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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일서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요일 3:23)

1. 성경 (요일 3:13 ~ 24)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3)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4)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5)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6)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7)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8)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19)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1)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2)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23)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24)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이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증거라고 놀랄만한 발언을 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격찬을 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만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축복받은 사람들이지만, 만일 우리가 형 제를 미워하면, 우리는 비참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사망에서 자유를 얻고 구원을 받는 것 이상의 더 큰 바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증오심을 키워서 자기 스스로 사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자들이야 말로 극도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러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을 형제 사랑으로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지만, 그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그 사랑 자체의 행위, 곧 우리 자신이 우리 생명의 구원자가 되고 우리 스스로가 생명의 구주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는 구원의 원인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 성령의 특별한 열매인 것처럼, 사랑은 또한 중생의 확실한 상징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상징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지, 원인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은 사람은 참으로 아무도 그의 형제를 신실하게 사랑할 수가 없으므로, 사도 요한은 생명이신 하나님의 성령이 형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거하신다고 분명히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순서상 사랑이 먼저이므로 생명은 사랑에서부터 얻게되는 것이라고 추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잘못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우리의 생명을 더욱 확증하여 줌으로, 구원의 확신이 행위에 있다는 더 그럴듯한 논증이 성립될 수 있을지 모른다.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조력을 받음으로 확고하게 될지라도,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언제나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빛의 혜택을 받을 때 우리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만일 태양이 우리가 있는 곳에 직접 밝게 비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태양 광선이 직접 우리에게 비취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태양이 그 찬란한 광채의 은혜를 우리에게 골고루 발산하고 있는 혜택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기초를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는데, 그 외의 다른 요소들이 믿음을 도울 수는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믿음은 그 기초를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두고 있는 것이다.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 ; 우리가 더욱 형제를 사랑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밝히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다 살인자를 싫어하며, 그 이름조차도 증오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여기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을 바로 살인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더할 수 없이 가혹한 호칭으로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가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을 여기서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단순한 마음 그 자체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살인 시도를 한 것과 꼭 같이 정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해하려 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 아닌 다른 연유로  인한 불행을 그 형제가 당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미 우리는 살인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증오를 살인자라고 불렀을 때, 그는 사태를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이 살인자라는 이름을 싫어하면서도, 그 살인 행위나 다름없는 형제를 미워하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 인간은 어떤 사물의 외적인 모습에 현혹되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내적인 중심, 곧 본질을 보신다. 아무도 그렇게 쓰라린 악에 대한 모습을 경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받을 우리의 심판을 항상 기억하여야 한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  사도 요한은 이제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랑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사랑의 진가를 충분히 찬양할 수 없다. 사랑의 완전한 모범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심으로 그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의 증거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고 나가야 할 목표라고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위의 말씀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사랑은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전하여 줄 때, 그래서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자세를 버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게 할 때에 비로소 증명이 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일한 그런 사랑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아무리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대로 따를 수는 없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며, 비록 먼 거리에서일 망정,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뒤따라 가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의 이런 권고는, 실제로는 형제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노라고 거짓 자랑을 하는 위선자들을 배격하는 것이 그의 목적임이 틀림없으며,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만일 우리 마음에 형제를 사랑하는 이 열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와의 상호 교제가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은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미 언급한 대로 사도 요한은, 우리의 형제 사랑이 그리스도와 똑 같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사랑의 불가능성에 모두 절망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사도 요한은 우리의 마음이 신실한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우리의 생애를 바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헌신을 드려야 하며 그 다음 그런 자세로 우리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의 목숨을 죽는 데까지 내어줄지라도 우리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 사이에는 놀라운 차이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피로 가라앉힐 수 없으며, 우리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도 없고, 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도 없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비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이나 그 효과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예를 본 받아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 사도 요한은 최상의 근원에서 기원되어 나오는 '사랑의 일반적인 의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의무는 우리가 이웃을 위하여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각오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실현 과정을 큰 것에서 적 은 것으로 추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곧 자기 자신은 풍요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으면서 가난한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움을 거절하는 사 람은 그의 생명을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형제를 돕는 일을 거절한다면, 우리 동안에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외면적인 친절을 칭찬함으 로써 동시에 선행의 참된 ,방법과 우리 안에서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생활자 세에 대하여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므로 첫째 주제는, 언제라도 이웃을 도와주어야 할 기회가 올 때면, 실제 행동으로써 그가 참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여야 한다. 두번째는 누구나 그의 물질로 이웃을 도와주어야 할 그런 상황에 처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바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세째, 인간은 누구나 보살핌을 받아야 하도록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풍성히 가지고 있는 음식물이나 음료수률, 또 어떤 사 랍은 다른 것들을 필요로 하고 있으므로, 그들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 고 있는 것이다. 네째로, 만일 우리가 가진 친절이 συμπαθecla(테스쉼파 데이아; 마음을 같이함)와 결합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릴 수 없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대하여 조금도 안타까와하거나 동정심을 갖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우리의 마음이 다른사람들을 향하여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곧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우리의 불행과 아픔으로 받아들일 때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 사도 요한은 여기서 형제 사랑에 대하여 지금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형제를 사랑하는 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 사랑하기를 하나님께 하듯 하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 하나님은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즉 시편 16편 2 절 이하에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주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18.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 이 첫째 귀절은 양보의 문장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혀로만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악하게도 이렇게 사랑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나타나듯이, 사도 요한이 그들의 위선을 이렇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 귀절에서 그는 행위가 없는 그들의 사랑의 선포란 무익한 것이라고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 앞은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다. 곧, 입술로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지말고 행위로써 그 사실을 증명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것만이 사랑의 참 방법이기 때문이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  사도 요한은 '진리' 라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나 품위있는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가 진리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과 또 진리가 우리 속에 거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사도 요한이 그렇게 사랑을 표현한 것은 아니며, 그런 지식을 우리가 사도 요한으로부터 언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하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값없이 우리 마음에 그의 자녀됨을 인쳐주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구원이 주어졌다는 확실한 보증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우리 자신들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보조물이며 조력의 역활을 하고, 우리의 믿 음을 지탱하게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기본적인 근거는 아니다.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은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 말씀 속에서 그는 믿음이란 선한 양심을 떠나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확신은 선한 양심에서 오거나, 그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칙령의 효과적인 사역을 통하여 친히 우리의 사랑 속에 나타나셨을 때 우리가 참되게:하나님과의 결합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항상 사도 요한이 무엇을 문제삼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믿음에 대한 위선적이고 거짓된 고백을 정죄하고 있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참 확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선한 양심이 믿음과 분리될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이 사실에서 우리가 확신을 굳히기 위하여 우리의 행위를 돌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20. 우리 마음이 흑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  사도 요한은 반대적인 상황에서, 곧 선한 양심의 증거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공연히 그리스도인의 이름이나 모양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죄의식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마음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고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악한 마음의 동요로 인하여 파멸될 수 있다는 결론이 따르게 된다.

 

사도 요한은 심판에 대하여 언급할 때,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는 것보다 더 예리하게 보시고 관찰하시며 더 준엄하게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 자신이 자기에 대하여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고 고백한 이유이기도 하다(고전4:4).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아무리 자기 자신의 의무에 대하여 충실한 것을 알고 있지만 여러 가지로 그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또 그의 부주의가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무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의미하는 것은, 양심의 억눌림을 받거나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 역시 다음에 나타나는 중요성이다. 하나님이 아니라도, 우둔하고 어리석은 우리 인간이 알 수밖에 없는 그런 사실이 어찌 하나님께 감추인 바 될 수 있다는 말인가 ? 그러므로 그 말을 이렇게도 풀이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분이므로, 그 분은 우리의 마음을 훨씬 초월하고 계신다"라고, 연결접속사를 원인을 나타내는 불변사로 사용하는 것은 아주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제 의미가 분명하 여진다.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 인간의 지각보다 더 깊으시기 때문에 온전하고 깨끗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버림을 받은 자들은 때때로 사단의 유혹을 받아 그런 양심의 마비 상태에 빠져들기 때문에, 그들이 범하고 있는 악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 죄를 슬퍼하거나 두려워함도 없이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거꾸로 지옥으로 곤두박질하는 자들이다. 또 위선자들은 항상 우쭐대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오만하게 멸시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의가 악으로, 침식당하여 버렸으며, 범죄에 대한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가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이 위선자들은 그들이 빛에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 또 이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린 자들이기 때문에 속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악한 마음이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그 악한 마음을 감추는 데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 양심을 빚으로 끌어내어, 심판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않을 수 없도록 그 악한 마음을 교란시키신다 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평화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중심으로 얻게 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대로 이렇게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도 때로는 은밀한 양심의 가책과 무기력한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21.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  나는 이 말이 위 선자들이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비열한 자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미 설명하였다. 버림받은 자들이 아무리 자기들 나름으로 선한 .생활을 한다 고 하여도 솔로몬의 말대로 하나님은 그 심령을 .감찰하신다(잠16: 2). 하나 님은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다고 자처하는' 모든 사람들의 오만을 하나님의 척도로 실살피시고 판단하신다. 사도 요한이 나타내는 그 의미는 우리가 무엇 이 옳고 선한 것인가에 대한 바른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 .조용한 확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 를 얻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엡3: 12). :그리 고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평화를 얻고,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 리게 된다(롬 5:1): 그러나 아래의 표현들 (사이에 차이점은 없다. 곧 사도 바울은 믿음의 원인으로 나타내었고, 사도 요한은 원인은 아니지만, [그 원 인과 필연적으로 밀접하게 관계되는 분리될 수 없는 결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큰 어려움이 제기된다: 곧 세상에서 누가 책망받을 것이 없는 사람일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경건한 사람들도 이와 같은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그들은 동시에 용서를 받는다. 그들도 자신의 죄에 대한 통렬한 내적 고통을 받아야 하며; 그 죄에 대한 공포 속에서 겸손하게 되며, 자신의 범죄를 증오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 앞에 나아가 확신에 [찬 평화를 얻게 된다. 다른 각도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 게 말한다. 그들이 비록 여러 면에서 실패한 그것을 깨달을지라도 그들은 이 양심의 증거를 계속 얻고, 참되고 정책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정죄받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건한 생각을 부여받은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노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들이 완전이라는 수준에는 까마 득히 먼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며, 그들의 마음 속 에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조용한 마음을 방 해할 내적인 가시가 없기 때문이다.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  왜냐하면 |이것을-확신 과 소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사도 필요한이 이미 앞에서 밝힌 것처럼 악 한 양심은 확신과는 서로 용납될 수 없다. 그러므로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 님을 경외하고 올바르게 경배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참되게찾을 수가 없다. 후자는 전자에게서 나온다. 불경건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들으시 지 않음 뿐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회생 제물과 기도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성경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위선자들이 멸시 속 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구원의 문이 그들에게는 닫 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마치 우리의 기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 고 있는 것처럼, 조선한 양심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행위를 공적으로 」삼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 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보호하여서만 오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믿음과 결합 되어 있기 때문에 위선자들을 더욱 신탈하게 질책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유일한  특권을 1994년부터선자들에게서 발발하였 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라고 사도 요한이 말할 그는 기도 의 확신이 우리의 :계명을 지키는 행위 때문이라고 개발하는 (것은!아니다.[그 는 다만 경건함과 신실한 하나님 경외가 믿음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을 가르치는 그것?뿐이다. !사도 요한이 원인을 나타내는 이것이 아닐 때에도-원 인을 표시하는 접두사를 쓰는 이것이 ,결코 불합리하게 보이지 않는다.왜냐하 면「분리될 수 없는 점가어가 때로는 원인을 나타내는: 것처럼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태양이 정오에 우리 위에서 비치고 있기 때문 에 그 때는 열이 더 강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열이 빛에서 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라고 발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  사도 요한은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견해를 다시 적용시키고 있다. 요약하여 말하면 우리가 형제를 서 로 사랑함으로 연합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제외되어 있으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불화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처럼 사랑만을 극찬하지는 않고, 사랑을 믿음의 친구와 혹은 부속물로 연합시키고 있다.

 

궤변가들은 이 말을, 마치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그리고 다른 일부는 행 함으로써 기도를 통하여 자유를 얻는 것처럼 허위를 날조하고 있다. 사도 요 한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순수한 기도의 방법을 요구하고, 이 계명 준수 속에 믿음과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칠 때, 이 퀘변가들은 우리가 이 두 가지로부터 기도에 포함되어 있는 확신도 이끌어 내야 한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여러번 사도 요한이 어떻 게 어떤 방법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감히 기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방법론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사도 요 한은 여기서 이유나 가치에 대하여 관계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으로 중생한 자들인 그의 자녀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하 나님과 친히 교제를 할 수 있는 은혜와 특권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사실만 올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중요성은, 하나님을 대한 경외와 찬양이 깃들이지 않는 곳에는 결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의 제명을 순종하려고 하면,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염려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하자. 사도 요한은 믿음을 사랑으 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았으며, 이 두 요소는 상호 서로 포용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가 문제명이라는 단어를단순화시킨. 이유 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거룩한 생활 속에 [포함되어야 [할 전체적인 완전 한 요소들을 분명히 그리고 간략하게 밝히고 |있으므로 [이것은 참으로 주목 할 만한 귀절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오랜 미궁 속에 '우리'를 방황하도 록 버려두시는 일이 결코 없으시고, 무엇이 옳으며 하나님을 ь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인가를 분명하고 간단하게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고 있으므로,-거 기에는 우리에게 .어려움을 야기시킬 만한 아무 문제성도 없다. 더구나 하나 님께서 올바른 생활의 시작과 마지막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 간결한 내용 속에 명료하지 못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여기서 형제의 사랑에)대해서만 언급을 하고, .하나님 사랑에 대하여 생략한 ,것은, 우리가 이미 다른 오곳에서[밝혔던 것처럼유형제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에서 나오며, 이 형제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정 확하고 참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 '이름'은 설교를 나타낸다.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 인가를 바로 이해하는 사람이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설교 의 방법에서 유일한 참 믿음이란 그리스도가 복음에서 조전파될 때, 그를 그 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다. 그려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장 14절에서 밝 힌 것처럼 가르침을 받지 않고는 믿음이 생길 수가 없다. 우리는 또 사도 요 한이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다고 선언한 사실을 잘 관찰하여 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상이며, 그리스도 동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를 떠난다면, 우리는 오류 속에서 방황할 것 뿐이다.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  이미 내가 언급한 대로, 우리가 하 나님과 연합하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나타난다고 사도 요한 은 확신하고 있다. 우리의 연합은 이것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게 되면 나태하거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사업게 된다. 사도 요한은 이 사 실을 그 이유로 제시함으로써 증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 에 거하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에는 어디든지 필연적으로 그 능력과 효력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 동안에거하 며,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이로써 우리가 안다"라고 말하였을 때 연결접속사소 and .(그리고)는 이유를 나타내는 for' (왜냐하면)와 'because'(때문에)와 동의어 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이유의 세부적인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타난 말씀이 사도 바울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성령 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마음에 증언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올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게 된다고 사도 요한이 말할 때,' 그 의미에 약간 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인 쳐[주시는, 없이 주시는 입양()의 확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요한은,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께서 나타내지는 그 결과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라고 말할 때는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그가 육체의 금욕과 새로운 생활에 대하여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하나님의 성령 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다스릴 때, 이 사실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안에 무슨 선행이 있든지 간간에, 그것 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지, 우리의 의로 인하여 성령을 얻게 된 것은 아니며, 성령은 무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사도 요한 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