하게 받아들이 는 것이 경건생활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자.

 

"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 이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결과를 먼저 제시하면서, 우리를 믿음으로 초대하고 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틀림없이 우리에게 실현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마땅히 경외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값없이 주셨을 때, 만일 우리가 그렇게 귀하고 복된 교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배은망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사도 요한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기 위하여서 우리는 복음에 경건하게 순종하여야 할 뿐 아니라, 복음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므로 우리는 그 복음을 사랑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또한 특별히 우리가 복음에서 찾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리하여 낼 수 있다. 즉 구원의 값없는 은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하도록 권고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우리가 떨어져 나갈 염려는 없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도록 하기 위하여,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생명을 얻도록 명하신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여기서 세가지 요점을 간단하게 지적하고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값없는 은혜로 우리를 생명으로 돌이켜주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사도 요한은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으며, 인간의 어떤 공로로도 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추론하여 낼 수 있다. 둘째로 이 생명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졌으며, 이 복음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그 사랑이 계시되어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을 때에라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12.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  이 말씀은 앞에서 나타난 내용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으며 그리스도에게서만 생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것에서 생명을 찾는다면,  그는 유일하신 생명인 그리스도의 생명의 소망에서 제외된 사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만 오로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자들은 모두가 생명을 빼앗긴 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합리한 말 같이 들린다. 왜냐하면 영웅적인 덕을 갖추었던 많은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이 그리스도를 전혀 몰랐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또 그런 탁월한 인물들이 그런 영예를 갖지 못한 것이 불합리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나는 만일 우리가 우리 인간의 눈에 훌륭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도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참으로 그것은 누가복음 16장 15절에,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는 말씀과 같다. 우리 인간은 그 모든 마음의 더러운 것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외형적인 모습만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에 감추어진 가장 추악한 악을 통찰하신다. 그러므로 불결한 마음에서 나와서 현재 상황으로는 분명히 덕인 것 같지만, 장차 불의로 기울어질 가능성을 지닌 피상적인 덕이 하나님의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사실이 못된다. 한편, 그리스도의 성령을 떠난 곳에서 어떻게 마음의 순결이 흘러 나올 수 있으며, 경건에 대한 참 관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가지 더욱 타당한 추리가 모든 의심을 제거하여 줄 것이다. 인간의 의는 죄의 용서에서만 가능하다. 만일 사죄를 제거하여 버린다면, 하나님 의 분명하신 저주와 영원한 사망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 화목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시며, 또 그분은 그의 죽음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 이미 화목시키 셨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우리를 용서하시며, ,그리스도 안에만 참 의가 있다는 사실을 유출하여 낼 수 있다. -온 만일 어떤 사람이, 고넬료, 곧 복음의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가 하나님께 받으신 바 되었다(행 10 :-2)고 누가가 기록한 그 고빌료의 사건에 반기를 들고 나선다면,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복음의 씨앗이 바로 그 첫날 발아되지 않는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취급하신다고 나는 간단히 대답 하겠다. 고넬료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뭔가를 역시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감추시고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명한 구원의 방법만을 깨닫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