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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일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5:18)

1. 성경 (요일5:13 ~ 21)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3)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4)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5)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6)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7)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8)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19)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20)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2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3. 이것을 쓴 것은~~~~~" ; 믿음은 날마다 향상하되어 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미 믿는 사람들이 더욱 확고하고 굳건히 믿어서 영생에 대한 충만한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이것을 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의 유용성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을 일깨워 주고, 또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믿음을 더욱, 더 확고하게 하여 주는 이중적인 효력을 발생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전 생애를 통해서 날마다 새롭게 :발전되기 위하여서, 우리의 배우는 의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안에 는 아직도 많은 불신앙의 잔재가 남아있으며,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 에, 우리가 믿는 내용은 아직 참으로 확고하다고 말할 수 없다.

 

더구나, 믿음이 어떻게 확고하게 될 수 있는가의 방법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그리스도의 사역과 능력이 설명될 때에 사도 요한은 이런 일들(영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을 쓰는 목적이 이미 믿는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하여-----다시 말하면 믿음의 발전을 위하여 썼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기위하여, 믿음의 훈련을 굳건히 하는 것이 경건한 교사들의 의무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어떤 다른 세상적인 것을 갈망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면에서 이 진리를 모호하게 하고 약화시키면서, 가톨릭 교도들은 그들이 믿음의 올바른 교훈 이상으로 충분히 유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동일한 이유로, 이 파의 사람들은 참으로 어려운 진퇴양난에서 피 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사람이 믿음의 파선없이는 그들이 말하 곳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 귀절에서 그리스도만이 믿음의 적절한 대상이며,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우리가 갖는 믿음과 연합되는 것이라고 더욱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믿음의 종국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그의 후사가 되는 것이다. 

 

"14.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 사도 요한은 그가 앞에서 설명한 믿음을, 그 열매를 들어 칭찬하고 있으며, 또 어디에 우리 믿음이 주로 위치하고 있는가, 즉 경건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담대하게 부르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3장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며, 또 로마서 8 장 15 절에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입을 여사, 우리가 하나님을 주저없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만일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쫓겨간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피난처가 우리에게 있는 한 우리는 모든 세상의 악속에 살면서도 행복할 것이다.  아니, 이 한가지가 우리의 근심을 축복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며,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의지하고 그에게로 피함을 우리가 확신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시험이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고, 또 만일 우리의 기도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완전히 확신하지 않으면 우리가 참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사도 요한의 말을 가슴 깊이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는 의심하고 요동하는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톨릭에서는 믿음의 가르 침이 매장되며, 거의 소멸되고 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확실히 많은 기도를 중얼거리고, 또 하나님을 수없이 많이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의심과 동요로 흔들리는 마음으로 심지어는 사도 요한이 필연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 담대함을 정죄하면서, 그들은 기도하고 또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한다.

 

"그의 뜻대로" ;  사도 요한은 기도의 올바른 법칙은 바로 인간이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있다는 내용을 이 귀절을 포말함으로써 생략하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의 백성들의 간구를 다 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요구하도록 무절제한 자유를 주신 것은 아니고, 그들에게 적당한 기도의 법칙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참으로 이 제재야말로 우리에게 최대로 유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 모두가 각자 좋을대로 다 구하도록 허락 받았다면, 그리고 또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대로 다 들어 주신다면, 우리의 관심은 최악의 상황으로만 기울어지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가 무엇이 최선인지 모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는 타락하고 유해한 욕심만을 부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 밖에서 잘못된 기도를 드리지 않기 위하여 두가지 치유책을 제시하여 주시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구하기를 원하는 것을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한가지는 우리가 적당한 한계를 벗어나 방황하지 않고,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지도자 로 그리고 다스리는 자로 제시하여 주셨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그러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롬 8 : 26). 우리는 또 주님께서 직접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여야 한다.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결코 불필요한 반복이 아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성공적인 기도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말한 것을, 다시 특별히 재확인하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받지 못 한번 할 것을 쓸데 없이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의 :모든 간 구를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사도 요한이 말할 때,「그 의미는 순종의 법칙에 따르는 모든 건전하고 '덕스러운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응답하여 주 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멀리 떠나지 않 고 또 방종에 빠지지도 않으며, 항상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계신가를 찾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기도 를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게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 역사하시는 동안에 그들이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리 도록 하기 위하여 또 그들이 그들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다 맡기고 염려 와 불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교리를 각 개인에게 특별하 도를 응답하시기 위하여 ' 게 개인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화와 안전 속에 있다 는 것이 그들의 기도의 열정을 소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복된 결과에 대한 확신을 갖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믿음의 확신이 게으름을 초래하여서는 결코 안된다. 사도 요한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다 맡기 고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16. 누구든지" ;  사도 요한은 그가 설명한 믿음의 열매를 더욱 크게 확대 시키고 있다. 즉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경제들에게까지 8그 영향이 미친다 는 것이다. 조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에게로 초대하시고 또 우리가 어려움 ,속에 빠질 때 곧 도와 주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만 관계되는 작은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어떤 기도도 결코 거절당하지 않는다는 완전한 확신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제 교사도 요한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서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권고하고 있다. 그는 또한 특정제들의 실패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된다고 격려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한 우리 형제 가 멸망하여 가는 것을 보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못하는 자들은 참으로 강철같이 강략한 심정을 가진 자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사도 요한은 형제들을 돕는 치유책이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는 멸망하여 가는 자를 위한 기도는 그 멸망자의 생명을 그에게 다시 회복시 켜 주며, 비록 주시리라'는 말이 하나님께 해당되는 말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형제를 위한 당신의 기도를 허락하신 그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의 기도는 그 형제를 죽음으로부터 살리는 덕을 가져온다는 뜻과 같다. 만일 우리가 형제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사람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표현은 과장법이지만 그러나 결코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한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허락받는다. 그런 큰 은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 죄사함 반도록 하 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사도 요한이. 우리에 σνμπ&θεια(숨파데이아; 동정하다)를 권고하였을 때, 그는. 동시에 우리 게 가 형제를 정죄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행위이며, 또 그들의 구원을 절망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를 깨닫게 하여 주고 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  그러므로 범죄하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소 망을 버릴 수가 없으며,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실수를 그들을 버릴 만큼 그렇게 가혹하게 정죄하시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이 사실로부터 우 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자녀의 반렬에 넣어주셨으므로,' 우리가 그들 을 형제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추론하여 낼 수 있다. 그러나 수사도 요 한은 성도들이 매일매일 범죄하며, 그 범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 아니하는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는 것일지라도, 그 죄가 죽음에 이르지 아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여지가 남아 있는 한에서만 죽음이 완전히 왕좌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도요한은 여기서 후에 일반화된 것처럼,그렇게 .멸망받을 최 와 용서받을 수 있는 가벼운 죄를 구별하고 있는 그것은 아니다.  가톨릭 교도들에게 팽배하고 있는 이 구별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소르본 학파들은 말하자면 뚜렷한 최악의 개범죄는 별문제로 하고라도, 거의 -존재하지도 보않는 멸망받을 죄를 공언하고 있다. 이렇게 경미한 죄 속에 영혼 깊숙이 감추어 진 가장 흉악한 죄가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원죄가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원죄의 연매는 성수를 뿌림으로써 죄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불경한 죄로 생각하지도 않을 때 에핀 만일 그들이 찬성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혹이나 육욕고그 리고 악한 욕망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만일에 인간의 마음이 불신으로 압도당하고, 조급함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도록 유혹받는다면, 악한 욕망이 그를 사로잡을 것인데, 가톨릭 교도들은 적어도 세례를 받은 후에는, 그것을 거의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 장 극악한 죄를 사소한 허무로 간주하여 버리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척도로 평가하지 않고 그들 자 신의 수준에서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나 하나님의 율법을 대적 하는 것은 죄악이며, 따라서 자연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 한 원리로 생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곳에 죄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비록 죄는 죽어 마땅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직은 그렇게 준엄하게 형벌하시지 않는, 필멸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죄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죄의 죄책을 관용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으로부터 그들에게 내려지는 심 판으로 보고 있다. 한마디로 비록 그들이 생명에서 분리되지 않은 것이 그 들의 어떤 공로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가 한번 생명으로 회복시켜 주신 자들을 결코 죽음으로 넘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  이것은 용서받을 소망이 없는 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 을 그렇게 가혹하게 형벌하시는 때에는, 틀림없이 극악무도한 죄일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문맥으로 보아 우리는 그것이 부분적인 타락이나 단순한 문제명의 위법이 아닌, 배교 곧 하나님으로부터 그들 자신이 완전히 떠나는 전적인 배교라는 사실을 추 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후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하지 않 는데,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으며, 또 그들 자신을 사단의 노예인 것처럼 사단에게 내어 주자도 않는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 배교가 필멸적인 것이라 하여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 령의 은혜로 그의 자녀들을 빼앗지 않으며, 또 그들은 어떤 경건의 빚을 띠 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버림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의모든 경외를 배척할 만큼 그렇게 타락한 자들은 .멸망으로 버림을 일반은 자들이다.

 

만일 보어떤 사람들이 회개를 위하는 사람에게 구원위 때문이 단할 수가 있느냐 고 물는다면 그 대답은 분명하다. 그들이 버림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 그들 에게는 성령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는 것처럼,들 은 완고한 마음으로 항상 악으로 달려가고, 조직악에 죄악을 더할 때뿐이다. 더구나 성령을 거역하는 죄와 불경은 항상 그 죄와 불경을 수반하는 그런 배 반을 가져오며, 여기서 이것을 가리키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그러면 인간의 타락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 수가 없다면, 이런 종류의 죄를 위하여 그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예외 를 둔 사도 요한의 취지가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들이 전혀 소망이 없는가 아니면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있는가를 때때 로 결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이 귀절에서 의심의 여지없 이 분명하다고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희귀한 사건이며, 또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의 무한한 풍요하심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의풍요를 따르라고 명령하심으로, 영원한 사망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경솔하게 그렇게 퍼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사랑은 우리에게 희망을 갖도록 하여 준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의 불경건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의 손가락 으로 지적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절망 이상의 다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대항하여서는 안되며, 또 하나님의 자비 하심 그 이상의 자비를 구하여서도 안된다.

 

"17. 모든 불의가" ;  이 귀절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동격으로 생각한다면, 그 의미는 부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불의가 조직라고 할지라도, 모든 죄가 다 죽음에 이르지는 않는다. 다른 의미 도 역시 적절하다. 죄가 모두 불의이기 때문에 어떤 죄는 죽음에 이르자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이 그가 말한 죄는 불의의 축척이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모든 불의를 완전한 불의로 여긴다. 그러나 나 는 첫번째나 혹은 두번째의 설명을 오히려 택한다. 그것은 같은 것이므로 나 는 그것을 어떤 것이 더 적절하던지간에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  만일 당신이 마치 광신자들이 다투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순결하다고 생각한다면, 사도 요한이 일관성이 없는 모순 된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그가 경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상호 기도의 의 무릎 제거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전적으로 탈락되지 않는 사람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기도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그 증 거를 덧붙이고 있다. 즉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바로 이것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위력이 되고, 경건에 대한 모든 감성을 소멸시키지 않도록 그를 인도하며, 또 자신을 완전히 마귀와 육신에게 넘겨주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도 요한이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말하였을 때, 그 는 치명적인 상처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 단위 상처를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공격 하여 올때 믿음의 방패로 그것을 격퇴하여서 사단의 상처가 그들의 마음 속 에 침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이 결코 그들 속에서 소 멸될 수 없다. 믿는 사람들이 육신의 허약성 속에서 죄의 멍에 아래 괴로움 을 담당하면서도, 그들이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을 계속 경외할 때, 이것이 바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상태이다.

 

"저를 지키시매" ;  사도 요한은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설 명하고 있다. 우리들 중의 어떤 사람이 친히 자신의 구원을 지키는 자라고 하면, 그처럼 비참한 보호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셨는데(요 .17: 11),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다. 자유 의지에 대한 중보설을 믿는 자들은 .우리가 죄에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또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힘으로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이 표현을 적용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 도 요한이 말하는, 믿는 사람 스스로가 스스로 관리인의 임무를 가질 수 없 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는 데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여기서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단에게서 결코 상처를 받지 않도록 그들이 사단을 대적하여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 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무기로 무장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까닭에 자신을 지키 게 되는 것이다.

 

"19.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 사도 요한은 그의 앞부분에서의 교훈에서 이 권고의 본질을 끌어내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자녀 에 관하여 선포한 것을, 그는 지금 그가 편지를 쓴 사람들에게 적용시키고 있 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그들이 죄를 깨닫도록 일깨우는데, 또 그 들이 사단의 공격을 격퇴시킬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독자들은 그것이 오로지 참된 믿음, 곧 하나님의 은혜에 적용된 것이라는 사실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의 반렬에서는 사람들만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럴듯 한 추측을 확산으로 인정하지 않는다(퀘변가들처럼). 그는 우리가 그것듯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 본질은 이렇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우리가 세상과 분리되고, 우리의 생활이 거룩하며, 우리가 그렇게 큰 영예로 불리우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제 이 교훈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단 은 경건한 사람들만 보면, 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끌어내려고 갖은 술책을 다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들의 소명을 세상의 모든 방해보다 자신에게서 참된 방향으로 지켜가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싸움을 위하여 무장을 잘 갖춘다면, 이 두가지 일, 곧 세상이 악하고, 우리의 소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분명해질 것 이다. 토으ь '세상'이라는 말에 사도 요한은 모든 인류를 다 포함하고 있음이 틀림없 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인간이 악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데, 그는 세상을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서 사단에게 내어준 바 된 세상을 우리가 멀리하지 않을 이유가 조금도 없 다. 또 우리를 향한 세상의 미움을 우리가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과 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타 락이 모든 본질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자기 부정을 배워야 한다.

 

세상에서 보이는 것은 악과 타락 뿐이므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 님을 따르려면 혈과 육에 작별을 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으므로, |그들은 세상과 사단의 모든 음모를 하나님 의 보호아래서 대적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면 에서 공격을 받기 때문에-----이미 말한 것처럼---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적을 대항하는데 인내를 가져야 한다고 격려하며 권고한다. 그리고 그 이유 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군기 아래서 싸우며, 또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 적 유 때 경우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 지식을 특별히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를 그들에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여 주시코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방황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아무 생각없 이 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에 우리의 믿음이 참으로 하나님께 기초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상과 사단과의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참된 하나님에 관한 확고한 지식을 얻으며, 절대로 우리가 불신과 의혹으로 흔들리지 않게 되는 이유라고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있다.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말함으로써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모든 우상들 로부터 구별되는 신실하시며 참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진실은 거짓과 반대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알레디노스(참되신 자)' 이고, '알레데스 (참된 것)'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요한복음 17장 3절의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는 말씀과 같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시어 하나님을 깨닫는 지식에 이르게 하는 이 임무를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가시적인 형상이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해설자이시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시고, 세상과 진리에 대한 빛이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를 떠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허구 속으로 빠져들어 멸망당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라고 말한 것은 그가 복음의 가르침에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또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조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있으며,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골2 :39), 이렇게 해서 어느 의미로는, 하나님의 얼굴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게 밝게 비추이고 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의심스럽기만 하였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충만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전 창세 때에 어두움 에서 빛을 비취라 명령하시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신 하 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의 빚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금 밝게 비추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선물이 선택자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확실히 그의 복음의 빚을 모든 사람들에게 구 별없이 밝게 비추어주시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갖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사단은 흑암의 베일을 많은 사람들 에게 덮어 씌우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속 에 비추는 빚이 비록 일시동안은 스러지는 한이 있을지라도, 결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  이 말로 서 사도 요한은 그가 말한 지식이 얼마나 효과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 여 주고 있는데,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았고, 하 나님과 연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노생명의 1뿌리 를 깊숙이 뻗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제거하게 된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 는 것이니"라고 말하면서 계사접속사를 생략하기 때문에, 그가, 우리는 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결합하는 방법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  아리우스파 사람들이 이 귀절을 아무리 그리스도 가 참 하나님이 아닌 분으로 해석하려고 하며, 또 오늘날도 일부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그리스도의 l놀라우 신 신성()에 대한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아리우스파 사람들은 이 귀 절을, 마치 사도 요한이 그가 참 하나님이신 것을 선포한 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를 다시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 고 있다. 그러나 그 반복은 너무 부당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여기에 나타 난 참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임을 두번씩이나 이미 선포하였다.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요"라는 '말을 왜 덧붙였겠는가 ? 이 말은 꼭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손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안내자라고 산도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칠 때,  우리가 더이상 방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부언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또 "영생'이라고 덧붙임으로써 그는 이 사실을 더욱 확증하고 있다.참 하나님이시며, 또 :영생이라는 말은 결국 하나요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나는 '후토스 (이것)' 라는 관계 대명사들 생략하였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맨 마지막에 나타나 있는 사 람에 제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가 영생이심은 아 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하며, 이 화법()은 사도 요한이 자주 사용하는 사도 요한 특유의 표현 방법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다른 데 서는 그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 감 추어져 있다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영생에 참여하는 자들 이 되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지만, 그러나 그 생명수를 우리는 그 리스도에게서 얻게 된다.

 

"21.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 이 말이 비록 분리된 문장일 지라도, 말하자면, 앞의 교훈에 연결된 것이다. 생명을 주시는 복음의 빛은 사방으로 그 찬란한 빚을 발하여 어두움을 내쫓을 뿐 아니라, 경건한 사람 들의 마음 속에서 모든 의심의 구름을 다 몰아낸다. 사도 요한은 우상을 정 죄할 뿐 아니라, 모든 형상에 대해서 우리가 조심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 요한은 인간이 어떤 형상을 만들기 시작할 때, 하나 님 경외는 온전하고 순결하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미신은 전염성으로 우리 마음 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극히 작은 그 요인이 강한 우리를 감염시켜버릴 것이다. 우상 숭배는 기회가 오기만 하면, 불타고 있 마른 나무가 타는 것보다도 더 쉽고 맹렬한 기세로 인간의 는 석탄 위에 던진 압도시켜버릴 것이다.

 

우상이 불꽃같은 것임을 깨닫지 못 마음을 사로잡고 누구이겠는가? 불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는 오 할 사람이 불태우는 햇불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런지 모른 히려 햇불, 세상을 온통 다. 사도 요한은 어떤 모양을 가진 형상을 말할 뿐 아니라, 제단과 또 모든 미 신적인 기구들을 총칭하며 말하고 있다. 가톨릭 교도들은 사도 요한이 하나 님을 어떤 형태적인 신상으로 만들어 빚을 때, 또 어떤 모양이나 그림을 경배의 대상으로 할 때, 경건이 타락되어 버린다고 그가 일반적으로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이 이 귀절을 쥬피터 신상()이나 머어큐리 (Mercury) 신 등으로 곡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박하 고 세속적인 모든 미신의 요소에서 떠나서, 오직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외하 도록 특별히 유의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